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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21] 1·21사태

淸潭 2008. 7. 7. 16:38
  • 북(北) 특수부대 31명 서울 침투
  •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 [21] 1·21사태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8.07.07 02:42 / 수정 : 2008.07.07 04:44
    • 무장간첩단의 서울 침투를 보도한 1968년 1월 23일자 조선일보.
    •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김신조)

      "고약한 놈들,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왔구먼."(박정희)

      1967년 5월 제6대 대선에서 116만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심각한 안보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북한 김일성(金日成)은 통일 전략을 무력적화 노선으로 바꾸고 대남 무장 공세를 강화했다. 7월에는 중앙정보부의 무리한 수사와 가혹행위로 물의를 빚은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일어났다.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군복을 입고 무장한 31명의 괴한들이 자하문 고개를 넘었다. 이들의 정체는 북한 124군 소속 특수부대원들이었으며, 나흘 전 휴전선을 넘어 시속 10㎞로 산속을 주파해 그곳에 닿았던 것이다. 목표는 '청와대 습격과 박정희 살해'였다. 이제 모퉁이 하나만 돌면 청와대였다.

      그때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이 탄 지프가 아래쪽에서 올라왔다. "소속을 밝히시오!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 최 서장이 권총을 뽑아 들고 저지할 때 시내버스 두 대가 올라와 멈춰 섰다. 지원 병력으로 오판한 간첩들은 최 서장의 가슴에 총을 쏜 뒤 버스에 수류탄을 던지고 흩어져 달아났다. 다음날 새벽 인왕산 기슭에서 인민군 소위 김신조(金新朝)가 생포됐고, 나머지 간첩 30명 중 27명이 교전 도중 사살됐으며 1명은 나중에 시체로 발견됐다.
    • 1968년 1월 22일 국군에 생포된 무장 간첩 김신조. 그는 훗날 전향한 뒤 대한민국에 정착,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조선일보 DB
    • 김신조가 잡힌 바로 다음날, 동해에서 활동 중이던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Pueblo) 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한반도는 한때 전면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그해 11월에는 울진·삼척에 120명의 북한 무장 게릴라가 침투했다. 1968년 한 해 동안 남북한 사이에 356건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 518명이 전사했다.
    • 1·21 사태의 여파는 컸다. 정부는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으며, '서울 요새화 계획'에 의해 비상시에 서울 시민 30만~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가 1970년까지 건설됐다(남산 1·2호 터널). 수많은 국민들에게 이 사건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남게 됐다. 그것은 '북괴군이 언제라도 우리의 일상 생활 속으로 침투할 수 있다'는 공포였다.

    • 1968년 북한 무장간첩단이 청와대로 침투하려 했던 1.21 사태를 다룬 당시의 영상물.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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