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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시풍속

淸潭 2007. 11. 2. 20:16

한국의 세시풍속

 

세시풍속의 현상


 

설날


 

1. 설의 유래


 

   설은 한 해의 첫날 전후에 치루는 의례와 놀이 등을 통털어 가리키는 말로서, 첫날을 설날, 그 하루 전날을 까치설날이라고 부르고 있다. 설이라는 말의 유래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5가지 설명이 통용되고 있다.

첫째, 삼간다는 뜻으로서, 새 해의 첫날에 일년동안 아무 탈없이 지내게 해 달라는 바람에서 생겼을 것이다. 둘째, '섧다'의 뜻에서 유래된 말로서,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 하는 뜻에서 생겼을 것이다. 셋째, '설다, 낯설다'라는 뜻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시간주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그리고 완전하지 않다는 뜻에서 생겼다. 넷째, 한 해를 새로 세운다는 뜻의 '서다'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설이란 말은 17세기의 문헌에 '나이,해'를 뜻하는 말로 쓰여진 반면에, 요즈음과 같이 나이라는 말이나 나이를 뜻하는 '살'이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를 하나 더먹는 날'의 의미를 가진 '설날'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살'로 바뀌므로써, '설'과 구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하루 전날인 섣달 그믐날을 왜 까치설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설날을 맞고 보낸다는 뜻을 말할 때, 다름 명절을 지내는 것과 같이 특별히 '쇠다,쇤다'고 말하고 있다. 이 '쇠다'는 뜻은 '오래되다,늙었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 설에 대한 해석 가운데에서 두 번째의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설을 쇠다'는 뜻은 '한 살을 더 먹어 늙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날은 1년의 첫날이라는 점에서, '한 해'라는 시간단위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와 함께 하루와 보름, 그리고 달과 계절 등과 같은 시간 단위는 사회생활과 일상생활, 제도와 농사 등고 밀접한 연관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단위와 절일 등을 정하는 역법은 바로 국가의 중요한 기밀사항의 하나였다. 따라서 어느 날을 설날로 잡는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로서, 현재의 설날은 달과 태양의 주기를 합쳐서 계산한 태음태양력에 의한 것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음력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보름을 주기로 한 달의 주기를 통해서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태음력과 함께 계절을 확인하여 농사를 짓는 기준으로 삼도록 태양주기를 15일 간격으로 24절기로 나눈 것을 결합한 것이다. 이 음력은 통일 신라시대에 중국 당나라에서 들여 온 것으로 보이며, 이후로 대한제국 말기에 양력이 등장하여 신정이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가지 약 1200여년간 설날은 이 음력을 기준으로 삼아 왔다. 따라서 한자로는 설날을 원일(元日) 원조(元朝) 원단(元旦) 삼원(三元) 삼시(三始) 세수(歲首)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시(年始) 정조(正朝) 춘절(春節) 원진(元辰)단일(旦日) 등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원단이나 삼원 등고 같은 말들이나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과 같이 양수가 겹친 날들을 중요한 명절일로 삼고 있는 종교가 도교인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날은 또한 도교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던 날로 보이며, 그 흔적을 많이 발견할수 있다.

설은 일제시대에 양력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강제적으로 쇠지 못하게 하였으나, 오랜 전통에 의해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제도적으로 양력설에 3일씩이나 공휴일로 삼았으나, 오히려 2중과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1985년에 '민속의 날'로 정하여 비로소 공휴일이 되고, 또 사회적으로 귀향인파가 늘어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설날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설날의 풍속

설날 풍속은 당대의 지배이념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았던 궁궐과 관리를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의 풍속과 피지배계층이었던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들의 풍속으로 나누어 지며, 그것도 설날의 전과 후에 걸쳐서 며칠간에 걸쳐이어진다. 새로운 지배이념이 등자아했을 때, 과거의 지배이념에 의해서 이루어진 풍속은 그 잔존물로서 일부계층이나 지역에 민속에 남겨진다. 따라서 불교가 지배이념으로 채택된 때에는 무속의 풍속이, 유교가 지배이념이 된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풍속이 일부 지역과 계층의 민속으로 남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조선시대의 유교 풍속이 민속의 일부로 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설빔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 놓은 새옷을 입는데 이 새옷을 「설빔」이라고 한다. 설빔을 위해서 각 가정에서는 가을부터 옷감을 마련하였다가 주부는 미리 정성껏 만들어 둔다. 설빔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없이 살림 정도에 따라서 마련하거니와 어린 아이는 설빔에 대한 기대 크고 서로 자랑도 하기 마련이다. 옛날 같으면 어른은 두루마기 또는 도포를 비롯하여 버선.대님까지 새로 한 벌을 하며, 바지.저고리에는 새 솜을 두어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모르게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한 벌을 마련하여 색동옷으로 곱게 단장한다. 여러 가지 색깔의 옷을 입으므로 마치 꽃밭처럼 아름답다. 설빔으로 갈아 입은 뒤에야 차례를 지낸다


 

성묘(省墓)


 

 설날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성묘를 한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 했다는 인사를 조상의 묘에 고하는 것이다. 생존한 어른에게는 세배를 하지만 이비 사별한 조상에게도 생존시처럼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수많은 자손들이 나이 많은 어른을 앞에 모시고 조상의 효열담(孝烈談)을 들어 가면서 줄을 지어 눈길 속에 성묘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정경이다.


 

차례


 

설날 아침 일찍 세찬(歲饌)과 세주(歲酒)를 마련하여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정조차례라고 한다. 사당은 지손(支孫)은 모시지 않고 장손이 모시는데,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까지의 4대조의 신주를 모셔두며 정조차례 때에는 차례대로 제사하고, 보통 제사 때에는 해당되는 분에게만 제사하게 된다.5대조 이상의 신주는 각기 분묘 옆에 묻어 집에서는 지내지 않고 10월에 있는 시제 때에만 제사를 지낸다. 차례 때에는 원근에 있는 자손들이 모두 장손집에 모여 들어 함께 지내는데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세배

차례가 끝나면 일동은 자리를 정리해 앉는다. 이때 조부모?부모?백숙부모?형제 등 차례로 절을 하고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고 한다. 집 안에서 세배가 끝나면 차례 지낸 세찬과 떡국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게 되는데, 사당을 모신 집이 있으면 먼저 사당에 절을한 다음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측에서는 어른에게는 주식(酒食), 아이에게는 과일과 돈으로 대접하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일가 어른이 먼 곳에 살면 수십리 길을 찾아가서라도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으며, 세배를 할 줄 모르면 교양업슨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다. 먼 곳에는 정월 15일까지 찾아가서 세배하면 인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덕담

정초에 어른이나 친구를 만났을 때에 말로써 새해 인사를 교환하는데 이를 덕담이라고 한다.이때에 「과세 안녕하셨읍니까?」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고 하며, 연소한 아이들에게는,「새해에는 복 많이 받게」또는 「새해에는 소원 성취하게」하는 등으로 처지와 환경에 알맞은 말을 한다. 덕담은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복을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축의(祝意)를 표시하는 것이다.


 

歲銜(세함)

벼슬을 하는 집안에서는 옻칠을 한 책상을 대청에 비치해 둔다. 그러면 밑에 거느리는 아전들이 종이를 접어 이름을 써서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간다. 각 관청(官廳)의 서리(胥吏)와 영문(營門)의 교졸(校卒)들도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청이나 선생의 집에 드린다. 이것을 세함이라고 한다. 설날이 되면 주인(主人)은 모두 하례하러 세배차(歲拜次) 나가서 부재(不在)이므로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


 

 

 

3. 설의 놀이와 연희


 

새해에 개인의 신수를 점쳐 보기 위하여 오행점을 보거나 윷점을 치고, 또 토정비결을 본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오행점은 나무조각에 금 목 수 화 토를 새겨 장기쪽같이

만들어 이것을 한번에 던져 엎어지고 자빠진 것으로 괘를 얻고, 그 괘에 따라 정해진 점괘로 그 한해의 신수를 본다고 하였는데, 현재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윷점은 대부분 윷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보는 것으로, 윷을 3번 던져서 나오는 결과를 조합해서 정해진 점괘를 통해서 보는 점이다. 모 와 윷은 같은 것으로 보고, 예글 들어 '도도도'는 '어린 아이가 인자한 어머니를 만난다' '도개걸'은 '남비가 등불을 친다' '개걸도'는 '갓난 아이가 젖을 얻느다' '모걸도'는 '구시가에 바람이 인다'등과 같은 내용으로, 특히 어린이들고 부인들간에 성행하였다고 한다. [토정비결]은 이지함(李芝涵 1517-1578)의 저술이라고 전해지는 점서로, 인간이 태어 날 연월일시의 사주 가운데 연월일에 해당하는 수를 그 해에 정해진 수와의 관계를 가감해서 얻어진 괘에 따라 점을 친다. 이 점괘는 1년치와 함께 달별로 상순 중순 하순으로 나누어서 일신과 가사, 그리고 공사에 관한 다양한 내용의 괘사로 되어 있다. 지금도 정초가 되면 길거리에서 토정비결을 보아 주는 사람들을 볼수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이루어진 세시풍속 관계의 문헌들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주역]에 바탕을 둔 점서로, 민간에서 심심풀이로 전해 오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널리 퍼진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3일이 지나면, 어린 아이들이 보름날까지 연날리기를 하다가 14일날 저녁에 줄을 끊어 날려 버리면 그 해에 드는 액을 날려 버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액막이연'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연을 만드는 종이도, 그리고 연실도 또한 만들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주로 서울고 같은 도시지역에서 성행했었다. 설을 지내고 3일째 되는 날에 일반 농촌이나 산촌에서는 마을고사, 또는 동제라고 하는 공동제사를 지내고, 집잡마다 찾아 다니며 농악을 치고 고사를 지내는 '지신밟기'가 있다. 마을제사는 지방마다 형태가 다른데, 일반적으로 가족 가운데 병자가 없거나 험이 없는 깨끗한 삶을 제관으로 뽑고, 마을 뒤나 산위에 있는 당나무나 당집에서 유교식으로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마을 사람들과 동물이 건강하고 또 한 해의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는 축문을 일고, 소지를 올리고 끝낸다. 제사를 끝내면 마을 동회를 열어 마을의 공동 일을 의논하고 일년동안 공동으로 사용한 경비를 결산하다. 지신밟기를 할 때에는 집집마다 조금씩 쌀을 내 놓는데, 니것은 마을이 공동자산으로 삼는다. 이 마을제사와 지신밟기는 새해를 맞아 공동의 생활공간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의미를 갖는다.


 

4. 설음식

설날 차례상과 세배 손님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 음식들을 통틀어 세찬(歲饌)이라 한다. 차리는 세찬에는 떡국, 세주, 족편, 각종 전유어, 각종 과정류, 식혜, 수정과, 햇김치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는데 준비는 가세에 따라 가지수와 양이 다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며 어느집에서나 만드는 대표 음식은 떡국이다. 그래서 떡국 한 그릇을 더 먹었다는 말이 설을 쇠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설 전에 어른들게 귀한 음식을 보내는 일, 어른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보내는 먹을 것들도 세찬이라고 하였다. 그때 보내는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어으나 대표적인 것은, 쌀, 술, 담배, 어물(魚物), 고기류, 꿩, 달걀, 곶감, 김 등이었다.


 

 

떡국 

설날에 흰떡국을 끊이는 풍습은 최남선의[조선상식]에서 흰색의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천지만물의 부활신생을 의미한다는 종교적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흰떡으 역사를 문헌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벼농사를 짓고 시루와 확돌을 사용하던 때가 B.C 4 - 5세시경으로 밝혀져 있으므로 이 때부터 흰떡이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흰떡은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按盤)위에 놓고 메로 쳐 몸이 매끄럽고 치밀하게 되도록 한 다음 가래떡으로 만든다. 이 떡을 백병(白餠) 거모(擧摸)라 하였다. 꾸득꾸득해진 가래떡을 얇고 어슷하게 썰어서 떡국거리로 준비해 둔다. 지금은 기계화되어 사라진 정취지만 1950년대만 해도 세모에 집집마다 떡에 소리가 골목을 메워서 즐거운 명절 분위글 자아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떡국은 흰떡과 쇠고기, 꿩고기가 쓰였으나 꿩을 구하기 힘들면 대신 닭을 쓰는 경우가 많다. "꿩대신 닭"이란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요즘은 쇠고기가 많이 쓰이고 있다. 떡국 끊일 때는 고기장국을 미리 끊여 두어야 한다. 국물이 맛있게 우러나는 양지머리를 고아서 덩어리는 편육으로 이용하고, 양념한 장국을 끊이다가 준비된 흰떡을 냉수에 씻어서 넣고 한소끔 끊이면 떡이 떠우르를 것이니 이때 그릇에 담아서 웃기를 얹는다. 웃기는 따로 살코기를 다져 ?은 것고 황백지단을 쓴다. 혹은 살코기와 움파를 꼬치에 꿰어 만든 산적을 한 두 꽂이 얹기도 한다. 특히 개성 지방에서는 조랭이 떡국을 끊이며 충청도 지방에서는 생떡국, 이북 지방에서는 만두국을 끊이기도 한다.


 

평안도 만두국

밀가루를 따뜻한 물로 반죽하여 젖은 보자기로 덮어 두었다가 끈기가 생기면 손바닥만큼씩 둥글게 밀어 놓는다. 속은 쇠고기, 돼지고기를 다지고 김치는 속을 털어내고 곱게 다져 물기를 꼭 짠다. 두부도 베주머니에 넣어 물기를 짜고 숙주나물은 살짝 데쳐서 잘게 다져 물기를 꼭 짠 다음 잘 섞어 갖은 양념으로 무친다. 밀어놓은 껍질에 소양지를 넣어 집어 두었다가 쇠고기로 육수를 만들어 만두를 넣어서 끊인다. 상에 낼 때 그릇에 떠서 웃기로 황백지단 채 썬 것을 얹고 초장을 곁들인다.


 

조랭이 떡국

멥쌀가루를 곱체 쳐서 흰떡을 만들어 참기름을 바르면서 나무칼로 썰어 조랭이떡을 만든다. 양지, 사골, 양 등을 고아 국물을 만들어서 간을 하고 삶아진 건지는 건져 양념해서 웃기로 쓴다. 준비한 떡을 찬물에 헹구어서 끊는 장국에 넣어 끊으면 그릇에 담고 고기와 완자, 홍백지단을 웃기로 얹는다.


 

1.말날


 

10월의 오일(午日)을 「말날」이라 하여 특별히 말을 위하는 풍속이 있다. 이날이면 팥떡을 해서 마굿간 앞에 차려놓고 말의 무병과 건강을 비는 고사를 지냈다. 우리 민족은 가축 중에서 말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위했기 때문에 때로는 말을 위한 고사까지 지낸 것이다. 말은 옛날에 가장 좋은 장거리 교통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노동력을 농사일에 이용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가축에 비해 영리해서 주인을 따랐으므로 말을 수중히 여기고 제사까지 지낸 당시의 풍속을 이해할 만하다. 조선 시대의《시용향약보(試用鄕藥譜)》에는 마제(馬祭)때 부르던 노래인 「군마대왕(軍馬大王)」이 전해지고 있다. 10월응 말말 중에서도 무오일(戊午日)을 상마일(上馬日)로 쳤는데 그것은 무(戊)와 무(茂)가 음이 같아 무성(茂盛)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였으리라 믿어진다. 또 말날 중에서도 병오일(丙午日)일 때에는 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역시 병(丙)과 병(病)의 음이 같아 말의 병을 꺼려한 데서 생겨난 것이라 믿어진다. 어떤 지방에서는 말날에 시루떡을 해서 외양간과 모든 방에 차려놓고 주인의 생기복덕을 비는 굿을 하거나 안택(安宅)을 하기도 한다. 또 햇곡식으로 떡을 하고 음식을 마련해서 굿을 하기도 하며, 전라북도 지방에서는 이날 상주 단지에 신곡(新穀)을 강아 넣는다. 오일(午日)에 떡을 해서 상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족(家族)이 모여 함께 먹는데 말일병(馬日餠)이라고 한다.


 

 

인날


 

  정초에는 남의 집에 가서 유숙하지 않지만, 특히 7일 인일(人日)에는 외숙(外宿)하지 않는다. 이날 객(客)이 와서 묵고 가면 그 해는 연중 불운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부득이 객(客)이 와서 묵게 될 때에는 불운을 막기 위해서 주인과 객(客)은 머리를 반대로 두고 거꾸로 자야만 한다 그러면 액운을 막을 수가 있다.

   옛날 나라에서는 인일제시(人日製試)를 하였는데 인일(人日)에 유생(儒生)들에게 시험을 보여 등용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동인승(銅人勝)을 각신(閣臣)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것은 작고 둥근 거울인데 자루가 달리고 뒤에 신선이 새겨져 있다.

   세시기(歲時記)에 수(隨)나라 유신이란 사람의 아내 진씨가 인일(人日)에 동인승(銅人勝)을 올리는데, 혹 비단실을 잘라 금박(金箔)을 새겨 장식하여 만들었다고 했다. 오늘날의 동인승(銅人勝)도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

   제학(提學)을 부르게 하여 과거(科擧)를 실시하라고 지시한다. 이것을 인일제(人日製)라 한다. 태학(太學)의 원점(圓點)을 얻은 유생(儒生)에게 시험(試驗)하는데 식당(食堂)에 참석한지 만 30일에 원점이 되면 처음으로 시험을 보도록 한다. 그들에게 시(詩) 부(賦) 표(表) 책(策) 잠(箴) 명(銘) 송(頌) 율부(律賦) 배율(排律)등 각 문체를 마음대로 시제에 맞도록 내게 하여 1등한 자에게는 혹 사제(賜第)도 내리며, 발해(發解)한 자도 시상하는데 차등이 있게 준다. 성균관과 문묘(文廟)에서 시행하기도 하고 대궐 안에서 임금이 친히 시험하기도 한다. 또는 지방의 유생도 불러 함께 보이기도 한다. 명절날 선비를 시험하는 것은 인일(人日)로 부터 시작하여 3월 3일 7월 7일 9월 9일에 행하는데 모두 인일제(人日製)을 모방한 것이다. 이런 것을 절일제(節日製)라고 한다.


 

 

 

상십이지일


 

상자일(上子日)

정월에 들어 첫째 자일을 「상자일」이라 하는데 곧 「쥐날」이다. 이날 농부들은 쥐를 없애기 위하여 들에 나가 논과 밭의 두렁을 태우는데 이를 쥐불놀이라고 부른다. 쥐가 많으면 수확한 오곡을 먹어 서해(鼠害)를 받게 되니 농사에서는 쥐를 없애려 한다. 그래서 쥐날 논밭 두렁의 풀을 태우면 쥐가 없어지고 해충이 제거되면 새싹의 발아도 촉진되어 그해 농사가 잘 된다고 하여 쥐불놀이를 한다. 요즘에는 보름날 밤에 횃불놀이를 겸해서 쥐불놀이를 많이 한다. 쥐날 밤에 자시(子時)에 방아를 찧으면 쥐가 없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밤중에 방아를 찧는다. 방아독에 넣을 곡식이 없으면 빈 방아라도 찧어서 요란한 소리를 낸다. 상자일엔 옛날부터 일도 하지 않고 백사(百事)를 금하고 놀았다고 하는데, 쥐가 곡식을 축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쥐는 곡식을 잘 먹는 까닭에 상자일 밤엔 불을 밝히지 않으며 길쌈을 하거나 의복을 짓는 일도 하지 않는다. 옷이가 천을 쥐가 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곡식을 볶아서 주머니에 넣으면 재수가 좋다고 전한다. 대궐에서는 주머니를 만들어 명주(名色) 실로 끈을 만들고 큰 나비같이 두 귀를 싸서 정조(正朝)에 문안(問安)오는 근신(近臣)이나 재상에게 나누어 주었다.


 

상인일(上印日)

정월의 첫 토끼날을 상인일이라 말하는데 「상묘일」또는 「토끼날」이라 부르기도 한다. 토끼날에는 남자가 먼저 일어나서 대문을 열어야 한다. 가장이 열면 더욱 좋으나, 가장이 없을 때에는 식구 중에서 누구든지 남자가 먼저 대문을 열기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일년동안 가운이 융성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에 여자가 먼저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가면 가운이 불길하다고 한다. 이것을 철저히 지키는 집안에서는 밥을 짓는 일도 남자가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간 다음에야 방문을 여고 나와서 한다. 토끼날은 장수를 비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은 남녀 할 것 없이 명사(命絲)라 해서 명주실을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매달거나 또는 문 돌찌귀에 걸어 두는데, 그렇게 하면 명이 길어 진다고 전한다. 또 상묘일에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 장수한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실을 짜고 옷을 지으며 베틀이 있으면 한 번씩 올라가서 베를 짜본다. 그래야만 장수한다고 전한다.


 

상진일(上辰日)

정월의 첫 진일을 상진일이라고 하는데 용란을 뜨는 민속이 전한다. 즉 상진일 이른 새벽에, 농촌에서는 부인이 남보다 먼저 우물에 가서 물을 긷는다. 상진일에는 천상에 있는 용이 하강해서 우물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아무도 길어가지 않은(우물에 일찍 가서 물을 뜬다는 것은)우물 속에 낳은 용란을 뜨는 것이 된다. 이것을 [알 뜨기]라고 하는데 용알을 떠다가 밥을 지어 먹으면 그 해는 농사가 잘 되어서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그래서 농촌의 부인들은 이른 새벽에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 간다. 용란을 먼저 떠간 사람은 용알 뜨고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짚을 우물에 띄운다. 그러면 다음에 왔던 사람이 보고 다른 우물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상사일(上巳日)

정월 들어 첫 상일을 [상사일]또는 [뱀날]이라고 한다. 이날 머리를 빗으면 그해에 진안에 뱀이 들어온다는 속신이 있다. 뱀이 침입한다는 것은 불길한 일이요 누구든 금기한다. 그래서 상사일에는 남녀간에 머리를 빗지 않는다. 뱀을 금기하는 것은 집념이 강하고 악착스러워서 대개 좋아하지 않는다. 뱀이 죽어 귀신이 된 사귀는 한번 사람에 부착하면 악행을 자행할 뿐 아니라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고 전한다. 상일에 이발을 하지 않는 것은 사전에 사귀의 침입을 예방하는 것이니 하절에 뱀이 많은 지방에서 이 금기가 엄격하다.


