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24) 가을에 외간(外間)에 임금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절구(絶句)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웅장한 마음은 우리 동방을 안정시키고자 했더니 / 壯心曾欲奠吾東
이제껏 그 사업은 한단의 걸음 / 如今事業邯鄲步
가을 바람에 고개 돌리니 한스럽기 그지없네 / 回首西風恨不窮
시격(詩格)이 노련하고 건장하여 시인에 못지 않았는데, 어찌 그 이듬해 변고가 있을 줄을 알았으리오.
동궁(東宮)이 또한 임금 되기 전에 시[詞藻]에 뜻을 두어 고서(古書)를 많이 모았다. 언젠가 삼청동시(三淸洞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맑은 시냇가 기이한 풀들이 천단을 에웠도다 / 碧溪瑤草繞天壇
노을 어린 옥솥에 단약은 익어가나 / 煙霞玉鼎靈砂老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위주로 하여 비록 경렴(景濂) 같은 대유(大儒)로도 역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 날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찌꺼기를 빨아 비위를 썩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만들 따름이니, 읽으면 염증이 날 정도이다. 성당(盛唐)의 소리는 다 없어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梅月堂)의 시는 맑고 호매(豪邁)하고 세속을 초탈하였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을 쓰지 않고 갑자기 지은 것이 많기 때문에 간혹 가다가 박잡한 것도 섞여 결국 정시(正始)의 시체는 아니다.
망헌(忘軒) 이주지(李冑之)의 시는 침착ㆍ노련하여 나의 중씨(仲氏)가 대력(大曆 당 대종(唐代宗)의 연호)ㆍ정원(貞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 연간의 작품과 가깝다고 여겼다. 그러나 소식ㆍ두보(杜甫)로부터 나왔는데도 대체가 순박치 못했다. 충암(冲庵)은 맑고 굳세고 기이하고 아름다워 작가라고 할 만하되, 거친 말[生語]과 중첩되는 말[疊語]이 약간 많다. 그 후에는 퇴폐한 것을 일으킨 자가 없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ㆍ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연간에 최가운(崔嘉運)ㆍ백창경(白彰卿)ㆍ이익지(李益之) 등이 비로소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시대의 공부를 전공하여 정화(精華)를 이루기에 힘써서 고인에게 미치고자 하였으나, 골격(骨格)이 온전치 못하고 너무 아름답기만 하였다. 당(唐)의 허혼(許渾)ㆍ이교(李嶠)의 사이에 놓더라도 바로 촌뜨기의 꼴을 깨닫게 되는데, 도리어 이백(李白)ㆍ왕유(王維)의 위치를 앗으려고 한단 말인가? 비록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학자는 당풍(唐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세 사람의 공을 또한 덮어버릴 수는 없다 하겠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자는 열경(悅卿), 강릉인(江陵人)이다. 처사(處士)로서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이주지(李冑之)의 이름은 주(冑)이며 고성인(固城人)으로 벼슬은 정언(正言)이다. 중씨(仲氏)는 하곡(荷谷) 허봉(許篈)이다. 자는 미숙(美叔), 양천인(陽川人)이며 벼슬은 전한(典翰)이다.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冲), 경주인(慶州人)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가운(嘉運)의 이름은 경창(慶昌), 호는 고죽(孤竹)인데 해주인(海州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이다. 창경(彰卿)의 이름은 광훈(光勳), 호는 옥봉(玉峯)인데 해미인(海美人)으로 벼슬은 참봉(參奉)이다. 익지(益之)의 이름은 달(達), 호는 손곡(蓀谷)이며 홍주인(洪州人)으로 쌍매(雙梅) 첨(詹)의 서손(庶孫)이다.
가운(嘉運)은 제고봉군산정시(題高峯郡山亭詩)에
오래된 고을이라 성곽도 없는데 / 古郡無城郭
산재에는 다만 수풀뿐 / 山齋有樹林
백성도 아전도 흩어져 쓸쓸한데 / 蕭條人吏散
물건너 마을에 겨울 다듬이 소리 / 隔水搗寒砧
라 하였다. 창경(彰卿)은 제화시(題畫詩)에,
문서 기록은 백발을 재촉하는데 / 簿領催年鬢
시내와 산이 그림 속에 들었구려 / 溪山入畫圖
모래톱 평평하니 옛 언덕이 예로구나 / 沙平舊岸是
달빛은 하얀데 낚싯배 외로워라 / 月白釣船孤
하였고, 제승축시(題僧軸詩)에
지리산은 쌍계가 승경이오 / 智異雙溪勝
금강산은 만폭이 기이하다던데 / 金剛萬瀑奇
명산엔 몸소 가보도 못하고서 / 名山身未到
매양 스님을 보내는 시만 짓누나 / 每賦送僧詩
하였다. 익지(益之)는 산사시(山寺詩)에,
흰 구름 속에 절이 있으니 / 寺在白雲中
흰 구름이라 중은 쓸지를 않네 / 白雲僧不掃
손이 오자 그제사 문을 여니 / 客來門始開
골짜기엔 온통 송화만 흐드러졌구나 / 萬壑松花老
하였고, 회주시(回舟詩)에,
병든 가을 해오리 모래밭에 내려앉고 / 病鷺下秋沙
늦매미는 강가 나무에서 울어대네 / 晩蟬鳴江樹
흰 물마름에 바람 일자 배를 돌리니 / 回舟白蘋風
꿈속에 서담엔 비가 내리네 / 夢落西潭雨
하였다.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3인의 시는 모두 정시(正始)의 법을 본받았는데, 최씨의 청경(淸勁)과 백씨의 고담(枯淡)은 귀히 여길 만하나, 기력(氣力)이 미치지 못하여 다소 후한 결점이 있었다. 이달의 부염(富艶)함은 그 두 사람에 비하면 범위가 약간 크긴 하나, 모두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최경창ㆍ백광훈은 일찍 죽었고, 이달은 늙어서야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자기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그 기려(綺麗)를 거두고 평실(平實)로 돌아갔다. 나의 중형이 자주 칭찬하기를,
하므로 내가,
하였다. 중씨는,
하였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를 않았다.
나의 중형의 시가 처음에는 동파(東坡)를 배워서 전아(典雅) 순실(純實)하고 온건(穩健) 노숙(老熟)하더니, 호당(湖堂)에 뽑히자 《당시품휘(唐詩品彙)》를 익히 읽어 시가 비로소 청건(淸健)해졌다. 늙마에 갑산(甲山)으로 귀양 갈 때, 이백시(李白詩) 한 부를 가지고 갔었기 때문에,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의 시는 천선(天仙) 이백(李白)의 말을 깊이 체득하여 장편이고 단편이고 휘몰아치는 기세여서 일찍이 이익지가 말하기를,
하더니, 중씨가 불행히 일찍 죽어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펴보지 못했고, 남긴 글마저 흩어져 미처 수습하지도 못했는데, 임진왜란에 찾아낼 겨를도 없이 다 병화(兵火)에 타버렸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느냐. 내가 경호(鏡湖 강릉(江陵)의 별칭)에 살 때, 놀라움이 우선 가라앉자, 일찍이 외던 것을 생각해 내어 보니 겨우 5백여 편이라, 베껴서 세상에 전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기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만 태산(泰山)의 일호(一毫)일 뿐이다.
최경창(崔慶昌)의 자는 가운(嘉運)이니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무진년(1568, 선조1)에 진사(進士)를 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강등(降等)되었다가 국자 직강(國子直講)을 제수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북경(北京)에 가 조천궁(朝天宮)에서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향 피우고 멀리 옥신군에게 절한다 / 焚香遙禮玉宸君
달 아래 절하는 모습 보는 이 없고 / 月中拜影無人見
아름다운 나무만 겹겹이 궁문 가리웠네 / 琪樹千重鎖殿門
또
봉피리 부는 신선 달밤에 배회했건만 / 鳳管裵廻月在空
동산길에 지금은 향기로운 수레 끊기고 / 苑路至今香輦絶
푸른 복사 붉은 살구 봄바람 한창일세 / 碧桃紅杏自春風
하였다. 어떤 도사(道士)가 있었는데 성은 진씨(秦氏)이고 이름은 지금 기억에 없다. 그 또한 시를 잘 지었다. 이 시를 크게 칭찬하여 통주(通州) 하청관(河淸觀)까지 쫓아와 그 책에 제(題)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현단은 태청과 가깝네 / 玄壇近太淸
난새는 주포수에 깃들고 / 鸞棲珠圃樹
노을은 자미성을 감돌았네 / 霞繞紫微城
삼원의 보록은 비장되어 있고 / 寶籙三元秘
금단은 구전으로 이루어졌네 / 金丹九轉成
지거를 탄 사람 보이지 않고 / 芝車人不見
공중 저 밖에 피리 소리만 / 空外有簫聲
이 시가 중국에 전파되어 왕봉주(王鳳洲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호) 선생이 대단히 칭찬하였다. 충장공(忠壯公) 양조(楊照)의 무덤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선우는 이미 녹두관에 다가왔네 / 單于已近鹿頭關
장군이 홀로 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 將軍獨領千人去
한밤에 요하 건너 싸우다 돌아오지 않았구려 / 夜渡遼河戰未還
이 시는 당인(唐人)의 수준에 못지 않으니 중원(中原)에서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백광훈(白光勳)의 자는 창경(彰卿)이고, 글씨 쓰는 법은 왕희지ㆍ왕헌지에 가까우며, 첫 벼슬은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다. 언젠가 홍경사(弘慶寺)를 지나다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낡은 비석엔 학사의 글 / 殘碑學士文
유수는 천년토록 의구한데 / 千年有流水
해질 무렵 떠가는 구름을 보네 / 落日見歸雲
임오년(1582, 선조15)에 병으로 서울집에서 죽었다. 난설(蘭雪) 누님의 감우시(感遇詩)는 다음과 같다.
성당을 법삼아 시를 익혀 / 攻詩軌盛唐
적막하던 대아의 음률이 / 寥寥大雅音
이들 만나 다시금 크게 떨쳤네 / 得此復鏗鏘
하료는 마냥 광록이고 / 下僚因光祿
변방의 고을살이 적신이 슬프네 / 邊郡悲積薪
나이나 벼슬이 모두 쇠락하니 / 年位共零落
이제야 믿겠네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함을 / 始信詩窮人
난설헌(蘭雪軒)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니, 초당(草堂) 엽(曄)의 딸이며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의 아내이다. 난설헌의 강남곡(江南曲)은 다음과 같다.
남들은 강남땅 좋다 하지만 / 人言江南樂
나보기엔 강남땅 시름겹기만 / 我見江南愁
해마다 모래톱 포구에 서서 / 年年沙浦口
애끊는 마음으로 가는 배만 바라보네 / 腸斷望歸舟
빈녀음(貧女吟)은 또 다음과 같다.
가위를 손에 잡으니 / 手把金剪刀
추운 밤 열손가락 곱네 / 寒夜十指直
남 위해 시집갈 옷 지어주건만 / 爲人作嫁衣
해마다 도리어 혼자 살다니 / 年年還獨宿
채련곡(采蓮曲)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긴 호수엔 비취옥이 흐르는데 / 秋淨長湖碧玉流
연꽃 깊숙한데 난주 매어두고 / 荷花深處係蘭舟
물건너 님을 만나 연밥을 던지다가 / 逢郞隔水投蓮子
남의 눈에 그만 띄니 반나절이나 무안해라 / 剛被人知半日羞
임제(林悌)의 자는 자순(子順)이니 나주인(羅州人)이다. 만력(萬曆 송신종(宋神宗)의 연호) 정축년(1577, 선조10)에 진사가 되었다. 본성이 의협심이 있고 얽매이질 않아서 세속과 맞질 않았으므로 불우했고 일찍 죽었다. 벼슬은 의제 낭중(儀制郎中 예조정랑 겸 지제교(禮曹正郞兼知製敎)의 별칭)에 그쳤다. 죽은 뒤에 어떤 이가 ‘역괴(逆魁 정여립(鄭汝立)을 말함)와 더불어 시사를 논하면서 항우(項羽)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치 못한 것이 애달프다 말하고 나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무함했는데 그 말이 삼성(三省)에 전해지자 그 아들 지(地)를 국문하니 지(地)가 그의 선친이 지은 오강(烏江)에서 항우를 조상한다는 부(賦)를 올리므로 인하여 용서받아 변방에 귀양 가게 되었다. 그의 평사 이영을 보내는 시[送李評事瑩詩]는 다음과 같다.
음산한 바람 부는 발해 바닷가 / 陰風渤澥涯
원융의 서기를 맡은 이는 / 元戎掌書記
일대의 미남아로다 / 一代美男兒
칼집엔 별을 찌르는 칼 있고 / 匣有干星劍
주머니엔 귀신도 울릴 시가 들었네 / 囊留泣鬼詩
변방 모래 바람 금갑옷에 자욱한데 / 邊沙暗金甲
쪽문 위의 달 홍기를 비치누나 / 閨月照紅旗
옥문관 걸음 어딘들 안 가리오 / 玉塞行應遍
공신각에 화상 걸기 머지 않으리 / 雲臺畫未遲
바라보니 머리카락 곤두세우고 / 相看豎壯髮
먼 길 떠날 슬픈 빛 짓지 않네 / 不作遠遊悲
시격(詩格)이 양영천(楊盈川 당(唐)의 양형(楊炯))과 매우 비슷하다.
제(悌)의 호는 백호(白湖), 벼슬은 북평사(北評事)를 지냈다. 《잠영보(簪纓譜)》를 상고해 보면 ‘제(悌)의 맏아들은 탄(坦)이고 호는 한정(閒亭)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기(垍)인데 호는 월창(月牕), 벼슬은 좌랑(佐郞)이다.’ 하였다.
탄(坦)은 혹 지(地)의 개명(改名)이 아닌지?
백호(白湖)의 규원시(閨怨詩)는 다음과 같다.
열다섯 살 월계 아가씨 / 十五越溪女
남보기 부끄러워 말도 없이 헤어졌네 / 羞人無語別
돌아와 겹문 닫고는 / 歸來掩重門
배꽃에 비친 달 보며 울었네 / 泣向梨花月
산사시(山寺詩)는 다음과 같다.
한밤중 숲 속에 중이 자는데 / 半夜林僧宿
무거운 비구름이 초의를 적시누나 / 重雲濕草衣
느지막에 사립을 여니 / 巖扉開晩日
깃든 새 그제서야 놀라서 나네 / 棲鳥始驚飛
영(瑩)은 고성인(固城人)으로 자는 언윤(彦潤), 호는 남고(南皐)이니 청파(靑坡) 육(陸)의 손자로 벼슬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중형의 경흥압호정(慶興狎胡亭)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인가의 연기는 귀방과 접했구나 / 人煙接鬼方
산은 외로운 장막 밖을 에웠고 / 山圍孤障外
물은 무너진 능 옆으로 흘러드는구나 / 水入毁陵傍
초가집에 해 바뀌도록 병들었는데 / 白屋經年病
푸른 모에 한밤중 서리 내렸네 / 靑苗半夜霜
이곳에 오르자 가장 서글퍼지니 / 登臨最蕭瑟
까칠한 수염은 낙엽과 함께 누렇구나 / 衰鬢葉俱黃
임자순(林子順)이 크게 칭찬하며 그 운자로 화답하려 하였으나 종일 궁리해도 뜻대로 되질 않자 시를 보내기를,
하였으니, 셋째와 넷째 구절이 사실(史實) 기록임을 말한 것이다. 금성 객관(金城客館)에 옛사람이 추(秋) 자로 압운하여 판각해서 못을 박아 걸어 놓았는데, 최고죽(崔孤竹)이 차운하기를
깊은 강물은 어둠속 급히 흐르네 / 沈河急暝流
으스레한 등불 아래 초객의 꿈이요 / 疏燈楚客夢
한밤중 중선의 다락일레 / 半夜仲宣樓
찬 비 비록 개었으나 / 寒雨雖逢霽
고향 생각 또다시 가을을 만났네 / 歸心更値秋
라고 했다. 중씨가 이어 읊기를
말 멈추어 차가운 물을 먹이네 / 駐馬飮寒流
큰 길엔 온통 꽃다운 풀들 / 芳草遍官道
저녁 연기 역루에서 피어오르네 / 晩煙生驛樓
나그네 회포는 어렴풋 꿈과 같아서 / 旅懷渾似夢
봄이라지만 거의 가을 같고나 / 春事半如秋
라고 했다. 고죽이 보고,
하였다.
내 생각에 누대 현판은 모조리 케케묵은 시들이라, 비록 청신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으니, 지을 필요가 없다. 임자순(林子順)이 언젠가 가학루(駕鶴樓)를 지나갔는데, 판시(板詩)가 많아 만여 개나 되므로, 그 되지 않은 잡소리를 싫어하여 관리(館吏)를 불러 말하기를,
하니, 그의 말이,
하자, 자순이,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다 웃었다. 임진왜란에 적이 관사를 불살라 남은 게 없었으며, 불사르지 않은 곳은 현판을 철거하여 불 속에 던져버렸다. 아마 하늘도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싫어했으리라.
누제(樓題)에도 좋은 시구가 또한 더러 있다. 임진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난리를 피하여 북변으로 들어가다가 곡구역(谷口驛)에 이르니, 임형수(林亨秀)가 지은 시의 항련(項聯)에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 같구나 / 山斷蒼虯飮海腰
하였다. 시어(詩語)가 청절(淸絶)하니 어찌 누제라 하여 흠잡을 수 있겠는가.
형수의 자는 사수(士遂)이고, 호는 금호(錦湖)이다. 평택인(平澤人)으로 벼슬은 목사를 지냈는데, 정미년 벽서(壁書) 사건 때 원통하게 죽었다.
