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비가 막 그친 후의 덕숭산은 참으로 싱싱했다. 그 안에 고풍창연한 수덕사가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보기 흉하게 법당을 가로막은 황하정루만 아니었던들 아마도 필자는 덕숭산을 넋을 놓고 언제까지나 바라보았을 것이다.(지금은 주지 법장 스님이 부임해 흉측한 모습의 황화루는 철거하고 수덕사가 새롭게 총림격을 갖춘 가람으로 재건, 본래의 사격을 회복해가고 있다.)
짙푸른 빛깔을 한 인공못을 지나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웅장한 황하정루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거슬러 올랐다. 몇 십 개에 불과한 계단임에도 불구하고 숨이 몹시 가쁘다. 아마도 도시생활의 속진에 찌들린 때문일 것이리라.
“점심공양들은 했는가?” 정겨운 목소리로 맞이하는 원담 큰스님의 엷은 미소가 비 내린 후의 사원숲 만큼이나 해맑게 다가왔다. 건강이 늘 걱정이라는 주위의 이야기가 무색할 만치 스님은 건강해 보였다. 비결을 물으니, 특별한 비결은 없고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살아가면 건강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올해(1993년)는 큰스님께서 출가하신지 꼭 60년이 되는 해. 세속에서는 60주년이라고 하면 환갑이다, 뭐다 해서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며 마땅히 호들갑을 떨 일이지만 스님의 표정은 그저 덤덤하기만 하다.
“큰스님 그래도 출가 60년인데 감회가 새로우시지요. 출가시절을 회상해주시지요.”
큰스님은 마지못해 답변을 한다는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다가 말문을 연다.
“내가 중이 된 것은 어머님처럼 모시고 살던 이모님께서 출가를 하신 게 동기가 되었어. 막상 이모님이 출가를 하고나니 허전하기가 이를 데가 없더군. 그래 도대체 이모가 무엇 때문에, 어떻게 해서 중이 되었을까를 알아보고 싶기도 했고, 또 출가해서 사시는 절은 어떤 곳인가 알고 싶어 찾아보겠다고 나선 것이 이곳 덕숭산까지 오게 된 연유지.”
“그렇다면 왜 다시 속가로 내려가지 않으셨나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 그래요. 그때가 내 나이 12살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가만히 살펴보니까 어린 눈에도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 바로 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또 세상에서 제일로 멋지게 사는 분들이 스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나니까 이곳을 버리고 갈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된 게 지금까지 이곳에 머물러 살고 있게 된 이유입니다.”
그 후 스님은 마벽초 스님을 은사로 축발(머리를 깎는 것)을 했고, 만공스님께 계를 받아 스님이 됐다. 당시 상황을 큰 스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누구든지 절에 오면 은사스님을 정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런데 나는 처음에 은사를 정하지 않았어. ‘부처님이 나의 은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 그런데 불교집안이란 게 은사가 없으면 중을 안 만들어줘요. 그래 절에 와서 4년이 넘게 행자로 있었지. 그러다가 마벽초 스님을 은사로 중이 되었는데, 은사는 만공 노스님이 정해주셨어요. 그런데 왜 내가 중이 되었는가. 그 연유가 재미있어요. 행자 생활을 한 4년 하고 있으니까 만공 노스님께서 어느 날 나보고 이제부터 당신을 시봉하라고 명령을 내려요. 그런데 말이지, 노스님을 행자복 입고 시봉할 수는 없는 일 아니요. 법복을 입혀서 시봉을 들게 하려고 하니 노스님은 나를 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내신 것이지요. 또 나도 스님께 중이 될 결심을 말씀드렸고. 만공 노스님께서 그때 은사로 마벽초 스님을 추천해 주셨어요. 벽초 스님은 아주 훌륭한 스님이시니 은사로 잘 모시라는 말씀에 따라 벽초 스님을 은사로 나이 열여섯에 정식으로 중이 됐지요.”
스님은 이야기가 옛날로 돌아가자 입가에 엷은 미소마저 머금었다. 대담이 차츰 열기를 띠어가게 되자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큰스님, 덕숭문중은 경허, 만공 스님으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중추적인 선맥(禪脈)을 이어가는 문중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덕숭문중의 가풍(家風)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덕숭가풍은 서래(西來)가풍입니다. 부처님의 탄생국인 인도가 여기서 서쪽이고, 또 서라고 하면 모든 법이 나온 근본도 되고 끝도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초이면서 동시에 최후인 것, 이것이 바로 덕숭산의 가풍이라고 할 수 있지요.”
“큰스님께는 만공 스님께 들려드렸다는 ‘딱따구리 노래’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화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그 이야기를 자세히 알려주지. 원래 만공 노스님께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노래 부르기를 아주 즐겨하셨어요. 노래를 잘하건 못하건 아이들만 보면 노래를 시키곤 하셨어. 그래 나도 만공 노스님을 잘 시봉하려면 노래하나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런데 그 때 무슨 일로 큰절(수덕사)에 들렸다가 거기서 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딱따구리 노래를 배웠어. 그 사람들이 이 노래가사를 잘 외워 노스님께 꼭 들려드리라면서 노래를 가르쳐줍디다. 그 내용이 대강 무엇인고하면(스님은 이 대목에서 장단을 넣으며 천진한 표정으로 흥얼거리듯 가사를 들려주셨다) ‘뒷동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어진 구멍도 못 뚫는구나.’라는 내용입니다. 그래 그 가사를 잘 외워가지고 정혜사로 돌아와서 노스님께 정성을 다해 노래를 들려드렸지. 만공 노스님은 나의 노래를 재미있는 표정으로 들으시더니만 ‘그거 참 좋은 노래다 보통 노래가 아니야. 단단이 외워두도록 해라.’고 하시더군.”