 

상해일(上亥日)

정월 들어 첫 해일이 「돼지날」이다. 돼지날에는 얼굴이 검거나 피부색이 검은 사람은 왕겨나 콩깍지로 문지르면 살겨이 희고 고와진다고 전한다. 돼지는 살겨이 검고 거친데 그 반대의 뜻으로 이러한 민속이 생긴 것이다. 상해일엔 바느질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는다. 바느질을 하면 손가락이 아리고, 머리를 빗으면 풍증(風症)이 생긴다고 해서 금하기 때문이다. 이조(李朝) 때 궁중에서는 젊고 지위가 낮은 환신(宦臣)들 수백명이 횃불을 들고 땅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 주둥이 지진다」하며 돌아다녔다. 또 곡식의 씨를 태우 주머니에 넣어 환신(宦臣)과 근신(近臣)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모두가 풍년을 비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로부터 해낭(亥囊)?자낭(子囊)으 명칭이 생겼다. 이 해낭고 자낭은 모두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해낭은 둥글고 자낭은 길다. 조조가 등극하자 이제도를 복구하여 주머니를 나누어 주게 되었다


 

 

 

대보름


 

 

매서

상원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상대방이 대답하면 곧 [내 더위 사가라]한다. 이것을 [매서]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더위를 팔면 1년 동안 더위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미리 눈치채고 대답을 하지 않는 수가 있으니 학(謔(희롱할 학))이라고 했다. 이름을 불렀을 때 상대편이 더위 판다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내 더위 사가게]하면 도리어 이쪽에서 더위를 먹게 된다. 더위를 한 번 팔면 되는 것을 장난꾼은 여러 사람에게 몇 번이고 파는 수도 있다. 상원날과 더위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 사람 뿐 아니라 심지어 가축들도 더위를 막는다고 해서 예방으로 소나 돼지의 목에 왼새끼를 걸어주거나, 혹은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꺽어 둥글게 해서 목에 걸어준다. 왼새끼를 목에 걸어 주는 것은 좌색(左索)으로 귀중(鬼衆)을 묶었다는 고대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며,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는 악귀를 쫓는 민속적 주술로 쓰이는 일이 많아 더위를 막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더위를 먹지 않아야 하절(夏節)에 건강을 유지하고 행복(幸福)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매서(賣暑)하는 풍속(風俗)이 생긴 것으로 믿어진다. 더위팔기는 성인보다 아이들 아이에 성행되어 왔다.


 

부럼

상원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밤 호도 잣 은행 등을 깨무는데 이를 부럼이라고 한다. 대개 자기 나이수대로 깨무는데 노인들은 이가 단단치 못하여 몇 개만 깨문다. 여러 번 깨물지 않고 단번에 깨무는 것이 좋다고 하여 일단 깨문 것은 껍질을 벗겨 먹거나 첫 번째 것은 마당에 버리기도 한다. 깨물 때에, [1년 동안 무사태평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며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기원한다.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가 단단해진다고 한다. 상월날의 부럼을 위해서 14일 밤에 미리 과실을 준비해 둔다. 땅 속에 묻었던 밤을 파내서 깨끗이 씻어 두고, 서울같은 도시에서는 14일 저녁에 부럼을 위한 과실을 시장에도 많이 진열되어 있으며 주부들은 식구수를 감안해서 과실을 사간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상원날 새벽 날밤, 은행, 호두, 무를 깨물며 [1년 열두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 주시요]하고 축수한다. 이것을 부럼이라 하기도 하고 고치지방(固齒之方)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또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새벽에 밤이나 무를 깨물면서 축원하기를 [1년 열두달 동안 무사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귀밝이술(耳明酒)

상원날 이른 아침에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해서 모두 술을 한잔씩 마시니 [귀밝이술]이다. 귀밝이술은 데우지 않고 차게 해서 마시며, 일설에는 귀가 밝아질 뿐 아니라 1년 동안 좋은 소식을 듣는다고도 전한다. 귀밝이 술은 부녀자도 마신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청주(淸酒) 한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한다. 이것을 귀밝이술이라 한다고 했다. 도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소주 한 잔을 마셔 사람의 귀를 밝게 한다. 해록쇄사(海錄碎事)에 사일(社日)에 치성주(治聲酒)를 마신다고 했으나 지금 풍속(風俗)에서는 상원날로 올겨졌다고 한다.


 

달맞이(迎月)

대보름날 저녁 달이 동쪽에서 솟아오를 때면 사람들은 달맞이를 위하여 뒷 동산에 올라간다 한 겨울이라 춥긴 하지만 횃불에 불을 붙여 가지고 될수 있는대로 먼저 달을 보기 위해서 산길을 때라 뒷동산에 오르는 것이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고 대보름달이 솟을 때에 횃불을 땅에 꽂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제각기 기원을 한다. 농부는 풍년들기를 빌고, 도령은 과거에 급제할 것을 빌고, 총각은 장가들기를, 처녀는 시집가기를 기원한다. 그러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대보름달은 될 수 있는대로 남보다 먼저 보는 것이 길한 것이니 서로 앞을 다투어 산에 올라간다. 대보름달을 보고 1년 농사를 미리 점치기도 하는데 달빛이 희면 우량이 많고 붉으면 한발이 있으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며 흉년이 든다고 한다.또 달이 남으로 치우치면 해변에 풍년이 들 징조이고, 북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백가반

대보름날 여러 집의 오곡밥을 먹어야 좋고 또는 백집의 밥을 먹어야 좋다고 한다. 그래서 남의 집을 다니며 일부러 걸식을 해서 많은 집의 밥을 먹는 일도 있다. 백가반을 먹지 않으면 어린 아이가 봄에 발병하고 몸이 마른다고 한다. 백가반을 얻어다가 절구에 올라타고 개와 마주 앉아 개에게 한수저 먹인 다음에 자기도 한 수저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전한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 의하면 봄을 타서 살빛이 검고 야위는 아이들으 상원에 백 집의 밥을 빌어다가 절구를 타고 개와 마주 앉아 개에게 한 숟갈 먹이고 자기도 한 숟갈 먹으면 그런 병이 도지지 않는다고 했다


 

쥐불놀이

14일과 상원 밤에 농가에서는 들에 나가서 노둑,밭둑을 불태우는데 이것을 [쥐불놀이]라고 한다. 가을에 무성했던 둑의 풀이 겨울 동안에 건조해져서 불을 지르면 잘 탄다. 쥐불놀이를 위해서 머슴아이들은 미리 횃불을 만들어 두었다가 달이 오를 무렵에 떼지어 들로 나아가 쥐불놀이를 하므로 여기저기에서 불타는 광경은 장관을 이룬다. 쥐불놀이는 잡귀를 쫓고 신성하게 봄을 맞이한다는 것과, 잡초를 태움으로써 해충의 알을 죽여 풍작을 기도하며, 봄에새싹이 날 때 거름이 되도록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또 쥐불놀이를 하면 1년 동안 무병하고 액을 멀리할 수가 있다고 믿고 있다. 대보름날 저녁에 청소년들 사이에 횃불싸움을 한다. 대보름을 며칠 앞두고 청소년들은 횃불싸움을 위한 홰를 만든다. 낡은 마당비를 그대로 사용 하기도 하고 대나무 또는 싸리로 홰를 필요한 수만큼 만들어 두었다가 보름날 저녁에 뒷산에 올라간다. 그러면 건너 마을에서도 횃불싸움 준비를 갖추고 청소년들이 모여드어 서로 대치한다. 둥근 달이 동녘에 막 솟아오르면 대치하고 있던 패들은 서로 놀려주고 약을 올려 때로는 욕설까지 퍼붓는다. 이때 농악대들은 제각기 자기네 편의 기세를 올리기 위해서 신나게 한바탕 농악을 울려 흥을 돋운다. 흥분이 고조되었을 때 그 가운데 용감한 청년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채 손에 횃불을 들고 앞장을 서 싸움을 시작한다. 이 때에 소년은 소년끼리, 청년은 청년끼리 싸우게 된다. 횃불을 든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횃불을 휘두르며 싸우는데 서로 함성을 지르면서 때리고 차고 심지어는 옷까지 태운다. 이것은 매우 용맹스러워 보인다. 승부는 부상을 당하거나 횃불을 빼앗겨 항복한 사람이 많거나 또는 후퇴한 편이 패하게 된다. 횃불싸움은 협동정신을 기르고 남성적인 용감성을 나타내는 놀이로 고대 전투의 연습이기도 했다.


 

약식

상원날은 약식을 먹어야 좋다고 한다. 상원날의 약식 먹는 유래는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의 고사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소지와이 즉위한지 10년 되던 해에 하루는 천천정(天泉亭)에 행신(行辛)했는데 쥐와 까마귀가 와서 울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말하기를, 까마귀가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라고 했다. 왕은 기사로 하여금 까마귀를 따르게 했으나 남촌에 이르렀을 때 두 돼지가 싸우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다가 까마귀를 잃었다. 기사는 까마귀를 찾아 헤매다가 못에서 나온 노인을 만나 봉서(奉書)를 받아본 즉 [개견이인사 부개견일인사](開見二人死 不開見一人死)라 적혀 있었다. 기사는 이글을 왕에게 올리니 왕이 개봉치 않으려는 것을 일관(日官)이 일인(一人)은 왕이요, 이인(二人)은 서민이라 하므로 이 말을 듣고 개봉한즉 [금갑(琴匣)을 쏘아라]라고 적혀 있었다. 왕은 궁중에 돌아온 즉시 금갑을 활로 쏘니, 내전(內殿)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가 몰래 내통하여 왕을 죽이고자 모의하고 있다가 맞아 죽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상원을 오기일(烏忌日)이라 부르고, 까마귀를 약식으로 제사 지내는 민속이 생겨 오늘날까지 전해온 것이라고 한다. 약식은 14일 밤이나 15일에 만드는데, 찹쌀. 대추.밤.꿀.잣을 섞어 쪄서 만든다. 이것은 검붉은 빛이 나고 단맛이 잇으며 오래 두고 먹어도 좋다. 약식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서 만든 맛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잔칫상에는 으레 오르고 있다. 렬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의하면 역관(譯官)들의 말을 인용(引用)해서 우리의 사신 일행이 북경에 머물고 있을 때 상원날이면 약식을 꼭 해 먹었다. 중국의 귀인들이 약식의 맛을 보고 변색하여 기뻐했으며 백미를 다한 것이라 칭찬했다고 하는데, 약식의 맛은 중원에 까지 알려진 셈이다.


 

오곡밥(五穀밥)

상원날은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지은 밥을 먹는데, 곧 오곡밥이다. 보통 밥은 쌀만으로 짓거나 혹은 한가지 잡곡을 섞어 짓지만 상원날엔 한꺼번에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밥을 지어 먹어야 한다. 또 상원날엔 세 집 이상의 타성(他姓)집 밥을 먹어야 그해의 운이 좋다고 해서 여러 집이 오곡밥을 서로 나누어 먹으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이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해서 틈틈이 여러 번 먹는다. 열양세시기에 의하면 향촌(鄕村)의 부자집에서 잡곡밥을 지어 이웃 사람들과 용인(傭人)들을 불러서 한 사발씩 나누어 먹인다. 부자가 많은 곳은 하루에 여러 사발을 먹는다. 밥 아홉 그릇을 먹고 나무를 아홉 짐을 했으며 밥을 많이 먹어 기력(氣力)이 건장(健壯)하여졌다는 것이다.


 

진채식(陣菜食)

상원날에는 호박고지?무우고지?외고지?가지나물?버섯?고사리?등 여름에 말려둔 나물을 삶아 먹는데 이를 진채식이라고 한다. 상원날 진채식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들 즐겨 먹는다. 따라서 각 가정에서는 상원으 진채식을 위해서 나물을 햇볕에 말려둔다. 동축세시기에 의하면 박나물?버섯 등을 말린것과 대두황권(大頭黃卷)?순무?무등을 묵혀 두는데 이것을 진채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날 나물로 무쳐서 먹는다. 대체로 외고지?가지고지?시래기 등도 모두 버리지 않고 말려 두었다가 삶아서 먹는다. 이렇게 하면 여름 동안 더위를 먹지 않는다.

복(福) 쌈

상원날에는 밥을 김이나 취에 싸서 먹는데 이것을 복쌈이라고 부른다.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露積)쌓듯이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있다고도 전한다. 때로는 돌을 노적처럼 마당에 쌍하 놓고 풍작을 기원 하는 수도 있다. 상원날에 국수를 먹으면 수명이 길다고 해서 국수를 먹는 풍속도 있다. 동국세새기에 의하면 배추잎과 김으로 밥을 싸서 먹는다. 이것을 복리(福裏)라 한다. 또 열양세시기에는 해의(海衣)에다 마제채(馬蹄菜) 등속을 싸서 먹되 많이 먹어야 좋다고 하며, 복쌈이라 부르니 이것도 기풍(祈豊)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귀신단지 날


 

 

  정월(正月) 16일을 귀신단지날이라고 한다. 이날에 외출을 하면 귀신이 붙는다고 해서 삼간다. 또 귀신날에 귀신이 동하기 때문에 출입을 신중히 하고 일도 하지 않고 쉰다. 남자가 일을 하면 연중 우환이 있고 여자가 일을 하면 과부가 된다고 한다. 이승에서 과부가 되지 않으면 저승에 가서라도 과부를 못 면한다고 한다. 16일에 일을 하면 가을에 까치가 목화를 모두 쪼아버린다고 해서 까치날이라 부르는 수도 있다.


 

 

중화절과 머슴날


 

대청소

2월 1일을 각 가정에서는 대청소를 한다. 집 안팎을 깨끗이 쓸고 닦으며, 거미줄을 털고 외양간 같은 가축 우리도 거름을 치운다. 2월 초면 노래기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초목의 썩은 부분에서 더욱 심하게 나오고 방에 까지 기어 들어오므로, 이것을 막기 위한 부적을 만들어 붙인다. 백지에 [香浪閣氏 千里速去(향낭각씨 천리속거)] 또는 [노낙각시 천리속거]라고 써서 기둥이나 벽.석까래 같은 곳에 거꾸로 붙인다. 노래기에게 빨리 천리만큼 먼 곳에 가라고 명령하는 것이니 이 주문 부적을 붙이면 노래기가 없어지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이 부적은 朱書(주서)가 원칙이지만 묵서도 한다. 또 노래기를 막기 위해 솔가지를 꺽어다 지붕 위에 꽂기도 하낟. 초하룻날 이른 새벽에 소나무 잎을 문 앞이나 뜰에 뿌린다. 솔잎은 냄새가 나므로 벌레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해온다.


 

콩볶기

각 가정에서는 2월 1일에 콩을 볶는다. 솥에 불을 지피고 콩을 넣은 후 주걱으로 타지 않게 젓는다. 볶은 콩은 식구들이 나누어 먹는데 아이들은 좋아라고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며 먹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날을 기다린다. 콩을 볶을 때에 주걱으로 저으며, [새알 볶아라, 쥐알 볶아라, 콩 볶아라]하고 呪言(주언)을 한다. 그러면 새와 쥐가 없어져서 곡식을 축내는 일이 없다고 한다. 2월 1일에 콩볶는 것으로 가을 수확을 미리 예상하기도 하는데 그 방법은 콩과 약간의 보리를 섞어서 한 되를 솥에 볶는다. 다 볶은 다음 담아 한 되가 더 되면 풍년이 들어 추수가 많으며, 한 되가 못되면 흉년이 들게 된다고 전한다. 또 이날 콩을 볶아 먹으면 집안에 노래기가 없어지고 청결해서 좋다고 한다.


 

 

머슴날

농가에서는 2월 1일을 머슴날이라고 한다.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오랫동안 쉬던 머슴들에게 이제 2월이 되니 농사일을 준비하라고 주인이 술과 음식으로 머슴들을 위로한다. 그들로 하여금 하루를 즐겁게 쉬게 하며, 주인은 술과 음식을 한턱 내고, 머슴들은 농악을 울리며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긴다. 많은 노비를 거느린 大家(대가)에서는 떡도 하고 많은 음식을 했다. 그해에 20세가 된 젊은이는 이날 성인 머슴에게 술을 한턱 낸다. 20세 전에는 아이로 취급하여 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20세가 되어 성인에게 한턱을 낸 다음부터는 어른 취급을 받아 그들과 품앗이를 할 수 있게된다. 지방에 따라서는 나이가 많아도 2월 1일 머슴날에 한턱 내지 않으면 성인 취급을 받지 못하는 곳도 있다. 한턱을 내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신고와 마찬가지이다. 정월 보름날에 마당에 세워 놓은 禾 (화우)에서 벼이삭을 내려 떡을 한다. 크게는 손바닥만하게 작게는 계란만하게 만드는데 모두 반쪽의 둥근 옥 모양으로 한다. 콩을 불려서 소를 만들어 넣고 시루 안에 솔잎을 겹겹이 깔고 넣어서 찐다. 푹 익힌 다음에 꺼내서 물로 닦고 참기름을 바르는데 이를 송편이라고 한다. 송편을 노비에게 年齡數(연령수)대로 먹이고 위로한다.


 

 

 

 

좀생이 별 보기


 

음력 2월 6일


 

  2월 6일 저녁에 좀생이를 보는데, 이것이 달보다 앞서 가면 대풍이 들고, 평행으로 가면 평년작, 달보다 뒤떨어져 가면 흉년이 든다. 그리고 좀생이의 색깔이 붉으면 흉년, 투명하면 비가 많이 온다.  <경기>


 

 

  밤에 좀생이별을 보고 그 위치에 따라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충북>


 

 

  달과 좀생이가 나란히 가거나 조금 앞서 있으면 길조, 뒤에 멀리 떨어져 있으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충남>


 

 

  달을 밥 광주리로 보고 좀생이별을 아이들로 보아 달고 좀생이가 가깝거나 앞서 가면 배가 고파 따르는 것이니 그해는 흉년, 멀리 떨어져 가면 배가 불러 그러는 것이니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한다.  <경남>


 

 

  좀생이별이 달의 뒤로 돌아가면 풍년이 들고, 앞으로 나오면 흉년이 든다.  <전북>


 

 

  달과 좀생이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 길조로 풍년이 들고, 거리가 멀면 흉조로 흉년이 든다고 한다.  <강원, 영서>


 

 

  [송생이 본다]고 하며, 이는 좀생이가 달 앞에 갈 때, 옆으로 나란히 갈 때, 달 옆에 가까이 갈 때, 또는 북쪽으로 머리를 틀고 갈 때, 까불거리고 갈 때 등에 따라 농사의 길흉을 예측한다.  <전남>


 

 

  큰 별이 앞서고 조그만 좀생이별이 멀리 떨어지면 풍년이 든다. 만일 가깝게 가거나 부지런히 가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5일날 점치기도 한다.  <경기>


 

 

무신일


 

 

음력 2월 9일


 

   경북일원에서 이날을 신이 없는 날로 알고, 나무를 심거나 콩을 담그고 가재도구를 정비한다. 이날은 손이 없어 집수리도 하며 나무를 심으면 잘 자라고, 부지깽이를 심어도 산다고 한다.   <경북>


 

 

 

답청일


 

음력 2월 11일


 

  이날을 답청일이라 하는데, 밀양에서는 남강에 가서 천렵을 하고 쑥을 뜨어다가 잡은 고기를 넣어 쑥국을 끓여 먹는다.   <경남>


 

 

 

 

삼짇날


 

 

 

1. 삼짇날의 유래

   음력으로 3월3일을 삼짇날이라고 한다. 삼짇날은 3이 둘 겹쳤다 하여 중삼(重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월일(月日)이 홀수이면서 같은 숫자로 겹치는 날을 대개 명절로 정해 즐겨왔다. 선날인 1월1일, 3월3일, 5월5일 7월7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홀수는 양수(陽數)이고 그 양수가 겹치는 날은 양기(陽氣)가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짇날이 되면 강남에 갔던 제비도 옛집을 다시 찾아온다고 하며 나비도 나타난다. 제비는 음력 9월9일에 따뜻한 강남으로 갔다가 삼짇날에 다시 온다고 하느데 삼짇날이 되면 그만큼 날씨가 따뜻해진다는 의미다. 그리고 옛집을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속설(俗說)만은 아니다. 제비는 실제로 자기가 태어난 곳의 500m내외의 권내에 다시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니 자기가 태어난 집을 다시 찾게 되는 셈이다.


 

 

2. 삼짇날의 풍속

삼짇날 사람들은 꽃을 찾아 날아드는 여러 가지 나비들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하는데,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제일먼저 보게되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좋다고 생각하나 흰나비를 먼저 보게되면 나쁘고 특히 부모의 상(喪)을 당하게 되는 흉조(凶兆)라고 여겼다. 이러한 속신(俗信)은 나비보기 뿐만아니라, 경남지방에서는 3일에 바람점을 보는데 오전에 바람이 불면 초장(初場)에 삼 값이 비싸고 오후에 바람이 불면 파장에 값이 비싸다고 하였다. 또 이 날 바람이 불면 삼농사가 잘 되지 않고, 비가오면 콩과 팥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 외에도 이날 몇가지 속신에 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짇날 머리를 깍으면 머리결이 좋고 또 잘 자란다.

?봄에 처음 보이는 여릅(야생삼)을 보고 "야 삼 봐" 하고 먹으면 학질에 걸리지 않는다.

?할미꽃이 처음 필 때 세잎을 따서 먹으면 학질에 걸리지 않는다.

?서쩍새가 소짝소짝하고 울면 그해 농사가 흉년이들고, 소탱소탱하고 울면 풍년이 든다.

이 무렵이면 날씨도 따뜻해져서 나무는 꽃을 피우고 들녘에는 봄나물이 돋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산에는 이미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발해여 온통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고, 이꽃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기도 한다. 삼짇날에는 여자들이 머리를 감는 일이 많았는데, 그것은 이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소담스러워지고 윤기가 나며 부드러워진다고 믿어서이다. 또 가정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한 부녀자는 자식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데 그 비는 대상은 산신(産神),부처 등 여러이 되었다. 우리민족은 아들을 더 원하는 마음이 깊으며 조선시대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게 되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라 하여 중벌시하는 풍습도 있었다. 아들 얻기는 비는 그시기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수시로 하였으나 충북의 진천(鎭川) 지방에스는 삼짇날부터 초파일 사이에 부녀자가들이 무덩을 불러 용왕당이나 삼신당에 가서 굿을 하고 절(寺刹)에 가서 빌었는데, 그곳에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사방의 여인들이 모두와서 기도하므로 마치 시장이 선 것처럼 혼잡을 이루었다고 한다.


