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묘(성균관) : 동재東齋·서재西齋
안녕하세요!! 친절한 선배 입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서울문묘의
교학공간에
위치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서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자료출처 : 서울문묘 실측조사보고서
2006)
동재와 서재는
서울문묘의 유생들의
기숙 공간이자 강학 공간의 일부이며,
명륜당 앞 중정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재는 동향, 서재는
서향하며
각건물은 정면 20칸 측면 3칸으로,
전퇴는 툇마루를 달아 본채와
연결되어 있으며,
본채는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당을 바라보는 후퇴는 통로로 이용되도록
벽체 없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서재와 동재의 평면은 대칭되어 유사하게 보이나
실제로는 남측 3칸 부분이 서로 다릅니다.
서재의 경우
남측부터 2칸은 창고,
1칸은 방으로 사용되는 반면 동재의 경우
남측부터
2칸은 방, 1칸은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목조건축 평면에서
도리칸은 주로 홀수 칸이 일반적이고,
보칸은 홀수와 짝수가 자유로이
구성됩니다.
짝수로 도리칸을
나누면
동측면 중앙에 기둥이 서게
되어
입구와 내부 공간 처리에 문제가 있으므로
권위 건축에서는 드물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단지 일부 짝수를 사용한
예는
민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동재와 서재는 전면
20칸,
측면 3칸의 평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태학지』에서는 각각 18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생들의 기숙을 위한 공간 개념과 더불어
기능적인 공간 확보에 중심을 두면서
짝수 칸의 긴 장방형
건물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측면 3칸의 전·후 칸은 반 칸의
퇴칸이
덧붙은 것으로 개방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 조선고적도보』의 배치도와 비교해 보았을
때
후대에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구 구조는 전후퇴
2고주 5량가로
맞배지붕에 민도리집 입니다.
정조 때 윤기(尹グ,
1741~1826)가 지은
『반중잡영泮中雜詠』에는 동재와 서재의 건축 내용
및
공간 이용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二十八房各有稱스물여덟 개의 방마다 명칭이 있고
房房儒士共濟朋각 방에는 친한 유생끼리 거처를 정했다
少年或爲工夫地어린 사람 더러는 공부터를 삼으려고
僻靜泮村占得桓반촌 구석의 고요한 곳을 항상 차지하네.
이 시의 주석을 보면
동재·서재는
매 두 칸이 한 방으로,
동재의 첫 번째 방을 약방藥房,
그 다음을
우제일방右第一房, 장의방掌議房,
진사칸進仕間, 하일방下一房, 하종방下終房,
하재下齋순으로 위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재의
경우 또한 첫 번째 방을 서일방西一房이라 하고
그 다음 이하는 동재와 명칭을 같이
하였습니다.
여기서 약방은 의료실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학생회장에
해당되는 직인
장의掌議는 독방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방에는 고향이나 색목이 같은
사람들끼리
기거를 같이하였습니다.
원칙적으로는 4명에서 6명 정도가
한
방에 기거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 시설이 열악하였기 때문에 경제력이 있는
사람은
공부하기 좋은 반촌의 집을 골라 하숙도 하였으며,
계성사나 향관청, 일양재
등의
부속 건물에 머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동·서재는
태조 7년(1398)에 건설되었고,
태종 및 세종 대에는 동·서재 각 5칸을
온돌로
대체하는 등의 시설 확충이 있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반쯤 타버렸고
선조 39년(1606) 명륜당과 함께
중건되었습니다.
동재
동재는 명륜당 동측에
위치하여
동향을 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동재는 정면
20칸, 측면 3칸의 장방형 건물로
정면 기둥 간격은 거의 비슷하고,
측면은
중앙칸이 퇴칸에 비해
더 크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재의 본채는 온돌로 되어
있으며,
동측면 1칸과 서측면 1칸을 모두 퇴칸으로
하여
동측면 퇴칸에는 마루를 설치하고
서측면은 개방된 공간으로 두고
있습니다.
평면 형식을 기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동재의 서측면인 개방된 후퇴가
명륜당 중정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처마공간과 개방된 퇴칸 공간을 합하여
명륜당의 위계를 높이고 더불어
통로로 이용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동재의 기단은 자연석을 낮게
설치한
외벌대 기단이며 상부는
삼화토로
다짐하였습니다.
초석의 경우 방형으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그 상부로 네모기둥을 세운
간소한 민가형식의 모습입니다.
동재의 가구 구조는
2고주
5량가의 민도리 집으로
고주 위로 대량을
걸치고,
대량 위에는 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놓는데
주심도리와
중도리는 납도리이고,
종도리만 굴도리인 것이 특징입니다.
종대공은 대량 위에
세워져
종도리와 종도리 단장혀를 받치고 있습니다.
종대공은 상부가 좁고
하부가 약간 넓은 형태의 판대공입니다.
퇴량을 대량보다 레벨을 낮게
하여
고주에 결구하고 있습니다.
퇴량은 전·서측면의 평주 상부에 직접 결구하고
다른 한 끝은
고주에 장부맞춤하여 끼운 후
고주에 2개의 산지를 꽂아 고정되어 있습니다.
동재의 양 측면은 회벽 밖으로
화강석 사고석으로 화방벽을 설치하고
하부에 기단 없이 마감되고
있습니다.
동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로
서측벽면 각 실의 하인방 하부에는
아궁이와
굴뚝으로 보이는
두 개의 구멍이 있는 벽체를 사고석과
장대석을 이용하여 형성하고
있습니다.