어촌(漁村)의 시는 혼후하고 부염하기가 호음(湖陰)에 못지 않은데, 송계(松溪)가 중종 이래 대가를 평하되 그 선(選) 중에 어촌이 들지 않았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내가 북변의 누제(樓題)를 보다가, 공의 시를 읽고는, 눈을 씻고 장단을 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동역시(嶺東驛詩)는 다음과 같다.
표령한 남은 목숨 그 어디에 붙일까 / 飄零何處着殘生
하늘가 해질 무렵 고향 그리는 눈물 / 天邊落日懷鄕淚
국경밖 늦가을 고국 떠나는 마음일세 / 寒外窮秋去國情
구름송인 어지러이 날아 산은 온통 새까맣고 / 雲葉亂飛山盡黑
둥근 달 나직이 비치니 온바다는 밝아라 / 月輪低照海全明
나그네신세 오늘밤 유난히 시름겨워서 / 羈愁此夜偏多緖
푸른 등불 마주하여 앉아 지샜네 / 坐對靑燈到五更
수성역(輸城驛)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낯선 땅 풍경은 모두가 고향을 그리게 하네 / 異方雲物摠關情
넓은 강 건너고 싶으나 사공 없고 / 洪河欲濟無舟子
겨울나문 말라가도 겨우살인 매달렸네 / 寒木將枯有寄生
일신을 도모함이 곧은 길 아님 우습고 / 自笑謀身非直道
세상 속여 헛된 이름에 붙들림 오히려 부끄럽네 / 還慙欺世坐虛名
새벽 문을 열고 푸른 바다 마주하니 / 曉來拓戶臨靑海
아침해 밝고 밝아 간담을 비치네 / 旭日昭昭照膽明
이와 같은 작품들이 어찌 호음(湖陰)무리만 못하단 말인가? 아래 시의 제4구는 안로(安老)가 죽었지만 그의 잔당은 아직 다 죽지 않았음을 가리킨 것이다.
눌 위해 단장하는고 야인의 집에 / 爲誰粧點野人家
한밤중 비바람에 초췌할까 두렵더니 / 三更風雨驚僝僽
다닥다닥 핀 사과꽃 모조리 다 졌구나 / 落盡來禽滿樹花
잠자던 해오리 나직이 날아 물언덕 모래톱에 내려 앉는다 / 宿鷺低飛下岸沙
물가 정자에 발 거두고 기둥 기대어 앉아 있으니 / 江閣捲簾人依柱
나룻머리 노 젓는 소리 밤이라 크게 들리네 / 渡頭鳴櫓夜聞多
중씨가 근래 시인을 평하되, 소재 상공(蘇齋相公)을 대가로 여기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그 다음으로 쳤다. 이익지(李益之 익지는 이달(李達)의 자)는 중씨의 시ㆍ문이 모두 고공(高公)보다 낫다고 치는데 논란은 오래되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권응인(權應仁)을 만나게 되어 물어보니, 이익지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권응인이 갑산(甲山)으로 귀양 가는 중씨를 보내는 시의 항련(項聯)에
라 하니, 고사 인용이라든가 대우(對偶)가 다 적절하다. 중형이 서애(西厓)에게 부친 시에 또
응당 경인년에 하강하는 때를 맞으리 / 應値庚寅下降年
하였다.
중형이 귀양 가기 전 옥당(玉堂)에 있을 때 꿈속에서 시를 짓기를
천상은 꿈결에도 어렴풋 / 煙霄夢寐稀
오직 가의의 눈물만 남아 / 唯殘賈生淚
밤마다 차가운 옷을 적실 뿐 / 夜夜濕寒衣
하더니, 가을이 되자 갑산(甲山)에 귀양 가게 되었다. 누님이 평시에 또한 꿈속에서 지은 시에
청난은 채봉을 기대었구나 / 靑鸞倚彩鳳
연꽃 스물일곱 송이 / 芙蓉三九朵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구나 / 紅墮月霜寒
하더니 이듬해 신선되어 올라가니,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인사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유선시(遊仙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詩語)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문(文)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四六文)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이 세상에 전한다. 중형이 일찍이,
라고 한 적이 있다. 아, 살아서는 부부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
이옥봉(李玉峯)은 사문(斯文) 조원(趙瑗)의 소실이다. 그 시가 몹시 맑고 강건하여, 거의 아낙네들의 연지 찍고 분 바르는 말들이 아니다. 남편을 따라 진주부(眞珠府)로 가는 길에 노산묘(魯山墓)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참담한 노릉 구름 슬픈 노래 끊어지네 / 哀歌唱斷魯陵雲
이 몸도 또한 왕손의 딸이라서 / 妾身亦是王孫女
이 땅 두견새소리 차마 들을 수 없구려 / 此地鵑聲不忍聞
서군수(徐君受)의 소실이 액서(額書)와 단율(短律)을 부쳐준 데 사례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유공권(柳公權) 서체의 남은 자취 보여주네 / 元和脚跡見遺蹤
진서는 나부끼는 가운데 봉새처럼 날아오르고 / 眞書翥鳳飄揚裏
큰 글씨는 뭉게구름이 응집되었네 / 大字崩雲結密中
시험삼아 산헌에 걸고 보니 호랑이가 뛰는 듯 / 試掛山軒疑躍虎
문득 강각에 거니 용이 오르는 양 / 乍臨江閣訝騰龍
위부인 필재 바야흐로 건장한 줄 알거니와 / 衛夫人筆方知健
소야란의 재주라고 어찌 공교함을 독차지할 것인가 / 蘇惹蘭才豈擅工
몸은 마치 혜초가지 같아도 생각은 씩씩하며 / 體若蕙枝思則壯
가녀린 손 파대공 같건만 글씨를 쓰면 웅장하여라 / 手纖蔥玉掃能雄
정신적인 사귐이 만리를 문묵으로 통하니 / 神交萬里通文墨
여의주를 갚기 위해 백옥동자에게 알리노라 / 爲報螭珠白玉童
그 아우 또한 시를 잘 지어, 언젠가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그 하구는 다음과 같다.
이슬은 매화가지에 함초롬하구나 / 露濕梅花枝
그 전집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옥봉(玉峯)의 이름은 원(媛)이고 완산인(完山人)인데, 충의(忠義) 봉(逢)의 딸이다.
원(瑗)의 자는 백옥(伯玉), 호는 운강(雲江), 임천인(林川人)으로 벼슬은 승지(承旨)이다. 서군수(徐君受)의 이름은 익(益), 호는 만죽(萬竹), 부여인(扶餘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다.
옥봉의 규정시(閨情詩)에
언약하신 서방님 어이 이리 더디신가 / 有約郞何晩
뜰가의 매화는 이울려 하는데 / 庭梅欲謝時
갑자기 가지 위에 까치소리를 듣고 / 忽聞枝上鵲
헛되이 거울 비쳐 눈썹 그리네 / 虛畫鏡中眉
최고죽(崔孤竹) 등이 언젠가 말하기를,
하며 늘 한스럽게 여겼는데, 소재(蘇齋)의 시에
강물은 깊어라 판사정 앞에 / 江深判事亭
라는 것을 보니, 상하구가 모두 속어를 썼건만 구법이 온당 적절하다. 그러니 대가의 솜씨는 자연 여느 사람과 다름을 알겠다.
이익지(李益之)는 젊어서 화류계(花柳界)에 출입한 실수로 말미암아, 그 재주를 시새우는 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비방하였고, 심지어는 ‘어머니도 잘 대우하지 않고 부인과의 예의도 닦지 않았다.’ 하며 비난해 마지않았다. 양봉래(楊蓬萊)가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부임했을 때 그를 빈사(賓師)의 예로 대우하자, 강샘하는 이들이 선대부(先大夫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을 가리킴)에게 무근한 말을 하여 선대부께서 편지로 익지를 사절토록 권하였다. 양봉래가 답장을 보내기를,
하였다. 그 후에 대우가 약간 소홀해지자, 익지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작별하였다.
주인의 눈썹 사이에 달렸나니 / 主人眉睫間
오늘 아침 반기는 빛 없으니 / 今朝失黃氣
우리 집 고향산 그리워지네 / 舊宇憶靑山
노 나라에선 원거를 잔치해 주고 / 魯國爰居饗
남정에는 의이로 돌아갔다네 / 南征薏苡還
가을바람에 소계자의 신세로 / 秋風蘇季子
또다시 목릉관을 떠나노라 / 又出穆陵關
이에 양봉래가 놀라고 뉘우쳐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봉래(蓬萊)의 이름은 사언(士彦), 자는 응빙(應聘), 청주인(淸州人)으로 벼슬은 부사(府使)이다. 선대부(先大夫)의 이름은 엽(曄),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며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이다.
봉래의 국도시(國島詩)는 다음과 같다.
단청한 누대에 보라빛 연기 떨치며 / 金屋樓臺拂紫煙
구름길에 용을 타고 여러 신선 내려오네 / 濯龍雲路下群仙
청산도 또한 인간속세 싫어선지 / 靑山亦厭人間世
푸른 바다 같은 만리장천으로 날아드누나 / 飛入滄溟萬里天
연산군이 집정하였을 때, 강혼(姜渾)은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가장 총애를 받았다. 언젠가 연산군이 출제하기를
비바람에 꽃지는 새벽은 싸늘해라 / 落花風雨五更寒
하고, 승지ㆍ사관ㆍ경연관에게 칠언율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강혼의 시는 다음과 같다.
쌀쌀한 봄바람 새벽들어 한층 더 미친 듯하구나 / 料峭東風曉更顚
붉은 꽃잎 땅을 덮도록 내버려두고 / 不禁落花紅襯地
휘날리는 버들개지 온 하늘에 자옥하구나 / 賸敎飛絮白漫天
물건너 높은 누각에 구슬발 걷히니 / 高樓隔水搴珠箔
꽃구경 가는 좋은 말 비단안장 빛나네 / 細馬尋香耀錦韉
금동이술 다 마시고 취하여 별원으로 돌아오노라니 / 醉盡金樽歸別院
단청한 난간가에 오색드림 나불리네 / 綵繩搖曳畫欄邊
하였다. 연산군이 크게 칭찬을 하며 금은 보화를 많이 하사하였다.
강혼(姜渾)의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진주인(晉州人)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응교(應敎) 기준(奇遵)이 온성(穩城)으로 귀양 가 있는데, 서울로부터 사약이 내려왔다. 그는 조용히 시를 읊어 스스로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산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 山深谷似雲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 君臣千載意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 / 惆悵一孤墳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지게 한다.
기준의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 행주인(幸州人)이며, 벼슬은 응교(應敎)에 그쳤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최원정(崔猿亭)이 항상 화(禍) 입을까 두려워 세상 밖에 방랑했건만, 마침내 그의 숙부(叔父)의 참소를 받아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그가 만의사(萬義寺)에 제(題)한 시는 다음과 같다.
나뭇가지엔 저물녘 경쇠소리 맑아라 / 林梢暮磬淸
산굽이는 천리나 아스라한데 / 曲通千里盡
담장은 우뚝 뭇산 하마 낮아 뵈네 / 墻壓衆山平
나무는 하 늙었으니 몇 살이나 되었누 / 木老知何歲
새들의 지저귐도 곳에 따라 유달라라 / 禽呼自別聲
어려운 세상 죄의 그물 근심했더니 / 艱難憂世網
오늘이야말로 부끄럽다. 나의 삶이여!/今日愧余生
시어(詩語)가 맑고도 빼어났다. 끝구는 대체 그 화 입을 것을 미리 헤아렸단 말인가?
원정의 이름은 수성(壽城), 자는 가진(可鎭), 강릉인(江陵人)이며, 처사(處士)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의 숙부 세절(世節)의 자는 개지(介之), 벼슬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다. 원정의 망천도시(輞川圖詩)는 다음과 같다.
가을달이 서녘산에 내리니 / 秋月下西岑
어두운 연기 먼 나무에 피어나네 / 暝煙生遠樹
끊어진 다리에 복건쓴 두 사나인 / 斷橋兩幅巾
그 누가 망천의 주인인지 / 誰是輞川主
장음정(長吟亭) 나공 식(羅公湜)은 웅장한 글과 곧은 절개가 천세에 빛난다.
풍랑은 으레 밤 깊으면 더하다네 / 風浪夜應多
라는 구절은 선배들이 이미 칭찬하였던 것이고, 원숭이 그림 제한 절구 두 편을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호)은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칭찬하였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다리로 긴긴 가지를 밟는구나 / 脚踏長長枝
떨어진 열매 주울 때 / 收拾落來顆
뉘 능히 암수를 구별하리오 / 誰分雄與雌
또 이런 시도 있다.
마른 나무 등걸 위에 해는 지네 / 落日枯査上
동그마니 앉아 고개조차 까딱 않으니 / 兀坐首不回
아마도 일천 봉의 메아리 듣나 보네 / 想聽千峯響
아랫시가 더욱 기발하다.
나식(羅湜)의 자는 장원(長源), 안정인(安定人)이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의 문인. 을사사화에 형인 부제학(副提學) 숙(淑)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그의 여강시(驪江詩) 상구(上句)는 다음과 같다.
푸른 강가에 해는 저물고 / 日暮滄江上
하늘이 차니 물결은 절로 이네 / 天寒水自波
다른 야사(野史)를 참고해 보면 최원정(崔猿亭)의 시로 되어 있다. 그의 숙부인 세절(世節)이 이 시를 가지고 그를 참소했다고도 하나,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화원시(畫猿詩)의 아랫수를 《기아(箕雅)》에서는 원정(猿亭)의 시라고 하였는데, 혹 잘못이 아닌가 한다.
손곡(蓀谷) 이익지(李益之)의 한식시(寒食詩)에
병객으로 떠돈 지 삼십년일세 / 病客江湖三十年
라든지, 임귀성(林龜城)에게 보낸 시에
몇 달을 집 떠나니 허리품 줄었구나 / 數月離家帶有餘
범숙(范叔)의 이 가난 뉘 가엾이 여길 건가 / 誰憐范叔寒如此
소진(蘇秦)처럼 곤궁하여 못감을 스스로 비웃노라 / 自笑蘇秦困不歸
라든지, 노산묘시(魯山墓詩)에
해 저물녘 노릉은 스산도 해라 / 西日魯山寒
등의 시구는 대우(對偶)가 자연스럽고 침착하고 돈좌(頓挫)하다. 세상 사람들은 더러 바람 앞의 꽃이라 하여 결점으로 여기나, 글쎄 미처 생각을 못해서 하는 말이 아닌지?
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 시집 속에 ‘청산금야월(靑山今夜月)’이라는 시는 바로 용재(容齋) 이 문민공(李文愍公)의 작품으로 시법(詩法)이 같지 않다. 편찬한 자가 잘못 엮은 것이다. 내가 승축(僧軸)을 보니 충암(冲庵)의 시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스님 만나니 문득 반가워라 / 逢師眼忽靑
돌샘 가의 같은 병든 나그네 / 石泉同病客
천지간에 하나의 부평초 / 天地一浮萍
성긴 빗속 가물거리는 등불은 싸늘한데 / 疏雨殘燈冷
잔 들자 들려오는 먼 바닷소리 / 持杯遠海聲
창 열고 거듭 두런거리다 헤어지니 / 開窓重話別
구름 설핏 샛별만 밝구나 / 雲薄曉星明
이 시가 본집에는 없으니, 당시 편자가 혹 미처 못본 것인가?
문민(文愍)의 이름은 행(荇), 자는 택지(擇之), 덕수인(德水人)이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었는데 문정(文定)이라 고쳤다가 다시 문헌(文獻)이라 고쳤다. 용재(容齋)의 제화시(題畫詩)는 다음과 같다.
후둑후둑 소상강에 비가 내리고 / 淅瀝湘江水
아스라이 보이네 반죽의 숲 / 依俙斑竹林
그러나 거기서 묘사키 어렵기는 / 此間難寫得
아황ㆍ여영의 심정 / 當日二妃心
서직사벽시(書直舍壁詩)는 다음과 같다.
늙마에 분주타 보니 병은 약속이나 한 듯 찾아오고 / 衰年奔走病如期
봄 흥취라야 많지 않으니 시까지 지을 건 없다 / 春興無多不到詩
졸다 깜짝 놀라 깨니 꽃철이 늦었구나 / 睡起忽驚花事晩
한 차례 보슬비가 장미를 적시누나 / 一番微雨濕薔薇
‘합천서 자규 소리를 듣다[陜川聞子規]’ 한 시는 다음과 같다.
강북 봄경치 밤이라 더 서글퍼서 / 江陽春色夜凄凄
잠깨자 까닭없이 나그네 맘 설레이네 / 睡罷無端客意迷
세상 만사 고향에 돌아감만 못하니라고 / 萬事不如歸去好
건너 숲에 울어대는 자규 소리 잦아라 / 隔林頻聽子規啼
주운영(朱雲詠)은 다음과 같다.
허리에 칼이 있으니 청할 게 무어 있소 / 腰間有劍何須請
땅밑에 사람 없어도 또한 노닐 만하네 / 地下無人亦足游
가석하다 한 나라 조정의 괴리령은 / 可惜漢廷槐里令
일생에 영신 머리 베기만을 알았구려 / 一生唯識佞臣頭
나의 중형이 언젠가 이손곡(李蓀谷)의 유송경시(遊松京詩) 가운데
누대 아래 격구하던 뜰엔 저녁 소를 먹이누나 / 臺下毬庭放夕牛
라는 구절을 칭찬하였으나 사인(舍人) 홍적(洪迪)의,
각은 황폐하나 옛 첨성각이네 / 閣廢舊瞻星
하는 시만큼 절실하지는 못하다.
홍적(洪迪)의 자는 태고(太古), 호는 하의(荷衣)이며, 남양인(南陽人)이다.
