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혜능 스님(六祖慧能禪師)께서 이르시기를, “나의 법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정과 혜가 다르다 하지 말라. 정과 혜는 하나요, 둘이 아니다. 정은 혜의 본체(本體)요, 혜는 정의 작용(作用)이다. 곧 혜 안에 정이 있고, 정 안에 혜가 있다. 만약 이 뜻을 알면 곧 정과 혜를 함께 배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정과 혜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등이 있어야 불빛도 있는 것이지 등이 없으면 불빛도 없어지는 것이니 등은 불빛의 본체이고 불빛은 등의 작용이 되는 것이니 등과 불빛이 이름은 비록 다르나 본체는 하나인 것처럼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정혜사 능인선원(定慧寺 能仁禪院)은 조선 왕조의 오랜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에 따라 날로 기운이 멸해가던 불교를 조선조 말에 새롭게 일으켜 세우신 ‘근대 선불교(禪佛敎)의 중흥조’이신 경허 스님(鏡虛禪師)과 그 제자이신 만공 스님(滿空禪師)의 수행과 교화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곳입니다.
특히 만공 스님께서는 1900년대부터 40여 년을 덕숭산에서 주석(駐錫)하시면서 선불교의 요람인 이 도량에서 구름같이 모여드는 선승(禪僧)들의 눈을 밝혀 주셨으니 정혜사야말로 선불교 역사에 우뚝 솟은 뜻깊은 선원입니다.
예로부터 전단나무 숲 속에는 잡나무가 없고 깊고 울창한 숲 속에는 사자가 살고 있다고 했으니 도인이 많이 배출된 이 도량에서 함께 정진하시고 그 공덕으로 이 산중이 더욱 향기 그윽하고 밝은 빛이 솟아오르는 선찰(禪刹)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선원을 운영하다 보면 숱한 일을 겪게 마련입니다. 요즈음 초발심자(初發心子)들 중에는 안하무인병(眼下無人病)에 걸린 이치에 어둡고 지혜는 적고 간만 큰 스님들이 많은데 공연히 사견에 빠져서 이(理)와 사(事)를 구분 못하고 ‘텅 텅 비었다’고 외치며 인과를 무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군(魔軍)의 권속(眷屬)이 되어서 파계(破戒)를 일삼고도 스스로는 무애행(無碍行)을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큰 일입니다. 실로 계를 파하면 선신들이 돌아서고 재앙은 쫓아오니 단견(短見)으로 유(有)를 버리는 데 집착하면 공(空)에 떨어지는 것과 같이 불을 피하다 물에 빠져드는 격이니 모름지기 공부인의 자세로 하심(下心)하고 선지식을 모시는 마음으로 대중스님들 가운데서 정진하십시오.
수좌(道座)의 살림살이가 가는 것도 참선이요, 앉는 것도 참선이 되어서 일체가 다 편안한 경지라면 모를까, 이에 못 미친다면 누가 내 머리 위에 벌겋게 달은 무쇠바퀴를 돌릴지라도 화두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놓인 자리 항상 그대로 있는 대들보 마냥 좌복 위를 지키며 일체 시비에 관여 않고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번뇌가 일더라도 지우려 말고 오직 화두만 챙기다 보면 불 속에서 핀 연꽃과 같이 결정코 시들지 않는 무한한 힘이 생길 것입니다.
대중이 얼마나 모였든 누가 모였든 공부 중에는 다 잊고 남이 나를 알아주고 안 알아 주고는 걱정하지 마시고 오직 내가 나를 순간 순간까지 잘 알아서 내가 내 자신에게 속지 않는가를 걱정할 일이며, 설사 남이 나를 비방하더라도 결코 걸려들지 마십시오.
진실을 왜곡시키는 일은 불로 허공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비방하는 사람이 더 괴롭게 되는 법이니 자신은 그저 바람 불어오는 대로 나부끼고 비 오는 대로 젖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고 물이 섞이듯이 섞여서 흐르며 한철 사는 겁니다.
