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생활상식

‘돼지해’ 정해년(丁亥年) 풀이

淸潭 2007. 1. 1. 20:01

돼지는 부와 복을 가져다 주는 재물신


나라의 수도 정해주고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신통력 지녀…
소원풀이 제사의 대표적 희생양

 

재운(財運)을 상징하는 ‘돼지해’ 정해년(丁亥年) 새해가 밝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고, 어쩌다 돼지꿈을 꾸면 “재수 좋은 꿈을 꾸었다”고 기뻐했다.

장사하는 사람은 돼지가 새끼들을 품에 안고 젖을 물린 사진을 걸어 놓고 일이 잘되기를 빌기도 했다. 상점에는 새해 첫 돼지날(上亥日)에 문을 열면 한 해 동안 장사가 잘 된다는 속신도 있다. ‘돼지혈(穴)에 묘를 쓰면 부자가 된다’고도 믿어왔다. 이처럼 한국 사람은 예로부터 돼지를 부(富)와 복(福)의 상징으로, 돼지꿈을 재운과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석기시대 동물상, 조개더미, 토우, 토기 등 고고 출토유물에서 돼지의 조상 격인 멧돼지 뼈가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가축으로 길들여지기 이전에 야생의 멧돼지가 한반도 전역에 자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고자료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기록으로 봐서 약 2000년 전에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멧돼지의 외형은 뭉툭한 몸뚱이, 거친 털, 긴 주둥이, 조그만 눈, 빈약한 꼬리 등이 특징이다. 하지만 저돌(猪突)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성이 나서 날뛰며 반격이라도 하면 그 날랜 동작이란 노한 호랑이와 진배없을 정도이다. 멧돼지의 가장 무서운 것은 주둥이 밖으로 솟아난 예리한 견치이다.

수컷의 아래 견치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라 장대하게 되는데, 위턱의 것과 엇물려 갈리는 관계로 언제나 날카로운 칼날모양을 하고 있다. 멧돼지가 이것으로 공격하는 솜씨도 신묘할 정도다. 우리나라 멧돼지는 유럽 멧돼지와 달리 정수리에서 등줄기까지 긴 갈기털이 있다. 또 윗입술에서 뺨을 거쳐 목에 이르기까지 연한 빛깔의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멧돼지는 ‘먹성’과 ‘야성’의 화신으로 냄새 맡는 데 귀신이다. 몇 리 밖 엽총의 화약 냄새까지 식별해 낼 정도이다. 성깔이 신경질적이고 경계심이 강하며, 전광석화처럼 민첩하고 헤엄도 잘 친다.

신화적 신통력을 지닌 동물

돼지는 신화에서 신통력을 지닌 동물, 제의의 희생, 재산이나 복의 근원, 집안의 재신(財神) 등을 상징한다.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돼지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인 동시에, 나라의 수도를 정해주고 왕에게 자식이 없을 때 왕자를 낳을 왕비를 알려주어 대를 잇게 하는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왕편,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는 돼지가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과 고려의 수도 송악을 점지해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山上王) 편을 보면, 산상왕은 아들이 없었으나 돼지의 도움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보통 돼지가 아니라 하늘의 제사에 쓰이는 제물 돼지이다. 제물로 쓰인 돼지는 신통력이 있고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使者)의 상징으로도 나타난다. 희생에 쓰이는 돼지는 신이한 예언적 행위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 편에는 소지왕의 화를 면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정월 상해일을 근신하는 날로 인식한다.

제전의 희생

 

▲ 인간문화재 만봉스님의 그린 돼지.

굿이나 고사 등을 지낼 때 상 위에 돼지머리를 놓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돼지는 언제부터 제물로 쓰였을까? 돼지는 일찍부터 제전에 희생으로 쓰인 동물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희생으로 교시(郊豕·고구려때 제물로 사용한 돼지)에 관한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삼국사기’ 제사조에 보면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항상 삼월 삼일에 낙랑의 구릉에 모여 사냥하고 돼지와 사슴을 잡아 하늘과 산천에 제사한다”고 하였다.

‘동국세시기’ 십이월 납(臘)조에 보면 산돼지가 납향(臘享ㆍ동지 뒤의 셋째 미일에 지내는 제사)에 제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에도 무당의 큰 굿에서나 동제(洞祭)에는 돼지를 희생물로 쓰고 있다. 또 각종 고사 때는 어김없이 돼지머리가 등장한다. 이처럼 제전에 돼지를 쓰는 풍속은 멀리 고구려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도 전승되고 있는 역사 깊은 민속이다.

길상, 복, 집안의 재물신 상징

돼지는 길상(吉詳ㆍ운수가 좋을 징조)의 동물로 길조를 나타내며 재산이나 복의 근원으로서 집안의 수호신 또는 재신을 상징한다. 우리의 고대 문헌이나 문학에서의 돼지는 상서로운 징조로 많이 나타난다.

 

 

▲ 돼지 문화 열차

한국인은 꿈에 본 돼지는 대단한 귀물(貴物)로 친다. 돼지꿈은 용꿈과 같은 항렬이다. 한국인이 갖는 동물 꿈 가운데에서 돼지는 용과 더불어 최상의 길조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돼지꿈과 용꿈은 길몽의 쌍벽이다. 용은 알다시피 상상의 동물, 왕권의 상징이다. 따라서 그것은 권력을 나타낸다. 용꿈은 그래서 태몽 중 으뜸이다. 장차 크게 이름을 떨칠 사내애를 낳게 될 꿈이 바로 용꿈이다. 거기에 비해서 돼지꿈은 부의 상징이다. 집안에 모시고 믿음을 바치던 ‘업신’이 현실의 재물신이라면, 돼지는 꿈속의 재물이다. 어쩌면 돼지꿈은 용꿈보다 한 수 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돼지꿈은 단적으로 길조와 행운의 상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돼지는 다산(多産)까지 겸하고 있다.

돼지그림이나 돼지코는 번창의 상징이나 부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장사하는 집에서는 곧잘 돼지 그림을 문설주 위에 그려 붙였다. 돼지가 한 배에 여러 마리씩 새끼를 낳고, 잘 먹고 잘 자라는 강한 번식력 때문이었다. 즉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돼지가 풍년이나 번창을 가져온다고 하는 인식은 돼지저금통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돼지는 풍요의 기원, 재산이나 복의 근원, 집안의 재물신을 상징한다. 그런가 하면 돼지는 속담에서 대부분 탐욕스럽고, 더럽고, 게으르며, 우둔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즉 돼지는 상서로움과 탐욕스러움의 서로 반대되는 속성을 갖춘, 이른바 모순적 등가성(等價性)을 지니고 있는 십이지의 열두 번째 띠동물이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민속학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