나의 중형이 일찍이,
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또,
하더니, 후에 명보는 나이 겨우 서른이 넘자 대제학에 임명되고, 벼슬로는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대제학이 되리라던 말이 비로소 증명되었다. 홍(洪)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는 하였건만 불행히도 뜻을 얻지 못하여 벼슬이 변변치 못하였으니, 재주와 팔자는 이처럼 같지가 않다.
덕공(德公)의 이름은 경신(慶臣), 호는 녹문(鹿門)이며 남양인(南陽人)이다. 만정당(晩全堂) 가신(可臣)의 아우로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명보(明甫)의 이름은 덕형(德馨), 호는 한음(漢陰), 광주인(廣州人)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홍덕공(洪德公)의 봉래풍악가(蓬萊楓嶽歌)를 나의 중씨가 아침 저녁으로 한번 죽 읊으면서 장단을 맞추며 감탄하였다. 그 시는 이태백(李太白)의 천로음(天姥吟)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종횡(縱橫)ㆍ억양(抑揚)에 한 자도 세속에 찌든 태가 없다. 반통투수사(飯筒投水詞)ㆍ기택요(沂澤謠) 등 작품은 모두 호방하며 기력이 있으나, 율시(律詩)나 절구(絶句)는 장편만은 조금 못하고, 산문 또한 간결하고 엄정하다. 운부(雲賦)ㆍ격구부(擊毬賦) 같은 작품은 양봉래(楊蓬萊)가 몹시 부러워하며,
하였다.
명 나라 사람의 시를 이손곡(李蓀谷)은 하중묵(何仲黙 중묵은 하경명(何景明)의 자)으로 첫째를 꼽되 나의 중형은 이헌길(李獻吉 헌길은 이몽양(李夢陽)의 자)을 최고로 여겼고, 윤월정(尹月汀)은 이우린(李于麟 우린은 이반룡(李攀龍)의 자)을 그 두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여겼으니, 정론(定論)을 내릴 수 없다. 봉주(鳳洲 명(明)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말은,
하고 그도 또한 누가 첫째요, 누가 다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익지(益之)가 하루는 율시 한 수를 내어 보이며,
하기에, 처음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
하니, 익지가 자기도 모르게 껄걸 웃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그윽한 집 성긴 반딧불만 고요 속을 나는구나 / 深屋疏螢度寂廖
밝은 달은 뜰에 가득 서늘한 이슬은 함초롬 / 明月滿庭凉露濕
푸른 하늘은 물 같은데 은하수는 아득해라 / 碧天如水絳河遙
이별의 꿈 고개고개 넘다 깨니 / 離人夢斷千重嶺
대궐 누수 소리 십이교에 여운지네 / 禁漏聲殘十二橋
지척에서 새삼 동각로 그립건만 / 咫尺更懷東閣老
고관의 말굽 소린 하늘처럼 아득해라 / 貴門行馬隔雲霄
짜임새와 구어(句語)가 대복(大復 하경명의 호)과 꼭 같아서, 감식안(鑑識眼)이 있는 사람이라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 시는 바로 이익지가 월정(月汀)에게 올린 작품이다.
월정(月汀)의 이름은 근수(根壽), 자는 자고(子固), 해평인(海平人)이며 벼슬은 예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임진난에 신노 제이(申櫓濟而 제이는 자)와 같이 북쪽으로 가는데, 명종(明宗)의 제삿날이 되었다. 그가 객창(客窓)에서 다음과 같이 지었다.
유언은 정녕 새 임금 부탁이었네 / 末命丁寧托聖人
선조 이십육년 종묘 제례도 못 모시게 되니 / 二十六年香火絶
센머리로 울부짖는 건 오직 유민들 / 白頭號哭只遺民
뜻이 몹시 서글퍼서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이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절(絶)’ 자를 고쳐 ‘냉(冷)’ 자로 하기도 하는데, 뜻은 좋으나 격은 먼저 글자만 못하다.
노(櫓)는 고령인(高靈人)이며 생원(生員)이다. 선대의 누로 과거에서 보류되어 급제를 못했다. 성민(聖民)의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 남양인(南陽人)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그쳤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명 나라 사람 등계달(滕季達)의 자는 진생(晉生)인데 오인(吳人)으로 글과 시를 잘하고, 글씨를 잘 쓰며, 또한 천하의 명산 대천을 두루 돌아다녔고 스스로 북해(北海)라 호하였다. 소재(小宰) 한세능(韓世能)이 계유년(1573, 선조6)에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북해(北海)가 따라왔는데, 그때 습재(習齋) 권벽(權擘)ㆍ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ㆍ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수행하였었다. 북해가 네 분과 서로 몹시 좋아하여 여러 번 시문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때, 나의 중형은 태사(太史 사관(史官)의 별칭)로 임금을 모시고 거침없이 일을 기록하자 조사(詔使)가 누구냐고 물으니 재상인 김계휘(金繼輝)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이름은 모요, 자는 모라 대답하였다. 북해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갑술년(1574, 선조7)에 나의 중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조천궁(朝天宮)에서 서로 만나보고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중형이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도 북해는 여러 번 사신 편에 편지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첨사(詹事) 황홍헌(黃洪憲)ㆍ도헌(都憲) 왕경민(王敬民)이 임오년(1582, 선조15)에 조서를 반포하러 올 때 북해가 나의 중형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하고, 또 그들에게,
하였다. 첨사가 의순관(義順館)에 이르러, 역관 곽지원(郭之元)에게 물어보고 중형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편지를 보이고 한편 쥘부채[手扇]를 선사하였다. 나의 중형도 율시를 지어 두 사신에게 인사하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하였다. 귀국하자 첨사가 북해에게,
하였다. 이것은 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에게 들은 말이다.
권벽(權擘)의 자는 대수(大手), 안동인(安東人)이며 벼슬은 감사(監司)이다. 정유일(鄭惟一)의 자는 자중(子中),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다. 한호(韓濩)의 자는 경호(景浩), 삼화인(三和人)이며 진사(進士)로 벼슬은 호군(護軍)이다. 김계휘(金繼輝)의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광주인(光州人)이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이다. 홍순언(洪純彦)은 역관(譯官), 남양인(南陽人)이며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었다.
사구(司寇) 정유일(鄭惟一)이 세상을 뜨자, 북해(北海)가 듣고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청강 위에 일산을 기울이고 즐긴 일 / 傾蓋淸江上
싸늘한 달빛 감미로운 술잔에 일렁이고 / 寒月漾芳罇
눈송인 털방장에 엉기었었지 / 雪花凝毳帳
그해 다섯 사람은 다리에 올라 / 斯年五子上河梁
바람머리에 손잡고 일어나 세 번이나 노래 불렀지 / 握手臨風起三唱
헤어진 뒤 갑자기 신선이 되어 / 別來何自遽游仙
학 타고 놀 속 만릿길을 소요하다니 / 萬里逍遙鶴背煙
가을밤은 쓸쓸하고 화표주에 / 秋夜冷然華表柱
푸른 하늘 가없는데 그대 오기만을 바라누나 / 碧天無際望君還
말쑥하고 속기가 없어 읽으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중국인이 인재를 아끼기가 대개 이와 같다.
황 조사(黃詔使 황홍헌을 가리킴)의 시를 사람마다 시원찮게 여겼으나 나의 중형만은,
했지만, 남들은 믿지 않았다. 《풍교운전(風敎雲箋)》에 첨사(詹事)의 글이 실린 것을 보면, 문법이 간결ㆍ엄숙하고 전아ㆍ미려하며 온후ㆍ순수하였으니 나의 중형은 인재를 아는 분이라고 할 만하다.
중추(中樞) 최립(崔岦)은 문장이 간결(簡潔)하고도 예로워서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더러 그의 시는 문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랑(正郞) 하응림(河應臨)을 제(祭)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
홀로 와 어느 가지에 칼을 건단 말가 / 獨來懸劍向何枝
재주와 명망이 당시의 비방을 이기지 못했는데 / 才名不救當時謗
사귐 도는 응당 저승 가야 알리라 / 交道還應入地知
영해에서 작별한 뒤에 영 이별을 하다니 / 瀛海別回爲此別
역정에서 시 지은 뒤 그대 시가 끊어졌네 / 驛亭詩後斷君詩
평생 술만 보면 다 마시고야 마시던 님 / 平生對酒須皆飮
궤연에 부어놓은 한잔 술 살피실지 / 倘省靈牀奠一卮
역시 근엄하고도 기발하며 건장하니 어찌 문만 못하다 할 것인가.
최립(崔岦)의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 통천인(通川人)이며 벼슬은 형조 참판이다. 하응림(河應臨)의 자는 대이(大而), 호는 청천(菁川), 진주인(晉州人)이다. 경재(敬齋) 하연(河演)의 오대손(五代孫)이며 벼슬은 수찬(修撰)이다.
나의 중형은,
하였다.
나의 중형은 언젠가,
고 한탄하였고, 이익지(李益之) 또한,
하였다. 그러나 시 짓기를, 소동파ㆍ황산곡처럼 하면 그만이지, 하필 새삼스레 도연명(陶淵明)ㆍ사영운(謝靈運) 사이를 꾀할 것인가.
나의 중형의 만년의 글은 유자후(柳子厚)와 너무도 같아서, 주한정기(晝寒亭記)ㆍ축려문(逐癘文) 등 작품은 가히 대씨당(戴氏堂)ㆍ축필방(逐畢方)등 문과 서로 어슷비슷하다. 최입지(崔岦之)가 화기(畫記)에 대해서 말하기를 철로보지(鐵鑪步志)만 못지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명(碑銘)과 묘지(墓誌)는 무엇보다도 그의 장기인데도 세상 사람은 다 모르고, 보아도 아는 이가 드무니, 후세에 반드시 양웅(揚雄)이 있어 알아 줄 것이다.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서울을 함락하고 바로 철령(鐵嶺)을 넘었다. 장계(長溪) 황정욱(黃廷彧)이 북청(北靑) 진남루(鎭南樓)에 올라 한탄하기를,
하더니, 7월에 회령(會寧)에서 사로잡혔다. 장계의 문장은 우뚝하고 웅건하며 속기가 없다. 조선초로부터 문병(文柄)을 잡은 자가 모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자 가운데서 나왔지만 장계만은 그렇지가 않아 세상에선 그를 영화롭게 여기지만 지난해 난리에 화를 유달리 더 입었다.
황정욱(黃廷彧)의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장수인(長水人)이며 벼슬은 병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입부(鄭立夫)의 이름은 언신(彦信), 호는 나암(懶庵),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우의정인데, 기축년(1589, 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원통하게 죽었다. 뒤에 신원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병부 주사(兵部主事) 왕사기(王士驥)는 봉주(鳳洲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아들로 우리나라 사신의 복물(卜物 사신이 가지고 가는 공물(貢物))을 검열하러 왔다가 마침 한집에 있게 되었다. 통역을 통하여 우리나라 문장을 보기 원하자 어떤 이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호)가 지은 정암(靜庵) 비문(碑文)을 보였다. 주사가 소매에 넣고 가며,
하고, 또
하였다고 한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자는 효직(孝直), 한양인(漢陽人)이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소재(蘇齋)의
산 바람에 이슬 기운 걷혔네 / 山風露氣收
라는 구절은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호)의 시집 중에서 찾는다 해도 흔히 얻을 수 없는 것이며
문득 판중추 되었다네 / 便就判中樞
라는 구절은 대우(對偶)가 자연스러워 솜씨를 부리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간 자기 아버지 신도비(神道碑)를 지을 때는 밋밋하여 굴기(崛奇)한 곳이 없으니, 아마도 기발하게 하려고 마음 쓰다가 도리어 옹졸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중형은 논평하기를, 국초 이래 문은 경렴당(景濂堂)을 제일로 치고, 지정(止亭)을 다음으로 치며, 시는 충암(冲庵)의 높음과 용재(容齋)의 난숙함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충암은 세련되지 않은 것 같고 용재는 너무 진부하니, 시 또한 경렴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지정 남곤(南袞)의 자는 사화(士華), 의령인(宜寧人)이며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기묘사화 때 간인(奸人)의 괴수이다.
가사(歌詞)를 지으려면 반드시 글자의 청탁(淸濁)과 율(律)은 고하(高下)를 분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음률(音律)은 중국과 달라서, 가사를 짓는 이가 없다.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이 왔을 때,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이 차운하지 않자, 세상에서는 체면을 유지했다고들 하였다. 그 후에 소퇴휴(蘇退休)가 시강(侍講)의 운에 차운한 시에,
꽃다운 풀빛 위에 눈길이 멈추네 / 目斷凄凄芳草色
라는 구절은 화공(華公)이 여러 차례 칭찬하였으니, 모두 음률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다만 그 말씨의 아름다움을 취한 것인지?
소퇴휴의 이름은 세양(世讓), 자는 언겸(彦謙), 진주인(晉州人)이며 벼슬은 찬성(贊成)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나의 누님이 언젠가 ‘시를 지으면 운율에 맞다’고 차칭하면서 소령(小令)짓기를 좋아하기에, 내 속으로 남을 속이는구나 하였는데, 《시여도보(詩餘圖譜)》를 보니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으로, 어떤 자는 전청(全淸)ㆍ전탁(全濁)이고 어떤 자는 반청(半淸)ㆍ반탁(半濁)이라 하여 글자마다 음을 달았기에 시험삼아 누님이 지은 시를 가지고 맞추어 보니, 어떤 것은 다섯 자 어떤 것은 세 자의 착오가 있을 뿐, 크게 서로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걸출ㆍ고매한 천재적인 소질로 겸손하게 힘썼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성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가오(漁家傲)’ 한 편은, 모조리 음율에 맞고 다만 한 자가 맞지 않았다. 사(詞)는 다음과 같다.
담머리엔 한그루 배꽃 희어라 / 墻頭一樹梨花白
옥난간에 기대어 고향 그리나 / 斜倚玉欄思故國
갈 수는 없고 / 歸不得
하늘과 맞닿은 우거진 꽃다운 풀빛만이 / 連天芳草凄凄色
비단방장 비단창도 쓸쓸히 닫겼는데 / 羅幙綺窓隔寂寞
단장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 적시네 / 雙行粉淚霑朱臆
강북과 강남은 무성한 나무가 가리었는데 / 江北江南煙樹隔
이 그리움 어이하리 / 情何極
산 높고 물은 아득 님 소식은 없으니 / 山長水遠無消息
‘주(朱)’ 자는 마땅히 반탁(半濁)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주(朱)’ 자는 전탁(全濁)이다. 하긴 소장공(蘇長公) 같은 재주로도 굳이 운율에 맞추지를 않았거든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일까보냐.
나의 중형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서진 배 여울 모래에 놓였구나 / 灘沙閣敗船
이것을 소재(蘇齋) 상공이 몹시 칭찬하여 당인(唐人)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나의 중형의 거산역(居山驛) 시는 이러하다.
터벅터벅 청주 고역정으로 향한다 / 倦向靑州古驛亭
나하동 그윽하고 산은 웅기중기 / 羅下洞深山簇簇
시중대(侍中臺)를 감도는 바다는 아득아득 / 侍中臺廻海冥冥
천년 전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혀 짧고 / 千年折戟沈沙短
십리 황무지는 비 온 뒤에 비린내 나네 / 十里平蕪過雨腥
옛일은 아득해라 물을 데 없고 / 舊事微茫問無處
두어 가락 젓대 소리 차마 어이 들을 건가 / 數聲橫笛不堪聽
삭계례(朔啓例)에 따라 그 시가 대궐에 들어가니, 주상이 보고 몇 번이나 감탄하고는 오륙구(五六句)에 이르러서는,
하였다.
조사(詔使) 황번충(黃樊忠)이 거련관(車輦館)의 반송(蟠松)을 읊었는데, 그 맨 끝구에 한(韓) 자를 압운하니, 나의 중형이 한 선자(韓宣子)가 각궁(角弓)을 읊은 일을 인용하여 짓기를
라 하였다. 이숙헌(李叔獻) 선생이 그 당시 원접사였는데 이 시를 버리고 쓰지 않자, 고제봉(高霽峯)이 크게 한탄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홍당릉(洪唐陵)이 몰래 황공(黃公)에게 보이니, 황공이 전편을 손으로 베껴 가져오게 하고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었다. 중국 사람은 시의 공정을 아는 것이 이러하다.
숙헌(叔獻)의 이름은 이(珥), 호는 율곡(栗谷), 덕수인(德水人)으로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당릉(唐陵)은 당성(唐城)의 잘못인 듯하다. 당성은 역관 홍순언(洪純彦)의 호이다.
율곡(栗谷)의 산중절구는 다음과 같다.
약 캐다 갑자기 길을 잃으니 / 采藥忽迷路
산마다 온통 가을 낙엽뿐 / 千峯秋葉裏
산승이 물 길어 오더니 / 山僧汲水歸
숲가에 피어나네 차 달이는 연기 / 林末茶煙起
성을 나서는 느꺼움[出城感懷]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사방에는 먹구름만 가득해도 / 四遠雲俱黑
중천엔 해 정히 밝구나 / 中天日正明
외론 신하의 한줌 눈물을 / 孤臣一掬淚
한양성 향하여 뿌리노라 / 灑向漢陽城
근세 어떤 선비가 지리산(智異山)에 유람갔는데, 한 외진 숲에 이르니, 폭포는 이리저리 흐르고 푸른 대 우거진 가운데 한 띳집이 있는데,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섰다가, 선비를 보고는 몹시 반기며 손을 맞아 솔 아래 앉혀 놓고 막걸리에 나물국으로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하면서 쪽지를 내어 놓는데, 그 속에 든 것이 바로 머리를 빗는다는 소두시(梳頭詩)였다.
