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묘
<2007년 10월 4일>
종묘(사적 제125호)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
하마비(下馬碑)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망묘루 -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부쳐진 이름이다.
공민왕 신당 -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어숙실 - 재궁(齋宮)이라고도 하며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어로 - 왕이 정전과 영년전으로 제를 지내기 위해 가던 길
전사청 -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이다.
제정 - 향제(享祭)에 사용되는 우물 이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찬게 특이하다. 네면을 담장으로 둘렀고, 남쪽에 팔작지붕의 일각문(一脚門)이 있다.
제관인 왕과 왕세자는 어숙실에서 재계(齋戒)를 한 후, 어숙실에서 정전과 영녕전 동문으로 난 어로를 따라 묘정에 들어와 각각 정해진 자리인 전하판위(殿下版位)와 세자판위(世子版位)에 이르러 제사를 올릴 예를 갖춘다. |
정전 남문 - 혼백이 출입하는 곳이므로 사람은 다닐 수 없다.
정전(국보 제227호)-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에 있다.
정전 동문 - 제례 때 헌관이 출입하는 동문은 정전 신문(神門)과 마찬가지로 지붕 용마루 높이가 같은 세칸 규모의 평삼문으로 되어있다. 어숙실 서협문에서 정전 동문으로 통하는 어로(御路)는 정전 동쪽 묘정에 닿는다. |
공신당 - 조선 왕조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동쪽에 있다.
영령전 남문 - 원형 주좌를 둔 주춧돌에 둥근 기둥과 간단한 초각을 한 익공, 두짝 판문 등 세부 구성은 정전과 거의 같다
영녕전은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을 느끼기에는 뒤지는 감이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더해 준다. |
천막을 고정시키는 고리
영령전 동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