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인 등산모임 ‘한마음산악회’
"당뇨는 안경쓰고 사는 셈… 적게 먹고, 규칙적으로 살고, 병원에 자주 가야죠"
아침 햇살이 제법 따뜻하게 느껴지던 지난 4월 13일 오전 9시. 서울 지하철 4호선 수유역 입구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등산복 차림의 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산악회 회원들처럼 보인다. 이들은 당뇨환자들로 구성된 ‘한마음산악회’ 회원이다. 이 산악회는 당뇨환자들의 모임인 한국당뇨협회가 만든 것이다.
강성구(60) 한국당뇨협회장과 김태명(57) 총무, 김정현(34) 과장은 일찌감치 나와 회원 출석을 불렀다. 한 달 만에 보는 얼굴들이라 그간의 안부를 묻는 인사로 시끌벅적하다. 김정현 과장은 “보통 30~40명이 모이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회원들이 다른 좋은 데 놀러갔는지 평소보다 인원이 적다”고 말했다. 한마음산악회에 정식으로 가입되어 있는 회원은 100명이 넘는다. 연령대도 3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천안에서 새벽 전철을 타고 왔다는 3명의 신입 회원을 마지막으로 총 21명의 대열이 정비되었다. 자, 출발! 북한산으로!
한국당뇨협회는 1995년 5월 비영리법인체로 구성됐다. 당뇨병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와 홍보로 당뇨인의 건강증진과 권익옹호에 이바지하자는 뜻에서였다. 산악회는 그해 11월 회원 30여명으로 출발했다.
“우리나라 당뇨인이 400만명이라고 하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잠재환자를 치면 훨씬 더 많습니다. 당뇨병을 완전히 낫게 하는 치료법이 없는 현실에서 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적당한 운동은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혈액순환을 도와줍니다. 당뇨 산악회가 만들어진 것 역시 그 때문이에요.” 강성구 당뇨협회장의 말이다.
2003년 회장으로 취임한 강 회장은 가톨릭대학교 성가병원의 내과 교수다. 당뇨 산악회는 협회가 생긴 이래 매달 세 번째 수요일에 모임을 가지고 있다. 환자와 가족이 함께 등산하며 회원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친목을 도모한다.
당뇨병을 앓아온 지 17년째라는 김태명 총무는 “당뇨 때문에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당뇨 예찬론을 펴기 시작했다. “소식(小食)하죠, 먹은 만큼 꼬박꼬박 운동하죠. 병원도 자주 가게 되니까 전보다 건강을 더 잘 챙겨요. 생활이 보다 꽉 짜여지고 규칙적이 됐다고나 할까요?” 실제로 산악회에 나오는 환자들은 이미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들이다. 그는 “각종 합병증으로 발가락이 썩어 들어가고 다리를 절단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당뇨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일단 당뇨가 왔다면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혈당측정기는 꼭 챙겨
이들은 일반 산악회원의 산행과는 다른 준비물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혈당측정기다. 북한산 도선사 입구. 몇몇 회원들은 혈당측정기로 간단한 자가 혈당 체크를 했다. 이들에게 혈당체크는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일과다. 5만~15만원 정도 하는 혈당측정기는 당뇨 환자들의 필수 물품이다. 보통 식후 2시간 후에 혈당 수치가 200㎎/㎗를 넘으면 당뇨병이라고 본다. 정상인은 140 미만. 이날 가장 혈당수치가 높게 나온 회원은 약 150으로 거의 정상인에 가까운 수준이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대부분 당뇨 경력만 20년 이상 된 회원들로, 그들에게 당뇨는 이미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한마음산악회의 최고령자 김영찬(83)씨는 6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당뇨병 생활 37년에 합병증(협심증)만 15년이라고. 근데 아직도 문제가 없어. 난 일부러 밖에 돌아다녀. 집안에서 장기·바둑 같은 것은 절대 안 해. 내 취미 세 가지가 뭔 줄 알아? 사냥, 낚시, 골프야!” 김씨는 당뇨협회에서 맞춘 빨간색 등산 조끼가 잘 어울리지 않느냐며 웃었다.
하지만 당뇨병 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만만한 것은 아니다. 행렬의 뒤에서 등산용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천천히 올라오는 정환길(64)씨는 당뇨를 앓은 지 20년째다. 합병증으로 다리가 조금 불편한 상태다. 상가(喪家)를 다녀오던 어느 날 너무나도 춥고 어지러워서 병원에 가봤더니 뇌졸중이었다는 것. 뇌졸중 역시 당뇨의 합병증으로 온 것이었다. 다행히 심각하지는 않았던 상황이라 열흘 입원 후에 퇴원할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정씨의 당뇨병 투병기가 시작됐다.
“그때라도 당뇨를 알아서 다행이었지만 처음엔 신경을 많이 못썼어요. 하루 아침에 습관을 바꾸기도 쉽지 않았고요. 그래서 저혈당으로 두 번이나 쓰러졌죠.” 정씨의 조끼 주머니에는 사탕과 초콜릿, 그리고 혈당을 조절해 주는 형형색색의 알약이 있다. 사탕과 초콜릿은 갑자기 혈당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비상약품이다.