천 번이나 훑어내니 이는 벌써 없어졌네 / 梳却千廻蝨已除
어떻게 하면 만 길 되는 큰 빗 구하여 / 安得大梳長萬丈
백성의 이 모조리 훑어 없앨꼬 / 盡梳黔首蝨無餘
선비가 자신도 모르게 뜰 아래 내려가 절하고 그 이름을 물으니 숨기고 알려 주지 않았다. 이튿날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는 두세 사람이 같이 다시 찾아가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성혼 호원(成渾浩原 호원은 자) 선생이 청양군(靑陽君)을 애도한 시에,
역려에서 만나니 바로 친구일레 / 逆旅相逢卽故人
오늘의 이별 자리 한 가락 노래로 / 今日祖筵歌一曲
고향 봄동산에 가서 누울 그대 전송하네 / 送君歸臥舊山春
하였으니, 이른바 길게 읊는 가락의 서글픔이 통곡보다 더하다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선생의 호는 우계(牛溪)이고 창녕인(昌寧人)이다. 벼슬은 참찬(參贊)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庵)이며, 청송인(靑松人)으로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차천로 복원(車天輅復元 복원은 자)의 글은 당시 사람들이 웅문(雄文)이라 일컬었다. 글(文)이란 기(氣)로써 주를 삼아야 하건만 복원(復元)은 하찮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고, 사륙문(四六文)은 전아(典雅)해야 하는데도 복원의 사륙문은 순정치 못하고 거칠다. 시는 그보다 더 못하다. 그의 일본기행고(日本紀行稿)가 매우 많아 천여 수나 되지만, 읊을 만한 글귀는 하나도 없다. 다만 명천(明川)으로 귀양 갈 때 지은
눈속에 시름겹긴 음산의 빛이로다 / 雪中愁色見陰山
라는 구절은 정말 웅혼(雄渾)하다. 그러나 전편이 다 그렇지는 못하다. 만약 복원이 조금만 사리를 추구하여 많이 짓거나 빨리 짓는 데 치우치지만 않았다면, 고인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천로(天輅)의 호는 오산(五山)이며, 연안인(延安人)으로 벼슬은 봉정(奉正)이다.
복원(復元)이 이필이 형산에 돌아가기를 비는 표[李泌乞還衡山表]를 지었는데,
늘 경월이 천혼을 두드렸네 / 常叩卿月於天閽
라는 구절이 있어 세상에서 적절하다고 일컬었다. 우리 중형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가는 윤칠계(尹漆溪)를 보내는 시의 항련(項聯)에 역시
복성이 먼저 낙동강을 비추누나 / 福星先照洛東江
라는 구절이 있으니, 차천로의 표에 비하면 나은 것 같다.
칠계(漆溪)의 이름은 탁연(卓然),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이며 칠원인(漆原人)으로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한익지(韓益之)가 어떤 일로 파직되어 농사를 짓기로 하고 온 식구가 원주로 내려갔다. 배가 종실(宗室) 순치수(順致守)의 별장에 닿았는데, 수(守)는 마침 활을 쏘고 약을 캐던 터라 사람을 달려 보내어 누구냐고 물어왔다. 익지(益之)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절구 한 수로 대구하기를
봄이 오자 살구꽃 마을에 낚시질하네 / 春來漁釣杏花村
쪽배 탄 나그네가 정겹게 문안드리니 / 扁舟過客勤相問
이 사람은 금양의 옛 원이라오 / 我是衿陽舊使君
라 하자 수가 배를 타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한익지는 금천 군수로 있다가 파면되어 가는 중이고, 순치(順致)는 금천에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익지(益之)의 이름은 준겸(浚謙), 호는 유천(柳川)이다. 청주인(淸州人)으로 벼슬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인조의 장인이다.
이익지(李益之)가 최가운(崔嘉運)을 따라 영광(靈光)에 노닐 적에, 사랑하는 기생이 있어 자금(紫錦)을 사주려는데, 그 비단 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익지가 시로써 다음과 같이 빌었다.
아침 해가 비치자 자주빛 안개가 피어나는구나 / 朝日照之生紫煙
미인은 그걸 사서 치마며 허리띠를 만들려는데 / 美人欲取爲裙帶
주머니 더듬어야 돈은 없구려 / 手探囊中無直錢
가운(嘉運)이 말하기를,
하고는 한 자에 각각 세 필씩 쳐서 그 요구에 응해 주었으니, 그 재주를 아낌이 이와 같았다.
동파(東坡)의 시에
한 차례 꽃 이울자 다음 꽃 새로워라 / 一番花老一番新
비낀 저녁 놀에 작은 누각 예 같건만 / 小樓依舊斜陽裏
그 당시 춤추던 이 어디 갔는지 / 不見當時垂手人
라는 것이 있는데, 손곡(蓀谷)이 죽은 아내를 슬퍼한 시에도 또한 동파의 말을 답습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닫힌 문엔 복사꽃만 쓸쓸한 봄날 / 門掩桃花寂寞春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달은 밝은데 / 依舊小樓明月在
발 걷고 달 즐길 이 그 누구런가 / 不知誰是捲簾人
이 시는 무르녹게 곱고 정겨워 전사람의 말을 쓴 줄도 모를 정도다. 익지(益之)가 기생을 너무 좋아한 것으로 남에게 비방을 받으면서도 정에 끌린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당 나라 장우(張祐)와 최애(崔涯)가 창루(娼樓)에 제시(題詩)를 해 주었는데, 만약 칭찬을 하면, 네 말[馬]이 끄는 수레가 그 문을 메우고, 그 시가 기생을 헐뜯으면 손님도 끊겼다. 신차소(申次韶) 선생이 상림춘(上林春)이라는 기생에게 준 시에
밤들자 바람 자고 날씨도 해맑아라 / 晩來風日轉淸和
노르스름한 열두 난간에 아가씨 옥과 같으니 / 緗簾十二人如玉
대궐 안 시인들도 말 가는 대로 찾아드네 / 靑瑣詞臣信馬過
라 하니, 기생의 명성은 이로 인해 십배나 올랐다. 이익지(李益之)가 옥하선(玉河仙)이란 기생을 비웃기를
암말 않고 앉은 꼴 귀신 같구나 / 黙坐無言似鬼神
몸에 걸친 비단옷도 얻어 입은 듯 / 遍身綺羅疑借著
고작해야 곽충륜에게나 시집가겠군 / 只宜終嫁郭忠輪
이라 하였다. 충륜(忠輪)은 장님인데 돈은 있었다. 이 기생은 유명했었으나 익지(益之)의 시가 나오자 문득 그 집이 쓸쓸해졌다. 똑같이 이름난 기생이로되, 한 시로 그 값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었으니, 어찌 다만 기생뿐이겠는가? 대개 선비도 이와 같았다.
차소(次韶)의 이름은 종호(從護), 호는 삼괴(三魁)로 고령인(高靈人)이다. 벼슬은 예조 참판에 이르렀는데, 연경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송도에서 죽었다.
삼괴(三魁)의 상춘(傷春) 절구에
한 사발 차 마시자 졸음 막 깨니 / 茶甌飮罷睡初醒
이웃에서 들려오는 붉은 옥피리 소리 / 隔屋聞吹紫玉笙
제비도 오잖고 꾀꼬리도 날아갔는데 / 燕子不來鸎又去
뜰에 가득 붉은 꽃잎만 지네 소리도 없이 / 滿庭紅花落無聲
라는 시가 있다.
임자순(林子順)은 스스로 소치(笑癡)라 호하였다. 우리 중형이 언젠가 기생들의 고사를 모아 글을 지었는데, 화치(和癡)의 고사를 따서 이십사령(二十四令)을 지었다. 자순(子順)이 칠언시로 제하기를
소치의 차지는 하나도 없네 / 笑癡之物一無之
인간 만사 다 거짓이라고 / 人間萬事皆虛僞
곳곳마다 풍류랑은 소치라 말들 하네 / 處處風流說笑癡
라 하였는데, 그의 글은 흔히 볼 수가 없다. 이른바 《수성지(愁城志)》라는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로 특별한 글이니, 천지간에 절로 이런 문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익지(益之)의 시를 세상 사람들은 기생에 대한 실수 때문에 트집을 잡지만, 그의 동산역시(洞山驛詩)에
비맞으며 보리 베어 풀섶길로 돌아오네 / 雨中刈麥草間歸
축축한 생솔가지 불도 안 붙는데 / 靑薪帶濕煙不起
문 들어서자 어린 것들 옷 잡고 칭얼대네 / 入門兒女啼牽衣
라 하였으니, 시골 살림의 식량 딸리는 보릿고개 실정을 직접 보는 듯하다. 그의 이삭줍기노래[拾穗謠]에는
온 종일 이리저리 주워야 소쿠리도 안 차요 / 盡日東西不滿筐
올해는 벼 베는 이 솜씨 하 좋아 / 今歲刈禾人亦巧
한톨이라도 흘릴세라 관창에 다 바쳤대요 / 盡收遺穗上官倉
라 하였으니, 흉년에 시골 사람의 말을 마치 친히 듣는 듯하다. 영남도중(嶺南道中)이란 시에서는
할멈은 어린 것을 데리고 따라가질 못하네 / 老婦携兒不得隨
사람 만나 떠돌아다니는 괴로움 넋두리하되 / 逢人却說移家苦
종군하기 육년이라 부자도 이별이라오 / 六載從軍父子離
라 하였으니,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살 수 없어 유리 신고하는 모습이 한편에 갖추 실려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가슴 아파하며 놀라 깨달아, 고달프고 병든 자를 어진 정치로 잘 살게 한다면, 그 교화에 도움됨이 어찌 적다 할 것인가. 문장을 지음이 세상 교화와 관계가 없다면 한갓 짓는데 그칠 뿐일 것이니, 이러한 작품이 어찌 소경의 시 외는 소리나 솜씨 있는 간언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망헌(李忘軒 망헌은 이주(李冑)의 호)이 진도(珍島)로 귀양 갈 때, 이낭옹(李浪翁 낭옹은 이원(李黿)의 자)을 작별하는 시에
이번 작별에 새삼 무슨 말 할꼬 / 一別復何言
궂은비는 깊은 바닷속까지 연하였고 / 怪雨連鯨窟
험상궂은 구름은 변방에까지 이었네 / 頑雲接鬼門
흰 구레나룻에 파리한 안색 / 素絲衰鬢色
두려운 눈물 자국 적삼에 그득 / 危涕滿痕衫
이소경(離騷經)의 말을 가지고 / 更把離騷語
그대와 꼼꼼히 따질 날 그 언제런가 / 憑君欲細論
라 하였다. 그가 제주도로 이배(移配)될 제, 배가 막 뜨려는데 친동생이 뒤쫓아 왔다.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어 작별하기를
백일은 밝게밝게 우리 형제를 비추네 / 白日昭昭照弟兄
정위새 와서 바다를 메우기만 한다면 / 若敎精衛能塡海
한 덩이 탐라도를 걸어서도 가련만 / 一塊耽羅可步行
하였으니 천년 뒤에도 읽는 이의 애를 끊어지게 하리라. 김경림 명원(金慶林命元 경림은 봉호)이 우리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낭옹(浪翁)의 이름은 원(黿),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며, 경주인(慶州人)이다. 벼슬은 예조 정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장류(杖流)되었고, 갑자년에 원통하게 죽었다. 망헌(忘軒)의 아우의 이름은 여(膂), 자는 홍재(弘哉)이고 벼슬은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명원(命元)의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이고 경주인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우리 형의 이름은 성(筬), 자는 공언(功彦)인데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호는 악록(岳麓)이다.
망헌(忘軒)의 만성시(漫成詩)에
나이 드니 풍상은 두렵기만 하고 짓궂은 병은 더욱 떠날 줄 모르는데 / 老怯風霜病益頑
외로운 처마 아침해에 포단에 앉았네 / 一簷朝旭坐蒲團
이웃 중이 가버린 뒤 사립 다시 닫았는데 / 隣僧去後門還掩
산구름만 돌난간을 스쳐 지날 뿐 / 只有山雲過石欄
이라는 것이 있다. 중에게 준[寄僧] 시는 또 다음과 같다.
종소리는 달을 두드려 가을 구름에 지고 / 鍾聲敲月落秋雲
산비는 주룩주룩 그대는 안 보이네 / 山雨翛翛不見君
염정은 닫히고 불길만 보이는데 / 鹽井閉門唯有火
개울 너머 인기척 밤깊도록 두런두런 / 隔溪人語夜深聞
한 경홍 호(韓景洪濩)는 글씨를 잘 쓸뿐더러 시도 잘 지었다. 그러므로 한경당(韓敬堂 경당은 한세능(韓世能)의 호)ㆍ등북해(滕北海 북해는 등계달(滕季達)의 호)ㆍ황규양(黃葵陽 규양은 황홍헌(黃洪憲)의 호)이 모두 그를 시인으로 대접했다. 임궁아집시(琳宮雅集詩)를 경홍(景洪)에게도 운을 화작하게 하였으니, 중국인이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언젠가 《봉주집(鳳洲集)》을 보니, 한 태사(韓太史)의 《동행록(東行錄)》에 발문을 지은 것이 있는데, 거기에서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를 칭찬하되 액자(額字)는 양속(羊續)보다 나아서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고 해서(楷書)는 왕헌지(王獻之)와 비슷하고 초서(草書)는 바로 회소(懷素)와 같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경홍을 잘 알아주었다고 하겠다.
다른 책을 상고하면 호(濩)의 자는 경호(景浩)인데, 여기서 경홍(景洪)이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혹은 자가 둘인지?
근세에 이현욱(李顯郁)이라는 이가 있어 시마(詩魔)에 걸렸는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 상공(相公)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굉장히 칭찬을 하였다. 이익지(李益之)가 어느 날 상공을 뵈러 가니 상공은 현욱(顯郁)의 시를 보여주며 그에게 고하(高下)를 품평케 하였다. 그러자 이익지는
봄이 오는 걸음걸인 느릴 것도 없고 서두는 것도 아닌데 / 步復無徐亦不忙
봄빛은 동서남북으로 고루 비치네 / 東西南北遍春光
라는 구절을 들어,
하였지만, 상공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으나 얼마 있다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허영주(許郢州)에게 차운한 시에
봄 산길 외져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물으니 / 春山路僻問歸樵
손가락으로 앞산 돌길을 가리키네 / 爲指前峯石逕遙
중도 백운도 어두운 골짜기로 돌아간 뒤 / 僧與白雲還暝壑
달은 푸른 바다 찬 밀물을 따라 오르네 / 月隨滄海上寒潮
세상살이 늙을수록 도무지 믿을 수 없는데 / 世情老去渾無賴
유흥만은 요즘에도 삭을 줄 모르누나 / 遊興年來獨未銷
둘러보니 외로운 배 벌써 자취 아득한데 / 回首孤航又陳迹
물 건너 드문 종소리만 한밤에 은은해라 / 疏鐘隔渚夜迢迢
라 하였고, 이익지에게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바람에 휘몰려 놀란 기러긴 편편한 모래밭에 내려앉고 / 風驅驚雁落平沙
물맵시 산빛엔 어스름 빛 자욱해라 / 水態山光薄暮多
용면(龍眠)시켜 이 경치 그림폭에 옮기려 하는데 / 欲使龍眠移畫裏
고깃배의 젓대소린 이를 어쩐다지 / 其如漁艇笛聲何
말들이 모두 속기가 없고 격이 또한 노숙하다. 시마(詩魔)가 떠난 뒤로는 일자무식이 되어 마치 추매(椎埋)처럼 되어버렸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자는 여수(汝受)이고 한산인(韓山人)인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용(鄭鎔)의 아들 백련(百鍊)이 일찍이 중풍에 걸렸는데 하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하였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벽도꽃 그림자 하늘문에 비치네 / 碧桃花影照天門
신선 수레 한 번 쉬면 천년이 훌쩍 지난다던데 / 鸞驂一息空千載
구령의 신선 피리 소리 한밤에 들리누나 / 緱嶺靈笛半夜聞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삼각산에 깃든 지 삼십년인데 / 棲身三角三十春
남녘 구름 바라보며 늘 울었네 / 日日每向南雲哭
솔바람 소리는 용음 소리만 못한데 / 松風不如龍吟聲
난안은 또 삼릉학만 못하도다 / 蘭雁又下三陵鶴
삼릉학은 오지를 않고 / 三陵鶴不來
촉도봉 앞엔 가을 달만 어둡구나 / 蜀道峯前秋月黑
어떤 이가 난안(蘭雁)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난초가 시들 무렵이면 철새인 기러기가 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한 해 남짓 지나더니 시마(詩魔)가 떠나자 병도 나았다. 이현욱(李顯郁)의 시마는 장편 대작도 다 지을 수 있었고, 산문(散文)도 다 원숙했는데, 정백련에게 걸린 시마는 격은 현욱보다 나았지만 율시는 절구에 못 미쳤으니, 더구나 그 문(文)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요개(姚鍇)의 이름은 전기(傳記)나 소설(小說)에도 보이지 않으니, 혹 당 나라 말기에 절구로 이름난 이가 아닌가 한다. 우리 중형은 그의 오언 절구를 사랑하여 성당(盛唐)에 못지 않다고 여겼다. 그가 노산(魯山)의 구택(舊宅)에 제(題)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복사꽃 핀 강 언덕을 지나가고 / 人度桃花岸
말은 버들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 운다 / 馬嘶楊柳風
노을진 산 그림자 속에 / 夕陽山影裏
노산군댁은 쓸쓸도 하여라 / 寥落魯王宮
청명날 남에게 주다[淸明日贈人]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이월이라 제비가 바다를 뜨니 / 二月燕辭海
고을마다 꽃이 가득할 때로다 / 千村花滿辰
청명이면 으레 취한 지도 / 每醉淸明節
올 들어 하마 삼십년일세 / 至今三十春
춘만(春晩)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봄잠 자고 나서 술잔 따르니 / 酒滴春眠後
걷은 발 앞에 꽃이 흩날리네 / 花飛簾捲前
덧없는 인생 얼마나 살리 / 人生能幾何
비 내리는 하늘을 창연히 바라보네 / 悵望雨中天
추일(秋日)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국화는 빗속에 꽃 드리우고 / 菊垂雨中花
뜨락의 오동잎은 가을에 놀래누나 / 秋驚庭上梧
오늘아침 갑절이나 서글퍼짐은 / 今朝倍惆悵
어젯밤 시골 꿈을 꾸어서일세 / 昨夜夢江湖
그의 문금(聞琴)이란 시는 이러하다.
