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담진성(圓潭眞性)스님(1926~)
현재의 방장인 `천진불` 원담스님은 수덕사 옆 견성암 비구니였던 이모를 따라 아홉살에 출가했다.
어려서부터 만공스님 옆에서 시봉을 하며 행자로 지내던 원담스님은 16세에
벽초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출가한 원담스님을 특히 귀여워했던 만공스님이 어린 원담스님의 머리를 주장자로 때리며
깨달음을 주고자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원담스님은 "`만공스님은 내가 맞을 때마다 `아야!` 하고 소리치면
`그 아야 하는 놈을 찾으라`고 하시고는 내가 한참을 그렇게 맞은 후
`그놈이 바로 마음인 것 같다`고 하자 크게 칭찬하며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1970 년대 초반까지 인삼밭에서 농사를 지은 스님은
"신도의 시주에 의지하는 것은 무위도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직접 농사짓는 것을 솔선수범했다.
어려서부터 덕숭산 꼭대기의 전월사로 쌀과 물을 지어 나르던 스님은 "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다녀서 그런지 키가 크지 않았다"고 종종 농담처럼 말한다.
원담스님은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선지종가(禪之宗家)인
수덕사의 방장답게 누구 앞에서나 거리낌없이 천진한 도인의 모습을 보인다.
60년대 서슬 퍼렇던 계엄시절, 송요찬 장군이 수덕사를 방문했을 때
원담스님은 수덕사의 총무일을 보고 있었다.
그때 송장군의 수행원들이 앞마당에서 "송장군이 오셨는데 내다보는 중도 없느냐?"고 소리치자
원담스님은 "너네 장군이지 우리 장군이냐?
절에 왔으면 부처님께 먼저 인사를 해야지"하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송장군은 슬며시 돌아갔다가 한달 뒤 다시 찾아왔고
그 후로 수덕사의 신도가 되어 범종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을 보시했다.
`도필`로 소문난 원담스님의 글씨는 특히 유명하다.
1986년 일본의 산케이 신문 주최 국제 서예전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는
원담스님의 글씨를 받아가려고 멀리 전국에서 찾아올 정도였다.
수덕사 스님들은 "한때는 `인근 경찰서에서 원담스님 글씨를 얻기 위해
스님들이 운행하는 차를 국도에서 집중단속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아 글씨를 예전처럼 쓰기가 힘들다고 한다.
방장실인 염화실에는 스님이 직접 쓴 금강경 병풍이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