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아름다운 구도자의 생 '회향'하다

淸潭 2007. 3. 11. 20:06
아름다운 구도자의 생 '회향'하다
▲ 15일 10시부터 조계사에서는 지난 11일 입적한 법장스님의 영결식이 있었습니다.
ⓒ2005 임윤수
지난 11일 새벽 입적한 조계종 총무원장 인곡당 법장 대종사의 종단장(宗團葬) 영결식이 15일 오전 10시부터 조계사에서 엄수되었습니다. 영결식에는 국내 종교계 지도자 및 정관계 인사들은 물론 스리랑카ㆍ태국 정부 관계자, 중국불교협회와 일한불교우호교류협회 인사 등 국내외 조문객들이 대웅전 앞마당은 물론 일주문 안쪽 및 오른쪽 불교역사문화기념관 앞마당을 가득 메워 추모의 마음들이 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영결식 중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모든 고통 내가 갖고 갈 테니, 여러분의 '만족의 보물'을 쥐고 신바람 나게 살라"는 스님의 생전 육성법문이 울려 나와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 추모객들이 대웅전 앞마당은 물론 불교역사문화관 앞마당까지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2005 임윤수
중생들을 위해 마지막 법구까지 기증한 조계종 총무원장 인곡당 법장 대종사의 아름다운 회향을 기리기라도 하는 듯, 식 중 때 아닌 오색 무지개가 떠올라 참석자들의 입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의미심장한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법장스님의 위패와 영정, 불자, 국민훈장 등은 영결식에 이은 간단한 의식에 이어 형형색색의 만장 행렬을 따라 수덕사로 이운되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일주문 앞 공터까지 추모객들로 빼곡하였습니다.
ⓒ2005 임윤수
구도자로, 종교지도자로 정말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남기신 법장큰스님의 영전에 마음의 삼배를 올리며, 그 애틋한 마음을 장문의 만사에 담아봅니다.

[아름답게 생을 회향하신 법장스님께 올리는 만사(輓詞)]

謹弔(근조)

▲ 생전의 스님 모습으로 누구를 만나든 환한 웃음을 주셨습니다.
ⓒ2005 임윤수


뗑그렁~ 뗑그렁~

산사의 처마 끝에서 울려주는, 청량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같은 맑은 소식이었습니다. 불가의 전통으로, 거역할 수없는 관행처럼 세습되던 스님의 입적에 따른 다비라는 굴레를 아주 신선하고도 큰 울림으로 벗어내는 듯한 벅차고도 기쁜 그런 소식이었습니다.

화두를 잡고 있던 수도승이었다면 그 화두를 깨치는 돈오의 순간처럼 느껴졌을 게 분명합니다. 지난 11일 황망히 원적에 드신 법장스님의 법구(시신)가 생전의 유지대로 후학들을 위해 기증된다는 소식이 눈물 찔끔하도록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진정한 '무'와 '회향'을 실천하다

어쩌다보니 그동안 많은 스님들의 다비식장엘 다녀왔습니다.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장대하게 마련된 연화대에 스님의 법구가 모셔지면 거화가 됩니다. 거화와 함께 연화대는 점차 사그라져가고, 형체를 찾을 수없는 연화대에서 느끼는 것은 무상과 허무였습니다. 그런 허무와 무상을 덜어보려 스님께서 남기신 좋은 말씀들을 더듬으려고 애도 썼습니다.

수많은 스님들이 그렇게 연화대에서 한줌의 재로, 알 수도 없는 그곳으로 그렇게 가버렸지만 그래도 그분들이 남기는 것은 분명 있었습니다. 오랜 구도생활에서 터득한 삶의 지혜거나 마지막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게송도 남기셨고, 수행의 결정체라고도 하는 사리도 남기셨습니다.

불교의식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독경되는 불경 중 하나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일 겁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현상계의 본질 차원인 공의 입장에서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각작용과 지각작용 그리고 의지적 충동과 식별작용도 없음을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이라고 일컬었습니다.

▲ 2003년 4월, 문경 봉암사에서 있었던 서암큰스님의 영결식에서 조사를 하고 계십니다.
ⓒ2005 임윤수
또한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 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등 주관 작용도 없음을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는 구절로 담고 있습니다. 불자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반야심경에는 이렇듯 유독 '없다(無)'는 말이 반복되듯 많이 나옵니다.

어찌 보면 '무'는 수행자가 추구하는 구도의 키워드이며 본질일지도 모릅니다. 소유하고 관계됨에서 오는 굴레가 바로 탐•진•치 삼독의 단초가 되고, 망상의 번뇌를 낳게 하는 원천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없음을, 없다는 것을, 없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인식하기 위해 이렇듯 반야심경에는 도돌이표라도 찍힌 듯 '무'를 반복하여, 없음을 강조하는 가르침으로 남기셨는지도 모릅니다.