아름다운 여인 붉은 비파를 끼고 / 佳人挾朱瑟
삐비 같은 섬수를 희롱하누나 / 纖手弄柔荑
갑자기 유수곡 타니 / 忽彈流水曲
집이 고릉 서녘에 있네 / 家在古陵西
익지가 또,
밝은 달은 큰바다 저문 줄도 모르고 / 明月不知滄海暮
구의산 기슭엔 흰 구름만 자욱 / 九疑山下白雲多
이란 구절을 전해 주었는데, 이런 구절은 이미 꿈의 경지에 든 것이다. 백련(百鍊)의 아우 감(鑑)은 나와 절친하므로, 상세한 얘기를 갖추 들었다.
용(鎔)의 호는 오정(梧亭)이고 해주인(海州人)이다. 시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일찍 죽었다. 감(鑑)의 호는 삼옥(三玉)인데 벼슬은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김충암(金冲庵)의 비로봉에 올라서[登毗盧峯]란 시에
해는 비로봉 위에 지고 / 落日毗盧峯
동해는 먼 하늘인 양 아스라해라 / 東溟杳遠天
푸른 바위에 불을 지펴 자고 / 碧巖敲火宿
옷소매를 나란히 자욱한 안개 속을 내려오다 / 聯袂下蒼煙
하였는데, 우리 중형의 시는
팔월이라 한가위 밤에 / 八月十五夜
비로봉 위에 홀로 서다 / 獨立毗盧峯
계수나무에 하늘 서리 차갑고 / 桂樹天霜寒
하늬바람결에 외기러기 그림자 / 西風一雁影
라 하였으니 충암(冲庵)의 시와 같은 가락이라 할 만하다.
고이순(高而順 이순은 고경명(高敬命)의 자)의 귤시(橘詩)는 다음과 같다.
평생을 소강남에서 마음껏 조으니 / 平生睡足小江南
귤밭 속 길이란 훤하여라 / 橘柚林中路飽諳
주황빛 열맨 예같건만 어버인 기다려 주질 않으시니 / 朱實宛然親不待
육적(陸績)이 있은들 그 뜻 어이하리 / 陸郞雖在意難堪
심어촌(沈漁村 어촌은 심언광(沈彦光)의 호)의 두견시(杜鵑詩)는 다음과 같다.
삼월이라 임금 여읜 이 마음 아픈데 / 三月無君弔此身
두견새 울음에 한결 더 슬프구나 / 杜鵑聲裏更悲辛
산중에서도 신하의 도리 폐치 않으니 / 山中不廢爲臣義
서천에서 재배하던 사람에 비기노라 / 準擬西川再拜人
이 두 시의 뜻은 너무도 서글프니 모두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어버이 생각, 임금 사랑하는 정성이 말 밖에 넘친다. 저 화려하게 꾸미기나 하는 자는 정말 시틋하다.
보락(保樂) 김안로(金安老)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봄은 우 임금이 정리한 산천에 무르녹고 / 春融禹甸山川外
풍악은 순 임금 뜰 새짐승 사이에 아뢴다네 / 樂奏虞庭鳥獸間
라는 시를 보이면서,
하였다. 꿈을 깨고 보니, 무슨 뜻인지도 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연산군이 병인년(1506, 연산군12)에 율시로 제를 내는데, 바로 ‘봄날 이원제자가 악보를 본다[春日梨園弟子閱樂譜]’라는 것이었고 간(間) 자로 압운(押韻)하라는 것이었다. 보락(保樂)이 갑자기 꿈속의 구절이 생각났는데 글제의 뜻과 꼭 들어맞으므로 이것으로 항련(項聯)을 메웠다. 그때 문경공(文敬公) 김감(金堪)은 대제학이고, 문경공 김안국(金安國)은 예조 좌랑으로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는데, 시를 읽다가 이 구절에 이르러,
하였다. 그러나 김감은 그렇게 여기질 않았다. 모재(慕齋 김안국의 호)가 말하기를,
하였다. 김감이 방을 내어 걸고, 보락을 불러 물어보니, 과연 꿈속에 신이 일러 준 것이었다. 이 일로 해서 모재를 시를 잘 알아보는[藻鑑] 사람이라 일컫게 되었다.
감(堪)의 자는 자헌(子獻), 호는 선동(仙洞)이고 또 다른 호는 일재(一齋)인데 연안인(延安人)이다.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렀다. 안국(安國)의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고 의성인(義城人)이다. 벼슬은 일상(一相)에 이르렀고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이 일이 정소종(鄭紹宗)의 일로 되어 있는데 근거가 분명하며, 또한 《국조방목(國朝榜目)》을 참고해 보아도, 연산군 갑자년(1504) 11월 별시에 어제(御題)는 춘방이원한열방악(春放梨園閒閱放樂)이었고 시는 칠률(七律)이었는데 제4등은 정소종(鄭紹宗)으로 되어 있어, 송와(宋窩 이기(李墍)의 호)가 기록한 것과 딱 들어맞는다. 여기서 김안로(金安老)라 한 것은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우리나라 아낙네로서 시 잘하는 사람이 드문 까닭은, 이른바 ‘술 빚고 밥 짓기만 일삼아야지, 그 밖에 시문(詩文)을 힘써서는 안 된다.’ 해서인가? 그러나 당인(唐人)의 경우는 규수로서 시로 이름난 이가 20여 인이나 되고 문헌 또한 증빙할 만하다. 요즘 와서 제법 규수 시인이 있게 되어 경번(景樊 허난설헌의 호)은 천선(天仙)의 재주가 있고 옥봉(玉峯) 또한 대가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선비인 정문영(鄭文榮)의 아내가 남편 대신 남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바람 불고 이슬 내린 열두 층 요대에 / 風露瑤臺十二層
아롱진 구름 모롱이에 도사(道士)의 경 읽는 소리 끊기었네 / 步虛聲斷綵雲稜
솔숲 새에 그립단 말 부치고파도 / 松間欲寄相思字
병꾸러기 장경은 무릉에 누웠다네 / 多病長卿臥茂陵
생원(生員) 신순일(申純一)의 아내가 글 잘하고 시 잘 지었는데 절구 한 수가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구름은 험상궂고 하늘은 물같은데 / 雲險天如水
높은 다락 곧 날 듯하네 / 樓高望似飛
무단히 밤새 내리는 비에 / 無端長夜雨
십년이라 그리운 서방님 생각 / 芳草十年思
양 부사(楊府使)의 첩도 시를 잘했는데 추한시(秋恨詩)는 다음과 같다.
우수수 가을 바람 오동 가지 흔들고 / 秋風摵摵動梧枝
하늘은 까마득 기러기 낢도 더디어라 / 碧落冥冥雁去遲
깁창에 기댔어도 사람 하나 안 보이고 / 斜倚綺窓人不見
눈썹 같은 초생달만 서녘 섬돌에 내리네 / 一眉新月下西墀
또한 모성(某姓)의 아내라고 전하는 이의 시는 다음과 같다.
그윽한 시내는 서늘만 하고 달은 아직 안 떴는데 / 幽磵冷冷月未生
충충한 등 덩굴 길에 드리웠고 다니는 이는 드물어라 / 暗藤垂路少人行
촌집은 정녕 맞은편 봉우리 너머려니 / 村家知在前峯外
엷은 안개 성긴 별빛 속에 외방앗소리 들려라 / 淡霧疏星一杵鳴
송강(松江) 정 상공(鄭相公 이름은 철(澈))의 소실이 남편의 호색(好色)을 간한 시는 다음과 같다.
도헌 벼슬 낮지도 않고 / 都憲官非下
그 충성 나랏님도 아시는 터인데 / 忠誠聖主知
나라를 경륜할 솜씨를 가지고 / 徒將經國手
부질없이 날마다 기녀(妓女)만 마주하시다니 / 日日對蛾眉
사문(斯文) 권붕(權鵬)의 계집종은 이름이 금가(琴哥)인데 또한 글을 알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장흥동에서 처음 헤어지고는 / 長興洞裏初分手
승학교 가에선 남몰래 애가 끊겼다오 / 乘鶴橋邊暗斷魂
해질 무렵 방초에서 헤어진 후론 / 芳草夕陽離別後
꽃지는 그 어디에선들 임 생각 안 했으리 / 落花何處不思君
이런 작품은 이루 다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문풍(文風)의 성함이 당 나라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국가의 한 성사(盛事)이다.
순일(純一)은 충경공(忠敬公) 신점(申點)의 아들로 벼슬은 군수이다. 아내는 이씨니 군수 경윤(景潤)의 딸이다. 양 부사(楊府使)의 이름은 사언(士彦)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연일인(延日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붕(鵬)의 자는 경유(景游)인데 안동인(安東人)이다. 찬성(贊成) 정응두(丁應斗)의 사위이며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송강의 우야시(雨夜詩)에
차가운 밤비는 대숲에 후두둑 떨어지고 / 寒雨夜鳴竹
가을 들자 풀벌레 침상으로 다가오네 / 草蟲秋近牀
흐르는 세월을 어이 머무르게 하며 / 流年那可住
자라는 백발을 어이 말리리 / 白髮不禁長
라고 하였고, 통군정시(統軍亭詩)에는
강 건너 가서 / 我欲過江去
곧장 송골산에 오르고 싶네 / 直登松鶻山
서녘 화표주의 학을 불러 / 西招華表鶴
구름 사이에 함께 노닐고지고 / 相與戲雲間
라고 하였으며, 의월정시(宜月亭詩)에는
백두산은 하늘에 연달아 솟고 / 白嶽連天起
성 외호의 물은 바다에 깊숙이 들어가네 / 城川入海遙
해마다 꽃다운 풀길 위로 / 年年芳草路
해지는 다리를 건너들 간다 / 人渡夕陽橋
라고 하였고, 추야시(秋夜詩)에는
우수수 잎 떨어지는 소리 / 蕭蕭落葉聲
후둑이는 성긴 비 인줄 알았네 / 錯認爲疏雨
아이 불러 문 밖에 나가보라니 / 呼童出門看
시내 남녘 나무에 달 걸렸다고 / 月掛溪南樹
박사(博士) 김질충(金質忠)이 병이 위독하기 하루 전에 지은 시에
삼년이나 약 먹고도 사람은 아직 앓고 / 三年藥力人猶病
하룻밤 빗소리에 꽃은 활짝 피었구나 / 一夜雨聲花盡開
하였으므로, 학사(學士) 김홍도(金弘度)가 보고는,
하더니 이튿날 새벽에 돌아갔다.
질충(質忠)의 자는 직부(直夫)이고 광주인(光州人)으로 벼슬은 호조 좌랑이다. 홍도(弘度)의 자는 중원(重遠)이고 호는 남봉(南峯)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벼슬은 전한(典翰)이다.
강릉부(江陵府)는 옛 명주(溟州) 땅인데,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東方]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인(異人)이 가끔 나온다. 국초(國初)의 함동원(咸東原)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 있고, 참판 최치운(崔致雲) 부자의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東原)만 못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으며,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또한 뛰어난 행실로 일컬어지고, 중종조의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과 최간재(崔艮齋)의 문장이 세상에 유명하다. 요즘 이율곡(李栗谷)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仲氏)와 난설헌 또한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崔雲溥) 이후에는 등과(登科)한 사람이 없어, 이인(異人)이나 문인[翰士]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한 선비는 전혀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보다.
동원(東原)의 이름은 부림(傅霖), 호는 난계(蘭溪)이며, 강릉인인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이고,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치운(致雲)의 자는 백경(伯卿), 호는 경호조은(鏡湖釣隱)이며, 강릉인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이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응현(應賢), 자는 보신(寶臣), 호는 수재(睡齋)이며, 벼슬은 대사헌이다. 간재(艮齋)의 이름은 연, 자는 연지(演之)이며, 강릉인인데, 벼슬은 참찬이고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운보(雲溥)의 자는 대중(大仲)인데, 연지의 당질(堂姪)이다. 아버지 해(瀣)는 벼슬이 한림(翰林)이다.
강릉부에서 구경할 만한 곳으로는 경포대(鏡浦臺)가 으뜸이요 한송정(寒松亭)이 다음간다. 이곳을 구경하는 사신(使臣)이 하 많은데도, 사람 입에 전파된 가구(佳句)ㆍ경어(警語)가 하나도 없으니, 이 어찌 묘사할 절경(絶景)이 너무나 무궁해서가 아니겠는가. 두로(杜老 두보(杜甫)를 가리킴)나 맹양양(孟襄陽 맹호연(孟浩然)을 말함)이 이 경치를 본다면
오와 초는 동남으로 트였고 / 吳楚東南坼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들뜬 듯하구나 / 乾坤日夜浮
라든지, 또
운몽택엔 기운이 찌는 듯 / 氣蒸雲夢澤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 / 波撼岳陽城
등의 구절이 반드시 현판에 걸렸을 터인데, 우리나라 인재는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또한 알 만하다.
명 나라 사람 산동 참의(山東參議) 여민표(黎民表)의 자는 유경(惟敬)인데 시를 잘하였다. 장 시랑의 훌륭한 맏아들 초보(肖甫)에게 부치다[寄張侍郞佳胤肖甫]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온 냇벌엔 백 번 이상 싸운 자취 / 滿目川原百戰餘
나그네 시름과 이운 풀은 한결같이 스산하다 / 旅情衰草共蕭疏
쓸쓸한 산 오래된 역에선 말탄 가을 손을 만나고 / 寒山古驛逢秋騎
먼 숲과 가물대는 불빛은 밤낚시로다 / 遠樹殘燈見夜漁
땅이 소상강에 가깝고 보니 저녁 비는 늘 내리고 / 地近瀟湘多暮雨
분포에 기러기는 온다만 고향 소식 드물구나 / 雁來湓浦少鄕書
벗은 정녕 아득한 하늘가에 있거니 / 故人政在雲霄外
안개 낀 물가에 서글퍼 정처 없어라 / 怊悵煙波未定居
이 시가 우리나라에 퍼져서, 《송계만록(松溪漫錄)》에는 나 장원 만화(羅壯元萬化)의 시로 실려 있는데, 글자가 잘못된 것이 많으니, 송계(松溪)는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을 뿐이기에 착오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송계만록》을 참고하건대, 만화(萬化)는 만호(萬湖)라고도 하는데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의당 다시 상고해야 할 것이다.
명 나라 사람 중 글로 이름을 날린 십대가(十大家)는 공동(崆峒) 이헌길(李獻吉)ㆍ양명(陽明) 왕백안(王伯安)ㆍ형천(荊川) 당응덕(唐應德)ㆍ좨주(祭酒) 왕윤령(王允寧)ㆍ안찰(按察) 왕신중(王愼中)ㆍ심양(潯陽) 동분(董玢)ㆍ녹문(鹿門) 모곤(茅坤)ㆍ창명(滄溟) 이반룡(李攀龍)ㆍ봉주(鳳洲) 왕세정(王世貞)ㆍ남명(南溟) 왕도곤(汪道昆)인데, 이공동(李崆峒)은 오로지 서한(西漢)만 본받고, 왕세정ㆍ이반룡은 난삽한 글귀가 선진(先秦)을 앞지르고자 하고, 왕남명(汪南溟)은 화려하고 건실하며 동분ㆍ모곤은 평이하고 원숙하며, 왕신중은 풍부하다. 그러나 명 나라 사람은 모두 역겹게 여기며 진부하고 속되다고 한다. 나의 의견도 거의 같다.
백안(伯安)은 문(文)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박잡함을 면치 못하고, 형천(荊川)은 전아 순실(典雅純實)하여 모두 대가가 될 만하다. 왕원미(王元美)의 무리가 명인(明人)의 문장을 서한(西漢)에 비기고, 이헌길(李獻吉)을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말함)에게 비기고, 우린(于鱗)은 양자운(揚子雲)에게 비기고, 자기는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비겼으니, 그 자기 자랑이 너무도 심하다.
우리나라 김계온(金季昷)ㆍ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南袞)의 호)ㆍ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ㆍ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의 글은 명 나라 십대가 속에 넣어 동심양(董潯陽)이나 모녹문(茅鹿門)에 비긴다면 그다지 못할 것 없으나 중국에서 팔을 휘두르고 뽐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계온(季昷)의 이름은 종직(宗直),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며, 선산인(善山人)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점필재가 제천정운(濟川亭韻)에 차운한 시에
꽃을 흩날리고 버들을 꺾는 반강 바람에 / 吹花劈柳半江風
돛그림잔 석양 기러기를 진 채 건드렁거린다 / 檣影擔搖背暮鴻
한 조각 고향 생각에 부질없이 기둥에 기대니 / 一片鄕心空倚柱
흰 구름만 날아서 술 실은 배를 스치는구나 / 白雲飛度酒船中
라 하였고, 보천탄즉사(寶川灘卽事)란 시에는
복사꽃 필 때 이는 파도 그 몇 자런가 / 桃花浪高幾尺許
은빛 바윈 이마까지 묻혀 보이도 않는구나 / 銀石沒頂不知處
쌍쌍이 나는 가마우지 옛 놀던 자갈밭 잃고는 / 兩兩鸕鶿失舊磯
물고기 입에 문 채 줄과 부들 속으로 날아드네 / 銜魚却入菰蒲去
라 하였으니, 참 좋다.