 

 

3. 삼짇날의 놀이

삼과들에 꽃이 피는 이 때쯤이면 유생(儒生)은 유생들끼리, 농부는 놀부들끼리, 부녀자는 부녀자들끼리 모여 들로 산으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서 음식을 먹어가며 시조를 지어 읊거나 춤과 노래로 하루를 즐기는 풍속이 있어 왔다. 이를 화류(花柳)놀이 꼬는 화전놀이라고 한다. 이 화류놀이는 남쪽지방으로 갈수록 유명했는데 특히 부녀자들은 봄을 맞아서 시집살이의 구속에서 벗어나 하루를 즐겁기 놀았던 것이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함빡 핀 진달래꽃을 꺽어서 머리에 꽂거나 꽃방망이를 만들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3월3일이 되면 정의원(旌義縣監)이 관속과 육방 하인들을 데리고 성읍(表善面 城邑里) 성북(城北) 영주산 서쪽에 있는 정수암이라는 곳에가서 큰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 잔치를 '정소암 화전놀이'라고 하였다. 이 때 노는 가운데 기생들은 '신목사 허리' '사랑가'등의 민요를 부르면 사령들은 칼춤을 추는데, 이칼춤은 비명에 죽은 죄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행교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풍월을 다투었으며, 이 때에 장원을 한 사람에게는 황봉(黃封)이라 해서 술로 상품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의 정의현 안에는 각 면에서 모여든 양반들도 참석하는데, 이 자리에서 어려운 일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날만 백성이 관리에 대해서 얼마쯤 불경한 태도를 보여도 관에서는 벌주지 않았다고 한다. 함남 영흥 지방에서는 삼짇날 동류수(東流水)에 몸을 씻으러 가는데, 이곳에서 몸을 씻으면 한 해의 재액(災厄)을 떨어 버린다고 한다. 시인과 묵객(墨客)들도 강변 정자에 모여 시를 읊고 화전놀이를 즐겼다. 이때 쯤에는 들에 여러 가지 풀들이 돋아나고 나뭇가지에는 물이 올라서 소년 소녀들은 이러한 풀과 나뭇가지로 여라 장난감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 소녀들은 담밑에 나는 각시풀을 한줌씩 따다가 추려서 한쪽 끝을 실로 묶어 머리채를 만들고 나무를 깍아서 그것을 묶어 머리채를 만들어서 각시놀이를 한다. 풀각시의 머리는 땋듯이 하든가 쪽을 지은 것처럼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예쁜 색 헝겊으로 치마와 저고리를 만들어 입힌다. 때로는 풀각시외에도 헝겉으로 이불이나 베개, 머리 별풍들을 만들어서 방안처럼 꾸며 가지고 놀기도 한다. 화창한 봄날에 뜰이나 양지바른 울타리 밑에 소녀들끼리 다정하게 모여 않아 서로의 겨루는 이 풀각시놀이는 어린 소녀들의 꿈을 길러주는 정서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소년들은 들과 냇가로 몰려 다니며 물이 잘 오른 버드나무를 꺾어서 손으로 껍질을 비튼후 껍질 속의 나무를 빼내면 껍질은 둥근 파이프처럼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피리처럼 만들 수 있다. 이것을 '호드기'라고 한다. 호드기는 그 굵기와 길이에 따라 여러 가지 소리가 난다. 물론 호드기 소리는 훌륭한 악기처럼 여러 음을 낼 수는 없지만 피리처럼 호드기 몸체에 구멍을 낼 수도 있어서 잘 불면 처량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소년들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들가 냇가에 호드기를 불고 돌아 다니면서 흥취를 돋운다. 소년들은 그것으로 족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소년 소녀의 풀놀이에는 여러 가지르 더 들 수 있다. 여러종류? 풀을 뜯어다가 누가 그 가지 수가 많은지 내기를 하기도 하고 또 질경이 풀을 뜯어다가 서로 얽어서 잡아 당기고 상대편의 것을 끊는 내기도 한다. 이런 놀이는 포플러 잎의 줄기로고 했고 골잎으로도 했다. 특히 '솔잎걸기'는 어린 시절 한번씩은 다 해보았을 만큼 성행했었다. 그것은 크고 굵은 솔잎을 따서 서로 두 가랑이를 걸어서 잡아당기는 놀이인데 먼저 끊어지는 쪽이 지는 것이다. 또 야산이나 들판에서 삘기(띠풀의 어린 새순)를 뽑는데 하나씩을 뽑아서 누가 더 긴 것을 뽑았나 겨루기도 한다. 이것을 삘기뽑기(지방에 따라서는 삐기 또는 삐빠라고도 부름) 라고 한다. 삘기뽑기는 긴 것을 뽑아 겨루기도 하지만 한 웅큼씩 뽑아서 누가 많이 뽑았나 겨루기도 한다. 삘기는 얇은 껍질을 벗겨내고 먹기도 하는데 부드럽고 달짝지근하다. 3월중에는 또 활쏘기 대회를 갖는다. 이 활쏘기는 대체로 장년층에서 많이하는데, 기품이 있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활쏘기를 스포츠로 즐기고 있지만 이전에는 궁숭을 무굴로서 익혔던 것이다. 궁술은 고대에서부터 중요한 무술으 하나였으며, 우리민족은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활을 잘 쏘았다. 지금도 서울과 지방에서는 사정(射亭)이 있고 일부 활쏘기를 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활쏘기가 전국적으로 크게 성행하여 활기를 지녔었다. 궁사들이 모여 활쏘기 대회를 열게 되면 남녀노소의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기생도 활을 쏘는 궁사들의 뒤에 열을 짓고 서서 소리를 하며 궁사들의 기운을 돋구어 주었다. 활쏘기 대회에는 여러 명의 궁사들이 앞으로 나와 한 줄로 서 차례로 활을 쏘는데 일정한 화살수(보통 다섯대)로 누가 과녁을 많이 명중 시켰는가로 승부를 낸다. 궁사가 과녁을 향해 활을 쏘면 과녁 쪽세서 깃발로 신호를 보내온다. 화살이 과녁에 못미치면 여러 차례 깃발을 아래로 내려 보이며, 화살이 과녁을 넘으면 깃발을 위로 들어 보인다. 그리고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면 깃발을 원으로 둥글게 돌린다. 그러면 북을 울리고 기생들은 지화자 노래를 부르며 손을 흔들어 춤을 추면서 한바탕 흥을 돋운다. 이 활쏘기가 조선시대에는 하나의 예절로서 봄철에는 3얼 3일, 가을철에는 9월 9일로 연 2회씩을 했는데, 노인들을 모신 가운데 고을의 규칙을 낭독하고 술을 마시면서 벌이는 하나의 잔치이기도 했다.


 

 

4. 삼짇날의 음식

화전(花煎)

꽃전 또는 두견화전이라고도 한다. 진달래 꽃잎을 따다가 씻어서 곱게 빤 찹쌀 가르에 버무려 한 입에 넣을 만큼 동글납작하게 빚어 참기름에 지진다. 또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동급납작하게 만든 다음 진달래꽃과 쑥잎을 얹어 번철에 지지기도 한다.

화면(花麵)과 수면(水麵)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五味子)국에 띄운 뒤,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것을 화면이라 한다. 또 수면은 진달래 꽃을 녹두가루에 반죽하여 국수를 만들어 이것을 꿀물이나 오미자국물에 띄운 것을 말한다.

탕평채(蕩平菜)

녹말가루로 묵을 쑤어 가늘게 채썰고 고기볶음, 미나리 김 등을 섞어 초에 무친 것이며 봄에 입맛을 돋구는 음식이다. 탕평채라는 음식명이 붙은 이유는 조선왕조 중엽 당파 당쟁이 심했을 때 여러 당파가 서로 잘 협력하자는 탕평채의 격론을 펴는 자리에 녹두묵에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이 나와서 붙여졌다고 한다.

진달래 화채

오미자 국물에 진달래꽃을 끊는 물에 잠깐 담갔다가 띄운 화채이다. 이훈종(李勳種 : 국문학자)은 수핑에서 "진달래 꽃잎에 녹말가루를 씌어 끊는 물에 담방 담갔다가 꺼내면 가루가 익어서 말간 꺼풀을 쓰고 그대로 있다. 그것을 분홍빛 오미자 물에 띄우면 꽃빛이 비치어 그릇 안이 온통 발갛게 보인다. 호로록 마시면 녹말꺼풀은 혀 끝에 매끄럽고 씹으면 쌉싸름한게 본래 진달래 맛을 낸다"라고 진달래 화채의 풍미를 읊고 있다. 봄내음이 가득하고 시적인 음식이다.

서여증식

마를 캐다가 쪄서 먹거나 꿀을 발라 조각내어 먹기도 했다.

여러 가지 술

3월에 빚는 술은 소국주(小麴酒) 두견주(杜鵑酒) 도화주(桃花酒) 송순주(松荀酒) 과하주(過夏酒)등이 있으며 서울 공덕, 옹막(지금의 마포구)의 삼해주(三亥酒)가 유명했다. 그 밖에 평안도에 감홍로(甘紅露)와 벽향주(碧香酒)가 있고 황해도에는 이강주(梨薑酒), 호남에는 죽력고(竹瀝膏) 계당주(桂當酒) 충청도에는 노산주(魯山酒)등이 가장 좋은 술이다.

여러 가지 국

황저합탕(黃苧蛤湯)은 노랗고 작은 조개인 황저합으로 끊인 국이다. 또 복사꽃이 떨어지기 전에 복어국을 끊여 먹고 복어를 먹지 않는 사람은 숭어로 대신 끊이기도 한다.


 

 

한식


 

 

1. 한식의 유래

  한식은 동지(冬至)후 105번째 되는 날을 말한다. 한식은 24절기의 하나인 동지를 기준으로 하여 정한 명절이기 때문에 양력으로는 매년 4월 5일이나 6일 무렵에 들게 된다. 그래서 4월 4일이나 5일에 드는 청명(淸明)날과도 같아지는 수도 있고 현재의 식목일과 같아지는 수도 있다. 한식의 풍습은 고대 중구에서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 보는데 그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晋)나라에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문공(文公)이 와이 되기 전에 공자(公子)로서 망명을 하여 외지에서 떠돌고 있을 때 19년 동안이나 갖은 고생을 다하며 문공을 극진히 모셨던 충신이다. 그런데 문공이 자기 나라인 진(晋)에 돌아와서 왕이 되었으나 개자추 에게 봉록(封祿)을 주지 않고 소홀히 대하자 개자추는 홀어머니와 함께 산중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숨어 살았다. 왕이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개자추를 찾았으나 그는 산중에서 나오지 않았다. 왕은 이에 한가지 꾀를 내어, 개자추가 숨어 있는 삼에 불을 지른다면 불 때문에 산을 빠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에 불을 지르고 개자추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으나 산의 나무가 완전히 타서 재가 될 때까지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불꺼진 산을 뒤지니 개자추는 홀어머니와 서로 껴안은 채 버드나무 밑에서 타 죽어 있었다. 왕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개자추가 죽은 이 날 불을 쓰기를 껴렸으니 자연히 밥도 짓지 못하고 미리 지어 놓은 식은 밥을 먹게 되어서 한식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말이 전한다.


 

 

2. 한식의 풍속

한식날에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과일과 떡 고기 술 등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한식차례(寒食茶禮)라고 한다. 또 이날 산소가 헐었을 때에는 흙을 다시 더하고 잔디도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改莎草)라고 한다. 또한 이날 무덤 둘레에 좋은 나무를 골라 심기도 한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리 조상을 깊이 숭배하여 집안에서는 기제사(忌祭祀)를 극진히 모시고 산소에도 열심히 성묘를 드리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성묘는 한식과 추석에 가장 성하다. 한식 때가 되면 농촌에서는 새해의 농사가 시작되어 매우 바쁘게 된다. 논. 밭갈이가 시작되고 벼모판 만들기, 보리밭 매기, 무 배추 고추등 채소씨를 뿌려서 새해 농경의 준비르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에 농가에서는 나무도 심는데, 한식날은 현재의 식목일과 겹치거나 하루차이여서 오늘날의 식목 행사에 해당되는 셈이다. 한편 이날 천둥이 치면 그해 농사가 흉년이 들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 닥친다고 해서 매우 꺼려한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천둥과 벼락을 하늘이 노해서 내리는 벌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농사가 시작되는 새해에 천둥이 치는 것을 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때에 비가 내리는 것은 나무를 심은 후이기 때문에 더없이 적합한 일이기도 하다. 이 한식날 제주도에서는 어민들이 문앞에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그해의 풍어(豊漁)를 비는 풍습이 있고 황해도 지방에서는 논의 샘물 나오는 곳이나 밭의 돌담에 밥을 해가지고 가서 '둑직이'에게 제(祭)를 지내기도 한다. 둑직이는 논이나 밭에 있는 큰 구렁이를 말한다. 구렁이는 일반 농가에서도 '업구렁이'라 하여 집안의 살림살이, 즉 재물을 늘려주는 동물로 여기기도 하는데, 이는 구렁이가 곡식을 저장해 두는 곡간에서 그 곡식을 축내는 쥐들을 잡아 먹어 결과적으로 곡식을 지켜주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논이나 밭에서 구렁이를 둑직이로 위해 주는 것은 집안의 구렁이를 업구렁이로 위해 주는 것과 같은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한식날은 조상의 산소를 가꾸고 성묘하는 것을 큰 일로 여기기 때문에 이날에 따르는 특별한 놀이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가족들이 함께 헤쳐진 조상의 무덤에 흙을 덮고 잔디를 씌우며 주위의 잡풀을 뽑은 등 묘역을 단정히 하고 또 좋은 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꾸미는 마음은 즐겹고 흐뭇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성묘를 마치고 가족 또는 집안 친척들이 함께 앉아 가지고 온 술이며 고기 과일 등을 먹으며 화목하게 보내는 것은 어떤 봄놀이에도 비할 것이 아니다. 한식 때가 되면 이미 산과 들에는 꽃이 피기 시작하고 풀이 돋아나 농촌에서는 특히 희망에 부푸는 때가 된다.


 

 

 

사월초파일


 

 

 4월 8일은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라고 전해지며, 욕불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흔히 초파일이라고 한다. 초파일에는 절을 찾아가 재를 올리고 연등하는 풍속이 있다. 초파일을 여러 날 앞두고 가정이나 절에서는 여러 가지 등을 만든다. 이 때 가정에서는 가족의 수대로 등을 만든다. 초파일 며칠 전부터 뜰에 등간(燈竿)을 세워 두고 간상(竿上)에 꿩 꼬리털을 꽂고 물들인 비단으로 기를 만들어 다는데, 이를 호기(呼旗)라고 한다. 이 호기에 줄을 매고 그 줄에 등을 매단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등간을 만들지 못하는 집에서는 나뭇가지나 혹은 추녀 끝에 빨래 줄처럼 줄을 매고 그 줄에 등을 매달아 두기도 한다. 그리고 초파일 저녁이 되면 등에 불을 밝힌다. 이 등석 행사는 그 이튿날인 9일에 그치는데, 부유한 집에서는 큰 대를 수십개씩 얽어매어 쓰기도 하고 해와 달의 형상으로 만들어 꽂아서 바람에 따라 굴러 돌게 하기도 하며, 굴러 돌아다니는 등[轉燈]을 매달아서 그 등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마치 탄환이 달아나듯 하게도 한다. 때로는 종이에다 화약을 싸서 이것을 노끈이나 또는 새끼줄에 얽어매어 불을 당기면 터져서 꽃불같이 비오듯 하게도 하고, 종이로 용을 만들어 바람에 날려 띄우기도 하며, 또는 인형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얽어 띄워서 요동케 하여 놀기도 한다. 또 옛날 각 상점에서는 등대를 서로 높이 세우려고 다투어 승부삼아 만들기도 한다. 등의 모양은 과실, 꽃, 어류 또는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을 본떠서 만들기 때문에 그 이름만 해도수박등?마늘등?참외등?연화등?목단등(牧丹燈)?잉어등(鯉魚燈)?거북등?봉등(鳳燈)?계등(鷄燈)?학등(鶴燈)?오리등?일월등(日月燈)?선인등(仙人燈)?칠성등(七星燈)?고등(鼓燈)?누각등(樓閣燈)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등에는 '태평만세(太平萬歲)' '수복(壽福)' 등의 글을 쓰기도 하고, 기마장군상(騎馬將軍像)이나 선인상(仙人像)을 그리기도 한다. 또 화약을 층층으로 새끼줄에 매달아 불을 붙이면 불꽃이 튀면서 퍼지는데, 이러한 놀이로 흥을 돋우기도 하고 때로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줄에 매달아 바람에 흔들리게 하여 놀기도 했다. 그런데 등을 달았을 때 불이 환하게 밝으면 길조로 해석한다. 이러한 풍속은 신라의 팔관회에서 시작되었으며, 고려 초에는 정월 보름과 2월 15일에 행하다가 지금은 4월 초파일로 고정되었다. 연등 행사는 불교의 습속이므로 원래는 불료 신도들에 의해서 행해지던 것이나, 지금은 일반화해서 민간에서도 성행되는 것은 그만큼 불교의 전파를 뜻하며, 신도가 아니라도 연등을 구경하는 사람으로 성황을 이룬다. 요즈음도 초파일에는 불도들의 대대적인 연등 행사가 도시의 거리를 누비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때에 정월 15일날 등을 달아매는 일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顯宗(현종)(A.D 1010)때에는 2월 15일에 燃燈會(연등회)를 거행하고 그후로 관례가 되었다가 高宗(고종)(A.D 1214)떼부터 초파일에 연등했다. 이씨 조선 왕조에 들어와는 고려시대처럼 공의로 정해서 연등하는 일은 없고, 민간에서 세시풍속으로 전해 왔다. 초파일을 명절로 여기고 연등을 하여 다채로운 행사가 거행 되기에 이르렀으며 태종 12년의 상원 연등때에는 용봉호표의 모양으로 등을 만들어 장식한 일이 있다. 성종 6년(A.D. 1475)초파일의 연등시에는 집집마다 수없이 등을 달았는데 새, 짐승, 물고기, 용등의 온갖 모양의 등들이 사치스럽고 절묘했다고 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초파일에 세우는 연간은 여자의 수대로 하고 남보다 크고 높기를 바라는데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등간 위에는 꿩의 깃을 꽂아 길상을 표시하고 울긋불긋한 천을 매달았다. 바람이 불때 휘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연의 종류는 매우 많아서 마늘, 연꽃, 수박같은 채과의 모양을 딴 것과, 학, 잉어, 자라, 거북과 같은 동물 모양의 등도 있었고, 병, 항아리, 북같은 기물의 모양을 한 등도 있었고 칠성연, 수연도 있었다.

塔(탑)돌이

4월 초파일인 佛誕日(불탄일)과 중추가절인 한가쉿날에는 塔(탑)돌이가 있었다.불탑의 건립은 석가모니가 入寂(입적)한 뒤, 그 유골을 넣어두기 위해 여덟 개의 탑을 세운데서 비롯한 것이므로 탑은 곧 불료의 상징인 셈이다. 佛寺(불사)에서 大齎(대재)가 있으면 신도들은 공양을 올린다. 이때에 염불. 梵音(범음) 梵唄(범패)가 따르며, 재가 끝나면 신도는 승려와 함께 불탑을 돌면서 부처님의 공덕을 빌고, 또 저마다의 기원을 비는 것이다. 일신의 왕생극락은 물론 국태민안을 빌어 태평성대를 누리고자 했다. 큰 재일수록 많은 신도들이 모이며 따라서 탑돌이도 성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윽한 法音(범음)에 맞춰 제각기 소원을 외면서 탑을 도는 모습은 엄숙했었다. 탑돌이 때 처음에는 梵鐘(범종) 鼓(고) 雲板(운판) 木魚(목어)의 四法樂器(사법악기)만 쓰이다가 후에 三弦六角(삼현육각)이 합쳐지고, 報念(보염)과 百八精進歌(백팔정진가)를 부른 것을 보면 처음에는 순수한 불교의식이던 것이 차츰 민속화해서 민중 속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60면 전까지만 해도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에서 탑돌이가 성대하게 거행 되곤 했으나, 이제 탑돌이 민속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는 듯하다. 근래에 탑돌이를 재현하는 경향이 있어 法主寺(법주사) 月精寺(월정사) 佛國寺(불국사)등에서는 탑돌이를 한 바 있다.


 

사월의 시식

 이 계절의 미각을 신선하게 해주는 시식(時食)으로는 花煎(화전) 魚菜(어채) 미나리강회 파강회 蒸餠(증병)등이 있다. 화전은 찹쌀가루에 장미꽃 잎을 섞어 반죽하고, 원형이나 반원형으로 만들어 기름에 튀긴 것인데, 기름에 튀기기 때문에 油煎(유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채는 생선을 익히지 않고 날 것으로 썰어 여기에 파.송이버섯. 전복. 달걀등을 넣어 부친 지단에 국화잎 등을 가늘게 썰어 버무린 후, 기름과 초를 쳐서 시원하게 먹는 것이다. 파강회는 파를 데친 뒤 날고기를 속에 넣고 감아서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며, 미나리강회는 미나리를 데쳐서 속에 날고기를 넣고 파강회처럼 만들어 먹는다. 이때에 쇠고기인 경우에는 날고기를 쓰지만 돼지고기일 경우에는 삶아서 사용한다. 이 시식들은 家度(가도)와 솜씨에 따라 양념을 달리하기 때문에 맛이 각각이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떡을 파는 집에서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한 조각씩 떼어서 술을 넣고 부풀어 오르게 해서 마치 방울처럼 만든다. 그리고 삶은 콩으로 소를 만들어 꿀을 섞어서 방울떡의 속에 넣는다. 그 위에 씨를 뺀 대추의 살을 썰어 발라서 찐 것을 蒸餠(증병)이라고 한다. 청빛을 낼 때에는 當歸(당귀)의 잎을 가루로 만들어 섞어서 만든다. 또 생선을 두텁게 썰어 쇠고기를 싸서 魚(어)만두를 만든다. 열양세시기에 의하면 葦魚(위어)는 모양이 좁고 길고 머리가 갈대잎 같으므로 葦魚(위어)라 부른다. 기름지고 고기가 연해서 보통 고기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4월 초에 湖水(호수)를 따라 바다로 통하는 강구에 종종 있으며 王都(왕도)가 아닌 곳에서는 볼 수가 없다. 扶餘(부여)나 開城(개성)에서도 때로 잡히나 변변치 못하고, 오직 漢陽(한양)의 杏州(행주)에 많다. 해마다 입하 무렵이 되면 왕으 식사를 맡는 사옹원에서는 관원을 보내어 잡아다 진상했다.


