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봉건귀족인 랭카스터와 요크 두 왕가 사이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내란. 1455년부터 85년까지 30년 동안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이 명칭은 요크파가 흰장미, 랭카스터파는 붉은장미가 문장(紋章)인 것에서 유래하는데, 내란 당시는 요크파의 흰장미만이 사용되었다.
내란의 원인은 랭카스터왕조 헨리 6세의 정부가 약체화되었고, 백년전쟁의 종결(1453)에 따른 귀휴병이 추가됨으로써 팽창한 무장호위대를 거느린 대귀족들이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데 있었다.
이들 대귀족은 헨리 6세를 지지하는 파(지도자는 서머셋공)와 요크공(公) 리처드가 이끄는 반국 왕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는데, 53년 왕이 정신이상을 일으켰기 때문에 요크공이 섭정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에 왕비가 왕자를 출산하고 왕의 병도 낫자, 야심을 가진 왕비 마거릿은 서머셋공을 섭정에 임명하였다.
이것이 요크공 결기(決起)의 원인이 되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55년 5월 세인트올번스 싸움에서 왕이 사로잡혀 요크파가 권력을 잡았으나, 이듬해 왕비의 반격을 받아 패하고 요크공과 조카 워릭백작은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60년 워릭백작의 활약으로 귀국한 요크공은 왕위를 선언했으나 왕비의 반격으로 패사(敗死)하였다. 61년 요크공의 아들 에드워드가 재기하여 왕비를 격파하고 왕위에 올라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요크왕조 창시).
워릭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정책에 반대하여, 대륙으로 망명중인 선왕의 왕비 마거릿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71년 바넛싸움과 튜크스베리 싸움에서 에드워드 4세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왕권은 강화되었으나, 83년 왕위가 어린 왕 에드워드 5세에게 넘어가자, 백부 글로스터공이 왕을 모살(謀殺)하고 리처드 3세를 선언하였다.
그 뒤 랭카스터파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 헨리(튜더家)가 망명중 귀국하여 85년 보즈워스싸움에서 리처드를 패사시켰다.
새로운 왕 헨리 7세는 튜더왕조를 열었고 두 왕가의 내란은 끝이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