선원생활의 근본은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끊고 견성성불(見性成佛)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니 복을 짓는 것에 매달려서 세월을 보내서도 안 됩니다. 복은 짓는 대로 얻는 것이니, 보시행이 복이 되어 돌아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복을 받는 이치는 허공에 쏘아올린 화살과 같이 화살의 힘이 다하면 다시 땅으로 떨어지듯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오직 도 닦는 데에 힘을 써야지 복 짓는 데 마음을 먼저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공부하는 납자(衲子)는 공부만 걱정하면 밥 값 다하는 것이니 사중 곳간의 쌀 걱정 하실 것도 없습니다. 도인은 하늘이 먼저 알아보고 수호하여 주시는데 공부 걱정 외에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마갈타국의 빔비사라왕이 왕사성 근처에 수보리 스님(須菩提尊者)의 토굴을 짓다 지붕 씌우는 것을 깜박 잊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왕사성 일대에 가뭄이 들다가 왕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정신을 차려서 스님께 참회하고 지붕을 이으니 그 때서야 단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이 자리에 수보리 스님과 같은 도인이 계신다면 산중이 다 도인스님 덕에 먹고 사는 것이 됩니다.
만공 스님께서도 “닭이 백이면 봉이 하나니 백 명 대중 가운데는 눈 밝은 도인이 꼭 있는 법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도가 복을 불러 산중이 사는 겁니다.
논어(論語)에도 “지자(知者)는 현혹되지 않고 인자(仁者)는 근심하지 않고 용자(勇者)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듯이 세속의 선비도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한 가운데서도 편안하게 도를 즐김)할 줄 아는데 청빈(淸貧)을 덕으로 삼는 출가자가 어찌 거친 음식과 남루한 옷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도를 대신하여 부와 명예를 따를 것입니까?
중국에 허유(許由)라는 사람은 요(堯) 임금이 천하를 모두 물려주겠다고 하자 세속의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투덜대며 강물로 달려가 귀를 씻었던 인물입니다. 그의 몸에는 재물이 하나도 없어 물을 마실 때도 손으로 마셨습니다. 이를 본 사람이 표주박 하나를 주니 받아서 쓰고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는데 바람 부는 날 흔들리며 소리를 내자 다시 표주박을 내버리고 이전처럼 손으로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공부인은 그저 재물이 없어야 한가로운 법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았던 ‘침묵의 수도원’이라는 카톨릭의 트라피스트 수도처 신부님들은 출가시 청빈서약서를 써서 개인의 모든 재산권을 포기하고 평생을 노동과 함께 기도를 하면서 생활하는데 우리처럼 삭발하고 금육(禁肉)하고 묵언(默言)하며 하루 7번 기도하고 일생을 다하면 입었던 옷 그대로 매장됩니다.
그 중에 로버트 신부님은 출가 후 25년을 산 속 토굴에서 하루 9시간 명상하며 8년을 묵언했는데 그분 말씀이 “인간은 모두 신에게서 와서 인간의 모습으로 잠깐 있다가 다시 신으로 간다.”라고 말씀하셔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금과 동서를 통해서 수행자의 향기는 청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장 스님(百丈禪師)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의 정신은 더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
수좌는 산중 살림 걱정 놓고 화두정진만 하시는 것이 산중 살림살이를 제일로 도와주시는 것이고, 종단시비 놓아 버리고 화두정진만 하시는 것이 종단시비를 제일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저는 이제껏 믿고 주지소임으로 대중스님들 모시고 살아왔습니다. 저는 꼬리 없는 소처럼 세속의 밭을 일구어 곡식을 거둘 것이니 대중스님들은 부디 좌복에서 농사 잘지으십시오.
끝으로 평소 제가 가슴 깊이 새겨온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의 말씀을 전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문틈에 지나가는 먼지로 보며, 금과 옥의 보배를 기와 자갈처럼 보며, 흰 비단을 떨어진 누더기로 보며, 대천세계를 작은 겨자씨로 보며, 큰 못물을 발에 바르는 기름처럼 본다. 방편으로 여는 문은 변화한 보배 무더기로 보며, 위없는 진리(無上乘)를 꿈속의 비단과 금으로 보며, 도(佛道)를 허공의 꽃처럼 보며, 선정(禪定)을 우뚝 선 수미산처럼 보며, 열반을 밤낮으로 깨어있는 것으로 보며, 삿되고 바른 것을 여섯 용이 춤추는 것으로 보며, 평등을 참되고 한결같은 땅으로 보며, 일고 지는 세상의 변화를 철따라 피고 지는 나무와 같이 본다.”
- 하안거 반산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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