 

 

 

단오


 

 

   5월 5일은 단오, 수리, 천중절, 중오절, 단양, 수릿날 등의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옛날엔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날이었으나 지금은 농촌의 명절로 되어 이날이면 각 가정에서는 수리치떡 등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단오 차례를 지내기도 하고, 여자는 창포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남자는 씨름등의 놀이로 하루를 즐긴다. 옛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등 월일이 홀수이면서 같은 숫자가 겹치는 날을 대개 명절로 정해 즐겨 왔지만, 그 중에서도 5월 5일은 양기가 가장 강한 날이라 하여 큰 명절로 생각해 왔다. 이날을 수리 또는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이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게 된 유래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이날 쑥떠ㅗ?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라고도 하고, 수리치로 떡을 해먹었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기도 하며, [수리]란 고.상.신 등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어인데, 5월 5일이 [신의 날], [최고의 날]이란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유두절


 

 

   6월 15일을 유두날이라고 한다. 유두란 말은 [동류두목욕]이란 말의 약언이다. 유두날에는 맑은 개울을 찾아가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으며 하루를 정유한다. 그러면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유두의 풍속은 신라 때에도 있었으며, 동류에 가서 머리를 감는것은 동방은 청이라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두날 선비들이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계곡이나 수정을 찾아가서 풍월을 읊으며 하루를 즐기는 것을 유두연이라고 한다. 유두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므로 수박.참외 등을 따고 국수와 떡을 만들어 사당에 올려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유두천신]이라고 한다. 추원보본사상이 강했던 옛날에는 새 과일이 나도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조상에게 올린 다음에 먹었는데, 이것은 조상의 은혜를 잊지 않고 지극한 효성을 드린다는 성실한 마음씨의 표현이다. 유두날의 음식으로는 유두면.수단.건단.연병 등이 있다. 유두 국수를 먹으면 장수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먹는다. 옛날에 유두날이면 잡귀의 출입을 막고 액을 쫓는다고 하여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슬처럼 만들고 색으로 물들여 세 갰기 포갠 후, 색실로 꿰어서 허리에 차거나 대문 위에 걸어두는 민속도 있었다. 수단은 찹쌀가루를 쪄서 손으로 비벼 구슬처럼 만든 후, 찬물에 넣어 꿀물을 타서 먹는 것이며, 찬물에 넣지 않고 먹는 것은 건단이다. 때로는 맵쌀이나 밀가루로 만들기도 하나 찹쌀로 만든 것이 부드럽고 연하며 매끄럽고 맛도 있다. 연병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판 위에 놓고 방망이로 문질러서 납작하게 만든 다음, 기름에 튀기거나 깨와 콩을 묻혀 꿀을 발라서 만든다. 유두날 아침에 천둥이 치면 그것을 가리켜 [유두 할아뱅이가 운다]고 한다. 유두날 떡을 해 가지고 논에 가서 물꼬 밑과 논둑 밑에 한 덩이씩 놓아 두는데, 물이 새지 말고 농사가 잘 되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때로는 떡을 해다가 논이나 논두렁에 뿌리는 수도 있는데 풍년 들라는 뜻에서 하는 것이다. 유두날 팥죽을 쑤어 먹으면 풍작이 된다고도 전한다. 성종 원년(A.D. 1470)여름에 명나라의 사신이 들어왔다. 마침 6월 유두일에 맞이하게 되었는데, 승정원에서는 상계하기를 [6월 15일은 옛부터 내려오는 유두의 명절이요 세조 때에도 명의 사신이 본국에 있을 때 만일 명절날을 맞이하면 그들을 불러 한강에서 위로연을 열거나, 태평관에서 위로연을 열었습니다. 이번에도 명의 사신이 서울에 있으니 청해다가 위로연을 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이 말에 연회를 열라고 명한바 있다.


 

 

 

삼복더위


 

 

 

   하지부터 세째 경일을 초복, 네째 경일을 중복, 입추부터 첫째 경일을 말복이라 하며 이들을 통틀어 삼복이라 한다. 이때 더위를 삼복 더위라 하며, 1년 중 더위가 가장 심한 때이다. 복중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술과 음식을 마련해 가지고 계곡이나 산정을 찾아가서 더위를 잊고 하루를 청유한다. 옛날에는 더위에 대처하라는 뜻에서 복중에 궁중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를 주어 궁의 장빙고에가서 얼음을 타가게 하였다. 복중에 더위를 막고 보신을 위해 먹는 음식으로는 계삼탕과 구탕이 있다. 햇병아리를 잡아 인삼과 대추와 찹쌀을 넣고 고은 것이 계삼탕인데, 땀을 많이 흘리면 원기가 없어지므로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가정에서나 음식점에서 많이 한다. 구탕은 특히 복날에 먹어야 보신이 되고 벽사도 하며 질병도 쫓고 더위를 잊게 된다고 해서 먹는다. 구탕은 식성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으나 대개 복날이면 먹는다. 그래서 일명 보신탕이라고 까지 부르고 있다. 구탕은 개를 잡아 통째로 고아 만드는데, 이때 파를 넣어서 고면 냄새가 없으며, 보리밥을 말아 먹기도 한다. 복날에 팥죽을 먹는 곳도 있다. 사람들은 팥죽이 사악한 악귀를 물리치는 음식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무더운 복중에 악귀를 쫓고 무병하려는 데서나온 풍습이다. 이때 팥죽에는 찹쌀로 구슬처럼 새알 수제비를 만들어 넣는다.


 

 

 

칠월칠석


 

 

  7월 7일을 칠석이라고 한다. 이날 저녁에 처녀들은 직녀성에다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었으며, 글 공부하는 소년들은 두 별을 제목으로 하여 작시를 했다. 이렇게 소년 소녀들이 칠석날 밤 견우성과 직녀성을 숭앙하며 경건히 지낸 것은 다음과 같은 애틋한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견우와 직녀는 은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은하에 다리가 없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어 사랑의 회포를 풀 길이 없었다. 견우와 직녀의 이 딱한 사정을 알고 해마다 칠석날이 되면 지상에 있는 까치와 까마귀가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에다 오작교란 다리를 놓아 준다. 그러면 견우와 직녀는 다리를 건너와 1년에 한 번 만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의 회포를 다 풀기도 전에 새벽 닭이 울고 동쪽 하늘이 밝으니 다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견우와 직녀는 또 다시 1년 동안 베를 짜고 밭을 강면서 고독하게 보내야 한다. 칠석날 세상에는 까마귀와 까치가 하나도 없으며, 어쩌다 있는 것은 병들어 하늘에 가서 오작교를 놓는데 참여하지 못하는 새들 뿐이라고 한다.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 기쁨의 눈물이라고 하며, 이튿날 새벽에 비가 오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전한다. 또 7월엔 옷과 책을 볕에 말리는 풍습이 있다. 여름 장마철 내내 장롱에 넣어 둔 의류는 습기가 차서 좀이 쏠거나 썩기 쉬우므로 햇볕에 말리는 것이다. 7월 7일쯤 되면 장마철도 지나는데, 그때 말려두면 옷과 책이 별탈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으므로 이때에 말리는 것이다. 칠석날 새벽에 부녀자들은 참외, 오이 등의 초과류를 상에 놓고 절을 하며 여공이 늘기를 빈다. 잠시 후에 상을 보아 음식상 위에 거미줄이 쳐 있으면 하늘에 있는 선녀가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여공이 늘 것이라고 기뻐한다.


 

 

 

백중


 

 

  7월 15일은 「백종일」.「백중절」또는 「망혼일」.「중원」이라고 한다. 이날 승려들은 사원에서 재를 올려 부처에게 공양을 한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우란분재를 벌여 속인들도 공양을 했으나, 이조 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승려들말의 행사가 되었다. 백종일에 사람들은 조상의 사당에 천신을 드리며,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긴다. 농촌에선 백종일을 전후해서 시장이 섰는데, 이를 「백중장」이라고 했다. 즉, 이는 백종 시장이라느 뜻이며, 머슴을 둔 가정에서는 이날 하루를 쉬게하여 물건을 사거나 취흥에 젖게 한다. 그래서 백종일을 전후해서 여러 곳에 씨름판이 벌어지거나 흥행단이 모여들기도 한다. 망혼일이라고 하는 것은 백종일 밤에 술과 고기.밥.떡.과실 등 많은 것을 차려놓고 망친의 혼을 불러들여 제를 지내는 까닭이다. 백종이란 말은 이 무렵에 과실과 소채가 많이 나기 때문에 제물을 백가지를 차린다 해서 나온 것이다. 또한, 이날은 그 해에 농사를 잘 지은 집의 머슴을 소에 태우거나 가마에 태운 후, 위로하고 흥겹게 놀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백종일에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 산소에 벌초를 하고 성묘도 한다. 백종일은 일손을 쉬고 노는 날이지만, 제주도에서는 바다일을 더 많이 한다. 즉, 백종날 살찐 해물들이 많이 잡힌다고 해서 모두 바다로 나간다. 밤에는 횃불을 들고 늦도록 해산물을 따는 것이다. 승가에서는 백가지의 꽃과 음식을 차려놓고 우란분재를 개최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공야이다. 서울의 여승들이 있는 절에서는 부녀자들이 찾아와 죽은 부모의 영을 부르면서 제사를 지낸다. 때로는 승려들이 거리에 탁자를 놓고 음식을 차려 우란분재를 열기도 한다. 이때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구경하게 되므로, 성종 때에 금지시켰던 일도 있다. 죽은 사람의 망령을 위로하는 것의 유래는 아래와 같다. 부처님의 제자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죽어 극락으로 가지 못하고 악귀가 되어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부처님이 우란분재를 열어 백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어머니께 공양하라고 말하였다. 이런 일로 인연해서 백중날에 부모를 위하여 공양을 하게 되었다. 명종 때에 쌀밥을 지어 가지고 강가에 가서 고기에 주고 방생을 한 일이 있으며, 천한 사람들끼리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추석


 

 

1. 추석의 의의

   한가위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었던 만월의 명절이다. 달의 고마움에 감사하고 달을 위했으며 떡을 해도 달떡을 했다. 달을 의식하는데 있어 중국에서는 만월을 상징하는 월형의 월병을 만들었으나 우리는 송편이라 해서 반월형의 떡을 했다. 얼을 숭상하여 달에게 소원을 비는 민간신앙을 가지면서 반월을 채택한 것은 반월이 일일성하므로 발전의 상징으로 본데서 온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으이 도성명에 반월성이 많은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둘째는 만월야를 계기로 사람이 신에게 대한 제의가 있었다. 올게심니를 해서 풍년에 감사하고 또 명년의 풍작을 기대했으며 밭고랑을 기는 행위도 소박한 기풍행위의 하나이다. 농경민족의 최대소원은 풍작을 이루는 일이기에 한가위를 기해서 신에게 청하고 감사했다.

세째는 오락을 풍성하게 했다. 풍작의 소원을 이루었고 포식하고 나니 할일은 놀이를 즐기는 일이다. 농부들에 의해서 소놀이, 거북놀이, 농악, 씨름이 행해지고 부녀자들에 의해, 강강술래,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 가마싸움등의 놀이가 흥겹게 있었다. 이러한 놀이는 만월과 풍작을 즐기는 축제이기도 했다.

네째, 한가위는 혈연간의 화목을 확인하고 추원보본의 실천의 계기가 되었다. 분산되어 사는 혈연들이 집결해서 협동하고 화목하며 같은 조상의 제의에 참여하는 기쁨이 있었다. 효란 인간원래의 일이지만 명절을 맞이해서 천신하고 명전에 경건하게 절하므로 은혜를 생각하고 보답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귀성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유교가 들어와 생활화됨에 따라 강조된 것이라 믿어진다. 한가위를 명절로 여기는 민속은 외래적인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에 있어 달고 관련있는 것으로 전승되어 왔으며 농경시대에 들어와서 기풍예측 풍작에 감사하는 의식이 첨가되고 유교시대에 들어 추원보본하는 조상숭배 의식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추속 풍속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의미를 갖는다. 산업사회가 가족의 분산을 초래하였으나 추석은 분산된 혈연이 집합하는 계기가 되고 따라서 혈연간의 협동과 화목을 다지는 핵의 구실을 하고 있다. 물질만능의 박정한 현대인들도 한가위가 되면 정이 솟아 친족에게의 선물과 조상에의 차례용의 제수감을 사들고 고향을 찾고 있다. 여기에 우리 생활의 일명이 있어 좋다.


 

2. 추석의 풍속

벌초

8월에 들어 한가위날이 밝아오면 낫을 갈아 가지고 조상의 묘에 간다. 여름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주기 위해서인데 벌초라고 한다. 옛날 조상의 묘를 풍수설에 의하여 명당에 쓰기 위해서 몇 십리 밖의 먼 곳에 까지 가서 쓰는 수가 많았고, 또 묘를 쓴 다음 먼 곳으로 이사가는 수도 있기 때문에 묘가 집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먼 길일지라도 벌초하는 것은 자손의 효성의 표시와 도리로 여겼다. 한가위 때에 성묘를 와서 별초도 안했으면 보기에 흉할 뿐 아니라 불효의 자손을 두었거나 임자 없는 묘라 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가위에 앞서 벌초를 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차례

가위날 이른 아침에 사당을 모시고 있는 종가(宗家)에 모여 고조(高祖)까지의 차례를 지낸다. 차례 지내는 절차가 설날과 다른 것은 흰떡국 대신 메[밥]를 쓰는 점이다. 조상에 대한 추원 보본(追遠報本)과 천신제(薦新祭)를 겸하였기 때문에 제물은 신곡으로 만들어 진열된다. 고조 이상의 윗대는 10월에 시제라 해서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원놀이?가마싸움

옛날 서당 교육은 훈장을 초빙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명절이 되면 훈장도 고향에 가서 차례 성묘를 하게 되므로 서당은 며칠을 쉬게 되고 학동들은 자유롭게 놀 수가 있었 다. 이럴 때에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와 가마싸움이 있게 된다. 원놀이란 학동들 중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재치 있는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 은 백성이 되어 원님께 소장을 내어 그 판결을 받는 놀이인데, 오늘날의 대학에서 행해지는 모의 재판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이 때에 현명하고 지혜로운 원님은 사건을 잘 해결하지만 서투른 원 님은 백성들의 놀림감이 된다. 장차 과거에 등과해서 벼슬을 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할 학동들의 놀이로서는 매우 적격이었다. 가마싸움도 학동들이 주가 되어 행하여졌다. 훈장이 없는 틈을 타서 가마를 만들어 이웃 마을 학동들과 또는 이웃 서당의 학동들끼리 대결을 하는 놀이이다. 가마를 끌고 넓은 마당에 나아가 달음질해서 가마끼리 부딪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되는데 이긴 편에서 당년에 등과가 나온다고 한 다.

반보기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일자와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 을 반보기라 한다. 옛날에 시집간 여자들은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녀 사이에 중간 지점을 정해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 한나절 동안 그 동안 나누지 못했 던 회포를 푸는 것이 반보기인 것이다. 또 한 마을의 여인들이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경치 좋은 곳에 집단으로 모여 우정을 두터이 하며 하루를 즐기는 수도 있다. 이 때에 각 마을의 소녀들도 단장하고 참여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며느릿감을 선정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반보기란 중로 (中路)에서 상봉했으므로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올게심니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가 묶어 기둥 이나 대문 위에 걸어 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고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주찬(酒饌)을 차려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푸는 수도 있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 당에 천신하거나 터주에 올렸다가 먹는다. 올게심니를 하는 것은 다음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 는 기원의 뜻이다.

밭고랑 기기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연령 수대로 밭고랑을 긴다. 이 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그 아 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는 것이다.


 

 

 

중양절


 

 

  9월 9일을 중구(重九) 또는 중양(重陽)이라고 부른다. 중구란 말은 9가 겹쳤다는 뜻이며, 중양이란 양수(陽數)가 겹쳤다는 것이다. 기수(奇數)는 양수(陽數)이기 때문이다. 각 가정에서는 국화 꽃잎을 찹쌀가루와 반죽하여 단자를 만들어 먹는데 이를 국화전이라 한다. 봄의 진달래 화전과 함께 9월의 시식으로서 빼놓을 숭 없는 이 국화전은 가을의 미각을 새롭게 한다. 또 술에 국화를 넣어서 국화주를 빚기도 하는데 그 향기가 일품이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단풍이 든 산이나 계곡을 찾아가서 장만해 온 술과 음식을 들면서 단풍놀이를 한다. 이때는 부녀?소년?소녀?농부들이 제각기 떼를 지어서 하루를 즐기는데, 문인들은 시를 짓고 풍월을 읊어 주흥을 내기도 하낟. 요즈음도 이때가 되면 각급 학교에서 가을 소풍을 가는데 이것은 오랜 전승(傳承)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울에서는 남산(南山)과 북악(北岳)에서 마시고 먹고 하루를 즐긴다. 등고(登高)하는 옛 풍속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 근교의 남한산(南漢山), 북한산(北漢山) 수락산(水落山) 도봉산(道峰山)등의 단풍도 볼만했다. 즉, 문(門)안 사람들이 4대문 밖의 높은 산에 올라가 청유(淸遊)를 즐겼다.


 

 

말날


 

 10월의 오일(午日)을 「말날」이라 하여 특별히 말을 위하는 풍속이 있다. 이날이면 팥떡을 해서 마굿간 앞에 차려놓고 말의 무병과 건강을 비는 고사를 지냈다. 우리 민족은 가축 중에서 말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위했기 때문에 때로는 말을 위한 고사까지 지낸 것이다. 말은 옛날에 가장 좋은 장거리 교통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노동력을 농사일에 이용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가축에 비해 영리해서 주인을 따랐으므로 말을 수중히 여기고 제사까지 지낸 당시의 풍속을 이해할 만하다. 조선 시대의《시용향약보(試用鄕藥譜)》에는 마제(馬祭)때 부르던 노래인 「군마대왕(軍馬大王)」이 전해지고 있다. 10월응 말말 중에서도 무오일(戊午日)을 상마일(上馬日)로 쳤는데 그것은 무(戊)와 무(茂)가 음이 같아 무성(茂盛)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였으리라 믿어진다. 또 말날 중에서도 병오일(丙午日)일 때에는 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역시 병(丙)과 병(病)의 음이 같아 말의 병을 꺼려한 데서 생겨난 것이라 믿어진다. 어떤 지방에서는 말날에 시루떡을 해서 외양간과 모든 방에 차려놓고 주인의 생기복덕을 비는 굿을 하거나 안택(安宅)을 하기도 한다. 또 햇곡식으로 떡을 하고 음식을 마련해서 굿을 하기도 하며, 전라북도 지방에서는 이날 상주 단지에 신곡(新穀)을 강아 넣는다. 오일(午日)에 떡을 해서 상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족(家族)이 모여 함께 먹는데 말일병(馬日餠)이라고 한다.


 

 

하원


 

10월 보름을 하원이라 하며 일년 중 달이 밝은 때이다. 하원의 달이 서산에 완전히 지고 날이 새면 그해의 시절이 길하고 그렇지 않으면 흉하다고 한다.  <전남>


 

 

손돌풍


 

 

  10월 20일에 관례적으로 불어오는 심한 바람을 [손돌풍] 또는 [손석풍]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사공 손돌이가 임금이 탄 배를 저어 통진.강화 사이를 가게 되었는데, 풍랑에 밀려 매우 곤란한 지경에 이르자 임금은 다른뜻이 있다 하여 손돌이의 목을 베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이곳을 [손돌목]이라 부르며, 이 날이면 해마다 으레 강풍이 심하게 부는데,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한이 바람이 되어 분다고 해서 손돌풍이라 불렀다. 강화도 사람은 손돌풍이 불 때에는 배를 타지 않는다. 손돌목은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곳으로 바다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어서 지금도 배가 지나려면 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다.


 

 

 

납향일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미일(未日)인 납일에 그해에 지은 농사 형편과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신에게 고하는 제사를 납향이라고 한다. 납일 밤에 농촌에서는 새잡기를 하는데, 서너 명의 청소년이 패가 되어 그물을 가지고 어두운 밤에 새가 사는 지붕 추녀를 찾아다니며 새를 잡는다. 그물을 새 구멍있는 추녀에 대고 막대기로 추녀를 호되게 치면 새가 놀라 나오다가 그물에 걸린다. 또 새가 많이 자는 숲에 가서도 이렇게 해서 잡는다. 납일으 새고기는 맛이 있을 뿐 아니라, 아이가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납일에 새를 잡으려고 애를 쓴다. 이날 내린 눈은 약이 된다고 해서 곱게 받아 독에 담아 두기도 한다. 눈 녹은 물을 두었다가 김장독에 넣으면 맛이 변하지 않으며, 의류와 책에 바르면 좀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대로 두웠다가 환약을 달일 때 쓰기도 하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안질에도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납일에 궁중의 의약국인 내의원에서 환약을 만들어 헌납했으며, 나라에서는 각신(閣臣)에게 나누어 주었다. 엿을 고기도 하는데, 설탕이 없던 옛날에는 당분을 엿에서 얻었으니 엿을 만드는 일도 매우 중요 했다. 밥에 엿기름 물을 부어 삭힌 다음, 곁불로 밥이 물같이 되도록 끓이고 껏을 자루에 넣고 짜낸 다음 다시 끓여서 식으면 굳어져 엿이 된다. 엿을 고기 시작하면 이?날 새벽에 엿이 된다 내의원(內醫院)에서 이날 만든 약은 납약(臘藥)이라고 부른다. 청심환(淸心丸)은 정신적 장애를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고, 안신환(安神丸)은 열을 다스리며, 소합환(蘇合丸)은 곽란을 다스리는데 효과가 있다. 정조(正祖)는 새로 제중단(濟衆丹) 과 광제환(廣濟丸)이라는 환약을 만들게 하였으며, 모든 영문(營門)에 나누어 주어 군사들을 치료하는데 쓰도록 했다. 기노소(耆老所)에서도 납약(臘藥)을 만들어 여러 기신(耆臣)에게 나누어 주고, 각 관아에서도 만들어 나누어 주고 서로 선사하기도 하였다. 납향(臘享)에 쓰는 고기에는 산돼지와 산토끼가 있다. 기내(畿內) 산간(山間)의 부(部)에서는 옛날부터 대궐에서 납향(臘享)에 쓸 산돼지를 잡았다. 그런데, 점차 폐단이 생기자 정조(正祖)는 장안(長安)의를 포수(砲手)를 시켜 용문산(龍門山)과 축문산(祝門山)에서 사냥을 해서 진상토록 한 일도 있다.


 

 

 

섣달그믐


 

1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0일을 「섣달 그믐」 또는 「제석」,「제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중에 있었던 거래의 종결을 맺는데, 빚이 있는 사람은 해를 넘기지 않고 이날 모두 청산한다. 그래서 만에게 받을 빚이 있거나 물건값의 외상이 있는 사람은 이날 찾아다니며 받아야 하며, 만일 자정이 넘도록 받지 못한 빚은 하는 수 없이 정월 보름까지 독촉도 못하고 따라서 받을 수 없게 된다.

