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은 봄 기운에 화사하게 웃어도 노송(老松)은 쓰러지기 전에는 추색(秋色)이 없듯이 덕숭산은 산색(山色)만큼이나 변함없는 대중들이 지켜가고 있습니다. 곳간의 살림은 넉넉하지 않아도 바위처럼 늠름한 가풍(家風)과 청송(靑松)처럼 곧은 수좌(首座)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승려가 귀중해야 불법(佛法)도 귀중하게 되고 승려가 천박하면 불법도 천박하게 되는 것이라 대중 각자가 귀중해지기 위해서 정진하는 곳입니다. 이 산중에서는 승려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 하면 오직 도(道)에다 둡니다. 도(道) 외에 가문이나 학식, 인물, 부귀, 명예는 다 소용이 없고 오로지 도에만 그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도가 있는 승려는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도가 없는 승려는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그 다음으로 생각합니다.
의식(衣食)은 넉넉지 못해도 도는 넉넉한 산중이니 누더기 속에 풍요로운 도를 감추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살아오신 선사(先師)들의 멋진 삶을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 도처럼 넉넉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도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큰 보배로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도란 쓸수록 빛나고 남을 위해 쓸 때는 더욱 빛나는 것이 다 이런 도리(道理)가 아니겠습니까?
승려의 가치를 오직 도에 두는 이 산중에 오셨으니 오직 도를 통할 것만을 원하고 나머지는 다 놓아버리고 함께 정진합시다. 조석으로 부처님께 향 사르고 발원하기를,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시여!
원하옵나니 이 몸 불도(佛道)를 이루어
법등(法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법향(法香)이 되어 세상을 향기롭게 하고
법수(法水)가 되어 세상을 맑히고자 하오며
이 몸의 뼈를 빼서 붓을 삼고 가죽을 벗기어
종이를 삼고 피로써 먹을 삼아 법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며 쉼 없고 치우침 없는 정진을 합시다.
간혹(間或) 대중 스님들 중에서 저에게 묻기를 “스님! 저는 제 나름껏 열심히 노력하는데 공부에 진전이 없으니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분이 있어서 이 자리를 통해 그 이유에 대해 중요한 것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첫째, 공부인이 깨달아야 한다는 철저한 각오와 용맹이 부족하고,
둘째, 생사(生死)와 무상(無常)에 대하여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부족하고,
셋째, 인과(因果)에 어둡고 조그마한 고통도 참지 못하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도가 바란다고 해서 어디 그냥 생기는 것이겠습니까? 고행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고 저절로 도인이 된 사람은 고금(古今)을 통해 한 사람도 본 일이 없습니다.
대도인(大道人)도 처음에는 다 생사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생각 생각을 화두(話頭)에만 두고 살 생각보다는 죽을 각오로 정진해서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도가 있는 산중에 와서 도인을 친견(親見)해 가며 함께 도를 닦는 도반(道伴)들을 만났으면 서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아끼고 존경하며 살아야지 말법시대(末法時代)를 탓하고 종단(宗團)을 탓하고 총림(叢林)을 탓하고 도반을 탓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영명 스님(永明禪師)께서 이르시기를,
“가령 참선(參禪)을 해서 깨치지 못하고 도를 배워 성불(成佛)하지 못했어도 그저 스쳐간 인연만으로도 영원히 종자를 심어서 세세생생 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잃지 않으니 언젠가는 선지식을 만나서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참선법을 만났을 때 정진하지 않으면 언제 하게 되겠습니까? 그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났을 때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정진해 봅시다.
제가 큰절(修德寺)에서 노스님(碧超禪師)을 모시고 소임 살 적에 하루는 노스님께서 불러놓고 말씀하시기를, “속인도 선방(禪房) 좋은 줄은 알아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 봐도 지옥을 면한다고 믿고 찾아오는데 너도 이제는 본사를 떠나서 큰 산중선방에 방부(房付)드리고 살다 오너라.”고 하셔서 맨 처음 용기를 내서 간 곳이 통도사(通度寺)였습니다.