명 나라 사람으로서 시로 이름난 이로는 대복(大復) 하경명(何景明)ㆍ공동(崆峒) 이몽양(李夢陽)이 있어 사람들이 이백(李白)ㆍ두보(杜甫)에 비긴다. 한 시대에 잘 한다고 칭도된 자는 화천(華泉) 변공(邊貢)과 박사(博士) 서정경(徐禎卿)ㆍ태백(太白) 손일원(孫一元)ㆍ검토(檢討) 왕구사(王九思)인데, 하경명ㆍ이몽양의 장편칠률(長篇七律)은 근체(近體)ㆍ고체(古體)를 다 잘 쓴다. 이우린(李于鱗)ㆍ왕원미(王元美) 역시 이대가(二大家)라 일컬어지며, 오국륜(吳國倫)ㆍ서중행(徐中行)ㆍ장가윤(張佳胤)ㆍ왕세무(王世懋)ㆍ이세방(李世芳)ㆍ사진(謝榛)ㆍ여민표(黎民表)ㆍ장구일(張九一) 등이 모두 나란히 달려 앞을 다투었다.
우리나라의 김계온(金季昷)ㆍ김열경(金悅卿)ㆍ박중열(朴仲說)ㆍ이택지(李擇之)ㆍ김원충(金元冲)ㆍ정운경(鄭雲卿)ㆍ노과회(盧寡悔) 등의 작품이 비록 하경명ㆍ이몽양ㆍ왕세정ㆍ이우린에게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찌 오국륜ㆍ서중행 이하 사람에게야 뒤지겠는가. 그러나 칠자(七子)로 더불어 중국에서 서로 겨루지 못함이 한스럽다.
중열(仲說)의 이름은 은(誾),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며 고령인(高靈人)이다. 벼슬은 수찬(修撰)이다. 18세에 문과 급제하고 연산군 갑자년(1504)에 사형되었다.
그때 나이는 26세였다.
요즘 중국인의 문학은 서경(西京)의 시조(詩祖)인 두보(杜甫)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보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른바 고니를 새기다가 집오리를 만드는 셈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문(文)은 삼소(三蘇)를, 시는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를 배우므로 저속하여 취할게 없다. 시 잘한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임제(林悌)ㆍ허봉(許篈)은 모두 일찍 죽고, 다만 이익지(李益之)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이익지는 비방이 산더미 같으니, 세상이 너무도 재주를 아끼지 않는다.
중국 근래 명사로 글 잘하는 이 중에 요천(瑤泉) 신시행(申時行)ㆍ영양(穎陽) 허국(許國)ㆍ동록(洞麓) 여유정(余有丁)ㆍ상서(尙書) 육광조(陸光祖)ㆍ사업(司業) 원응기(苑應期)ㆍ강주(康洲) 나만화(羅萬化)ㆍ시랑(侍郞) 심일관(沈一貫)ㆍ규양(葵陽) 황홍헌(黃洪憲)ㆍ백담(柏潭) 손계고(孫繼皐)ㆍ태사(太史) 심무학(沈懋學)ㆍ곤명(崑溟) 위윤중(魏允中)ㆍ태사(太史) 이정기(李廷機)가 더욱 두드러지고, 글을 잘하여 후세에 입언(立言)할 만한 정도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옥당 벼슬을 하는 사람도 눈으로 어로(魚魯)를 구별 못하며, 제고(制誥) 벼슬을 띠고 있는 사람도 사륙문(四六文)에 익숙지 못하여 심지어는 잘하는 이에게 차작을 해서 자기 직책을 메워가기까지 하니, 남의 의론이나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 고평(考評)을 하는 이도 또한 그 이름만 따라 등수의 고하(高下)를 매기니, 조선조에는 신시행(申時行)ㆍ허국(許國)의 무리를 바라볼 만한 사람도 없거든, 하물며 중국의 칠자(七子)와 재주를 겨룰 수 있겠는가.
대개 명 나라 사람은 학문을 애써 쌓아서 문과에 오른 사람도 등잔불을 켜놓고 새벽까지 글을 읽어 늙어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시문(詩文)이 모두가 혼후(渾厚)하고 기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는 문구(文句)나 잘 꾸며서 과거를 보는데 과거에 붙게 되면 곧바로 책 버리기를 원수같이 한다. 우리나라가 예전에는 문헌으로 일컬어졌는데, 이제 와서는 문헌이 어찌 이다지도 미약하단 말인가. 이 어찌 윗사람이 장려하고 이끌어 성취시키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혹 세상이 말세가 되고 풍속이 저속해져서 인재가 옛날에 미치지 못해서인가?
그러나 사람마다 다 요순(堯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데, 하찮은 하나의 기예를 어찌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하여 진력하지 않을 것인가. 애써 공부를 계속하면 고인에게 미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칠자(七子)라든지, 신시행(申時行)ㆍ허국(許國) 따위일까보냐. 우선 이것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한다.
선대부(先大夫)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하셨다. 그러므로 두 형과 나는 모두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생각하기를, 읽을 만한 책이 하도 많은데, 하필 이것을 읽을 것이 무엇인가 하였었다. 그러다가 황 조사(黃詔使)가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관반(館伴)인 정임당(鄭林塘) 상공(相公)에게 고려와 신우(辛禑) 부자의 내력을 묻자 상공이 입만 벌리고 대답을 못하니, 우리 중형이 들어가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선대부의 높은 견식이 여느 사람보다 매우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아, 재주가 임당(林塘) 같은 분으로서도 중국 사신과 문답할 때에 곤욕을 당했으니, 사신의 접반관이 되어 본국의 일을 몰라서 되겠는가.
임당(林塘)의 이름은 유길(惟吉), 자는 길원(吉元)이며 동래인(東萊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길의 사제극성(賜祭棘城)이란 시에
성조에선 죽은 이에게도 은혜 베푸사 / 聖朝枯骨亦霑恩
해마다 쓸쓸한 담장에 제사를 내려주시네 / 香火年年降寒垣
제사 마친 단 위엔 비바람도 잦아지고 / 祭罷上壇風雨定
흰 구름만 바다인 양 앞 마을에 자옥해라 / 白雲如海蒲前村
라 하였고, 영유이화정(永柔梨花亭)이란 시에는,
꽃샘 비바람은 옛 시에도 있거니와 / 落花風雨古人詩
올봄 꽃은 공교롭게도 늦장부리네 / 花到今春巧耐遲
꽃 필 때 되면 응당 달이 있겠고 / 直至開時應有月
그중의 봄빛 자규야 알고말고 / 個中春色子規知
라 하였으며, 또 그의 몽뢰정춘첩(夢賚亭春帖)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선대의 백발 판서 / 白髮先朝老判書
한가컨 분망컨 깜냥대로 편안했네 / 閑忙隨分且安居
고기잡이 영감 봄 강이 따사롭다면서 / 漁翁報道春江暖
꽃도 피기 전이건만 쏘가릴 진상하네 / 未到花時進鱖魚
최보(崔溥)의 자는 연연(淵淵)이요 나주인(羅州人)으로 호는 금남(錦南)이다. 문장에 능하여 문과와 문과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바다를 건너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40일 만에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 우두(牛頭) 외양(外洋) 땅에 배가 닿게 되었다. 당두채(塘頭寨) 천호(千戶)가 왜구(倭寇)라 무고하였으나 최보가 질문에 척척 응답하였으므로 화를 모면하였다. 항주(杭州)에 이르자, 삼사관(三司官)이 본국의 역대 흥망과 군현의 건치(建置), 산천ㆍ예악ㆍ인물에 대하여 매우 꼼꼼히 물었으나 최보의 대답이 마치 대를 쪼개듯 하므로, 삼사관이 모두 감탄하였다.
돌아오자 성종이 일기를 쓰도록 명하므로 이를 써서 바치니, 모두 3권이다. 최보의 시는 흔히 볼 수 없는데, 송사를 읽다[讀宋史]라는 시에
등잔불 돋우고 다 읽고 나선 문득 긴 한숨 짓노니 / 挑燈輟讀便長吁
중국 천지엔 대장부랄 사람 하나 없구나 / 天地間無一丈夫
삼백 년 내려온 중국 전토를 / 三百年□中國土
어쩌자고 늙은 선우에게 내어 주었나 / 如何付與老單于
하였다. 시가 침착하고 노련하니, 그 사람 됨됨이를 짐작할 만하다.
최보의 벼슬은 사간(司諫)인데 연산군 갑자년(1504)에 처형되었다.
성종(成宗) 때 정의 현감(旌義縣監)에 이섬(李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보(崔溥)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揚州府) 굴항채(崛港寨)에 닿으니, 채관(寨官)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 / 布帆十幅不遮風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섬(暹)은 무인(武人)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記事)가 없어 애석하다.
가정(嘉靖) 임술년(1572, 명종17) 간에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 정 상공(鄭相公)의 이웃 사람으로 해상(海商)을 업으로 하는 자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닿자, 지부에서는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하고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을 가는 길이 공 천사(龔天使 조선에 사신왔던 공용경(龔用卿))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龔氏)는 그때 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있었다. 조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역관(譯官)에게 청하여 길을 늦추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상인이 호음의 가계(家系)와 벼슬 지낸 경위를 말하자, 공씨가 크게 놀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처자를 나오라 하여 인사시키고, 호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또 후히 대접하여 보냈으니, 공씨가 호음에게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장흥(長興) 사람 이언세(李彦世)가 왜인(倭人)에게 사로잡혀 남번(南蕃)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주야(晝夜) 40일을 가서야 중국의 광서(廣西) 향산현(香山縣) 땅에 닿았다. 그는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명(明) 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반자[火伴]와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지현(知縣)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는 만인(蠻人)이 올린 고장(告狀)이라고 하여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조선국(朝鮮國)의 장흥(長興)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남웅부(南雄府)에 압송하니 삼사관(三司官)이 그 문초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언세는 남창(南昌)과 항주(杭州)ㆍ소주(蘇州)의 풍경이며 북경ㆍ남경의 훌륭한 경치를 말하기는 하나, 자세하지는 못하다.
승지(承旨) 이정립(李廷立)이 지은 표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 데 감사하는 표[謝刷還漂海人口表]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만 이랑 파도 헤치고 / 越萬頃之波濤
빛나는 요 임금 땅에 나아갔다가 / 就堯如日
천리라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 返千里之桑梓
우 임금 같은 임금 아니었던들 고기밥 되었으리 / 微禹其魚
이 글은 대우(對偶)가 적절하고 뜻이 좋다. 전편을 볼 수 없음이 섭섭하다.
이정립(李廷立)의 자는 자정(子正), 광주인(廣州人)으로, 호는 계은(溪隱)이고,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신묘년(1591, 선조24) 겨울에 중국 상인 20여 명이 사탕을 팔다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왔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가서 보고 소주와 항주의 풍속을 물으니, 그 중 한 사람이,
하였다. 그 중에 장덕오(莊德吾)란 사람이 있어, 자기 말로 복건(福建) 장포(漳浦) 사람이라 하기에, 내가 시랑(侍郞) 장국정(莊國禎)과 시랑 주천구(朱天球)가 당신의 이웃인가고 묻자 장덕오가 놀라며,
하였다. 내가 또
하자, 덕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껄껄대고 웃었다. 역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수재가 나이 젊어도 중국의 일을 잘 안다고 하더라.’고 했다. 왕신민(王信民)이라는 자가 나에게,
하고 묻기에, 무자년에 과거하여 국자감생(國子監生)이 되었다 하니, 왕씨가,
하고 물었다. 대개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이 으레 이부(吏部)에 추천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은 시를 잘하며 순평하고 전아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한 연구를 자랑하였는데
산귀신은 밤마다 금정불을 엿보고 / 山鬼夜窺金井火
물새는 가을이라 석당 연기에 잠들었네 / 水禽秋宿石塘煙
하였으니, 시구가 절로 좋다.
대박(大樸)의 자는 사진(士眞), 호는 청계(淸溪) 남평인(南平人)으로 벼슬은 학관(學官)이었다. 임진년 왜란 때 고제봉(高霽峯)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무기며 군량을 모두 자기집에서 대었다. 군중에서 병으로 죽자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으로 내렸다.
상사(上舍) 정지승(鄭之升)이 시를 잘했는데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의 무리가 몹시 추장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한 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돋아나는 풀잎 속에 왕손의 한 스며들고 / 草入王孫恨
피어나는 꽃잎따라 두견이 시름을 더하누나 / 花添杜宇愁
물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 汀洲人不見
바람에 목란배만 일렁이누나 / 風動木蘭舟
스님을 전송하다[送僧]란 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서에서 돌아오고 나는 또 서로 가니 / 爾自西歸我亦西
봄바람 한 지팡이 가는 길은 높고 낮네 / 春風一杖路高低
그 언제 달 밝은 밤 소요사에서 / 何年明月逍遙寺
동녘 숲 두견이 울음 함께 들을꼬 / 共聽東林杜宇啼
또 한 연(聯)은 다음과 같다.
손이 돌아가자 문을 닫으니 남은 건 달빛뿐 / 客去閉門惟月色
꿈 깨자 빈 산엔 흩어지느니 솔바람 소리 / 夢廻虛岳散松濤
그 전집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지승(之升)의 자는 자신(子愼), 호는 총계(叢桂) 온양인(溫陽人)으로 정렴(鄭)의 조카이다. 벼슬은 하지 않았다.
송익필(宋翼弼)이란 자도 시를 잘하니, 그의 산설(山雪)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밤새도록 내린 찬 눈 층대에 수북 쌓였는데 / 連宵寒雪壓層臺
다른 산에 묵은 주승 돌아오질 않았네 / 僧在他山宿未廻
등잔불 깜박이는 작은 절집 신령한 바람 고요한데 / 小閣殘燈靈籟靜
소나무 스쳐오는 밝은 달 홀로 보네 / 獨看明月過松來
구격(句格)이 맑고 뛰어나니, 어찌 사람의 지체로서 어찌 그 좋은 말까지 무시할 것인가.
송익필(宋翼弼)의 자는 운장(雲長), 호는 귀봉(龜峯)으로 흉인(凶人) 사련(祀連)의 아들이다. 본디 사천(私賤)의 자식이나, 문학의 조예가 뛰어나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서로 친했다. 아우 한필(翰弼)은 자는 사로(師魯), 호는 운곡(雲谷)인데 역시 시를 잘했다. 익필(翼弼)의 저물녘 남계에 배를 띄우다[南溪暮泛]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달 뜨기 기다리다 여울 내려오기 머뭇거렸네 / 待月下灘遲
거나한 가운데도 낚싯대 드리우니 / 醉裏猶垂釣
배는 흘러가도 꿈은 그대로 / 舟移夢不移
한필(翰弼)의 우음시(偶吟詩)는 다음과 같다.
어제 비엔 꽃이 피더니 / 花開作日雨
오늘 아침 바람에 그 꽃 지는구나 / 花落今朝風
애닯다 한철 봄이 / 可憐一春事
비바람 속에 오고 가누나 / 往來風雨中
최전 언침(崔澱彦沈 언침은 자)이 신동(神童)이란 이름이 있었다. 어려서 금강산에 노닌 적이 있었는데 그 길로 영동(嶺東) 산천을 구경하고 경포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봉래산 한번 들어 삼천년을 / 蓬壺一入三千年
은바다 아득아득 물은 맑고 얕아라 / 銀海茫茫水淸淺
난새 타고 피리 불며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 鸞笙今日獨飛來
벽도화 꽃 그늘에 님은 아니 보이네 / 碧桃花下無人見
중형이 그 시를 매우 칭찬하고 그 운자에 이어 읊기까지 하였는데, 그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전(澱)의 호는 양포(楊浦)니 해주인(海州人)으로 진사(進士)였다. 양포(楊浦)의 늙은 말[老馬]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꿈결에 천리길 가네 / 夢行千里路
가을바람 나뭇잎 지는 소리에 / 秋風落葉聲
놀라 깨니 지는 해가 뉘엿뉘엿 / 驚起斜陽暮
굴원(屈原)은 불평을 원망했네 / 靈均怨不平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도 / 至今魚腹裏
속마음 밝은 것은 간직했겠지 / 留得寸心明
금각(琴恪)의 자는 언공(彦恭)이니 봉성인(鳳城人)이다. 중형에게 12세 때 글을 배워 육경(六經)을 통하고 자사제집(子史諸集)을 두루 읽지 않은 게 없었다. 글 짓기를 전중(典重)하고도 온화하고 아름답게 하여 이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조대기(釣臺記)ㆍ주류천하기(周流天下記)ㆍ한발문(旱魃問) 등의 글이 세상에 전한다. 16세에 해외에 유학하였다. 복충증(腹蟲症)을 얻어 집에 있으면서 《풍창랑화(風牕浪話)》를 지으며 심심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무자년(1588, 선조21) 가을에 죽었다. 죽는 날에 스스로 명(銘)을 짓기를,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아버님 어머님 / 父兮母兮
나 때문에 울지 마세요 / 莫我哭兮
《조대집(釣臺集)》 4권이 있다.
종실(宗室)인 금산수 성윤(錦山守誠胤)은 자가 경실(景實)인데 우리 중형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시는 온정균(溫庭筠)과 이상은(李商隱)을 숭상하여 그들의 시풍을 터득하였다. 그의 향렴체(香奩體)란 시는 다음과 같다.