세시풍속의 현상


 

설날


 

1. 설의 유래


 

   설은 한 해의 첫날 전후에 치루는 의례와 놀이 등을 통털어 가리키는 말로서, 첫날을 설날, 그 하루 전날을 까치설날이라고 부르고 있다. 설이라는 말의 유래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5가지 설명이 통용되고 있다.

첫째, 삼간다는 뜻으로서, 새 해의 첫날에 일년동안 아무 탈없이 지내게 해 달라는 바람에서 생겼을 것이다. 둘째, '섧다'의 뜻에서 유래된 말로서,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 하는 뜻에서 생겼을 것이다. 셋째, '설다, 낯설다'라는 뜻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시간주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그리고 완전하지 않다는 뜻에서 생겼다. 넷째, 한 해를 새로 세운다는 뜻의 '서다'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설이란 말은 17세기의 문헌에 '나이,해'를 뜻하는 말로 쓰여진 반면에, 요즈음과 같이 나이라는 말이나 나이를 뜻하는 '살'이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를 하나 더먹는 날'의 의미를 가진 '설날'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살'로 바뀌므로써, '설'과 구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하루 전날인 섣달 그믐날을 왜 까치설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설날을 맞고 보낸다는 뜻을 말할 때, 다름 명절을 지내는 것과 같이 특별히 '쇠다,쇤다'고 말하고 있다. 이 '쇠다'는 뜻은 '오래되다,늙었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 설에 대한 해석 가운데에서 두 번째의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설을 쇠다'는 뜻은 '한 살을 더 먹어 늙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날은 1년의 첫날이라는 점에서, '한 해'라는 시간단위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와 함께 하루와 보름, 그리고 달과 계절 등과 같은 시간 단위는 사회생활과 일상생활, 제도와 농사 등고 밀접한 연관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단위와 절일 등을 정하는 역법은 바로 국가의 중요한 기밀사항의 하나였다. 따라서 어느 날을 설날로 잡는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로서, 현재의 설날은 달과 태양의 주기를 합쳐서 계산한 태음태양력에 의한 것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음력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보름을 주기로 한 달의 주기를 통해서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태음력과 함께 계절을 확인하여 농사를 짓는 기준으로 삼도록 태양주기를 15일 간격으로 24절기로 나눈 것을 결합한 것이다. 이 음력은 통일 신라시대에 중국 당나라에서 들여 온 것으로 보이며, 이후로 대한제국 말기에 양력이 등장하여 신정이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가지 약 1200여년간 설날은 이 음력을 기준으로 삼아 왔다. 따라서 한자로는 설날을 원일(元日) 원조(元朝) 원단(元旦) 삼원(三元) 삼시(三始) 세수(歲首)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시(年始) 정조(正朝) 춘절(春節) 원진(元辰)단일(旦日) 등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원단이나 삼원 등고 같은 말들이나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과 같이 양수가 겹친 날들을 중요한 명절일로 삼고 있는 종교가 도교인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날은 또한 도교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던 날로 보이며, 그 흔적을 많이 발견할수 있다.

설은 일제시대에 양력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강제적으로 쇠지 못하게 하였으나, 오랜 전통에 의해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제도적으로 양력설에 3일씩이나 공휴일로 삼았으나, 오히려 2중과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1985년에 '민속의 날'로 정하여 비로소 공휴일이 되고, 또 사회적으로 귀향인파가 늘어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설날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설날의 풍속

설날 풍속은 당대의 지배이념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았던 궁궐과 관리를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의 풍속과 피지배계층이었던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들의 풍속으로 나누어 지며, 그것도 설날의 전과 후에 걸쳐서 며칠간에 걸쳐이어진다. 새로운 지배이념이 등자아했을 때, 과거의 지배이념에 의해서 이루어진 풍속은 그 잔존물로서 일부계층이나 지역에 민속에 남겨진다. 따라서 불교가 지배이념으로 채택된 때에는 무속의 풍속이, 유교가 지배이념이 된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풍속이 일부 지역과 계층의 민속으로 남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조선시대의 유교 풍속이 민속의 일부로 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설빔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 놓은 새옷을 입는데 이 새옷을 「설빔」이라고 한다. 설빔을 위해서 각 가정에서는 가을부터 옷감을 마련하였다가 주부는 미리 정성껏 만들어 둔다. 설빔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없이 살림 정도에 따라서 마련하거니와 어린 아이는 설빔에 대한 기대 크고 서로 자랑도 하기 마련이다. 옛날 같으면 어른은 두루마기 또는 도포를 비롯하여 버선.대님까지 새로 한 벌을 하며, 바지.저고리에는 새 솜을 두어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모르게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한 벌을 마련하여 색동옷으로 곱게 단장한다. 여러 가지 색깔의 옷을 입으므로 마치 꽃밭처럼 아름답다. 설빔으로 갈아 입은 뒤에야 차례를 지낸다


 

성묘(省墓)


 

 설날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성묘를 한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 했다는 인사를 조상의 묘에 고하는 것이다. 생존한 어른에게는 세배를 하지만 이비 사별한 조상에게도 생존시처럼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수많은 자손들이 나이 많은 어른을 앞에 모시고 조상의 효열담(孝烈談)을 들어 가면서 줄을 지어 눈길 속에 성묘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정경이다.


 

차례


 

설날 아침 일찍 세찬(歲饌)과 세주(歲酒)를 마련하여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정조차례라고 한다. 사당은 지손(支孫)은 모시지 않고 장손이 모시는데,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까지의 4대조의 신주를 모셔두며 정조차례 때에는 차례대로 제사하고, 보통 제사 때에는 해당되는 분에게만 제사하게 된다.5대조 이상의 신주는 각기 분묘 옆에 묻어 집에서는 지내지 않고 10월에 있는 시제 때에만 제사를 지낸다. 차례 때에는 원근에 있는 자손들이 모두 장손집에 모여 들어 함께 지내는데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세배

차례가 끝나면 일동은 자리를 정리해 앉는다. 이때 조부모?부모?백숙부모?형제 등 차례로 절을 하고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고 한다. 집 안에서 세배가 끝나면 차례 지낸 세찬과 떡국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게 되는데, 사당을 모신 집이 있으면 먼저 사당에 절을한 다음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측에서는 어른에게는 주식(酒食), 아이에게는 과일과 돈으로 대접하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일가 어른이 먼 곳에 살면 수십리 길을 찾아가서라도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으며, 세배를 할 줄 모르면 교양업슨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다. 먼 곳에는 정월 15일까지 찾아가서 세배하면 인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덕담

정초에 어른이나 친구를 만났을 때에 말로써 새해 인사를 교환하는데 이를 덕담이라고 한다.이때에 「과세 안녕하셨읍니까?」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고 하며, 연소한 아이들에게는,「새해에는 복 많이 받게」또는 「새해에는 소원 성취하게」하는 등으로 처지와 환경에 알맞은 말을 한다. 덕담은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복을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축의(祝意)를 표시하는 것이다.


 

歲銜(세함)

벼슬을 하는 집안에서는 옻칠을 한 책상을 대청에 비치해 둔다. 그러면 밑에 거느리는 아전들이 종이를 접어 이름을 써서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간다. 각 관청(官廳)의 서리(胥吏)와 영문(營門)의 교졸(校卒)들도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청이나 선생의 집에 드린다. 이것을 세함이라고 한다. 설날이 되면 주인(主人)은 모두 하례하러 세배차(歲拜次) 나가서 부재(不在)이므로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


 

 

 

3. 설의 놀이와 연희


 

새해에 개인의 신수를 점쳐 보기 위하여 오행점을 보거나 윷점을 치고, 또 토정비결을 본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오행점은 나무조각에 금 목 수 화 토를 새겨 장기쪽같이

만들어 이것을 한번에 던져 엎어지고 자빠진 것으로 괘를 얻고, 그 괘에 따라 정해진 점괘로 그 한해의 신수를 본다고 하였는데, 현재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윷점은 대부분 윷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보는 것으로, 윷을 3번 던져서 나오는 결과를 조합해서 정해진 점괘를 통해서 보는 점이다. 모 와 윷은 같은 것으로 보고, 예글 들어 '도도도'는 '어린 아이가 인자한 어머니를 만난다' '도개걸'은 '남비가 등불을 친다' '개걸도'는 '갓난 아이가 젖을 얻느다' '모걸도'는 '구시가에 바람이 인다'등과 같은 내용으로, 특히 어린이들고 부인들간에 성행하였다고 한다. [토정비결]은 이지함(李芝涵 1517-1578)의 저술이라고 전해지는 점서로, 인간이 태어 날 연월일시의 사주 가운데 연월일에 해당하는 수를 그 해에 정해진 수와의 관계를 가감해서 얻어진 괘에 따라 점을 친다. 이 점괘는 1년치와 함께 달별로 상순 중순 하순으로 나누어서 일신과 가사, 그리고 공사에 관한 다양한 내용의 괘사로 되어 있다. 지금도 정초가 되면 길거리에서 토정비결을 보아 주는 사람들을 볼수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이루어진 세시풍속 관계의 문헌들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주역]에 바탕을 둔 점서로, 민간에서 심심풀이로 전해 오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널리 퍼진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3일이 지나면, 어린 아이들이 보름날까지 연날리기를 하다가 14일날 저녁에 줄을 끊어 날려 버리면 그 해에 드는 액을 날려 버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액막이연'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연을 만드는 종이도, 그리고 연실도 또한 만들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주로 서울고 같은 도시지역에서 성행했었다. 설을 지내고 3일째 되는 날에 일반 농촌이나 산촌에서는 마을고사, 또는 동제라고 하는 공동제사를 지내고, 집잡마다 찾아 다니며 농악을 치고 고사를 지내는 '지신밟기'가 있다. 마을제사는 지방마다 형태가 다른데, 일반적으로 가족 가운데 병자가 없거나 험이 없는 깨끗한 삶을 제관으로 뽑고, 마을 뒤나 산위에 있는 당나무나 당집에서 유교식으로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마을 사람들과 동물이 건강하고 또 한 해의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는 축문을 일고, 소지를 올리고 끝낸다. 제사를 끝내면 마을 동회를 열어 마을의 공동 일을 의논하고 일년동안 공동으로 사용한 경비를 결산하다. 지신밟기를 할 때에는 집집마다 조금씩 쌀을 내 놓는데, 니것은 마을이 공동자산으로 삼는다. 이 마을제사와 지신밟기는 새해를 맞아 공동의 생활공간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의미를 갖는다.


 

4. 설음식

설날 차례상과 세배 손님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 음식들을 통틀어 세찬(歲饌)이라 한다. 차리는 세찬에는 떡국, 세주, 족편, 각종 전유어, 각종 과정류, 식혜, 수정과, 햇김치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는데 준비는 가세에 따라 가지수와 양이 다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며 어느집에서나 만드는 대표 음식은 떡국이다. 그래서 떡국 한 그릇을 더 먹었다는 말이 설을 쇠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설 전에 어른들게 귀한 음식을 보내는 일, 어른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보내는 먹을 것들도 세찬이라고 하였다. 그때 보내는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어으나 대표적인 것은, 쌀, 술, 담배, 어물(魚物), 고기류, 꿩, 달걀, 곶감, 김 등이었다.


 

 

떡국 

설날에 흰떡국을 끊이는 풍습은 최남선의[조선상식]에서 흰색의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천지만물의 부활신생을 의미한다는 종교적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흰떡으 역사를 문헌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벼농사를 짓고 시루와 확돌을 사용하던 때가 B.C 4 - 5세시경으로 밝혀져 있으므로 이 때부터 흰떡이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흰떡은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按盤)위에 놓고 메로 쳐 몸이 매끄럽고 치밀하게 되도록 한 다음 가래떡으로 만든다. 이 떡을 백병(白餠) 거모(擧摸)라 하였다. 꾸득꾸득해진 가래떡을 얇고 어슷하게 썰어서 떡국거리로 준비해 둔다. 지금은 기계화되어 사라진 정취지만 1950년대만 해도 세모에 집집마다 떡에 소리가 골목을 메워서 즐거운 명절 분위글 자아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떡국은 흰떡과 쇠고기, 꿩고기가 쓰였으나 꿩을 구하기 힘들면 대신 닭을 쓰는 경우가 많다. "꿩대신 닭"이란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요즘은 쇠고기가 많이 쓰이고 있다. 떡국 끊일 때는 고기장국을 미리 끊여 두어야 한다. 국물이 맛있게 우러나는 양지머리를 고아서 덩어리는 편육으로 이용하고, 양념한 장국을 끊이다가 준비된 흰떡을 냉수에 씻어서 넣고 한소끔 끊이면 떡이 떠우르를 것이니 이때 그릇에 담아서 웃기를 얹는다. 웃기는 따로 살코기를 다져 ?은 것고 황백지단을 쓴다. 혹은 살코기와 움파를 꼬치에 꿰어 만든 산적을 한 두 꽂이 얹기도 한다. 특히 개성 지방에서는 조랭이 떡국을 끊이며 충청도 지방에서는 생떡국, 이북 지방에서는 만두국을 끊이기도 한다.


 

평안도 만두국

밀가루를 따뜻한 물로 반죽하여 젖은 보자기로 덮어 두었다가 끈기가 생기면 손바닥만큼씩 둥글게 밀어 놓는다. 속은 쇠고기, 돼지고기를 다지고 김치는 속을 털어내고 곱게 다져 물기를 꼭 짠다. 두부도 베주머니에 넣어 물기를 짜고 숙주나물은 살짝 데쳐서 잘게 다져 물기를 꼭 짠 다음 잘 섞어 갖은 양념으로 무친다. 밀어놓은 껍질에 소양지를 넣어 집어 두었다가 쇠고기로 육수를 만들어 만두를 넣어서 끊인다. 상에 낼 때 그릇에 떠서 웃기로 황백지단 채 썬 것을 얹고 초장을 곁들인다.


 

조랭이 떡국

멥쌀가루를 곱체 쳐서 흰떡을 만들어 참기름을 바르면서 나무칼로 썰어 조랭이떡을 만든다. 양지, 사골, 양 등을 고아 국물을 만들어서 간을 하고 삶아진 건지는 건져 양념해서 웃기로 쓴다. 준비한 떡을 찬물에 헹구어서 끊는 장국에 넣어 끊으면 그릇에 담고 고기와 완자, 홍백지단을 웃기로 얹는다.


 

1.말날


 

10월의 오일(午日)을 「말날」이라 하여 특별히 말을 위하는 풍속이 있다. 이날이면 팥떡을 해서 마굿간 앞에 차려놓고 말의 무병과 건강을 비는 고사를 지냈다. 우리 민족은 가축 중에서 말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위했기 때문에 때로는 말을 위한 고사까지 지낸 것이다. 말은 옛날에 가장 좋은 장거리 교통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노동력을 농사일에 이용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가축에 비해 영리해서 주인을 따랐으므로 말을 수중히 여기고 제사까지 지낸 당시의 풍속을 이해할 만하다. 조선 시대의《시용향약보(試用鄕藥譜)》에는 마제(馬祭)때 부르던 노래인 「군마대왕(軍馬大王)」이 전해지고 있다. 10월응 말말 중에서도 무오일(戊午日)을 상마일(上馬日)로 쳤는데 그것은 무(戊)와 무(茂)가 음이 같아 무성(茂盛)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였으리라 믿어진다. 또 말날 중에서도 병오일(丙午日)일 때에는 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역시 병(丙)과 병(病)의 음이 같아 말의 병을 꺼려한 데서 생겨난 것이라 믿어진다. 어떤 지방에서는 말날에 시루떡을 해서 외양간과 모든 방에 차려놓고 주인의 생기복덕을 비는 굿을 하거나 안택(安宅)을 하기도 한다. 또 햇곡식으로 떡을 하고 음식을 마련해서 굿을 하기도 하며, 전라북도 지방에서는 이날 상주 단지에 신곡(新穀)을 강아 넣는다. 오일(午日)에 떡을 해서 상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족(家族)이 모여 함께 먹는데 말일병(馬日餠)이라고 한다.


 

 

인날


 

  정초에는 남의 집에 가서 유숙하지 않지만, 특히 7일 인일(人日)에는 외숙(外宿)하지 않는다. 이날 객(客)이 와서 묵고 가면 그 해는 연중 불운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부득이 객(客)이 와서 묵게 될 때에는 불운을 막기 위해서 주인과 객(客)은 머리를 반대로 두고 거꾸로 자야만 한다 그러면 액운을 막을 수가 있다.

   옛날 나라에서는 인일제시(人日製試)를 하였는데 인일(人日)에 유생(儒生)들에게 시험을 보여 등용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동인승(銅人勝)을 각신(閣臣)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것은 작고 둥근 거울인데 자루가 달리고 뒤에 신선이 새겨져 있다.

   세시기(歲時記)에 수(隨)나라 유신이란 사람의 아내 진씨가 인일(人日)에 동인승(銅人勝)을 올리는데, 혹 비단실을 잘라 금박(金箔)을 새겨 장식하여 만들었다고 했다. 오늘날의 동인승(銅人勝)도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

   제학(提學)을 부르게 하여 과거(科擧)를 실시하라고 지시한다. 이것을 인일제(人日製)라 한다. 태학(太學)의 원점(圓點)을 얻은 유생(儒生)에게 시험(試驗)하는데 식당(食堂)에 참석한지 만 30일에 원점이 되면 처음으로 시험을 보도록 한다. 그들에게 시(詩) 부(賦) 표(表) 책(策) 잠(箴) 명(銘) 송(頌) 율부(律賦) 배율(排律)등 각 문체를 마음대로 시제에 맞도록 내게 하여 1등한 자에게는 혹 사제(賜第)도 내리며, 발해(發解)한 자도 시상하는데 차등이 있게 준다. 성균관과 문묘(文廟)에서 시행하기도 하고 대궐 안에서 임금이 친히 시험하기도 한다. 또는 지방의 유생도 불러 함께 보이기도 한다. 명절날 선비를 시험하는 것은 인일(人日)로 부터 시작하여 3월 3일 7월 7일 9월 9일에 행하는데 모두 인일제(人日製)을 모방한 것이다. 이런 것을 절일제(節日製)라고 한다.


 

 

 

상십이지일


 

상자일(上子日)

정월에 들어 첫째 자일을 「상자일」이라 하는데 곧 「쥐날」이다. 이날 농부들은 쥐를 없애기 위하여 들에 나가 논과 밭의 두렁을 태우는데 이를 쥐불놀이라고 부른다. 쥐가 많으면 수확한 오곡을 먹어 서해(鼠害)를 받게 되니 농사에서는 쥐를 없애려 한다. 그래서 쥐날 논밭 두렁의 풀을 태우면 쥐가 없어지고 해충이 제거되면 새싹의 발아도 촉진되어 그해 농사가 잘 된다고 하여 쥐불놀이를 한다. 요즘에는 보름날 밤에 횃불놀이를 겸해서 쥐불놀이를 많이 한다. 쥐날 밤에 자시(子時)에 방아를 찧으면 쥐가 없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밤중에 방아를 찧는다. 방아독에 넣을 곡식이 없으면 빈 방아라도 찧어서 요란한 소리를 낸다. 상자일엔 옛날부터 일도 하지 않고 백사(百事)를 금하고 놀았다고 하는데, 쥐가 곡식을 축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쥐는 곡식을 잘 먹는 까닭에 상자일 밤엔 불을 밝히지 않으며 길쌈을 하거나 의복을 짓는 일도 하지 않는다. 옷이가 천을 쥐가 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곡식을 볶아서 주머니에 넣으면 재수가 좋다고 전한다. 대궐에서는 주머니를 만들어 명주(名色) 실로 끈을 만들고 큰 나비같이 두 귀를 싸서 정조(正朝)에 문안(問安)오는 근신(近臣)이나 재상에게 나누어 주었다.


 

상인일(上印日)

정월의 첫 토끼날을 상인일이라 말하는데 「상묘일」또는 「토끼날」이라 부르기도 한다. 토끼날에는 남자가 먼저 일어나서 대문을 열어야 한다. 가장이 열면 더욱 좋으나, 가장이 없을 때에는 식구 중에서 누구든지 남자가 먼저 대문을 열기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일년동안 가운이 융성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에 여자가 먼저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가면 가운이 불길하다고 한다. 이것을 철저히 지키는 집안에서는 밥을 짓는 일도 남자가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간 다음에야 방문을 여고 나와서 한다. 토끼날은 장수를 비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은 남녀 할 것 없이 명사(命絲)라 해서 명주실을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매달거나 또는 문 돌찌귀에 걸어 두는데, 그렇게 하면 명이 길어 진다고 전한다. 또 상묘일에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 장수한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실을 짜고 옷을 지으며 베틀이 있으면 한 번씩 올라가서 베를 짜본다. 그래야만 장수한다고 전한다.


 

상진일(上辰日)

정월의 첫 진일을 상진일이라고 하는데 용란을 뜨는 민속이 전한다. 즉 상진일 이른 새벽에, 농촌에서는 부인이 남보다 먼저 우물에 가서 물을 긷는다. 상진일에는 천상에 있는 용이 하강해서 우물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아무도 길어가지 않은(우물에 일찍 가서 물을 뜬다는 것은)우물 속에 낳은 용란을 뜨는 것이 된다. 이것을 [알 뜨기]라고 하는데 용알을 떠다가 밥을 지어 먹으면 그 해는 농사가 잘 되어서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그래서 농촌의 부인들은 이른 새벽에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 간다. 용란을 먼저 떠간 사람은 용알 뜨고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짚을 우물에 띄운다. 그러면 다음에 왔던 사람이 보고 다른 우물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상사일(上巳日)

정월 들어 첫 상일을 [상사일]또는 [뱀날]이라고 한다. 이날 머리를 빗으면 그해에 진안에 뱀이 들어온다는 속신이 있다. 뱀이 침입한다는 것은 불길한 일이요 누구든 금기한다. 그래서 상사일에는 남녀간에 머리를 빗지 않는다. 뱀을 금기하는 것은 집념이 강하고 악착스러워서 대개 좋아하지 않는다. 뱀이 죽어 귀신이 된 사귀는 한번 사람에 부착하면 악행을 자행할 뿐 아니라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고 전한다. 상일에 이발을 하지 않는 것은 사전에 사귀의 침입을 예방하는 것이니 하절에 뱀이 많은 지방에서 이 금기가 엄격하다.