구도자의 길을 걷고 계시는 대개의 스님들은 무소유를 강조하고, 무소유한 가시밭길 같은 고행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러다 정작 세수(世壽)를 다해 원적에 들게 되면 본의 아니게 뭔가를 남김으로 무가 아닌 유를 야기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스님이 남기신 사리는 공개여부 및 봉안장소로 알력이 되고 속인들의 입방아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스님이 남기신 유무형의 재산이나 영향권은 그 상속권을 놓고 시시비비가 걸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차라리 남기지 않았으면 시비 거리도, 입방아거리도 되지 않았을 텐데 남김, 유에서 파생된 갈등이며 망상의 싸움들입니다.

▲ 2003년 11월, 화성 용주사에서 있었던 정대큰스님의 영결식에서도 조사를 하셨습니다.
ⓒ2005 임윤수
불교에서는 '스스로가 쌓은 공덕이나 수행을 다른 사람들이나 살아 있는 생명에게 되돌리는 일'을 '회향(回向)'이라고 합니다. 회향! 얼마나 아름다운 의미며 마음입니까. 결코 녹록하지 않았을 그 공덕과 수행을 다른 사람이나 생명체에게 보상 없이 되돌리는 마음이자 의미니 이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의미가 흔치는 않을 겁니다.

솔선하는 구도자의 실천적 삶

이런저런 기도나 법회로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회향이야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정작 진정한 회향을 본다는 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본의 아닐지라도 시비나 분란거리를 남길 수도 있고, 스스로가 쌓은 공덕과 수행이 사람이나 여타의 생명에게 되돌려지지 않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거나 공고히 하는 도구의 역할만 하였다면 그건 진정한 회향도 아니며 숭고한 구도자가 추구한 그런 결과는 더더욱 아닐 겁니다.

토대와 공덕이야 본인이 쌓아야 하지만, 아름답고 숭고하여야 할 선배나 은사스님이 세수를 다해 현상의 세계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영가가 되었을 때, 그 원적을 진정 아름다운 회향으로 갈무리하는 것은 후학들의 역량이며 도리일 겁니다.

은사스님이나 선배스님의 명성과 높은 법력을 자신의 영향력 확장이나 심지어는 일신영달의 도구나 수단으로 이용하는 후학이나 제자스님들이 있다면 이는 부끄럽게도 유를 추구하는 얼치기 구도자며 구도자를 빙자한 모사꾼일 수도 있을 겁니다.

스님들 중에는 구성지고도 차분한 음성으로 염불 잘하는 스님도 계시고, 어려운 교리나 부처님 가르침을 구수한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재미있게, 귀에 쏙쏙 들어오게 법문 잘하시는 스님도 계십니다. 그런 스님, 염불 잘하는 스님의 염불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서러운 마음이 일기도 하고, 그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환희심이 찾아들기도 하며, 명경처럼 마음을 맑게 해 주어 근심 걱정을 다 잊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 2003년 11월, 전남 곡성에 있는 성륜사에서 있었던 청화스님의 영결식에 참석하셨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계십니다.
ⓒ2005 임윤수
법문 잘하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노라면 최면이라도 거는 듯 사람을 집중시키고 그 법문 속으로 빨아들이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연실 고개 끄덕이며 스스로의 과보를 뉘우치다 보면 저절로 눈물짓거나, 그 깨달음에 뿌듯해 하기도 합니다. 법문을 듣다보면 어느새 그 스님은 저만치 높아 보이고 거룩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그 스님의 행적이나 일상생활이 법문을 할 때의 그 내용과 맞지 않는 이중적 삶, 시기하고 질투하며 온갖 술수 다 부리는 속인의 삶과 다름없다면 그 스님의 거창한 법문은 가증스런 사탕발림으로, 애절하고 구성져 심금을 울리게 하였던 그 염불소리는 배신감을 불러오는 가성의 혀 놀림으로 느껴질 겁니다.

부처님의 커다란 가르침인 팔만사천 법을 줄줄이 암송하고, 그 뜻을 온전히 해석하며 해박하게 알고 있다한들 솔선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구도자의 법문은 살아있는 법문도 아니지만 진정한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되뇌는 법문이나 염불은 시대가 시대니 만큼 오디오시스템에 테이프나 CD를 돌리면 감정의 기복 없이 얼마든지 팔만사천 큰 법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을 감복시키고 감탄시키는 진정한 법문과 염불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솔선하는 구도자의 실천적 삶이며 솔선하는 적극적 모습입니다.

안타깝게도 법문에서는 자비와 보시를 말하지만 정작 솔선하지 않고, 무소유를 말하지만 유를 추구하다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는 그런 사례들도 가끔은 볼 수 있었습니다.