나이 스무 살 갓 너머 타 산중에 살러 가보니 부처님 법은 같은데 산중 법은 어찌 다른 것이 그렇게 많은지 눈치볼 것도 많더니 두 철 세 철 다니다 보니 분별심(分別心)도 떨어지고 어디가나 제 살림살이대로 정진하게 되었습니다. 대중께서도 『사익경(思益經)』의 말씀처럼,
“있음에도 떨어지지 않고 없음에도 떨어지지 않으며 또한 있음과 없음을 분별하지도 않나니 이와 같이 익히는 자라야 수도(修道)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분별이 뚝 끊어진 경계에서 만사(萬事)에는 무심(無心)하고 오직 화두에는 세밀하게 지내는 수행자가 되어 빈틈없는 살림살이를 지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때때로 전생의 업과 금생의 수행력 부족으로 앞도 뒤도 깜깜하고 막막하고 답답하고 졸리기만 할 때도 좌절하지 마시고 더욱 신심(信心)을 발해서 화두산(話頭山)의 천길 만길 되는 벼랑 위에 앉았다고 생각하고 한 생각 놓치면 뚝 떨어져서 죽고 쏜살같이 지옥에 간다고 믿고 순간순간 정미롭게 공부를 지어 가다보면 긴 밤을 지나 해가 뜨는 새벽이 오듯 밝고 시원한 경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공부에는 신심보다 더 중한 주춧돌이 없으니 신심을 생명 삼아 보배 삼아 정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심만 있으면 어떠한 마장(魔障)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는 문수보살(文殊菩薩)님의 가르침에서 발심하여서 점차 남쪽으로 가면서 53인의 선지식을 뵙고 그 때 그 때 깨달음을 증득해 가다가 끝으로 보현보살(普賢菩薩) 님의 십대원(十大願)을 듣고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여 법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원을 세우고 이를 성취하니 이에 문수보살님께서 선재동자를 찬탄하시길 “착하도다. 선남자(善男子)여! 만일 신근(信根)이 없었더라면 세간을 여의고 법계에 들어가는 해탈을 얻지 못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성현의 말씀이 이러할진댄 공부인에게 있어서 신심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나 여러분이나 사람으로 태어나 다행히 부처님 법을 만나서 부처님되는 공부에 인생을 걸었으니 입지(立志)를 세운 출발점이 세상사 그 어느 길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 웅장하고 멋진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이나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 ‘중생도 깨달으면 부처’라는 진리를 알고 있으며 설사 알고 있더라도 그 말씀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며, 또 믿더라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며, 또 이해를 하더라도 실제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공부에 진전(進展)이 없다고 해서 공연히 신심 없고 어리석은 무리들과 어울려서 출발점에서 다짐했던 장한 뜻을 잊고 “깨닫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으니 깨닫고 나서 확인하고 믿는다.”라는 궤변이나 쏟으며 신심 없이 지내다 아까운 일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진실한 말씀이요, 참다운 말씀이요, 중생을 현혹시키는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면서 모름지기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도의 싹을 키워가야겠습니다. 믿음의 밭에서 자라나는 수행의 나무야말로 기필코 불과(佛果)를 맺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공연한 노파심(老婆心)으로 한 말씀 더 드리자면 한 철 정진하다 보면 허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때는 더 이상은 정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참회를 하여야 합니다.
열반경(涅槃經)에 “죄가 적다고 죄악이 없다고 하지 말라. 물방울이 적어도 큰 그릇을 채우고 작은 죄가 쌓여서 무간지옥을 세우나니 이 몸 이 때 잃으면 언제 닦겠는가. 이 몸은 허망한 것이니 오늘은 살아 있어도 내일을 기약하지는 못하느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죄라는 것은 참회하면 녹아져서 편해지고 덮으려 하면 더 커져서 괴로워지는 것이니 순간의 악이라도 한 두 번 일어나는 것을 그냥 두다보면 무쇠도 제 몸에서 생기는 녹으로 삭아 없어지는 것처럼 수행을 망치게 됩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자신의 죄장(罪障)이 태산 같은 줄 알아서 늘 참회하는 가운데 정진해야 처음도 달고 중간도 달고 끝도 달은 꿀맛 같은 여여(如如)한 나날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도 편하고 남도 편안하게 해주는 막힘 없는 마음으로 한철 잘 지내고 부지런히 탁마(琢磨)하여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한 경지에서 언제고 중생을 위해서는 진(眞)을 돌이켜 속(俗)으로 들어가는 이 세상의 멋진 나그네가 되어 봅시다. 멋진 나그네가 바로 주인장(主人丈)입니다.
- 하안거 결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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