 

상해일(上亥日)

정월 들어 첫 해일이 「돼지날」이다. 돼지날에는 얼굴이 검거나 피부색이 검은 사람은 왕겨나 콩깍지로 문지르면 살겨이 희고 고와진다고 전한다. 돼지는 살겨이 검고 거친데 그 반대의 뜻으로 이러한 민속이 생긴 것이다. 상해일엔 바느질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는다. 바느질을 하면 손가락이 아리고, 머리를 빗으면 풍증(風症)이 생긴다고 해서 금하기 때문이다. 이조(李朝) 때 궁중에서는 젊고 지위가 낮은 환신(宦臣)들 수백명이 횃불을 들고 땅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 주둥이 지진다」하며 돌아다녔다. 또 곡식의 씨를 태우 주머니에 넣어 환신(宦臣)과 근신(近臣)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모두가 풍년을 비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로부터 해낭(亥囊)?자낭(子囊)으 명칭이 생겼다. 이 해낭고 자낭은 모두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해낭은 둥글고 자낭은 길다. 조조가 등극하자 이제도를 복구하여 주머니를 나누어 주게 되었다


 

 

 

대보름


 

 

매서

상원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상대방이 대답하면 곧 [내 더위 사가라]한다. 이것을 [매서]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더위를 팔면 1년 동안 더위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미리 눈치채고 대답을 하지 않는 수가 있으니 학(謔(희롱할 학))이라고 했다. 이름을 불렀을 때 상대편이 더위 판다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내 더위 사가게]하면 도리어 이쪽에서 더위를 먹게 된다. 더위를 한 번 팔면 되는 것을 장난꾼은 여러 사람에게 몇 번이고 파는 수도 있다. 상원날과 더위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 사람 뿐 아니라 심지어 가축들도 더위를 막는다고 해서 예방으로 소나 돼지의 목에 왼새끼를 걸어주거나, 혹은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꺽어 둥글게 해서 목에 걸어준다. 왼새끼를 목에 걸어 주는 것은 좌색(左索)으로 귀중(鬼衆)을 묶었다는 고대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며,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는 악귀를 쫓는 민속적 주술로 쓰이는 일이 많아 더위를 막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더위를 먹지 않아야 하절(夏節)에 건강을 유지하고 행복(幸福)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매서(賣暑)하는 풍속(風俗)이 생긴 것으로 믿어진다. 더위팔기는 성인보다 아이들 아이에 성행되어 왔다.


 

부럼

상원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밤 호도 잣 은행 등을 깨무는데 이를 부럼이라고 한다. 대개 자기 나이수대로 깨무는데 노인들은 이가 단단치 못하여 몇 개만 깨문다. 여러 번 깨물지 않고 단번에 깨무는 것이 좋다고 하여 일단 깨문 것은 껍질을 벗겨 먹거나 첫 번째 것은 마당에 버리기도 한다. 깨물 때에, [1년 동안 무사태평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며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기원한다.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가 단단해진다고 한다. 상월날의 부럼을 위해서 14일 밤에 미리 과실을 준비해 둔다. 땅 속에 묻었던 밤을 파내서 깨끗이 씻어 두고, 서울같은 도시에서는 14일 저녁에 부럼을 위한 과실을 시장에도 많이 진열되어 있으며 주부들은 식구수를 감안해서 과실을 사간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상원날 새벽 날밤, 은행, 호두, 무를 깨물며 [1년 열두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 주시요]하고 축수한다. 이것을 부럼이라 하기도 하고 고치지방(固齒之方)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또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새벽에 밤이나 무를 깨물면서 축원하기를 [1년 열두달 동안 무사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귀밝이술(耳明酒)

상원날 이른 아침에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해서 모두 술을 한잔씩 마시니 [귀밝이술]이다. 귀밝이술은 데우지 않고 차게 해서 마시며, 일설에는 귀가 밝아질 뿐 아니라 1년 동안 좋은 소식을 듣는다고도 전한다. 귀밝이 술은 부녀자도 마신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청주(淸酒) 한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한다. 이것을 귀밝이술이라 한다고 했다. 도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소주 한 잔을 마셔 사람의 귀를 밝게 한다. 해록쇄사(海錄碎事)에 사일(社日)에 치성주(治聲酒)를 마신다고 했으나 지금 풍속(風俗)에서는 상원날로 올겨졌다고 한다.


 

달맞이(迎月)

대보름날 저녁 달이 동쪽에서 솟아오를 때면 사람들은 달맞이를 위하여 뒷 동산에 올라간다 한 겨울이라 춥긴 하지만 횃불에 불을 붙여 가지고 될수 있는대로 먼저 달을 보기 위해서 산길을 때라 뒷동산에 오르는 것이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고 대보름달이 솟을 때에 횃불을 땅에 꽂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제각기 기원을 한다. 농부는 풍년들기를 빌고, 도령은 과거에 급제할 것을 빌고, 총각은 장가들기를, 처녀는 시집가기를 기원한다. 그러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대보름달은 될 수 있는대로 남보다 먼저 보는 것이 길한 것이니 서로 앞을 다투어 산에 올라간다. 대보름달을 보고 1년 농사를 미리 점치기도 하는데 달빛이 희면 우량이 많고 붉으면 한발이 있으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며 흉년이 든다고 한다.또 달이 남으로 치우치면 해변에 풍년이 들 징조이고, 북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백가반

대보름날 여러 집의 오곡밥을 먹어야 좋고 또는 백집의 밥을 먹어야 좋다고 한다. 그래서 남의 집을 다니며 일부러 걸식을 해서 많은 집의 밥을 먹는 일도 있다. 백가반을 먹지 않으면 어린 아이가 봄에 발병하고 몸이 마른다고 한다. 백가반을 얻어다가 절구에 올라타고 개와 마주 앉아 개에게 한수저 먹인 다음에 자기도 한 수저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전한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 의하면 봄을 타서 살빛이 검고 야위는 아이들으 상원에 백 집의 밥을 빌어다가 절구를 타고 개와 마주 앉아 개에게 한 숟갈 먹이고 자기도 한 숟갈 먹으면 그런 병이 도지지 않는다고 했다


 

쥐불놀이

14일과 상원 밤에 농가에서는 들에 나가서 노둑,밭둑을 불태우는데 이것을 [쥐불놀이]라고 한다. 가을에 무성했던 둑의 풀이 겨울 동안에 건조해져서 불을 지르면 잘 탄다. 쥐불놀이를 위해서 머슴아이들은 미리 횃불을 만들어 두었다가 달이 오를 무렵에 떼지어 들로 나아가 쥐불놀이를 하므로 여기저기에서 불타는 광경은 장관을 이룬다. 쥐불놀이는 잡귀를 쫓고 신성하게 봄을 맞이한다는 것과, 잡초를 태움으로써 해충의 알을 죽여 풍작을 기도하며, 봄에새싹이 날 때 거름이 되도록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또 쥐불놀이를 하면 1년 동안 무병하고 액을 멀리할 수가 있다고 믿고 있다. 대보름날 저녁에 청소년들 사이에 횃불싸움을 한다. 대보름을 며칠 앞두고 청소년들은 횃불싸움을 위한 홰를 만든다. 낡은 마당비를 그대로 사용 하기도 하고 대나무 또는 싸리로 홰를 필요한 수만큼 만들어 두었다가 보름날 저녁에 뒷산에 올라간다. 그러면 건너 마을에서도 횃불싸움 준비를 갖추고 청소년들이 모여드어 서로 대치한다. 둥근 달이 동녘에 막 솟아오르면 대치하고 있던 패들은 서로 놀려주고 약을 올려 때로는 욕설까지 퍼붓는다. 이때 농악대들은 제각기 자기네 편의 기세를 올리기 위해서 신나게 한바탕 농악을 울려 흥을 돋운다. 흥분이 고조되었을 때 그 가운데 용감한 청년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채 손에 횃불을 들고 앞장을 서 싸움을 시작한다. 이 때에 소년은 소년끼리, 청년은 청년끼리 싸우게 된다. 횃불을 든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횃불을 휘두르며 싸우는데 서로 함성을 지르면서 때리고 차고 심지어는 옷까지 태운다. 이것은 매우 용맹스러워 보인다. 승부는 부상을 당하거나 횃불을 빼앗겨 항복한 사람이 많거나 또는 후퇴한 편이 패하게 된다. 횃불싸움은 협동정신을 기르고 남성적인 용감성을 나타내는 놀이로 고대 전투의 연습이기도 했다.


 

약식

상원날은 약식을 먹어야 좋다고 한다. 상원날의 약식 먹는 유래는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의 고사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소지와이 즉위한지 10년 되던 해에 하루는 천천정(天泉亭)에 행신(行辛)했는데 쥐와 까마귀가 와서 울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말하기를, 까마귀가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라고 했다. 왕은 기사로 하여금 까마귀를 따르게 했으나 남촌에 이르렀을 때 두 돼지가 싸우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다가 까마귀를 잃었다. 기사는 까마귀를 찾아 헤매다가 못에서 나온 노인을 만나 봉서(奉書)를 받아본 즉 [개견이인사 부개견일인사](開見二人死 不開見一人死)라 적혀 있었다. 기사는 이글을 왕에게 올리니 왕이 개봉치 않으려는 것을 일관(日官)이 일인(一人)은 왕이요, 이인(二人)은 서민이라 하므로 이 말을 듣고 개봉한즉 [금갑(琴匣)을 쏘아라]라고 적혀 있었다. 왕은 궁중에 돌아온 즉시 금갑을 활로 쏘니, 내전(內殿)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가 몰래 내통하여 왕을 죽이고자 모의하고 있다가 맞아 죽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상원을 오기일(烏忌日)이라 부르고, 까마귀를 약식으로 제사 지내는 민속이 생겨 오늘날까지 전해온 것이라고 한다. 약식은 14일 밤이나 15일에 만드는데, 찹쌀. 대추.밤.꿀.잣을 섞어 쪄서 만든다. 이것은 검붉은 빛이 나고 단맛이 잇으며 오래 두고 먹어도 좋다. 약식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서 만든 맛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잔칫상에는 으레 오르고 있다. 렬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의하면 역관(譯官)들의 말을 인용(引用)해서 우리의 사신 일행이 북경에 머물고 있을 때 상원날이면 약식을 꼭 해 먹었다. 중국의 귀인들이 약식의 맛을 보고 변색하여 기뻐했으며 백미를 다한 것이라 칭찬했다고 하는데, 약식의 맛은 중원에 까지 알려진 셈이다.


 

오곡밥(五穀밥)

상원날은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지은 밥을 먹는데, 곧 오곡밥이다. 보통 밥은 쌀만으로 짓거나 혹은 한가지 잡곡을 섞어 짓지만 상원날엔 한꺼번에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밥을 지어 먹어야 한다. 또 상원날엔 세 집 이상의 타성(他姓)집 밥을 먹어야 그해의 운이 좋다고 해서 여러 집이 오곡밥을 서로 나누어 먹으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이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해서 틈틈이 여러 번 먹는다. 열양세시기에 의하면 향촌(鄕村)의 부자집에서 잡곡밥을 지어 이웃 사람들과 용인(傭人)들을 불러서 한 사발씩 나누어 먹인다. 부자가 많은 곳은 하루에 여러 사발을 먹는다. 밥 아홉 그릇을 먹고 나무를 아홉 짐을 했으며 밥을 많이 먹어 기력(氣力)이 건장(健壯)하여졌다는 것이다.


 

진채식(陣菜食)

상원날에는 호박고지?무우고지?외고지?가지나물?버섯?고사리?등 여름에 말려둔 나물을 삶아 먹는데 이를 진채식이라고 한다. 상원날 진채식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들 즐겨 먹는다. 따라서 각 가정에서는 상원으 진채식을 위해서 나물을 햇볕에 말려둔다. 동축세시기에 의하면 박나물?버섯 등을 말린것과 대두황권(大頭黃卷)?순무?무등을 묵혀 두는데 이것을 진채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날 나물로 무쳐서 먹는다. 대체로 외고지?가지고지?시래기 등도 모두 버리지 않고 말려 두었다가 삶아서 먹는다. 이렇게 하면 여름 동안 더위를 먹지 않는다.

복(福) 쌈

상원날에는 밥을 김이나 취에 싸서 먹는데 이것을 복쌈이라고 부른다.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露積)쌓듯이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있다고도 전한다. 때로는 돌을 노적처럼 마당에 쌍하 놓고 풍작을 기원 하는 수도 있다. 상원날에 국수를 먹으면 수명이 길다고 해서 국수를 먹는 풍속도 있다. 동국세새기에 의하면 배추잎과 김으로 밥을 싸서 먹는다. 이것을 복리(福裏)라 한다. 또 열양세시기에는 해의(海衣)에다 마제채(馬蹄菜) 등속을 싸서 먹되 많이 먹어야 좋다고 하며, 복쌈이라 부르니 이것도 기풍(祈豊)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귀신단지 날


 

 

  정월(正月) 16일을 귀신단지날이라고 한다. 이날에 외출을 하면 귀신이 붙는다고 해서 삼간다. 또 귀신날에 귀신이 동하기 때문에 출입을 신중히 하고 일도 하지 않고 쉰다. 남자가 일을 하면 연중 우환이 있고 여자가 일을 하면 과부가 된다고 한다. 이승에서 과부가 되지 않으면 저승에 가서라도 과부를 못 면한다고 한다. 16일에 일을 하면 가을에 까치가 목화를 모두 쪼아버린다고 해서 까치날이라 부르는 수도 있다.


 

 

중화절과 머슴날


 

대청소

2월 1일을 각 가정에서는 대청소를 한다. 집 안팎을 깨끗이 쓸고 닦으며, 거미줄을 털고 외양간 같은 가축 우리도 거름을 치운다. 2월 초면 노래기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초목의 썩은 부분에서 더욱 심하게 나오고 방에 까지 기어 들어오므로, 이것을 막기 위한 부적을 만들어 붙인다. 백지에 [香浪閣氏 千里速去(향낭각씨 천리속거)] 또는 [노낙각시 천리속거]라고 써서 기둥이나 벽.석까래 같은 곳에 거꾸로 붙인다. 노래기에게 빨리 천리만큼 먼 곳에 가라고 명령하는 것이니 이 주문 부적을 붙이면 노래기가 없어지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이 부적은 朱書(주서)가 원칙이지만 묵서도 한다. 또 노래기를 막기 위해 솔가지를 꺽어다 지붕 위에 꽂기도 하낟. 초하룻날 이른 새벽에 소나무 잎을 문 앞이나 뜰에 뿌린다. 솔잎은 냄새가 나므로 벌레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해온다.


 

콩볶기

각 가정에서는 2월 1일에 콩을 볶는다. 솥에 불을 지피고 콩을 넣은 후 주걱으로 타지 않게 젓는다. 볶은 콩은 식구들이 나누어 먹는데 아이들은 좋아라고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며 먹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날을 기다린다. 콩을 볶을 때에 주걱으로 저으며, [새알 볶아라, 쥐알 볶아라, 콩 볶아라]하고 呪言(주언)을 한다. 그러면 새와 쥐가 없어져서 곡식을 축내는 일이 없다고 한다. 2월 1일에 콩볶는 것으로 가을 수확을 미리 예상하기도 하는데 그 방법은 콩과 약간의 보리를 섞어서 한 되를 솥에 볶는다. 다 볶은 다음 담아 한 되가 더 되면 풍년이 들어 추수가 많으며, 한 되가 못되면 흉년이 들게 된다고 전한다. 또 이날 콩을 볶아 먹으면 집안에 노래기가 없어지고 청결해서 좋다고 한다.


 

 

머슴날

농가에서는 2월 1일을 머슴날이라고 한다.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오랫동안 쉬던 머슴들에게 이제 2월이 되니 농사일을 준비하라고 주인이 술과 음식으로 머슴들을 위로한다. 그들로 하여금 하루를 즐겁게 쉬게 하며, 주인은 술과 음식을 한턱 내고, 머슴들은 농악을 울리며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긴다. 많은 노비를 거느린 大家(대가)에서는 떡도 하고 많은 음식을 했다. 그해에 20세가 된 젊은이는 이날 성인 머슴에게 술을 한턱 낸다. 20세 전에는 아이로 취급하여 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20세가 되어 성인에게 한턱을 낸 다음부터는 어른 취급을 받아 그들과 품앗이를 할 수 있게된다. 지방에 따라서는 나이가 많아도 2월 1일 머슴날에 한턱 내지 않으면 성인 취급을 받지 못하는 곳도 있다. 한턱을 내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신고와 마찬가지이다. 정월 보름날에 마당에 세워 놓은 禾 (화우)에서 벼이삭을 내려 떡을 한다. 크게는 손바닥만하게 작게는 계란만하게 만드는데 모두 반쪽의 둥근 옥 모양으로 한다. 콩을 불려서 소를 만들어 넣고 시루 안에 솔잎을 겹겹이 깔고 넣어서 찐다. 푹 익힌 다음에 꺼내서 물로 닦고 참기름을 바르는데 이를 송편이라고 한다. 송편을 노비에게 年齡數(연령수)대로 먹이고 위로한다.


 

 

 

 

좀생이 별 보기


 

음력 2월 6일


 

  2월 6일 저녁에 좀생이를 보는데, 이것이 달보다 앞서 가면 대풍이 들고, 평행으로 가면 평년작, 달보다 뒤떨어져 가면 흉년이 든다. 그리고 좀생이의 색깔이 붉으면 흉년, 투명하면 비가 많이 온다.  <경기>


 

 

  밤에 좀생이별을 보고 그 위치에 따라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충북>


 

 

  달과 좀생이가 나란히 가거나 조금 앞서 있으면 길조, 뒤에 멀리 떨어져 있으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충남>


 

 

  달을 밥 광주리로 보고 좀생이별을 아이들로 보아 달고 좀생이가 가깝거나 앞서 가면 배가 고파 따르는 것이니 그해는 흉년, 멀리 떨어져 가면 배가 불러 그러는 것이니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한다.  <경남>


 

 

  좀생이별이 달의 뒤로 돌아가면 풍년이 들고, 앞으로 나오면 흉년이 든다.  <전북>


 

 

  달과 좀생이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 길조로 풍년이 들고, 거리가 멀면 흉조로 흉년이 든다고 한다.  <강원, 영서>


 

 

  [송생이 본다]고 하며, 이는 좀생이가 달 앞에 갈 때, 옆으로 나란히 갈 때, 달 옆에 가까이 갈 때, 또는 북쪽으로 머리를 틀고 갈 때, 까불거리고 갈 때 등에 따라 농사의 길흉을 예측한다.  <전남>


 

 

  큰 별이 앞서고 조그만 좀생이별이 멀리 떨어지면 풍년이 든다. 만일 가깝게 가거나 부지런히 가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5일날 점치기도 한다.  <경기>


 

 

무신일


 

 

음력 2월 9일


 

   경북일원에서 이날을 신이 없는 날로 알고, 나무를 심거나 콩을 담그고 가재도구를 정비한다. 이날은 손이 없어 집수리도 하며 나무를 심으면 잘 자라고, 부지깽이를 심어도 산다고 한다.   <경북>


 

 

 

답청일


 

음력 2월 11일


 

  이날을 답청일이라 하는데, 밀양에서는 남강에 가서 천렵을 하고 쑥을 뜨어다가 잡은 고기를 넣어 쑥국을 끓여 먹는다.   <경남>


 

 

 

 

삼짇날


 

 

 

1. 삼짇날의 유래

   음력으로 3월3일을 삼짇날이라고 한다. 삼짇날은 3이 둘 겹쳤다 하여 중삼(重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월일(月日)이 홀수이면서 같은 숫자로 겹치는 날을 대개 명절로 정해 즐겨왔다. 선날인 1월1일, 3월3일, 5월5일 7월7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홀수는 양수(陽數)이고 그 양수가 겹치는 날은 양기(陽氣)가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짇날이 되면 강남에 갔던 제비도 옛집을 다시 찾아온다고 하며 나비도 나타난다. 제비는 음력 9월9일에 따뜻한 강남으로 갔다가 삼짇날에 다시 온다고 하느데 삼짇날이 되면 그만큼 날씨가 따뜻해진다는 의미다. 그리고 옛집을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속설(俗說)만은 아니다. 제비는 실제로 자기가 태어난 곳의 500m내외의 권내에 다시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니 자기가 태어난 집을 다시 찾게 되는 셈이다.


 

 

2. 삼짇날의 풍속

삼짇날 사람들은 꽃을 찾아 날아드는 여러 가지 나비들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하는데,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제일먼저 보게되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좋다고 생각하나 흰나비를 먼저 보게되면 나쁘고 특히 부모의 상(喪)을 당하게 되는 흉조(凶兆)라고 여겼다. 이러한 속신(俗信)은 나비보기 뿐만아니라, 경남지방에서는 3일에 바람점을 보는데 오전에 바람이 불면 초장(初場)에 삼 값이 비싸고 오후에 바람이 불면 파장에 값이 비싸다고 하였다. 또 이 날 바람이 불면 삼농사가 잘 되지 않고, 비가오면 콩과 팥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 외에도 이날 몇가지 속신에 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짇날 머리를 깍으면 머리결이 좋고 또 잘 자란다.

?봄에 처음 보이는 여릅(야생삼)을 보고 "야 삼 봐" 하고 먹으면 학질에 걸리지 않는다.

?할미꽃이 처음 필 때 세잎을 따서 먹으면 학질에 걸리지 않는다.

?서쩍새가 소짝소짝하고 울면 그해 농사가 흉년이들고, 소탱소탱하고 울면 풍년이 든다.

이 무렵이면 날씨도 따뜻해져서 나무는 꽃을 피우고 들녘에는 봄나물이 돋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산에는 이미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발해여 온통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고, 이꽃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기도 한다. 삼짇날에는 여자들이 머리를 감는 일이 많았는데, 그것은 이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소담스러워지고 윤기가 나며 부드러워진다고 믿어서이다. 또 가정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한 부녀자는 자식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데 그 비는 대상은 산신(産神),부처 등 여러이 되었다. 우리민족은 아들을 더 원하는 마음이 깊으며 조선시대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게 되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라 하여 중벌시하는 풍습도 있었다. 아들 얻기는 비는 그시기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수시로 하였으나 충북의 진천(鎭川) 지방에스는 삼짇날부터 초파일 사이에 부녀자가들이 무덩을 불러 용왕당이나 삼신당에 가서 굿을 하고 절(寺刹)에 가서 빌었는데, 그곳에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사방의 여인들이 모두와서 기도하므로 마치 시장이 선 것처럼 혼잡을 이루었다고 한다.