“하루에 먹는 약만 10가지예요. 운동하면서 혈당조절하고 약 먹으면 괜찮다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불편한 게 사실이에요. ‘젊었을 때 몸 생각 좀 할 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정씨는 이어 “당뇨병은 굉장히 외로운 병”이라고 말했다. “사회생활이 안 됩니다. 술을 먹더라도 권하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요. 고기 한 점 먹을 때마다 칼로리 계산을 해야 하니….”
쉬엄쉬엄 올라간다고 하지만 따사로운 봄 햇살 때문인지 회원들의 이마에도 어느덧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회원들은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며 물을 마시기도 하고 방울토마토를 먹기도 했다. 이순자(59)씨는 “당뇨환자들이 그나마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게 방울토마토”라며 웃었다. 일반 과일의 높은 당분에 비해 채소인 방울토마토는 비교적 당분이 낮아 괜찮다는 것이다. 한 회원은 초콜릿 한 움큼을 입에 넣고 씹었다. “굳이 혈당 체크를 하지 않아도 몸 상태만 가지고 혈당량이 얼마나 될지 이제 감이 와요.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당뇨환자의 인생 목표가 혈당 관리 아닙니까!”
방울토마토는 최고의 간식
시계가 어느덧 12시를 가리켰다. “자, 자, 조금만 더 올라가서 점심 먹읍시다. 이왕 운동하러 온 거니까 힘들 내시고요!” 김태명 총무가 회원들을 격려하며 앞장섰다. 몇몇 회원들이 “그만 올라가도 되지 않느냐”며 불만을 쏟아냈지만 그 누구보다 건강을 챙겨야 하는 당뇨병 산악회원들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김태봉(55)씨는 당뇨에 걸린 지 8년이 되었지만 당시 상황은 누구보다도 심각했다. “혈당량 수치가 600㎎/㎗를 넘곤 했어요. 신기한 건 밥맛은 하나도 없는데 물 하나는 얼마나 꿀맛이던지 하루에 1.5ℓ들이 물병으로 5병씩을 먹었으니까.”
김씨는 당뇨 외에도 위궤양에 간경변 증세까지 있었다. 입원했던 병원에서도 의사가 특별 관리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만큼 건강에 신경을 안 썼다는 소리죠. 조금만 운동하고 관리하면 됐을 걸. 엄청 후회가 됩니다.”
김씨는 당뇨환자 식단의 특성상 모든 식사를 스스로 차려 먹는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가족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회원은 “당뇨는 가족 모두가 합심해서 신경을 써야 하는 병”이라면서 “주위 사람에게 당뇨병임을 알리고 이해를 구해야 모두가 편하다”고 강조했다.
한마음산악회는 당뇨환자들에게 단순한 등반 소모임을 넘어선 정보 공유의 장이기도 했다. 어떤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식이요법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회원들은 서로의 주치의가 되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인수봉이 올려다 보이는 지점에서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를 했다. 회원들의 도시락 반찬은 민들레 무침부터 멧돼지 고기까지 다양했다. 천안에서 올라온 김종임(55)씨는 “당뇨환자들은 아무것도 마음대로 못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금씩 먹고 그만큼 운동을 하면 괜찮다”고 말했다.
방울토마토를 후식으로 점심식사가 끝나자 회원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산악회 등반의 마지막 행사로 강성구 회장의 강연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현 과장은 “회장님 강연을 들으려고 원주·단양·공주 등 지방에서 우리 산악회에 오는 회원이 많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은 그동안 잘못 알려진 당뇨에 관한 속설에 대한 것이었다. 회원이 질문을 하면 강 회장이 대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당뇨는 내 친구~”
한 회원이 “돼지 췌장을 먹으면 인슐린 분비에 도움이 된다고 들었다”고 질문을 하자 회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성구 회장은 “당뇨병 환자들조차 당뇨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약 먹고 주사 맞아야 하는 게 불편할 뿐이지 당뇨환자 역시 일반인과 똑같이 살 수 있습니다. 안경 쓰고 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어요. 그냥 무덤 갈 때까지 친구 한다고 생각하시고 당뇨병을 함께 데리고 사세요.”
회원들은 메모를 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강 회장의 말을 들었다. 이날 처음 나온 김병간(62)씨는 “혈당이 높으니 주의하라”는 의사의 지시를 듣고 바로 산악회를 찾았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환자와 등산하면서 많은 얘기를 하고, 회장님 말씀도 들으니 각오가 새로워집니다. 늦기 전에 건강관리에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는 이제부터라도 ‘차 멀리 주차하기’ ‘전철 한 정거장 미리 내려서 걷기’ 등 당뇨 환자들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수칙을 지켜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강연이 끝나고 신입 회원들의 자기소개를 끝으로 이날 당뇨 산악회 행사는 끝났다.
산을 내려오면서 김정현 과장은 “당뇨는 아주 무서운 병”이라며 “자기관리를 잘하는 산악회원들이 당뇨병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열심히 관리해도 합병증을 막기 힘든 것이 당뇨병이라는 것이다.
“저희 산악회 회원들이 대단한 거죠. 당뇨병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합니다. 당뇨는 치료하는 게 아니고 관리하는 거라고요!”
몇몇 회원들은 흘러간 유행가에 가사를 개작하여 흥얼거리며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당뇨는 내 친구, 오순도순 살자꾸나~.”
김승범 주간조선 기자(sbkim@chosun.com)
※본 기사 작성에는 박국희 인턴기자(freshman2828@naver.com)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