부용성 밖 예주궁에 / 芙蓉城外蕊珠宮
난새 수레로 허 시중을 맞네 / 鸞馭來迎許侍中
앵무부는 달 밝은 밤에 읊조리고 / 鸚鵡賦吟明月夜
숙상 갖옷은 비단 병풍에 걸려 있네 / 鷫鷞裘掛錦屛風
추운 비단 방장엔 향로까지 곁들였고 / 寒重繡幕漆香獸
꿈 깬 은등잔엔 등화[玉蟲]가 맺혔네 / 夢罷銀燈結玉蟲
앵무새에 말 전하노니 자주 손을 물리쳐서 / 傳語雪衣頻撝客
운우의 정 총총히 흩어지게 말아다오 / 莫敎雲雨散悤悤
달[姮娥]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옥같은 달에 이슬만 함초롬 맺혔구나 / 露華徧濕玉蟾蜍
항아가 장생약이야 얻었다 한들 / 姮娥縱得長生藥
해마다 홀로 사는 애달픔 어쩌지 / 爭奈年年恨獨居
자못 부귀롭고 아름다운 운치가 있다. 임진왜란에 어버이를 하직하고 임금을 호종하기에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배운 바 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할 만하다.
금산(錦山)의 호는 매창(梅窓)으로 성종(成宗)의 4세손(世孫)이요, 왕자 익양군 회(益陽君懷)의 증손이다. 그 아버지는 청원도정 간(靑原都正侃)이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양정집(梁廷楫)은 호남 사람으로 나이 10세에 글을 잘 써 고향에서 신동(神童)으로 소문났었다. 스님에게 보내는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노닥노닥 기워 입은 한 늙은 영감 / 百結一老翁
지팡이 의지하여 바위 아래 서 있어 / 倚杖巖下立
머리 돌려 뭔지 기다리는 듯하니 / 回頭如有看
필경 동해바다 달일 테지 / 應待東溟月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잔치에도 초대받았었으나 불행히 세상을 떴다.
근세 선비들은 예(禮)를 병으로 여기고 다만 허무(虛無)를 말하고 욀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채 수레를 타고 태연히 거리를 나돌아다니며 조금도 꺼리낌이 없는 이가 있는데 엄숙한 선비나 단아한 선비조차 이에 물들었다. 요즘 박엽 숙야(朴燁叔夜 숙야는 자)라는 사람이 있어 시문(詩文)을 잘하나 불행하였다. 기생집[秦樓]에서 나의 글씨 솜씨와 시법을 보고 본떠 가는 곳마다 벽에다 써대었는데 뒷사람이 와 보고는 으레 이를 아무개 글씨다 하였다. 그의 상춘곡(傷春曲)은 다음과 같다.
꾀꼬리 읊조리고 제비는 지지배배 남의 시름 자아내네 / 鸎吟燕語愁人腸
이끼 자욱 이슬에 함초롬 비취빛으로 젖었는데 / 苔痕漬露翡翠濕
흩날리는 눈같은 살구꽃은 연지빛으로 향기롭다 / 杏花撲雪臙脂香
봉황 무늬 저고리는 흐르르 얇아 봄추위 스며드는데 / 鳳衫輕薄春寒襲
은병풍 기대어서 이별을 슬퍼하네 / 斜倚銀屛怨離別
서방님 한 번 떠나 돌아오질 않아 / 藁砧一去歸不歸
손꼽아 기다리던 그 봄도 또 삼월이라니 / 屈指東風又三月
선자가리개[仙子障]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손으로 바둑알 잡고 생각만 거듭 / 手拈棋子費思量
몇 해 두고 바둑은 두질 않으니 / 經年不下神僊著
아마도 선경엔 세월이 긴가보이 / 想是蓬萊日月長
달 나라 궁전[月殿]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창창한 밤 꽃동산 / 花苑夜蒼蒼
등불 들고 해당화 구경 / 移燈賞海棠
이슬은 붉은 너울에 스미고 / 露華侵絳帕
향기는 다홍 치마에 배어드네 / 香氣襲紅裳
고래론 황금빛 자물쇠 만들고 / 鯨製黃金鑰
소라는 백옥상에 아로새겼네 / 螺雕白玉牀
가던 구름 저물녘 비 되어 내리니 / 行雲著行雨
돌아가면 초 양왕을 뵙게 되겠네 / 歸見楚襄王
이울어가는 봄[殘春]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먼지 탄 병풍은 우중충한데 / 屛暗下流塵
엉긴 구름 비단 수렐 옹위하듯 / 凝雲護綺輪
버들 꽃은 어지러이 흩날리고 / 斷絲縈落絮
제비새낀 이우는 봄을 재재거리네 / 雛燕語殘春
졸음기 붉은 볼에 피어나고 / 睡思生紅頰
눈물 자국 푸른 수건에 젖네 / 啼痕染翠巾
용이 서린 옥대의 거울은 / 盤龍玉臺鏡
눈썹 그릴 미인을 기다릴 뿐 / 只待畫眉人
선동요(仙洞謠)는 다음과 같다.
푸른 새 깃으로 금자(錦字) 전하니 / 靑鳥翩翩錦字通
광한전엔 옥피리 소리 / 玉簫吹煙廣寒宮
알고 말고 선동 안의 꽃같은 여인 / 情知洞裏如花女
웃으며 멋쟁이 허 시중을 가리킬 것을 / 笑指風流許侍中
시격(詩格)이 나와 비슷하며 자획(字畫)은 분간할 수 없어 진짠지 가짠지 사람들이 정말 의심하게 된다. 이 때문에 내가 화류가에 드나든단 소문을 얻게 되었으니 우습다. 옛사람이 찻집[茶肆]ㆍ술집[酒坊]에도 도리상(道理上) 들어가지 않았거든 하물며 이보다도 더한 기생집일까보냐? 서진(西晉) 말(末)의 선비가 청담(淸談)을 숭상하자 오호(五胡)가 중국을 어지럽게 했고, 당(唐)이 망할 무렵 세상 풍속이 풍류를 즐기자 칠성(七姓)이 쟁립(爭立)하였으니, 이 두 가지를 겸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요행일 뿐이다.
박엽의 호는 국창(菊窓), 반남인(潘南人)이며 벼슬은 평안 감사를 지냈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 때에 사형되었다.
두남(斗南) 김일숙(金一叔)은 글은 보통이었으나, 남을 풍자하는 작품으로는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이웃에 어른(丈人)이 있었는데 앞니가 길어 홀(笏) 모양 같았음으로, 다음과 같이 찬(贊)을 지었다.
나이 일흔에 / 生年七十
긴 것이라곤 이[齒]니 / 所長者齒
이는 홀을 만들만 허구려 / 齒兮可爲笏兮
또 이웃사람이 눈이 가늘어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모든 것 보고 싶지 않아 한세상을 하찮게 보는 자인가 / 不欲觀諸眇視一世者邪
보이는 것이 작으니 / 其見者小
우물에서 하늘을 보는 자 아닌가 / 豈非坐井觀天者邪
그 눈동자를 보면 / 觀其眸子
그 사람 무슨 수로 속마음 숨길쏜가 / 人焉瘦哉
나의 중형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였다.
김두남(金斗南)은 원주인(原州人)이며 응남(應南)의 사촌 동생이다. 음관으로 부윤(府尹)을 지냈다.
내가 다리를 앓아 핑계삼아 장인댁에 가니, 중형은 내가 나들이 않음을 빈정대어 시를 지어 보냈는데 첫 수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태왕(太王)을 사모하는 자네 마음 알아 / 天意憐君慕太王
짐짓 두 다리에 온통 부스럼이 나게 했구나 / 故敎雙脚遍生瘡
이웃이 지척이나 오히려 멀다 혐의하니 / 隣家咫尺猶嫌遠
하물며 물마름 우거진 십리길이랴 / 何況蘋洲十里長
또 다른 수는 다음과 같다.
체 짧은 수레도 안 타는 자네 / 知君不駕短轅車
덩그런 황문이 한길가에 서겠네 / 高處黃門大路隅
세상이 온통 공사에만 종사한다면 / 擧世若從公事業
이 세상 어디메서 잠부를 찾을꼬 / 人間何地覓潛夫
대개, 태왕이 그 비를 사랑하기에 세상에서 애처가를 태왕이라 부르는 것이다. 황문은 옛날 어떤 사람이 그 아내를 너무 사랑하여 그 친구가 빈정대기를,
하였다 해서 쓴 것이니, 그 풍류와 익살이 모두 이와 같다.
익지(益之)가 일찍이 ‘낙화(落花)’를 읊기를
슬프다 진분홍에 또 연분홍 / 惆悵深紅更淺紅
한꺼번에 풀풀 날아 작은 뜰에 지는구나 / 一時零落小庭中
푸른 이끼에 붙어 남는 것만은 못하나 / 不如留著靑苔上
바람 따라 동서로 흩날리는 것보단 낫구나 / 猶勝風吹西復東
하니, 어의(語意)가 함축되어 있다. 또 감회를 읊은 절구 두 수는 다음과 같다.
성궐은 들쑥날쑥 솟을대문 늘어섰는데 / 城闕參差甲第連
오후의 집 풍악소리 하늘 높이 울리는구나 / 五侯歌管沸雲煙
패릉교 위 나귀 탄 나그네 / 灞陵橋上騎驢客
양양땅 맹호연 만은 아니라오 / 不獨襄陽孟浩然
둘째 수는 다음과 같다.
벼슬 높은 고관들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고 / 好爵高官處處逢
수레는 물 흐르듯 말은 용 같네 / 車如流水馬如龍
장안 밭두렁에 부질없이 고개 돌리니 / 長安陌上空回首
지척인 대궐문 아홉 겹이 가렸구나 / 咫尺君門隔九重
용나루를 건너며[渡龍津]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강물은 용나루에 급히 내리니 / 秋江水急下龍津
나루의 아전은 배 멈추고 웃었다 성냈다 / 津吏停舟笑更嗔
서울 나들이 그 무슨 소용 / 京洛旅游成底事
십년을 오가도 포의인 것을 / 十年來往布衣人
그 뜻이 몹시 서글프니 참으로 불우한 사람의 시다.
양봉래(楊蓬萊) 선생의 아량과 풍도는 세상의 숭상받는 바가 되거니와,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사마(司馬)ㆍ문과(文科)를 모두 같이 합격하였으므로, 그 사귐이 가장 친밀한데 문장이 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 듯한 기상이 있고, 행서(行書)ㆍ초서(草書)를 잘 쓰는데 그 쓰는 법이 마치 용이나 뱀처럼 분방하며,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에 정을 붙여, 짚신과 밀로 결은 나막신차림으로 어느 때고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바위 골짜기에 사는 이들이 사강락(謝康樂 강락은 육조(六曹) 진(晉)의 사영운(謝靈運)의 봉호)에 비겼다. 언젠가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운 일도 있었다. 언젠가 금강산에서 시를 읊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봉래섬의 백옥루를 / 蓬萊島白玉樓
소문으로만 들었더니 이제야 구경하네 / 我昔聞之今則游
운모병 들러 치고 호박구슬 베개삼고 / 雲母屛圍琥珀枕
산호 발걸이로 수정발 거두었네 / 水晶簾捲珊瑚鉤
벽도화 피고 지니 일천 년인데 / 碧桃開落一千年
서왕모 머물기는 팔만 년이라네 / 王母淹留八萬秋
요대 맨 위에 호올로 서니 / 瑤臺上表獨立
흰 구름 누른 학은 한가롭게 가는구나 / 白雲黃鶴去悠悠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노을처럼 공중에 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봉래의 금수정(錦水亭)시는 다음과 같다.
비단물 은모래는 마냥 고운데 / 錦水銀沙一樣
골구름 강비 속에 갈매기 산뜻 / 峽雲江雨白鷗明
진인 찾아 그릇 봉랫길에 들었거니 / 尋眞誤入蓬萊路
고기잡이 배를 동구 밖으로 내몰진 마오 / 莫遣漁舟出洞行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죽은 뒤, 오세억(吳世億)이란 자가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나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어떤 관부(官府)에 이르니 ‘자미지궁(紫微之宮)’이란 방이 붙었는데 누각이 우뚝하여 난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學士) 한 분이 하얀 비단 옷을 입었는데, 흘긋 보니 바로 하서였다. 오씨는 평소에 그 얼굴을 알고 있는데, 하서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하더니,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고 했다.
세억은 그 이름 자는 대년 / 世億其名字大年
문 밀치고 와서 자미선 뵈었구려 / 排門來謁紫微仙
일흔에 또 일곱 된 뒤에 다시 만나리니 /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오 / 歸去人間莫浪傳
깨어나자 소재 상공(蘇齋相公)께 말씀드렸다. 그 뒤에 오씨가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인후(麟厚)의 자는 후지(厚之), 울주인(蔚州人)이며 벼슬은 교리(校理)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하서(河西)가 충암(冲庵) 시권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오기를 어디로부터 왔으며 / 來從何處來
가기를 또한 어디를 향해 가는고 / 去向何處去
가기도 오기도 정한 자취 없이 / 去來無定蹤
유유한 세월 백년 남짓이로구나 / 悠悠百年許
양봉래(楊蓬萊)의 풍악에서[在楓岳]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백옥경 봉래도에 / 白玉京蓬萊島
허허 넓은 연파는 태고적이고 / 浩浩煙波古
맑고 따사로운 날씨도 좋구나 / 熙熙風日好
벽도화 그늘에 한가로이 오가니 / 碧桃花下閒來往
학 탄 신선 피리소리에 세월은 간다 / 笙鶴一聲天地老
신선 같은 풍채와 도인 같은 느낌이 짙다. 자동(紫洞) 차식(車軾)이 흉내내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
아침엔 현포에 저물녘엔 봉래산에 / 朝玄圃暮蓬萊
산달 걸린 박연폭포요 / 山月鉢淵瀑
향풍어린 계수대라 / 香風桂樹臺
동해를 굽어보며 마고에게 절하고 / 俯臨東海揖麻姑
삼십륙동천에 돌아가노라 / 六六壺天歸去來
원숙하기는 하나. 격(格)이 미치지 못한다. 나의 중형도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학은 훤칠하게 제비는 높게 낮게 / 鶴軒昂燕差池
삼신산에 돌아와 오색 구름에 나는구나 / 三山歸去五雲中飛
이 천지간 석자짜리 지팡이에 / 乾坤三尺杖
포의로 한 세상 보내누나 / 身世一布衣
바윗머리 나무에 긴 칼 척 걸어 두고 / 好掛長劍巖頭樹
맑은 시내에 손 담그고 영지풀잎 씹네 / 手弄淸溪茹紫芝
비록 좋기는 해도 마침내 양봉래의 신선 같은 운치에는 미치질 못한다. 이익지(李益之)에게 읊게 한다 해도 미치지 못할는지 모르겠다. 양봉래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산 위에 또 산 있으니 산이 땅에서 나오고 / 山上有山山出地
물가에 또 물 흐르니 물 속에 하늘 어리었네 / 水邊流水水中天
아득해라 이 몸 공허 속에 있거니 / 蒼茫身在空虛裏
연하도 아닌 것이 선경도 아니로세 / 不是煙霞不是仙
금옥루대에 보랏빛 안개 떨치고 / 金屋樓臺拂紫煙
용이 나는 구름길에 신선 내려오네 / 躍龍雲路下群仙
청산도 인간 세상에 역겨웠던지 / 靑山亦厭人間世
푸른 바다에 어린 구만리 장천 속에 날아들었네 / 飛入蒼溟萬里天
삼천 년 만에 익는다는 신선 복숭아 / 蟠桃子熟三千歲
한밤중 하얀 난새 쌍으로 왔네 / 半夜白鸞來一雙
중천에 신선 서왕모 내려오니 / 中天仙郞降王母
아롱진 바다기운 구름창에 이었네 / 玲瓏海氣連雲牕
차식(車軾)의 자는 경숙(敬叔), 호는 이재(頤齋), 연안인(延安人)이며 벼슬은 군수이다. 《기아(箕雅)》를 참고하건대 ‘金玉’은 ‘金屋’으로 되었고, ‘躍龍’은 어떤 본에는 ‘濯龍’으로 되어 있다.
내 누님의 보허사(步虛詞)는 다음과 같다.
난새 타고 한밤 중 봉래도에 내려서 / 乘鸞夜下蓬萊島
기린수레 한가로이 몰고 아름다운 풀 밟기도 하네 / 閒碾麟車踏瑤草
바닷바람은 벽도화를 불어 꺾어오고 / 海風吹折碧桃花
옥소반엔 가득찬 외만한 대추 / 玉盤滿摘如瓜棗
학의 등 싸늘바람 자부로 돌아왔네 / 鶴背冷風紫府歸
비취 바다 달도 지고 은하수 기우는데 / 瑤海月沈星漢落
옥피리 소리 속에 상서구름 날리네 / 玉簫聲裏霱雲飛
유몽득(劉夢得)을 본받았으나, 맑고 뛰어나긴 그보다 더하다. 유선사(遊仙詞) 백편은 모두 곽경순(郭景純 경순은 동진(東晋) 곽박(郭璞)의 자)의 남긴 뜻인데, 조요빈(曺堯賓) 따위로는 미치지 못한다. 나의 중형과 이익지가 모두 모방하여 지었으되, 마침내 그 울을 넘지 못했으니, 우리 누님은 천선(天仙)의 재주라 할 만하다.