 

 

3. 삼짇날의 놀이

삼과들에 꽃이 피는 이 때쯤이면 유생(儒生)은 유생들끼리, 농부는 놀부들끼리, 부녀자는 부녀자들끼리 모여 들로 산으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서 음식을 먹어가며 시조를 지어 읊거나 춤과 노래로 하루를 즐기는 풍속이 있어 왔다. 이를 화류(花柳)놀이 꼬는 화전놀이라고 한다. 이 화류놀이는 남쪽지방으로 갈수록 유명했는데 특히 부녀자들은 봄을 맞아서 시집살이의 구속에서 벗어나 하루를 즐겁기 놀았던 것이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함빡 핀 진달래꽃을 꺽어서 머리에 꽂거나 꽃방망이를 만들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3월3일이 되면 정의원(旌義縣監)이 관속과 육방 하인들을 데리고 성읍(表善面 城邑里) 성북(城北) 영주산 서쪽에 있는 정수암이라는 곳에가서 큰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 잔치를 '정소암 화전놀이'라고 하였다. 이 때 노는 가운데 기생들은 '신목사 허리' '사랑가'등의 민요를 부르면 사령들은 칼춤을 추는데, 이칼춤은 비명에 죽은 죄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행교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풍월을 다투었으며, 이 때에 장원을 한 사람에게는 황봉(黃封)이라 해서 술로 상품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의 정의현 안에는 각 면에서 모여든 양반들도 참석하는데, 이 자리에서 어려운 일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날만 백성이 관리에 대해서 얼마쯤 불경한 태도를 보여도 관에서는 벌주지 않았다고 한다. 함남 영흥 지방에서는 삼짇날 동류수(東流水)에 몸을 씻으러 가는데, 이곳에서 몸을 씻으면 한 해의 재액(災厄)을 떨어 버린다고 한다. 시인과 묵객(墨客)들도 강변 정자에 모여 시를 읊고 화전놀이를 즐겼다. 이때 쯤에는 들에 여러 가지 풀들이 돋아나고 나뭇가지에는 물이 올라서 소년 소녀들은 이러한 풀과 나뭇가지로 여라 장난감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 소녀들은 담밑에 나는 각시풀을 한줌씩 따다가 추려서 한쪽 끝을 실로 묶어 머리채를 만들고 나무를 깍아서 그것을 묶어 머리채를 만들어서 각시놀이를 한다. 풀각시의 머리는 땋듯이 하든가 쪽을 지은 것처럼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예쁜 색 헝겊으로 치마와 저고리를 만들어 입힌다. 때로는 풀각시외에도 헝겉으로 이불이나 베개, 머리 별풍들을 만들어서 방안처럼 꾸며 가지고 놀기도 한다. 화창한 봄날에 뜰이나 양지바른 울타리 밑에 소녀들끼리 다정하게 모여 않아 서로의 겨루는 이 풀각시놀이는 어린 소녀들의 꿈을 길러주는 정서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소년들은 들과 냇가로 몰려 다니며 물이 잘 오른 버드나무를 꺾어서 손으로 껍질을 비튼후 껍질 속의 나무를 빼내면 껍질은 둥근 파이프처럼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피리처럼 만들 수 있다. 이것을 '호드기'라고 한다. 호드기는 그 굵기와 길이에 따라 여러 가지 소리가 난다. 물론 호드기 소리는 훌륭한 악기처럼 여러 음을 낼 수는 없지만 피리처럼 호드기 몸체에 구멍을 낼 수도 있어서 잘 불면 처량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소년들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들가 냇가에 호드기를 불고 돌아 다니면서 흥취를 돋운다. 소년들은 그것으로 족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소년 소녀의 풀놀이에는 여러 가지르 더 들 수 있다. 여러종류? 풀을 뜯어다가 누가 그 가지 수가 많은지 내기를 하기도 하고 또 질경이 풀을 뜯어다가 서로 얽어서 잡아 당기고 상대편의 것을 끊는 내기도 한다. 이런 놀이는 포플러 잎의 줄기로고 했고 골잎으로도 했다. 특히 '솔잎걸기'는 어린 시절 한번씩은 다 해보았을 만큼 성행했었다. 그것은 크고 굵은 솔잎을 따서 서로 두 가랑이를 걸어서 잡아당기는 놀이인데 먼저 끊어지는 쪽이 지는 것이다. 또 야산이나 들판에서 삘기(띠풀의 어린 새순)를 뽑는데 하나씩을 뽑아서 누가 더 긴 것을 뽑았나 겨루기도 한다. 이것을 삘기뽑기(지방에 따라서는 삐기 또는 삐빠라고도 부름) 라고 한다. 삘기뽑기는 긴 것을 뽑아 겨루기도 하지만 한 웅큼씩 뽑아서 누가 많이 뽑았나 겨루기도 한다. 삘기는 얇은 껍질을 벗겨내고 먹기도 하는데 부드럽고 달짝지근하다. 3월중에는 또 활쏘기 대회를 갖는다. 이 활쏘기는 대체로 장년층에서 많이하는데, 기품이 있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활쏘기를 스포츠로 즐기고 있지만 이전에는 궁숭을 무굴로서 익혔던 것이다. 궁술은 고대에서부터 중요한 무술으 하나였으며, 우리민족은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활을 잘 쏘았다. 지금도 서울과 지방에서는 사정(射亭)이 있고 일부 활쏘기를 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활쏘기가 전국적으로 크게 성행하여 활기를 지녔었다. 궁사들이 모여 활쏘기 대회를 열게 되면 남녀노소의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기생도 활을 쏘는 궁사들의 뒤에 열을 짓고 서서 소리를 하며 궁사들의 기운을 돋구어 주었다. 활쏘기 대회에는 여러 명의 궁사들이 앞으로 나와 한 줄로 서 차례로 활을 쏘는데 일정한 화살수(보통 다섯대)로 누가 과녁을 많이 명중 시켰는가로 승부를 낸다. 궁사가 과녁을 향해 활을 쏘면 과녁 쪽세서 깃발로 신호를 보내온다. 화살이 과녁에 못미치면 여러 차례 깃발을 아래로 내려 보이며, 화살이 과녁을 넘으면 깃발을 위로 들어 보인다. 그리고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면 깃발을 원으로 둥글게 돌린다. 그러면 북을 울리고 기생들은 지화자 노래를 부르며 손을 흔들어 춤을 추면서 한바탕 흥을 돋운다. 이 활쏘기가 조선시대에는 하나의 예절로서 봄철에는 3얼 3일, 가을철에는 9월 9일로 연 2회씩을 했는데, 노인들을 모신 가운데 고을의 규칙을 낭독하고 술을 마시면서 벌이는 하나의 잔치이기도 했다.


 

 

4. 삼짇날의 음식

화전(花煎)

꽃전 또는 두견화전이라고도 한다. 진달래 꽃잎을 따다가 씻어서 곱게 빤 찹쌀 가르에 버무려 한 입에 넣을 만큼 동글납작하게 빚어 참기름에 지진다. 또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동급납작하게 만든 다음 진달래꽃과 쑥잎을 얹어 번철에 지지기도 한다.

화면(花麵)과 수면(水麵)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五味子)국에 띄운 뒤,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것을 화면이라 한다. 또 수면은 진달래 꽃을 녹두가루에 반죽하여 국수를 만들어 이것을 꿀물이나 오미자국물에 띄운 것을 말한다.

탕평채(蕩平菜)

녹말가루로 묵을 쑤어 가늘게 채썰고 고기볶음, 미나리 김 등을 섞어 초에 무친 것이며 봄에 입맛을 돋구는 음식이다. 탕평채라는 음식명이 붙은 이유는 조선왕조 중엽 당파 당쟁이 심했을 때 여러 당파가 서로 잘 협력하자는 탕평채의 격론을 펴는 자리에 녹두묵에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이 나와서 붙여졌다고 한다.

진달래 화채

오미자 국물에 진달래꽃을 끊는 물에 잠깐 담갔다가 띄운 화채이다. 이훈종(李勳種 : 국문학자)은 수핑에서 "진달래 꽃잎에 녹말가루를 씌어 끊는 물에 담방 담갔다가 꺼내면 가루가 익어서 말간 꺼풀을 쓰고 그대로 있다. 그것을 분홍빛 오미자 물에 띄우면 꽃빛이 비치어 그릇 안이 온통 발갛게 보인다. 호로록 마시면 녹말꺼풀은 혀 끝에 매끄럽고 씹으면 쌉싸름한게 본래 진달래 맛을 낸다"라고 진달래 화채의 풍미를 읊고 있다. 봄내음이 가득하고 시적인 음식이다.

서여증식

마를 캐다가 쪄서 먹거나 꿀을 발라 조각내어 먹기도 했다.

여러 가지 술

3월에 빚는 술은 소국주(小麴酒) 두견주(杜鵑酒) 도화주(桃花酒) 송순주(松荀酒) 과하주(過夏酒)등이 있으며 서울 공덕, 옹막(지금의 마포구)의 삼해주(三亥酒)가 유명했다. 그 밖에 평안도에 감홍로(甘紅露)와 벽향주(碧香酒)가 있고 황해도에는 이강주(梨薑酒), 호남에는 죽력고(竹瀝膏) 계당주(桂當酒) 충청도에는 노산주(魯山酒)등이 가장 좋은 술이다.

여러 가지 국

황저합탕(黃苧蛤湯)은 노랗고 작은 조개인 황저합으로 끊인 국이다. 또 복사꽃이 떨어지기 전에 복어국을 끊여 먹고 복어를 먹지 않는 사람은 숭어로 대신 끊이기도 한다.


 

 

한식


 

 

1. 한식의 유래

  한식은 동지(冬至)후 105번째 되는 날을 말한다. 한식은 24절기의 하나인 동지를 기준으로 하여 정한 명절이기 때문에 양력으로는 매년 4월 5일이나 6일 무렵에 들게 된다. 그래서 4월 4일이나 5일에 드는 청명(淸明)날과도 같아지는 수도 있고 현재의 식목일과 같아지는 수도 있다. 한식의 풍습은 고대 중구에서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 보는데 그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晋)나라에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문공(文公)이 와이 되기 전에 공자(公子)로서 망명을 하여 외지에서 떠돌고 있을 때 19년 동안이나 갖은 고생을 다하며 문공을 극진히 모셨던 충신이다. 그런데 문공이 자기 나라인 진(晋)에 돌아와서 왕이 되었으나 개자추 에게 봉록(封祿)을 주지 않고 소홀히 대하자 개자추는 홀어머니와 함께 산중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숨어 살았다. 왕이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개자추를 찾았으나 그는 산중에서 나오지 않았다. 왕은 이에 한가지 꾀를 내어, 개자추가 숨어 있는 삼에 불을 지른다면 불 때문에 산을 빠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에 불을 지르고 개자추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으나 산의 나무가 완전히 타서 재가 될 때까지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불꺼진 산을 뒤지니 개자추는 홀어머니와 서로 껴안은 채 버드나무 밑에서 타 죽어 있었다. 왕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개자추가 죽은 이 날 불을 쓰기를 껴렸으니 자연히 밥도 짓지 못하고 미리 지어 놓은 식은 밥을 먹게 되어서 한식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말이 전한다.


 

 

2. 한식의 풍속

한식날에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과일과 떡 고기 술 등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한식차례(寒食茶禮)라고 한다. 또 이날 산소가 헐었을 때에는 흙을 다시 더하고 잔디도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改莎草)라고 한다. 또한 이날 무덤 둘레에 좋은 나무를 골라 심기도 한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리 조상을 깊이 숭배하여 집안에서는 기제사(忌祭祀)를 극진히 모시고 산소에도 열심히 성묘를 드리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성묘는 한식과 추석에 가장 성하다. 한식 때가 되면 농촌에서는 새해의 농사가 시작되어 매우 바쁘게 된다. 논. 밭갈이가 시작되고 벼모판 만들기, 보리밭 매기, 무 배추 고추등 채소씨를 뿌려서 새해 농경의 준비르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에 농가에서는 나무도 심는데, 한식날은 현재의 식목일과 겹치거나 하루차이여서 오늘날의 식목 행사에 해당되는 셈이다. 한편 이날 천둥이 치면 그해 농사가 흉년이 들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 닥친다고 해서 매우 꺼려한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천둥과 벼락을 하늘이 노해서 내리는 벌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농사가 시작되는 새해에 천둥이 치는 것을 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때에 비가 내리는 것은 나무를 심은 후이기 때문에 더없이 적합한 일이기도 하다. 이 한식날 제주도에서는 어민들이 문앞에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그해의 풍어(豊漁)를 비는 풍습이 있고 황해도 지방에서는 논의 샘물 나오는 곳이나 밭의 돌담에 밥을 해가지고 가서 '둑직이'에게 제(祭)를 지내기도 한다. 둑직이는 논이나 밭에 있는 큰 구렁이를 말한다. 구렁이는 일반 농가에서도 '업구렁이'라 하여 집안의 살림살이, 즉 재물을 늘려주는 동물로 여기기도 하는데, 이는 구렁이가 곡식을 저장해 두는 곡간에서 그 곡식을 축내는 쥐들을 잡아 먹어 결과적으로 곡식을 지켜주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논이나 밭에서 구렁이를 둑직이로 위해 주는 것은 집안의 구렁이를 업구렁이로 위해 주는 것과 같은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한식날은 조상의 산소를 가꾸고 성묘하는 것을 큰 일로 여기기 때문에 이날에 따르는 특별한 놀이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가족들이 함께 헤쳐진 조상의 무덤에 흙을 덮고 잔디를 씌우며 주위의 잡풀을 뽑은 등 묘역을 단정히 하고 또 좋은 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꾸미는 마음은 즐겹고 흐뭇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성묘를 마치고 가족 또는 집안 친척들이 함께 앉아 가지고 온 술이며 고기 과일 등을 먹으며 화목하게 보내는 것은 어떤 봄놀이에도 비할 것이 아니다. 한식 때가 되면 이미 산과 들에는 꽃이 피기 시작하고 풀이 돋아나 농촌에서는 특히 희망에 부푸는 때가 된다.


 

 

 

사월초파일


 

 

 4월 8일은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라고 전해지며, 욕불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흔히 초파일이라고 한다. 초파일에는 절을 찾아가 재를 올리고 연등하는 풍속이 있다. 초파일을 여러 날 앞두고 가정이나 절에서는 여러 가지 등을 만든다. 이 때 가정에서는 가족의 수대로 등을 만든다. 초파일 며칠 전부터 뜰에 등간(燈竿)을 세워 두고 간상(竿上)에 꿩 꼬리털을 꽂고 물들인 비단으로 기를 만들어 다는데, 이를 호기(呼旗)라고 한다. 이 호기에 줄을 매고 그 줄에 등을 매단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등간을 만들지 못하는 집에서는 나뭇가지나 혹은 추녀 끝에 빨래 줄처럼 줄을 매고 그 줄에 등을 매달아 두기도 한다. 그리고 초파일 저녁이 되면 등에 불을 밝힌다. 이 등석 행사는 그 이튿날인 9일에 그치는데, 부유한 집에서는 큰 대를 수십개씩 얽어매어 쓰기도 하고 해와 달의 형상으로 만들어 꽂아서 바람에 따라 굴러 돌게 하기도 하며, 굴러 돌아다니는 등[轉燈]을 매달아서 그 등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마치 탄환이 달아나듯 하게도 한다. 때로는 종이에다 화약을 싸서 이것을 노끈이나 또는 새끼줄에 얽어매어 불을 당기면 터져서 꽃불같이 비오듯 하게도 하고, 종이로 용을 만들어 바람에 날려 띄우기도 하며, 또는 인형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얽어 띄워서 요동케 하여 놀기도 한다. 또 옛날 각 상점에서는 등대를 서로 높이 세우려고 다투어 승부삼아 만들기도 한다. 등의 모양은 과실, 꽃, 어류 또는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을 본떠서 만들기 때문에 그 이름만 해도수박등?마늘등?참외등?연화등?목단등(牧丹燈)?잉어등(鯉魚燈)?거북등?봉등(鳳燈)?계등(鷄燈)?학등(鶴燈)?오리등?일월등(日月燈)?선인등(仙人燈)?칠성등(七星燈)?고등(鼓燈)?누각등(樓閣燈)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등에는 '태평만세(太平萬歲)' '수복(壽福)' 등의 글을 쓰기도 하고, 기마장군상(騎馬將軍像)이나 선인상(仙人像)을 그리기도 한다. 또 화약을 층층으로 새끼줄에 매달아 불을 붙이면 불꽃이 튀면서 퍼지는데, 이러한 놀이로 흥을 돋우기도 하고 때로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줄에 매달아 바람에 흔들리게 하여 놀기도 했다. 그런데 등을 달았을 때 불이 환하게 밝으면 길조로 해석한다. 이러한 풍속은 신라의 팔관회에서 시작되었으며, 고려 초에는 정월 보름과 2월 15일에 행하다가 지금은 4월 초파일로 고정되었다. 연등 행사는 불교의 습속이므로 원래는 불료 신도들에 의해서 행해지던 것이나, 지금은 일반화해서 민간에서도 성행되는 것은 그만큼 불교의 전파를 뜻하며, 신도가 아니라도 연등을 구경하는 사람으로 성황을 이룬다. 요즈음도 초파일에는 불도들의 대대적인 연등 행사가 도시의 거리를 누비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때에 정월 15일날 등을 달아매는 일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顯宗(현종)(A.D 1010)때에는 2월 15일에 燃燈會(연등회)를 거행하고 그후로 관례가 되었다가 高宗(고종)(A.D 1214)떼부터 초파일에 연등했다. 이씨 조선 왕조에 들어와는 고려시대처럼 공의로 정해서 연등하는 일은 없고, 민간에서 세시풍속으로 전해 왔다. 초파일을 명절로 여기고 연등을 하여 다채로운 행사가 거행 되기에 이르렀으며 태종 12년의 상원 연등때에는 용봉호표의 모양으로 등을 만들어 장식한 일이 있다. 성종 6년(A.D. 1475)초파일의 연등시에는 집집마다 수없이 등을 달았는데 새, 짐승, 물고기, 용등의 온갖 모양의 등들이 사치스럽고 절묘했다고 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초파일에 세우는 연간은 여자의 수대로 하고 남보다 크고 높기를 바라는데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등간 위에는 꿩의 깃을 꽂아 길상을 표시하고 울긋불긋한 천을 매달았다. 바람이 불때 휘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연의 종류는 매우 많아서 마늘, 연꽃, 수박같은 채과의 모양을 딴 것과, 학, 잉어, 자라, 거북과 같은 동물 모양의 등도 있었고, 병, 항아리, 북같은 기물의 모양을 한 등도 있었고 칠성연, 수연도 있었다.

塔(탑)돌이

4월 초파일인 佛誕日(불탄일)과 중추가절인 한가쉿날에는 塔(탑)돌이가 있었다.불탑의 건립은 석가모니가 入寂(입적)한 뒤, 그 유골을 넣어두기 위해 여덟 개의 탑을 세운데서 비롯한 것이므로 탑은 곧 불료의 상징인 셈이다. 佛寺(불사)에서 大齎(대재)가 있으면 신도들은 공양을 올린다. 이때에 염불. 梵音(범음) 梵唄(범패)가 따르며, 재가 끝나면 신도는 승려와 함께 불탑을 돌면서 부처님의 공덕을 빌고, 또 저마다의 기원을 비는 것이다. 일신의 왕생극락은 물론 국태민안을 빌어 태평성대를 누리고자 했다. 큰 재일수록 많은 신도들이 모이며 따라서 탑돌이도 성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윽한 法音(범음)에 맞춰 제각기 소원을 외면서 탑을 도는 모습은 엄숙했었다. 탑돌이 때 처음에는 梵鐘(범종) 鼓(고) 雲板(운판) 木魚(목어)의 四法樂器(사법악기)만 쓰이다가 후에 三弦六角(삼현육각)이 합쳐지고, 報念(보염)과 百八精進歌(백팔정진가)를 부른 것을 보면 처음에는 순수한 불교의식이던 것이 차츰 민속화해서 민중 속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60면 전까지만 해도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에서 탑돌이가 성대하게 거행 되곤 했으나, 이제 탑돌이 민속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는 듯하다. 근래에 탑돌이를 재현하는 경향이 있어 法主寺(법주사) 月精寺(월정사) 佛國寺(불국사)등에서는 탑돌이를 한 바 있다.


 

사월의 시식

 이 계절의 미각을 신선하게 해주는 시식(時食)으로는 花煎(화전) 魚菜(어채) 미나리강회 파강회 蒸餠(증병)등이 있다. 화전은 찹쌀가루에 장미꽃 잎을 섞어 반죽하고, 원형이나 반원형으로 만들어 기름에 튀긴 것인데, 기름에 튀기기 때문에 油煎(유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채는 생선을 익히지 않고 날 것으로 썰어 여기에 파.송이버섯. 전복. 달걀등을 넣어 부친 지단에 국화잎 등을 가늘게 썰어 버무린 후, 기름과 초를 쳐서 시원하게 먹는 것이다. 파강회는 파를 데친 뒤 날고기를 속에 넣고 감아서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며, 미나리강회는 미나리를 데쳐서 속에 날고기를 넣고 파강회처럼 만들어 먹는다. 이때에 쇠고기인 경우에는 날고기를 쓰지만 돼지고기일 경우에는 삶아서 사용한다. 이 시식들은 家度(가도)와 솜씨에 따라 양념을 달리하기 때문에 맛이 각각이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떡을 파는 집에서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한 조각씩 떼어서 술을 넣고 부풀어 오르게 해서 마치 방울처럼 만든다. 그리고 삶은 콩으로 소를 만들어 꿀을 섞어서 방울떡의 속에 넣는다. 그 위에 씨를 뺀 대추의 살을 썰어 발라서 찐 것을 蒸餠(증병)이라고 한다. 청빛을 낼 때에는 當歸(당귀)의 잎을 가루로 만들어 섞어서 만든다. 또 생선을 두텁게 썰어 쇠고기를 싸서 魚(어)만두를 만든다. 열양세시기에 의하면 葦魚(위어)는 모양이 좁고 길고 머리가 갈대잎 같으므로 葦魚(위어)라 부른다. 기름지고 고기가 연해서 보통 고기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4월 초에 湖水(호수)를 따라 바다로 통하는 강구에 종종 있으며 王都(왕도)가 아닌 곳에서는 볼 수가 없다. 扶餘(부여)나 開城(개성)에서도 때로 잡히나 변변치 못하고, 오직 漢陽(한양)의 杏州(행주)에 많다. 해마다 입하 무렵이 되면 왕으 식사를 맡는 사옹원에서는 관원을 보내어 잡아다 진상했다.