동재는 부연 없이 장연과 단연만을 사용한
홑처마의 맞배지붕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번 치면 외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번 치면 진사식당에서 모여 식사를
하였습니다.
동재에는 내외로
통하는 판장문이
서측면 좌측 3번째 칸과 8번째 칸,
13번째, 18번째 칸에 각각
1개소씩
총 4개소 설치되어 있습니다.
문짝은
안여닫이로 되어 있으며
상·하인방에 둔테를 붙이고,
둔테의 촉구멍에 끼워져
회전축을 이루며 문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널문의 구조를 보면 장방형으로 널을 세우고
상하로 띠장을 붙여 고정시킨 간단한
구조입니다.
동재의 동편의
모습입니다.
유생들이 전퇴의 마루를 지나 온돌방으로
출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재의 온돌방으로 출입하는 세살문은
동측면 고주열에 간 사이마다 1개소씩,
대문칸을 제외하고 총
16개소에
이분합문으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분합문
사이에는 중간문설주가
상·하인방 사이에 세로로 끼워져
있는데,
문짝은 밖으로 여닫게 되어
있습니다.
중앙 선대에 문고리가 있으며,
문선과 만나는
선대에 돌쩌귀가
상, 하 1본씩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루로 올라가기 위한
디딤돌도 매
칸마다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루는 동측면(정면) 퇴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문칸이 있는 좌측에서 2번째와
우측에서 3번째 칸 등 2개의
칸에는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장귀틀은 도리방향으로는
퇴기둥 간,
고주 간 설치하였고,
또 퇴기둥과 고주
사이에
보방향으로 각각 설치하였습니다.
동귀틀을
보방향으로 설치한 장귀틀에
1본을 건 후 청판을 끼워 각 칸마다
2개의 우물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각 우물에는
10장 내외의 청판을 끼웠습니다.
청판은 마지막 마무리를 위에서 덮는
방식의
막덮장으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서재
서재는 동재와 대칭으로 놓여 있으며,
규모와 구조는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면과 입면을 자세히 살펴
보면
동재와 완전히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지는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면 20칸, 측면 3칸의 평면인것은
같으나
동재의 남측 3개칸은 방 2칸과
대문칸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비해,
서재의 남측의 3칸 중 2칸은 창고,
1칸은 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고는 서측면의
마루칸까지 확장하여
전체를 하나의 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배치도와
비교했을 때 근래에 변형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대문칸의 위치는 대칭을 보이고 있으나
대문칸의 서측면 툇마루 설치부분은
서로 달라서 동재는 좌·우측 3번째 칸에서
완
전히 통하는 출입문이 되고,
서재에서는 좌·우측 8번째 칸에
출입문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재 역시 동재와
마찬가지로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로
방형으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간략한 구조를 보입니다.
서재의 기단은 건물의 평면을 따라
장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좌측면은 기단 없이
화방벽으로
마감되고
있습니다.
서재의 가구는 전·동측면에 퇴칸을
두고
개방한 형식으로 서측면 퇴에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종도리는 굴도리로 하고
중도리와
주심도리는 납도리로 결구한
간단한 2고주 5량의
민도리집
구조를 이루먀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목조 가구는 동재와 동일한 구조입니다.
서재의 판장문은 동측면 고주열 좌측 3번째
칸과
8번째 칸, 13번째 칸에 각각 1개소씩
총 3개소 설치되어 있는데,
문짝은 안여닫이로 되어 있으며
상·하인방에 둔테를 붙이고,
둔테의 촉구멍에 끼워져 회전축을
이루며 문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판장문의 구조를 보면 장방형으로 널을
세우고
상,하로 띠장을 붙여 고정시킨 간단한 구조입니다.
문 외부에는 빗장이 설치되어
있고,
내부에는 문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서재의 외짝 세살창은 동측면 고주열에
간사이마다 1개소씩 대문칸과
판문칸을 제외하고 총 15개소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문짝은 밖으로 들어 올리는
들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재의 동측면의 벽체에는
세살창을 달고 하인방 상부까지의
여백은 회벽으로
처리하고,
하인방 하부에는 아궁이와 굴뚝으로 보이는
두 개의
구멍이 있는 벽체를
사고석과 장대석을 이용하여 형성하고 있습니다.
서재 좌·우 양 측면 벽체는 내부로는
회벽으로
외부로는 화강석 사고석을 쌓고
내민 줄눈으로 마감한 화방벽으로 되어
있습나다.
현재는 사고석 화방벽으로 되어
있으나
과거 고적도보를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견치석으로
되어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서재의 서편의 모습은 담장으로 둘러
싸여
공개되지 않는
구역입니다.
하지만 멀리서 살펴보면
마루는
전면 퇴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문칸과 창고가 있는 4개의 칸에는
설치되어 있지
않고 있습니다.
온돌방에는 세살문이 설치되어
동재와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참고실 > 우리의옛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갓일·망건·조각·불화 인간문화재 (0) | 2018.07.20 |
---|---|
한국의 산사 7곳,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돼 (0) | 2018.07.02 |
사라진 줄 알았던 원측 스님 대표저술 복원했다 (0) | 2018.06.18 |
청동기~삼국시대 (0) | 2018.06.15 |
[스크랩] 金冠 및 裝飾品 國寶 (0) | 2018.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