▲ 2004년 11월, 부산 범어사에서 있었던 석주큰스님의 영결식에서 큰스님의 영정이 담긴 안내장을 안고 애통한 표정으로 앉아 계십니다.
ⓒ2005 임윤수


다비장도 연화대도 없는 영결식장

'졸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총무원장 법장스님의 입적은 황망하기 그지없지만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이슬방울의 그 반짝임보다도 더 신선하고, 보석보다도 더 영롱하다는 형형색색의 수많은 사리나 장엄물에 비할 바 없이 훨씬 값지고 보배로운 가르침을 남기셨습니다.

지금껏 들었던, 여태껏 글을 통해 보았던 그 어떤 법문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실천적인 자비의 대행(大行)이며, 눈으로 보여주는 구도자의 실천적 무량보시였습니다. 세습 되듯 이뤄지던 불가의 다비식을 거침없이, 자칫 파계로 보일지도 모를 만큼 단호하고 당당하게 일탈한 스님의 마지막 보이심은 신선한 충격이며, 정말 옷깃을 여미게 하는 종교지도자의 표상입니다.

스님의 영결식장에는 다비장도 마련되지 않고 연화대도 보이질 않았지만 영결식장 어느 곳도 다비장 아닌 곳이 없었으며 연화대 아닌 곳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남기고 간 스님의 행적은 아름다운, 진정 아름다운 회향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 가슴마다 한 더미씩 쌓아놓고 가신 무형의 연화대는 자비심과 보시 행이 피어나는 불심의 연꽃일 겁니다.

그동안 보았던 많은 영결식들이 사그라짐을 보게 되는 무상의 다비였다면 스님의 영결식은 태어나고 나눠주는 보시의 대행(大行)으로, 근래 불교계에 일던 크고 작은 허물들 모두 거두고도 남을 만큼 큰 자비의 실천이었습니다.

구도자의 표상, 종교지도자가 남겨야 할 마지막 가르침을 너무도 또렷하게 보이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스님께선 비록 사리를 남기진 않으셨지만 또 다른 형태로 사리 아닌 사리를 세세인의 가슴에 남기셨습니다. 스님의 그런 아름다운 회향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마음의 등신불로 봉안될 것입니다.

▲ 진천에 있는 보탑사엘 들르셨다 보물로 지정된 백비를 둘러보고 계십니다.
ⓒ2005 임윤수


아름다운 회향이 무지개다리 되어

햇볕 쨍쨍한 맑은 하늘에 홀연히 맺혀진 오색의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스님이 남기신 그 아름다운 회향이 무지개다리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탄과 환희심도 주었습니다. 알알의 사리를 대신해 사바세계를 덮고도 남을 커다란 무지개다리 되어 그렇게 보이셨음을 기대하렵니다.

스님의 입적소식을 들은 어느 스님은 '스님께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며, 그 빚을 스님 생전에 갚아드리지 못함을 애달파하셨습니다. 그 스님에게 스님이 지워준 그 빚은 다름 아닌 자비의 빚이며 그 스님이 스님께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그 빚도 실천적 자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스님은 비록 스님생전에 여법한 자비행으로 마음의 빚을 갚지는 못했더라도, 대물림 되듯 물려받은 그 바지의 빚은 불자들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베푸는 마음으로 실천되고 솔선될 것입니다.

구도자였던 스님의 일생 회향은 너무 숭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한 숭고함을 손상됨 없이, 스님의 유지를 잘 받든 제자스님들 또한 그런 구도의 길, 그런 실천적 자비를 행하실 듯합니다. 영가의 몸이 되어 현상의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스님의 유지를 오롯이 지켜가는 제자스님들의 모습도 아름답고 존귀해 보입니다.

▲ 아름답게, 정말 아름답게 떠나는 스님의 그림자처럼 영결식장엔 오색무지개가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2005 임윤수


스님께서 보여주신 그 아름다운 회향이 세세곳곳에 만파되어 이승의 세계가 극락정토 되길 진심으로 기원해 봅니다. 아름답게, 정말 아름답게 회향하신 스님의 일생이 종파와 신앙에 개의치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 찔끔하도록 벅찬 감동을 주었습니다. 스님이 주신 그 감동은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에 희망과 행복으로 무성히 자랄 것입니다. 산사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때로는 목탁소리로, 가끔은 북소리나 종소리가 되어 제도의 등불이 되리라 믿습니다.

정말 숭고하고도 아름답게 구도자의 생을 회향하신 스님의 원적에 애통한 마음으로 심상(心喪)의 정례를 올립니다.

先山後人 林潤洙 哭再拜(선산후인 임윤수 곡재배)

/임윤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