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스크랩] 덕숭총림 선원

淸潭 2006. 9. 17. 21:24

[禪院산책] 덕숭총림선원        <한국경제/2005/1/27/문화A32>

절집 공양간에 모처럼 활기가 돈다.
서울에서 신도들이 선방 납자들을 위해 특별식을 마련해왔기 때문이다.
식탁 위에 오른 음식은 채식 샤브샤브와 국수,전,샐러드,과일 등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산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수행에만 전념하던 납자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돈다.
스님들이 워낙 좋아해서 말만 들어도 웃는다는 '승소(僧笑.절집에서 국수를 이르는 말)'까지 나왔으니.. 그러나 파탈(破脫)의 시간도 잠시뿐.공양을 마친 납자들은 다시 본분사(本分事)로 돌아간다.

수행자에게 음식은 단지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기 위한 것일 뿐,욕망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망상과 욕심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도심(道心)으로 먹어야 한다는 얘기다.
보조국사도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서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맛없는 것을 싫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충남 예산군 덕산면의 덕숭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정혜사 능인선원.한국불교조계종의 5대총림 가운데 하나인 덕숭총림 수덕사를 대표하는 선원이다.
덕숭산 중턱의 수덕사에서 가파른 산길을 30분 남짓 걸어올라 정혜사에 도착하자 오전 11시,점심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린다.
음식을 탐하지 않는 납자들 덕분에 불청객만 특식을 맛있게 먹었으니 이것도 복이라면 복일까.
"이곳은 한국 근세 선불교의 중흥조이신 경허스님이 선풍을 크게 일으켜 수월,혜월,만공,고봉,금오,혜암,벽초,설봉스님 등 기라성같은 고승을 배출한 '선의 산실'입니다. 지금 한국불교가 선방을 유지하는 것도 그때 씨앗을 뿌려놓은 덕분이지요."

점심공양을 마친 선원 수좌 설정(雪靖.64)스님은 선원 마당을 산책하며 이렇게 입을 연다.
수좌(首座)란 수행자를 통칭하는 뜻과 달리 선원에서 방장이나 조실을 대신해 선을 지도할 수 있는 소임자를 뜻하는 말.설정 스님은 경허-만공-벽초-원담(현 수덕사 방장)스님의 법맥을 잇는 덕숭총림의 차세대 지도자다.

"덕숭산은 크지는 않으나 아름다운 계곡과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뤄 '호서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표토 밑에는 무늬석이 대량으로 매장돼있고,지상에는 분재같이 예쁜 나무들이 즐비하지요. 예로부터 덕숭산에서 '삼성칠현(三聖七賢)'과 무수한 도인이 나온다고 했는데 실제로 이곳이 선의 산실이 된 것이지요."

능인선원이 있는 정혜사의 입지는 실로 탁월하다.
덕숭산 정상과는 불과 3백m 거리요,큰절(수덕사)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관람객들로부터 자유롭다.
덕숭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 옆에 있어 간혹 등산객들이 기웃거리긴 하지만 출입을 막고 있어 정혜사는 수행자들만의 공간이다.
멀리 서해바다까지 탁 트인 전망도 압권이다.

마침 비구니 스님 셋이 설정 스님을 찾아왔다.
어떤 화두를 들고 수행하면 좋을지 화두를 타러 왔다고 한다.
비구니 스님들이 돌아간 후 설정 스님은 다시 경허 스님 이야기를 꺼낸다.
"경허 스님은 화두를 금방 주지 않는 게 특징이었어요. 수월 스님에겐 대비주(大悲呪) 하나만 외우라고 했고,혜월 스님에겐 나무아미타불을 시켰습니다. 만공 스님은 경허 스님이 화두를 주지 않으니까 어떤 객승이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를 화두 삼아 수행을 시작하셨지요."

수월 스님은 대비주로 확철대오(廓徹大悟)했고,혜월 스님은 나무아미타불로 삼매(三昧)에 이르렀다.
만공 스님 역시 온양 봉곡사에서 새벽 종소리를 듣고 오도송을 읊었다.

수행자의 근기를 성숙시켜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는 게 경허 스님의 지도방식이었던 것.삼매에 이른 혜월 스님이 "씨없이 심은데서 싹이 나는 도리를 아느냐"는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막히자 그제서야 조주의 '무(無)'자 화두를 주었으며,견성한 만공 스님의 선문답이 미진하자 역시 "무"자 화두로 더 정진하게 했다고 설정 스님은 설명한다.

수덕사에 선원이 개설된 것은 만공 스님은 깨달은 뒤 1905년 정혜사 아래쪽에 "금선대(金仙臺)"라는 띠집을 지으면서다.
전국의 수행자들이 만공 스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지금의 관음전 자리에 작은 선방을 짓고 선원을 열었다.
당시 여름에는 선원 밖 마당에서도 정진했고 겨울에는 요사채도 선방으로 삼았다고 한다.
설정 스님은 "고암 성철 청담 효봉 등 근현대 선승 치고 정혜사를 거치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덕숭총림은 1932년 만공 스님이 세웠던 능인선원 건물을 헐고 정면 7칸,측면 3칸의 선원을 지난해 가을 신축했다.
처음엔 보수계획을 세웠다가 천장의 서까래가 썩어 있는 등 상태가 심각해 새로 지었다고 한다.
적정 수행인원은 30명 가량이나 이번 동안거엔 18명이 정진 중이다.
"지난 50년대에 처음 여기 왔을 땐 40명 가량이 공부하며 살았어요. 그땐 겨울에도 덮고 자는 이불이 없었고 좌복을 배에 걸치는 게 전부였지요. 방바닥도 추워서 차라리 앉아서 조는 게 나았습니다. 춥고 배고파야 도심이 생긴다(飢寒發道心)는 건 철칙입니다. 몸이 쉽고 편하면 타성에 젖어 나태하기 쉽거든요."

설정 스님은 덕숭문중의 수행가풍으로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먼저 든다.
실제로 정혜사 윗쪽엔 납자들이 농사를 짓는 너른 밭이 있다.
몸을 움직여 일하면 건강에도,수행에도,절 살림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오후 참선에 들어가는 납자들의 발걸음이 가뿐하다.
선원 기둥의 '閑人勿入(한인물입.일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라는 글귀가 선원 마당의 동산에 나란히 선 쌍탑과 마주보고 있다.

선방과 쌍탑 사이에 선 나의 일은 무엇인가.

예산=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출처 : 수덕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쓴이 : bany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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