“그 딱따구리 노래를 정혜사를 찾아온 궁중의 상궁들 앞에서도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맞아요. 그랬지. 정혜사엔 가끔씩 서울의 상궁이나 나인들이 찾아오곤 했어요. 그 당시엔 그들이 시주를 많이 하는 아주 큰 신도들이라. 정혜사 살림은 그분들의 시주로 꾸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언젠가 서울에서 상궁나인들이 왔을 때 만공 노스님이 ‘진성아’하고 부르셔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상궁나인들이 쭉 둘러앉았는데, 노스님께서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을 내리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의젓하게 노래를 불렀지. 그들은 처음엔 가사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 소린지 잘 모르는 것 같다가 까르르 넘어가게 웃음보를 터트리더군. 그런데 나중에 만공 노스님의 노래의 가사를 풀이하는 것을 듣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어. 그런데 말이오. 만공 노스님이 이 노래의 가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시오. 노스님은 결코 이 노래의 가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시오. 노스님은 결코 이 노래의 가사를 속된 내용을 담은 노래로 해석하지 않았어요. ‘진리라는 것은 본시 막힌 것이 아니고 열려(뚫려)있는 것인데, 우리 절 멍텅구리 대중들은 이미 열려있는(뚫려진) 진리도 알지 못하는구나(못 뚫는구나).’라고 해석을 하시더군요. 어때요. 이렇게 해석을 해놓고 보니 멋지지요.”
이 대목에 이르러서 원담 큰스님은 신바람마저 나신 듯했다. 그러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와 덕숭총림을 이끄는 방장으로서의 원칙 같은 것을 말씀하셨다. 예컨대, 덕숭총림 수덕사는 해인사나 통도사, 송광사 등 여타 총림과는 달리 장소도 비좁고, 재정도 넉넉지 못해서 총림의 자격에 미흡한 점이 많은데도, 총림으로 지정이 된 것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중흥시킨 본찰로서 선풍을 진작시키라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스님은 만일 선풍을 진작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덕숭총림은 총림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자신은 여생을 선풍을 높이는 일에 모두 바칠 생각이라며 이 일 외에 다른 일은 모두 번외(番外)인 만큼 수덕사가 다 날라 가는 일이 있더라도 덕숭산 가풍을 살리는 일에 나설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딱따구리 노래 이야기를 하시며 천진한 미소를 짓던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이 단호함, 맺고 끊음이 명확한 것이 우리네 중생들과 다른 점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분위기도 바꿀 겸 해서 불쑥 수덕사의 보물로 알려진 거문고 이야기를 꺼냈다. 최인호의 소설 『길없는 길』도입부에 만공스님이 남긴 귀중한 유품 중에 거문고가 수덕사에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거문고에 얽힌 이야기와 거문고가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가를 물었다. 큰스님은 거문고에 얽힌 이야기를 아주 소상히 설명했다.
“거문고 이야기를 하려면 수덕사 소유의 덕숭산 임야가 이왕직(李王職)에게 재산관리를 맡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만 이왕직의 소유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에 만공스님께서 이왕직을 찾아가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땅을 반환받아 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운현궁에 살고 있던 의친왕 이강(李剛)과 교분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이강이 만공스님께 귀의해 수덕사의 임야를 찾아주고 신표(信標)로 거문고를 선물한 것입니다. 이 거문고는 고려 공민왕이 탔던 신품명기로 대대로 조선왕실의 보물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수덕사에 잘 보관되어 있어요.”
여러 차례 종회의원을 역임한 스님은 종단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인사권이 집중이 된 인사제도와, 종단재산을 중앙에서 일괄 관리하도록 하는 제도의 개혁이 없으면 조계종은 10년이 못가서 크게 쇠퇴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을 어떻게 길러내느냐의 문제인데 요즈음 젊은 후학들을 보면 솔직히 걱정이 많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법문을 할 때 경이니, 계율이니, 행이니 보다는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늘 강조합니다. 사람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진리를 구현하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지요. 요즈음 젊은 수행자들을 보면, 중 생활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옛날 스님네들은 아침, 저녁으로 예불하고, 도량 청소하고, 공심(公心)으로 살려고 애를 쓰고, 하심(下心)과 자비심을 갖고 중 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을 보면 이런 기본적인 면이 무척 약하다 이 말이요.”
스님의 질책은 후학들에 대한 염려에 다름아니다. 야단을 하는 경책의 일갈(一喝) 속에 진한 사랑이 숨겨져 있음이다.
“요즈음 먹물도 마르기 전에 주지를 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옛날엔 그러지 않았어. 그땐 주지라는 말은 없고 주장이라고 했는데, 주장이 모든 절살림을 알아서 처리했지. 특히 주장스님들은 원력이 있고, 하심하고, 자비로워야 했어. 절 아랫마을 사람들의 양식이 떨어지면 아무도 모르게 절 양식을 내다주기도 했고, 하여간 지금 주지들처럼 나서대질 않았다. 이 말이지. 자신이 아무리 좋은 일을 했어도 숨기려고 했지. 이런 점이 요즈음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아요.”
60년 수행생활을 해오면서 아직 스스로 깨달았느니, 깨닫지 못했느니라는 따위의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는 스님은 걸림없는 가풍, 형식에 얽매임과 특정한 대상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가풍속에 살다보니 요란을 떨지 않고 무난히 중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승이든 속이든 기본이 튼튼해야 제대로 된다”는 가르침을 거듭 강조한 원담 큰스님. ‘걸림이 없으되 기본은 철저히 하라’는 가르침을 늘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스님은 그리 크고 높지 않은 덕숭산의 그늘을 한없이 길게 드리우는 거목이었다. <1993. 7.>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942호 [2008-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