 

 

 

단오


 

 

   5월 5일은 단오, 수리, 천중절, 중오절, 단양, 수릿날 등의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옛날엔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날이었으나 지금은 농촌의 명절로 되어 이날이면 각 가정에서는 수리치떡 등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단오 차례를 지내기도 하고, 여자는 창포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남자는 씨름등의 놀이로 하루를 즐긴다. 옛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등 월일이 홀수이면서 같은 숫자가 겹치는 날을 대개 명절로 정해 즐겨 왔지만, 그 중에서도 5월 5일은 양기가 가장 강한 날이라 하여 큰 명절로 생각해 왔다. 이날을 수리 또는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이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게 된 유래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이날 쑥떠ㅗ?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라고도 하고, 수리치로 떡을 해먹었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기도 하며, [수리]란 고.상.신 등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어인데, 5월 5일이 [신의 날], [최고의 날]이란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유두절


 

 

   6월 15일을 유두날이라고 한다. 유두란 말은 [동류두목욕]이란 말의 약언이다. 유두날에는 맑은 개울을 찾아가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으며 하루를 정유한다. 그러면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유두의 풍속은 신라 때에도 있었으며, 동류에 가서 머리를 감는것은 동방은 청이라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두날 선비들이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계곡이나 수정을 찾아가서 풍월을 읊으며 하루를 즐기는 것을 유두연이라고 한다. 유두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므로 수박.참외 등을 따고 국수와 떡을 만들어 사당에 올려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유두천신]이라고 한다. 추원보본사상이 강했던 옛날에는 새 과일이 나도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조상에게 올린 다음에 먹었는데, 이것은 조상의 은혜를 잊지 않고 지극한 효성을 드린다는 성실한 마음씨의 표현이다. 유두날의 음식으로는 유두면.수단.건단.연병 등이 있다. 유두 국수를 먹으면 장수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먹는다. 옛날에 유두날이면 잡귀의 출입을 막고 액을 쫓는다고 하여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슬처럼 만들고 색으로 물들여 세 갰기 포갠 후, 색실로 꿰어서 허리에 차거나 대문 위에 걸어두는 민속도 있었다. 수단은 찹쌀가루를 쪄서 손으로 비벼 구슬처럼 만든 후, 찬물에 넣어 꿀물을 타서 먹는 것이며, 찬물에 넣지 않고 먹는 것은 건단이다. 때로는 맵쌀이나 밀가루로 만들기도 하나 찹쌀로 만든 것이 부드럽고 연하며 매끄럽고 맛도 있다. 연병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판 위에 놓고 방망이로 문질러서 납작하게 만든 다음, 기름에 튀기거나 깨와 콩을 묻혀 꿀을 발라서 만든다. 유두날 아침에 천둥이 치면 그것을 가리켜 [유두 할아뱅이가 운다]고 한다. 유두날 떡을 해 가지고 논에 가서 물꼬 밑과 논둑 밑에 한 덩이씩 놓아 두는데, 물이 새지 말고 농사가 잘 되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때로는 떡을 해다가 논이나 논두렁에 뿌리는 수도 있는데 풍년 들라는 뜻에서 하는 것이다. 유두날 팥죽을 쑤어 먹으면 풍작이 된다고도 전한다. 성종 원년(A.D. 1470)여름에 명나라의 사신이 들어왔다. 마침 6월 유두일에 맞이하게 되었는데, 승정원에서는 상계하기를 [6월 15일은 옛부터 내려오는 유두의 명절이요 세조 때에도 명의 사신이 본국에 있을 때 만일 명절날을 맞이하면 그들을 불러 한강에서 위로연을 열거나, 태평관에서 위로연을 열었습니다. 이번에도 명의 사신이 서울에 있으니 청해다가 위로연을 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이 말에 연회를 열라고 명한바 있다.


 

 

 

삼복더위


 

 

 

   하지부터 세째 경일을 초복, 네째 경일을 중복, 입추부터 첫째 경일을 말복이라 하며 이들을 통틀어 삼복이라 한다. 이때 더위를 삼복 더위라 하며, 1년 중 더위가 가장 심한 때이다. 복중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술과 음식을 마련해 가지고 계곡이나 산정을 찾아가서 더위를 잊고 하루를 청유한다. 옛날에는 더위에 대처하라는 뜻에서 복중에 궁중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를 주어 궁의 장빙고에가서 얼음을 타가게 하였다. 복중에 더위를 막고 보신을 위해 먹는 음식으로는 계삼탕과 구탕이 있다. 햇병아리를 잡아 인삼과 대추와 찹쌀을 넣고 고은 것이 계삼탕인데, 땀을 많이 흘리면 원기가 없어지므로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가정에서나 음식점에서 많이 한다. 구탕은 특히 복날에 먹어야 보신이 되고 벽사도 하며 질병도 쫓고 더위를 잊게 된다고 해서 먹는다. 구탕은 식성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으나 대개 복날이면 먹는다. 그래서 일명 보신탕이라고 까지 부르고 있다. 구탕은 개를 잡아 통째로 고아 만드는데, 이때 파를 넣어서 고면 냄새가 없으며, 보리밥을 말아 먹기도 한다. 복날에 팥죽을 먹는 곳도 있다. 사람들은 팥죽이 사악한 악귀를 물리치는 음식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무더운 복중에 악귀를 쫓고 무병하려는 데서나온 풍습이다. 이때 팥죽에는 찹쌀로 구슬처럼 새알 수제비를 만들어 넣는다.


 

 

 

칠월칠석


 

 

  7월 7일을 칠석이라고 한다. 이날 저녁에 처녀들은 직녀성에다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었으며, 글 공부하는 소년들은 두 별을 제목으로 하여 작시를 했다. 이렇게 소년 소녀들이 칠석날 밤 견우성과 직녀성을 숭앙하며 경건히 지낸 것은 다음과 같은 애틋한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견우와 직녀는 은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은하에 다리가 없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어 사랑의 회포를 풀 길이 없었다. 견우와 직녀의 이 딱한 사정을 알고 해마다 칠석날이 되면 지상에 있는 까치와 까마귀가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에다 오작교란 다리를 놓아 준다. 그러면 견우와 직녀는 다리를 건너와 1년에 한 번 만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의 회포를 다 풀기도 전에 새벽 닭이 울고 동쪽 하늘이 밝으니 다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견우와 직녀는 또 다시 1년 동안 베를 짜고 밭을 강면서 고독하게 보내야 한다. 칠석날 세상에는 까마귀와 까치가 하나도 없으며, 어쩌다 있는 것은 병들어 하늘에 가서 오작교를 놓는데 참여하지 못하는 새들 뿐이라고 한다.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 기쁨의 눈물이라고 하며, 이튿날 새벽에 비가 오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전한다. 또 7월엔 옷과 책을 볕에 말리는 풍습이 있다. 여름 장마철 내내 장롱에 넣어 둔 의류는 습기가 차서 좀이 쏠거나 썩기 쉬우므로 햇볕에 말리는 것이다. 7월 7일쯤 되면 장마철도 지나는데, 그때 말려두면 옷과 책이 별탈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으므로 이때에 말리는 것이다. 칠석날 새벽에 부녀자들은 참외, 오이 등의 초과류를 상에 놓고 절을 하며 여공이 늘기를 빈다. 잠시 후에 상을 보아 음식상 위에 거미줄이 쳐 있으면 하늘에 있는 선녀가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여공이 늘 것이라고 기뻐한다.


 

 

 

백중


 

 

  7월 15일은 「백종일」.「백중절」또는 「망혼일」.「중원」이라고 한다. 이날 승려들은 사원에서 재를 올려 부처에게 공양을 한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우란분재를 벌여 속인들도 공양을 했으나, 이조 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승려들말의 행사가 되었다. 백종일에 사람들은 조상의 사당에 천신을 드리며,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긴다. 농촌에선 백종일을 전후해서 시장이 섰는데, 이를 「백중장」이라고 했다. 즉, 이는 백종 시장이라느 뜻이며, 머슴을 둔 가정에서는 이날 하루를 쉬게하여 물건을 사거나 취흥에 젖게 한다. 그래서 백종일을 전후해서 여러 곳에 씨름판이 벌어지거나 흥행단이 모여들기도 한다. 망혼일이라고 하는 것은 백종일 밤에 술과 고기.밥.떡.과실 등 많은 것을 차려놓고 망친의 혼을 불러들여 제를 지내는 까닭이다. 백종이란 말은 이 무렵에 과실과 소채가 많이 나기 때문에 제물을 백가지를 차린다 해서 나온 것이다. 또한, 이날은 그 해에 농사를 잘 지은 집의 머슴을 소에 태우거나 가마에 태운 후, 위로하고 흥겹게 놀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백종일에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 산소에 벌초를 하고 성묘도 한다. 백종일은 일손을 쉬고 노는 날이지만, 제주도에서는 바다일을 더 많이 한다. 즉, 백종날 살찐 해물들이 많이 잡힌다고 해서 모두 바다로 나간다. 밤에는 횃불을 들고 늦도록 해산물을 따는 것이다. 승가에서는 백가지의 꽃과 음식을 차려놓고 우란분재를 개최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공야이다. 서울의 여승들이 있는 절에서는 부녀자들이 찾아와 죽은 부모의 영을 부르면서 제사를 지낸다. 때로는 승려들이 거리에 탁자를 놓고 음식을 차려 우란분재를 열기도 한다. 이때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구경하게 되므로, 성종 때에 금지시켰던 일도 있다. 죽은 사람의 망령을 위로하는 것의 유래는 아래와 같다. 부처님의 제자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죽어 극락으로 가지 못하고 악귀가 되어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부처님이 우란분재를 열어 백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어머니께 공양하라고 말하였다. 이런 일로 인연해서 백중날에 부모를 위하여 공양을 하게 되었다. 명종 때에 쌀밥을 지어 가지고 강가에 가서 고기에 주고 방생을 한 일이 있으며, 천한 사람들끼리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추석


 

 

1. 추석의 의의

   한가위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었던 만월의 명절이다. 달의 고마움에 감사하고 달을 위했으며 떡을 해도 달떡을 했다. 달을 의식하는데 있어 중국에서는 만월을 상징하는 월형의 월병을 만들었으나 우리는 송편이라 해서 반월형의 떡을 했다. 얼을 숭상하여 달에게 소원을 비는 민간신앙을 가지면서 반월을 채택한 것은 반월이 일일성하므로 발전의 상징으로 본데서 온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으이 도성명에 반월성이 많은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둘째는 만월야를 계기로 사람이 신에게 대한 제의가 있었다. 올게심니를 해서 풍년에 감사하고 또 명년의 풍작을 기대했으며 밭고랑을 기는 행위도 소박한 기풍행위의 하나이다. 농경민족의 최대소원은 풍작을 이루는 일이기에 한가위를 기해서 신에게 청하고 감사했다.

세째는 오락을 풍성하게 했다. 풍작의 소원을 이루었고 포식하고 나니 할일은 놀이를 즐기는 일이다. 농부들에 의해서 소놀이, 거북놀이, 농악, 씨름이 행해지고 부녀자들에 의해, 강강술래,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 가마싸움등의 놀이가 흥겹게 있었다. 이러한 놀이는 만월과 풍작을 즐기는 축제이기도 했다.

네째, 한가위는 혈연간의 화목을 확인하고 추원보본의 실천의 계기가 되었다. 분산되어 사는 혈연들이 집결해서 협동하고 화목하며 같은 조상의 제의에 참여하는 기쁨이 있었다. 효란 인간원래의 일이지만 명절을 맞이해서 천신하고 명전에 경건하게 절하므로 은혜를 생각하고 보답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귀성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유교가 들어와 생활화됨에 따라 강조된 것이라 믿어진다. 한가위를 명절로 여기는 민속은 외래적인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에 있어 달고 관련있는 것으로 전승되어 왔으며 농경시대에 들어와서 기풍예측 풍작에 감사하는 의식이 첨가되고 유교시대에 들어 추원보본하는 조상숭배 의식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추속 풍속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의미를 갖는다. 산업사회가 가족의 분산을 초래하였으나 추석은 분산된 혈연이 집합하는 계기가 되고 따라서 혈연간의 협동과 화목을 다지는 핵의 구실을 하고 있다. 물질만능의 박정한 현대인들도 한가위가 되면 정이 솟아 친족에게의 선물과 조상에의 차례용의 제수감을 사들고 고향을 찾고 있다. 여기에 우리 생활의 일명이 있어 좋다.


 

2. 추석의 풍속

벌초

8월에 들어 한가위날이 밝아오면 낫을 갈아 가지고 조상의 묘에 간다. 여름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주기 위해서인데 벌초라고 한다. 옛날 조상의 묘를 풍수설에 의하여 명당에 쓰기 위해서 몇 십리 밖의 먼 곳에 까지 가서 쓰는 수가 많았고, 또 묘를 쓴 다음 먼 곳으로 이사가는 수도 있기 때문에 묘가 집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먼 길일지라도 벌초하는 것은 자손의 효성의 표시와 도리로 여겼다. 한가위 때에 성묘를 와서 별초도 안했으면 보기에 흉할 뿐 아니라 불효의 자손을 두었거나 임자 없는 묘라 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가위에 앞서 벌초를 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차례

가위날 이른 아침에 사당을 모시고 있는 종가(宗家)에 모여 고조(高祖)까지의 차례를 지낸다. 차례 지내는 절차가 설날과 다른 것은 흰떡국 대신 메[밥]를 쓰는 점이다. 조상에 대한 추원 보본(追遠報本)과 천신제(薦新祭)를 겸하였기 때문에 제물은 신곡으로 만들어 진열된다. 고조 이상의 윗대는 10월에 시제라 해서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원놀이?가마싸움

옛날 서당 교육은 훈장을 초빙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명절이 되면 훈장도 고향에 가서 차례 성묘를 하게 되므로 서당은 며칠을 쉬게 되고 학동들은 자유롭게 놀 수가 있었 다. 이럴 때에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와 가마싸움이 있게 된다. 원놀이란 학동들 중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재치 있는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 은 백성이 되어 원님께 소장을 내어 그 판결을 받는 놀이인데, 오늘날의 대학에서 행해지는 모의 재판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이 때에 현명하고 지혜로운 원님은 사건을 잘 해결하지만 서투른 원 님은 백성들의 놀림감이 된다. 장차 과거에 등과해서 벼슬을 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할 학동들의 놀이로서는 매우 적격이었다. 가마싸움도 학동들이 주가 되어 행하여졌다. 훈장이 없는 틈을 타서 가마를 만들어 이웃 마을 학동들과 또는 이웃 서당의 학동들끼리 대결을 하는 놀이이다. 가마를 끌고 넓은 마당에 나아가 달음질해서 가마끼리 부딪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되는데 이긴 편에서 당년에 등과가 나온다고 한 다.

반보기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일자와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 을 반보기라 한다. 옛날에 시집간 여자들은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녀 사이에 중간 지점을 정해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 한나절 동안 그 동안 나누지 못했 던 회포를 푸는 것이 반보기인 것이다. 또 한 마을의 여인들이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경치 좋은 곳에 집단으로 모여 우정을 두터이 하며 하루를 즐기는 수도 있다. 이 때에 각 마을의 소녀들도 단장하고 참여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며느릿감을 선정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반보기란 중로 (中路)에서 상봉했으므로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올게심니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가 묶어 기둥 이나 대문 위에 걸어 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고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주찬(酒饌)을 차려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푸는 수도 있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 당에 천신하거나 터주에 올렸다가 먹는다. 올게심니를 하는 것은 다음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 는 기원의 뜻이다.

밭고랑 기기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연령 수대로 밭고랑을 긴다. 이 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그 아 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는 것이다.


 

 

 

중양절


 

 

  9월 9일을 중구(重九) 또는 중양(重陽)이라고 부른다. 중구란 말은 9가 겹쳤다는 뜻이며, 중양이란 양수(陽數)가 겹쳤다는 것이다. 기수(奇數)는 양수(陽數)이기 때문이다. 각 가정에서는 국화 꽃잎을 찹쌀가루와 반죽하여 단자를 만들어 먹는데 이를 국화전이라 한다. 봄의 진달래 화전과 함께 9월의 시식으로서 빼놓을 숭 없는 이 국화전은 가을의 미각을 새롭게 한다. 또 술에 국화를 넣어서 국화주를 빚기도 하는데 그 향기가 일품이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단풍이 든 산이나 계곡을 찾아가서 장만해 온 술과 음식을 들면서 단풍놀이를 한다. 이때는 부녀?소년?소녀?농부들이 제각기 떼를 지어서 하루를 즐기는데, 문인들은 시를 짓고 풍월을 읊어 주흥을 내기도 하낟. 요즈음도 이때가 되면 각급 학교에서 가을 소풍을 가는데 이것은 오랜 전승(傳承)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울에서는 남산(南山)과 북악(北岳)에서 마시고 먹고 하루를 즐긴다. 등고(登高)하는 옛 풍속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 근교의 남한산(南漢山), 북한산(北漢山) 수락산(水落山) 도봉산(道峰山)등의 단풍도 볼만했다. 즉, 문(門)안 사람들이 4대문 밖의 높은 산에 올라가 청유(淸遊)를 즐겼다.


 

 

말날


 

 10월의 오일(午日)을 「말날」이라 하여 특별히 말을 위하는 풍속이 있다. 이날이면 팥떡을 해서 마굿간 앞에 차려놓고 말의 무병과 건강을 비는 고사를 지냈다. 우리 민족은 가축 중에서 말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위했기 때문에 때로는 말을 위한 고사까지 지낸 것이다. 말은 옛날에 가장 좋은 장거리 교통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노동력을 농사일에 이용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가축에 비해 영리해서 주인을 따랐으므로 말을 수중히 여기고 제사까지 지낸 당시의 풍속을 이해할 만하다. 조선 시대의《시용향약보(試用鄕藥譜)》에는 마제(馬祭)때 부르던 노래인 「군마대왕(軍馬大王)」이 전해지고 있다. 10월응 말말 중에서도 무오일(戊午日)을 상마일(上馬日)로 쳤는데 그것은 무(戊)와 무(茂)가 음이 같아 무성(茂盛)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였으리라 믿어진다. 또 말날 중에서도 병오일(丙午日)일 때에는 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역시 병(丙)과 병(病)의 음이 같아 말의 병을 꺼려한 데서 생겨난 것이라 믿어진다. 어떤 지방에서는 말날에 시루떡을 해서 외양간과 모든 방에 차려놓고 주인의 생기복덕을 비는 굿을 하거나 안택(安宅)을 하기도 한다. 또 햇곡식으로 떡을 하고 음식을 마련해서 굿을 하기도 하며, 전라북도 지방에서는 이날 상주 단지에 신곡(新穀)을 강아 넣는다. 오일(午日)에 떡을 해서 상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족(家族)이 모여 함께 먹는데 말일병(馬日餠)이라고 한다.


 

 

하원


 

10월 보름을 하원이라 하며 일년 중 달이 밝은 때이다. 하원의 달이 서산에 완전히 지고 날이 새면 그해의 시절이 길하고 그렇지 않으면 흉하다고 한다.  <전남>


 

 

손돌풍


 

 

  10월 20일에 관례적으로 불어오는 심한 바람을 [손돌풍] 또는 [손석풍]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사공 손돌이가 임금이 탄 배를 저어 통진.강화 사이를 가게 되었는데, 풍랑에 밀려 매우 곤란한 지경에 이르자 임금은 다른뜻이 있다 하여 손돌이의 목을 베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이곳을 [손돌목]이라 부르며, 이 날이면 해마다 으레 강풍이 심하게 부는데,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한이 바람이 되어 분다고 해서 손돌풍이라 불렀다. 강화도 사람은 손돌풍이 불 때에는 배를 타지 않는다. 손돌목은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곳으로 바다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어서 지금도 배가 지나려면 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다.


 

 

 

납향일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미일(未日)인 납일에 그해에 지은 농사 형편과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신에게 고하는 제사를 납향이라고 한다. 납일 밤에 농촌에서는 새잡기를 하는데, 서너 명의 청소년이 패가 되어 그물을 가지고 어두운 밤에 새가 사는 지붕 추녀를 찾아다니며 새를 잡는다. 그물을 새 구멍있는 추녀에 대고 막대기로 추녀를 호되게 치면 새가 놀라 나오다가 그물에 걸린다. 또 새가 많이 자는 숲에 가서도 이렇게 해서 잡는다. 납일으 새고기는 맛이 있을 뿐 아니라, 아이가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납일에 새를 잡으려고 애를 쓴다. 이날 내린 눈은 약이 된다고 해서 곱게 받아 독에 담아 두기도 한다. 눈 녹은 물을 두었다가 김장독에 넣으면 맛이 변하지 않으며, 의류와 책에 바르면 좀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대로 두웠다가 환약을 달일 때 쓰기도 하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안질에도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납일에 궁중의 의약국인 내의원에서 환약을 만들어 헌납했으며, 나라에서는 각신(閣臣)에게 나누어 주었다. 엿을 고기도 하는데, 설탕이 없던 옛날에는 당분을 엿에서 얻었으니 엿을 만드는 일도 매우 중요 했다. 밥에 엿기름 물을 부어 삭힌 다음, 곁불로 밥이 물같이 되도록 끓이고 껏을 자루에 넣고 짜낸 다음 다시 끓여서 식으면 굳어져 엿이 된다. 엿을 고기 시작하면 이?날 새벽에 엿이 된다 내의원(內醫院)에서 이날 만든 약은 납약(臘藥)이라고 부른다. 청심환(淸心丸)은 정신적 장애를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고, 안신환(安神丸)은 열을 다스리며, 소합환(蘇合丸)은 곽란을 다스리는데 효과가 있다. 정조(正祖)는 새로 제중단(濟衆丹) 과 광제환(廣濟丸)이라는 환약을 만들게 하였으며, 모든 영문(營門)에 나누어 주어 군사들을 치료하는데 쓰도록 했다. 기노소(耆老所)에서도 납약(臘藥)을 만들어 여러 기신(耆臣)에게 나누어 주고, 각 관아에서도 만들어 나누어 주고 서로 선사하기도 하였다. 납향(臘享)에 쓰는 고기에는 산돼지와 산토끼가 있다. 기내(畿內) 산간(山間)의 부(部)에서는 옛날부터 대궐에서 납향(臘享)에 쓸 산돼지를 잡았다. 그런데, 점차 폐단이 생기자 정조(正祖)는 장안(長安)의를 포수(砲手)를 시켜 용문산(龍門山)과 축문산(祝門山)에서 사냥을 해서 진상토록 한 일도 있다.


 

 

 

섣달그믐


 

1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0일을 「섣달 그믐」 또는 「제석」,「제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중에 있었던 거래의 종결을 맺는데, 빚이 있는 사람은 해를 넘기지 않고 이날 모두 청산한다. 그래서 만에게 받을 빚이 있거나 물건값의 외상이 있는 사람은 이날 찾아다니며 받아야 하며, 만일 자정이 넘도록 받지 못한 빚은 하는 수 없이 정월 보름까지 독촉도 못하고 따라서 받을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