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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13] 4·19

淸潭 2008. 7. 7. 16:00
  •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대의민주주의 내딛은 '혁명'
  • [13] 4·19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8.06.27 02:37 / 수정 : 2008.06.27 06:00
    • 1960년 4월 19일 석간 조선일보 1면. 조선일보 DB
    • 1960년 2월, 사람들은 비정한 기시감(旣視感)에 몸을 떨었다. 꼭 4년 전 신익희처럼, 4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 조병옥도 선거 직전 별세했던 것이다. 85세 이승만의 4선은 확정적이었다. 노골적으로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던 집권 자유당은 이번에는 2인자인 이기붕을 꼭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전국이 규탄 시위로 들끓었고, 마산에선 눈에 최루탄이 박힌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다.

      4월 18일, 3000명의 고려대 학생들이 '민주 역적을 몰아내자'며 서울 시내로 행진, 국회에서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돌아오던 중 종로 4가에서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피를 흘렸다. 다음 날 아침, 조선일보는 '폭력이 휩쓴 서울의 야음(夜陰)'이라는 기사와 유일한 현장 사진을 통해 이를 생생히 보도했다. 그 충격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19일, 10만 명의 서울 시내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해일(海溢)처럼 거리로 뛰쳐나왔다. 경찰의 총격으로 18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 1961년 4월 19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열린 4월학생혁명기념탑의 제막식. 조선일보 DB
    • 전선(戰線)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국론은 나뉘지 않았고, 사안은 분산되지 않았으며, 막연한 공포감이 대중을 사로잡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10년 넘게 이어진 장기집권과, 선거라는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유린된 데서 나온 국민적 분노의 폭발이었다. 야당은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 시위에 가담한 대학교수들은 사회적 사표(師表)와도 같은 지위였다. 물론 반미(反美) 감정도 없었다. 이기붕의 집에서 성조기가 발견되자 군중은 취재 중이던 미국 기자에게 그걸 건네 줬다.

      4월 26일,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선거를 다시 하도록 하겠다"며 경무대를 떠났다. 차기 대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이기붕의 일가족은 자살했다. 12년간에 걸친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은 종식됐다. 이는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다가 5·16 이후 의거(義擧)로 규정됐으나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됐다.

    • 4.19 민주혁명 1주년 기념 영상물. 1961년 4월 제작된 대한뉴스의 일부분.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