양봉래(楊蓬萊)의 선종암(仙鍾巖)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거울속 부용은 서른 여섯인데 / 鏡裏芙蓉三十六
하늘가에 바라뵈는 일만 이천 봉 / 天邊螻䯻萬二千
그 가운데 한조각 창주석에는 / 中間一片滄洲石
한 백년 동안에 시라고 말할 수가 있다오 / 可以言詩此百年
박 상공(朴相公)이 끝구절을 고쳐,
동녘에 온 해객이 졸기에 합당하네 / 合著東來海客眠
하자, 봉래가 온당하다고 하여 드디어 고치고 나중에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의 호) 황 상공(黃相公)에게 말하니 상공이,
하므로 봉래가 지천의 식견에 크게 탄복했다. 지천은 봉래를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박 상공(朴相公)의 이름은 순(淳),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 충주인(忠州人)이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사암의 퇴계 선생이 남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며[送退溪先生南還]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생각 끊임없어 고리인 양 이어지니 / 鄕心不斷若連環
한필 말로 오늘아침 한관 떠나네 / 一騎今朝出漢關
추위에 고갯매화 봄인데도 못 피니 / 寒勒嶺梅春未放
늦은꽃 응당 늙은 신선 돌아오길 기다리리 / 留花應待老仙還
총병(總兵) 양조(楊照)의 사당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철갑옷 금빛칼도 이미 흙이 되었고 / 鐵衣金劍已塵沙
사당집 소나무 전나무엔 저녁 까마귀 지저귀네 / 廟間松杉噪夕鴉
슬프다 중국 날센 장수 죽었으니 / 惆悵漢家飛將死
갈대 피리 소리만 백낭하 자주 넘네 / 胡笳頻度白狼河
청풍(淸風) 한벽루(寒碧樓) 시는 다음과 같다.
나그네 그리움 외로이 절로 시름 생기니 / 客心孤廻自生愁
앉은 채 강물소리 듣노라 다락에서 내려올 줄 모르네 / 坐聽江聲不下樓
내일 또 벼슬길로 가버린다면 / 明日又登官道去
흰 구름에 단풍은 누구 위한 가을일꼬 / 白雲紅樹爲誰秋
견 상인(堅上人)에게 보내는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입은 은혜이기에 이 마음 궁리 많아 / 久沐恩波役此心
새벽 닭소리에 조회 나갈 비녀를 꽂네 / 曉鷄聲裏戴朝簪
강남 땅 들집은 하마 황폐했겠지 / 江南野屋今蕪沒
산승을 고용하여 대밭을 돌보게 했네 / 却倩山僧護竹林
짧은 거문고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역산에서 그 누가 오동나무 잘랐는가 / 嶧山誰採鳳凰枝
벼락친 자욱 있어 깎아보니 더욱 기이해 / 雷斧餘痕斲更奇
소리 알 이 이미 갔다 서러워 마라 / 休恨賞音人已逝
옷깃 비추는 저 달이 바로 종자기라네 / 照衿明月卽鍾期
이양정(二養亭) 벽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산새 소리 어쩌다 외마디 들리고 / 谷鳥時時聞一箇
침상은 쓸쓸해라 여러 책 흩어졌네 / 匡床寂寞散群書
가엾어라 백학대 앞 저 물도 / 可憐白鶴臺前水
산문을 나서자 이내 진흙 머금으리니 / 纔出山門便帶淤
신기재(申企齋)의 동산시(洞山詩)는 다음과 같다.
봉래도는 아득아득 지는 해 시름겹고 / 蓬島茫茫落日愁
흰 갈매기 해당숲에 다 날아갔네 / 白鷗飛盡海棠洲
오늘에야 비로소 명삿길 밟게 되니 / 如今蹈踏鳴沙路
이십년전 옛꿈에 놀던 데라오 / 二十年前舊夢游
나는 그곳에 가 본 뒤에야 이 시의 절묘함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언젠가 꿈에 한 곳에 이르니 거친 연기, 들풀이 눈길 닿는 데까지 끝없는데, 불탄 나무의 껍질 벗겨진 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원통한 기운 끝없어 / 冤氣茫茫
산하가 한 빛이로다 / 山河一色
세상엔 사람 하나 없고 / 萬國無人
중천에 달도 침침하네 / 中天月黑
잠에서 깨어 몹시 언짢게 여겼었는데 임진란에 서울이나 시골을 막론하고 피를 흘리고 집들이 불탐에 이르러서 이 시가 바야흐로 징험이 되었다.
무위자(無爲者) 천연(天然) 스님은 집안이 본래 좋았으나 잘못 중이 되었는데 씩씩하여 기개가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智異山) 성모(聖母) 음사(淫祠)가 대중에게 혹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겨, 이를 쳐부수었다. 남명 선생(南冥先生)이 용사천연전(勇士天然傳)을 지었으며 양송천(梁松川)이 그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제하였다.
주먹 한번 휘둘러 산꼭대기 돌 깨부수니 / 張拳一碎峯頭石
갈 곳 없는 잡귀가 대낮에 울더라 / 魍魎無憑白晝啼
양봉래(楊蓬萊)ㆍ박사암(朴思庵)과 나의 중형이 모두 천연의 친구가 되었다. 천연이 약간 시를 알아 우리 중형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잘못 고기 배에 걸린 용 곤핍함을 슬퍼하고 / 枉罹魚腹嗟龍困
닭우리에 그릇 떨어진 봉황새 쇠해만 가네 / 誤落鷄巢欲鳳衰
임진란에 정화상(靜和尙)을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자는 건중(楗仲), 창녕인(昌寧人)이며 벼슬은 전첨(典籤)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의 자는 공섭(公燮). 남원인(南原人)이며 벼슬은 부윤(府尹)이다. 정화상(靜和尙)은 휴정(休靜)이니 호는 청허(淸虛)이다. 임진란 때 승병 대장으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었다. 시를 잘하였다. 송천의 어양교를 지나다[過漁陽橋]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나무빛이며 풍경은 태평세월 그렸는데 / 樹色煙光畫太平
강다리는 아직도 옛이름을 띠었구나 / 河橋猶帶舊時名
이주곡(伊州曲) 양주곡(涼州曲)이 소소곡 같았더라면 / 伊涼若是簫韶曲
어찌 오랑캐놈들이 양경(兩京)을 침범하였으리 / 豈使胡雛犯兩京
청허의 한성도중(漢城道中)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 나무엔 가을 서리 내리고 / 海樹落秋霜
초관엔 이른 기러기 떠나네 / 楚關鴻去早
종산 외론 새 나는 하늘가에 / 鍾山獨鳥邊
나그넨 배 안에 늙어만 가네 / 客子舟中老
중형이 무위자(無爲者)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천왕봉 위로 나는 듯 달려가 / 天王峯上走如飛
천 년 묵은 돌덩이 주먹으로 부수고 돌아왔네 / 手碎千年片石歸
애닯다 영웅은 속절없이 늙어가고 / 可惜英雄空老去
산속에 밝은 달이 닫힌 사립문 비추네 / 碧山蘿月掩柴扉
또
두만강가 나뭇잎은 시들고 / 豆滿江邊木葉衰
여기저기 외론 산엔 깃발만 펄럭이네 / 孤山處處見旌旗
산속에 하늘을 떠받칠 솜씨 버려졌으니 / 山中褒却擎天手
슬프다 월지국 선우 머리 벨 이 그 누구런가 / 怊悵何人斮月支
그에 대한 칭찬이 이와 같았다. 또 장편 시의 머리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무위자는 사람중에 용이니 / 無爲者人中龍
전생엔 바다를 가르던 금시조(金翅鳥)였는데 / 前身擘海金翅鳥
벼락이 한밤에 천왕봉에 떨어졌네 / 霹靂夜下天王峯
말이 매우 기발하였는데 전편을 못 외우겠다. 필경 무위자의 책속에 있을 것이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이 이우정(二憂亭)에 제한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물가에 가로 세로 밀물은 지고 / 洲渚縱橫潮漸退
나무숲 우수수 기러기 손이 오네 / 樹林搖落雁來賓
조어(造語)가 기이 건장한데 전한(典翰) 엄흔(嚴昕)은 하찮게 보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엄흔(嚴昕)의 자는 계소(啓昭)이고 호는 십성(十省)이다. 영월인(寧越人)으로 벼슬은 전한(典翰)을 지냈다.
남추강(南秋江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의 한식시(寒食詩)는 다음과 같다.
흐린 날 울 밖에 저녁 해 나고 / 天陰籬外夕陽生
한식날 봄바람에 들 물은 맑다 / 寒食東風野水明
배에 가득찬 장사아치 끝없이 지껄이는 말 / 無限滿船商客語
버들꽃 필 무렵이라 고향의 정일레라 / 柳花時節故鄕情
안자정을 꿈에 보다[夢子挺]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부귀 영화 덧없는 꿈 저문 산 앞에서 꾸니 / 邯鄲一夢暮山前
넋과 넋 만남이란 정말 우연이라 / 魂與魂逢是偶然
가는 비 뜰에 내리고 봄은 쓸쓸한데 / 細雨半庭春寂寞
살구꽃 수없이 지네 붉은 돈처럼 / 杏花無數落紅錢
상사일 성남에서[上巳日城南]란 시는 다음과 같다.
성남이고 성북이고 살구꽃 붉은데 / 城南城北杏花紅
해는 꽃 서녘에 있으니 꽃 그림잔 동에 있네 / 日在花西花影東
외로이 말 탄 병든 늙은이 철 바뀜에 놀라니 / 匹馬病翁驚節候
비낀 바람이 성가퀴에 눈물을 흩뿌려주네 / 斜風吹淚女墻中
이상 몇몇 시는 당인(唐人)에 못지 않다. 귀신론(鬼神論) 일편은 학문이 극히 높다. 훌륭한 재주를 지녔어도 펴보지 못했으니 아깝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고 의령인(宜寧人)인데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안자정(安子挺)의 이름은 응세(應世)이고 호는 월창(月窓)이며 죽산인(竹山人)이다. 진사(進士)를 지냈다.
남추강(南秋江)의 성거산(聖居山)에 제한 절구는 다음과 같다.
동녘에 해 높이 돋으니 / 東日出杲杲
신령스러운 비에 나뭇잎 지네 / 木落神靈雨
창 열자 온갖 시름 스러지니 / 開牕萬慮淸
병든 몸이 날개가 돋는 듯 / 病骨欲生羽
무절공(武節公) 황형(黃衡)은 무장(武將) 출신으로, 또한 글과 글씨에 능했다. 경오년(1510, 중종5)에 왜구를 진압하고 몰운대(沒雲帶)에 올라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높은 대에 깃발 세우니 큰 바람 이는구나 / 建節高臺起大風
바다 구름 갓 걷히고 해는 둥실 붉어라 / 海雲初捲日輪紅
하늘에 비겨 칼 어루만지며 자주 고개 돌리니 / 倚天撫劍頻回首
탄환만한 대마도가 가까이 보이는구나 / 馬島彈丸指顧中
조어(造語)가 기이하고 장엄하여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어찌 인재가 옛사람에게 못 미치랴.
무절(武節)의 이름은 형(衡)이요 창원인이다. 무과급제로 공조 판서를 지냈다. 시안(諡案)을 상고컨대 형의 시호는 장무(莊武)이지, 무절이 아니었다.
《승암시화(升庵詩話)》에 명초(明初) 이래 재상의 업적을 논함에 있어 유성의(劉誠意 성의는 유기(劉基)의 봉호)를 제일로 치켜세웠다. 성의가 실로 어질긴 하지만 재상의 업적에 대해서는 소문난 게 없다. 영락(永樂) 연간에는 하원길(夏原吉)을 제일로 삼고 삼양(三楊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보(楊溥))은 그 축에 들지 않았으니 그 의논 또한 온당치 못하다. 이 문달공(李文達公 문달은 이현(李賢)의 시호)이 그를 헐뜯어 심지어는 문달이 나륜(羅倫)을 내쳤으니, 비록 흠이 됨을 면할 수는 없으나, 그 공정한 것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정덕(正德) 연간에 이르러는 거드름스럽게 자기 아버지를 제일로 쳤다. 젊어서는 비록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입각(入閣)하여서는 임금의 외척을 연줄로 삼았으니 이미 올바른 선비는 아닌데, 공평하여 사심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가정(嘉靖) 이래로 명정승은 문정공(文正公) 사천(謝遷)과 충의공(忠毅公) 양부(楊傅)가 더욱 드러나게 유명했는데, 소인(小人)도 제일 많았다. 계악(桂萼)ㆍ방헌부(方獻夫)ㆍ장총(張璁)ㆍ엄숭(嚴嵩)ㆍ이본(李本)이 모두 소인들인데, 그 중 엄숭은 은총을 20여 년이나 독차지했다. 그 뒤에는 소사(少師) 서계(徐階)ㆍ소부(少傅) 이춘방(李春芳)이 다 명정승인데, 서소사(徐少師)는 남들이 사마공(司馬公)에 비겼으니, 오랫동안 논정(論定)하는 일을 담당했었다. 융경(隆慶) 이래로 고공(高拱)ㆍ장거정(張居正)은 모두 약골(弱骨)이었으며 신시행(申時行)은 기롱을 면할 수 없었고, 승상(丞相) 마자강(馬自强)ㆍ소부(少傅) 허국(許國)ㆍ소보(少保) 왕석작(王錫爵)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그들의 사업은 삼양(三楊)에게 비기면 누가 나은지는 모르겠다. 인재가 날로 저하되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명상(名相)은 황ㆍ허(黃許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제일로 삼는다. 세상에서는 더러 전조(前朝 고려(高麗))의 과제(科第)를 병폐로 여기기도 하는데, 과연 그 뒤에는 별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중종 때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은 전인(前人)에 부끄럽지 않다.
황희(黃喜)의 자는 구부(懼夫)이고 호는 방촌(厖邨)인데 장수인(長水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익성(翼成)으로 세종묘정(世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허조(許稠)의 자는 중통(仲通)이고 호는 경암(敬庵)인데 하양인(河陽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정광필(鄭光弼)의 자는 사협(士協)이고 호는 수부(守夫)인데, 동래인(東萊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단간공(端簡公) 정효(鄭曉)의 《오학편(吾學編)》에 우리나라가 여진(女眞)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한 일의 본말(本末)이 아주 자상히 실려 있는데, 강순(康純)ㆍ어유소(魚有沼)ㆍ남이(南怡)의 이름을 대서특필하였다. 이 세 사람은 진실로 장군감으로 국사(國史)에 그 이름이 드러났으니 이보다 큰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강순의 자는 태초(太初)요 신천인(信川人)이다. 음관으로 좌의정을 지냈고 남이의 옥사(獄事)에 죽었다.
어유소는 충주인(忠州人)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남이는 의령인(宜寧人)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의산위(宜山尉) 남휘(南暉)의 손자(孫子)이고 익평(翼平) 권람(權擥)의 사위로 유자광(柳子光)의 무고에 의해 살해되었다. 남이의 정남(征南)이란 절구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닳아지고 / 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마르리라 / 豆滿江流飮馬無
사나이 스물에 북을 정벌치 못하면 / 男兒二十未平北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 後世誰稱大丈夫
척 총병(戚總兵 척계광(戚繼光)을 가리킴)은 위명(威名)과 사업이 남의 이목에 번쩍거릴뿐더러 또한 시문에 능하여 이창명(李滄溟)의 무리가 치켜세웠다. 임회후(臨淮侯) 이언공(李言公)의 자(字)는 유인(惟寅)인데, 또한 시문에 능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바람은 밀물소리 휘몰아 섬들 떠들썩하고 / 風捲潮聲喧島嶼
해에 비낀 돛 그림자 누대에 오르네 / 日斜帆影上樓臺
요즘 스님으로 시 잘 쓰는 사람이 많지 않는데, 유정산인(惟政山人)은 당(唐) 나라 구승(九僧)의 유를 배워 시가 몹시 맑고 고고하였다. 행사(行思)도 자못 좋은 시구가 있어서 상서로운 오색구름 아롱지니 나물 먹는 중이 아니다[慶雲爛熟非筍蔬]라는 구가 있다. 요즘 홍정(弘靜)이란 분이 또한 시를 잘하여 스님을 칭송하다[送僧]란 시가 있었는데 우리 중형(仲兄)이 몹시 칭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해 헤어질 땐 가을 강물에 단풍 지더니 / 去年別紅葉秋江波
올해 작별에는 봄 산언덕에 매화가 지네 / 今年別落梅春山阿
물결은 아득하고 산언덕은 가렸는데 / 波杳杳山阿隔
단풍잎 지는 매화 이 시름 어이하리 / 紅葉落梅愁奈何
유정(惟政)의 호는 송운(松雲)이다. 행사(行思)와 같이 일본에 사신갔었다. 이 두 분의 시가 같이 《기아(箕雅)》에 들어 있다.
백대붕(白大鵬)은 천한 종으로 중의 대열에 끼었다. 시를 잘 하였으므로 우리 중형과 승지(承旨) 심희수(沈喜壽)가 다 대등한 벗으로 사귀었는데
가을 하늘에 엷은 그늘 어리어 / 秋天生薄陰
화악의 그림자 침침해라 / 華岳影沈沈
라는 시는 우리 중형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백형을 따라 일본에 오간 일이 있으며, 아름다운 시가 매우 많다.
백대붕은 전함사(典艦司)의 종이다. 심희수의 자는 백구(伯懼)이고 호는 일송(一松)으로 청송인(靑松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내가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형님들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차마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게을러 빠져서 독서에 힘쓰지 않았다, 차츰 자라서는 남들이 과거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덩달아 해 보았으나, 글치레나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짓은 아니었다.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니, 세상에 나갈 뜻은 이미 사그라졌다. 10년 글읽기로 작정했으나, 아, 그 또한 늦었도다. 《학산초담(鶴山樵談)》 1부(部)를 짓는다.
명 신종(明神宗) 21년 계사년(1593, 선조26) 양월(陽月) 연등(燃燈)한 뒤 사흘 만에 교산자(蛟山子)는 쓰다.
'글,문학 > 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천정(樂天亭) / 김시찬 (0) | 2020.02.22 |
---|---|
梅月堂 김시습(1435 ~ 1493) (0) | 2020.02.16 |
고려궁사22수중 6수 / 고전 번역원 노성두 (0) | 2020.02.06 |
元正詩(원정시) - 辛簫(신소 (0) | 2020.01.25 |
장미에 관한 漢詩 (0) | 2020.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