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스크랩] 종손, 장손. 누가 그 이름을 부르는가?

淸潭 2006. 11. 29. 13:06

 

 

종손? 장손? 그 이름이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올해 명절제사도 모두 나 혼자의 몫이다. 지난주 부터 틈틈이 준비한 엄청난 시장보기부터 다섯가지 전과 다섯가지 나물. 그것도 모자라 탕과 어적과 산적들과 물김치에 새 김치 담기. 동서와 시동생은 여태 전화 한통도 없고 시어머님도 아직 연락조차 없다. 아마 명절 아침이나 도착 하리라.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은 밤까지 온 집안이 기름냄새에 절어야 하고, 남편은 내 눈치만 살피며 안절부절 할 것이다.

 

 

 

저곳에는 여자들은 없다. 남자들. 그것도 혈연속에서 제사 순위가 정해진 사람들

 

나는 장손 맏며느리다. 우리 집안에 나 말고 며느리가 한사람 더 있지만 명절 당일 아침에만 온다. 왜냐구? 그래야 집안이 편하다고 시어머님의 배려다. 결국 나혼자 떠맡은 제사 음식 일은 싫던 좋던 내가 차리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작년엔 남편과 아이랑 헛헛한 마음 서로  달래며 해냈지만 그래도 뒷맛은 소태 씹은 것 마냥 씁쓸했는데 올해는 그나마 내게 주어진 일이 더 많아서인지 아예 미리부터 기운이 빠졌다.

 

 

추도하고 추모하는 것이 왜 이렇게 변함없는 일이어야 하는지 현명한 대답이 가능할까?

 

그런데 정말 더 힘 빠지고 우울하게 하는 것은 주변 분위기다. 전통과 예의범절 운운하며 마구잡이로 여론몰이를 하는 일부 사람들. 그것이 미디어든 아니면  통상의 수다든 직접 그 일을 하는 당사자를 압박하고 심지어는 강제까지 하게 만드는 일. 그러나 실상 본인들은 그런 일들이 얼만큼의 수고와 고단함을 필요로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할 생각도 없는 이들의 말장난이다.

 

 

그런 논리가 웹사이트인 이곳에서도 있었다. 불과 얼마전의 자기부모 산소는 자신의 손으로 벌초를 하자는 기사가 며칠간 탑에 올랐던 것을 봤다. 솔직히 기막힘에 화까지 났었다. 벌초를 자신의 부모 산소만 한다면야 누가 싫다고 할까. 누가 귀찮다고 하겠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몰라서가 아니다. 대안도 없고, 현상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그런 글들이 나 같은 종손에겐 이중삼중의 책임과 고통의 무게만 더한다는 사실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명절증후군. 말로만 하지 말고 직접 한번 해 보시라. 과연 누굴 위해 존재하는 말인지를.

 

묻고 싶다. 그럼 각자 자기 부모 봉분만 벌초를 하면 나머진 누가 하는가? 결국 종손과 장손이란 이름이 붙은 사람몫이다. 거절도 불가능하고 못하겠다고 버티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아직 이 땅은 벌초와 제사에서 만큼은 500년전과 변함이 없으니.

 

모두가 자신의 부모 봉분만 슬쩍 벌초를 하고 가면 남은 사람은 부모의 부모. 4대조 5대조의 커다란 봉분 28기는 종중의 연로한 어른들 몫이되고 하루종일 하늘이 노래지도록 한다. 그래서 항상 벌초때마다 다치고 상처나는 일은 별로 큰일도 아닌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일이란 모두에게 '고통'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고 이어지는 제사. 내가 처음 맡은 기제사만 해도 10번이었다. 직장 생활을 해도 절대로 달라지지 않았던 그 일에 대해선 무조건 '넌 장송 맏며느리다!'란 한마디였다. 옷도 못 갈아입고 달려와 늦은밤까지 준비하는 제사음식. 사람들이 먹고 난 그 많은 그릇들을 설겆이 하면서 장손 맏며느리란 이름에 얼마나 분노하고 울었는지 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나마 집에서 하는 제사야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지만 한식과 벌초때의 많은 일은 그야말로 시골 마당에서 음식장만과 마무리를 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내 자신을 '제사 담당 민며느리'라고 말한다. 그때 말고는 내가 맏며느리란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다지 깨닫는 일도 없거니와 평상시엔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데 명절이 즐겁겠는가? 제사가 오래된 우리들의 전통이니 잘 지켜나가야 한다는 말이 감사할 일인가? 난 지금도 온 부엌에 가득 쌓인 음식 재료들을 보면서 다시 속이 끓어 오른다.

 

 

 

내 아이. 이 아이를 향한 종손과 장손이란 이름을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혼자 해야하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을 이 시대까지 500년전 모습 그대로 해야 하는지 답을 못찾아서다. 단지 그 특별한 이유가 궁금해서다. 왜 아직도 종손과 장손이란 이름으로 이런 일을 도맡아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바뀌고 세상도 바뀌었건만 종손 장손이란 이름은 영원불멸의 원죄처럼 내 앞에 버티고 있다.

 

 

'왜 이래야만 하지? ' 오늘도 난 그 물음을 안고 내 앞에 가득 놓인 제사 음식을 해야만 한다. 단지 장손 맏며느리란 이름 때문에.

출처 : 새파랗게 날이 선 비수처럼
글쓴이 : 숨소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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