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대통령은 어떤 심판을 받았는가?
1989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 1918~1989)와 그의 부인 엘레나(Elena Ceaușescu, 1916~1989)의 재판은 비록 이들의 폭정에 대한 정의의 심판까지는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12월 25일에 열린 차우셰스쿠의 재판은 약 60분간 진행되었는데, 그중 55분은 심문에 할애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대통령은 자신은 모른다는 식의 답변으로 일관했다. 재판에 앞서 12월 16일 35만여 명이 참여했던 친민주주의 집회에서 루마니아 군대와 차우셰스쿠의 비밀경찰들이 비무장 시위자들을 공격하여 수백 명의 남녀노소가 희생된 데 격분하여 폭동이 일어났고, 이에 재판관을 비롯한 법정 구성원들 역시 시민군의 임원들로 구성되었다. 당시의 반란을 살펴보면, 루마니아군은 대통령의 비밀경찰에 대해 오랜 원한을 품고 있었고, 때마침 폭동이 일어나자 반군에 무기를 나눠주며 폭동에 합류했던 것이 분수령이 되었다.
12월 21일, TV와 라디오는 물론 공산당 중앙 건물과 귀금속들과 비밀 통로로 가득했던 왕궁이 시민의 손에 넘어갔다. 차우셰스쿠와 그의 측근들은 도주하려 했으나, 12월 22일 시민군에 붙잡혔고, 같은 날 비밀 공동묘지가 발견되면서 비밀경찰들이 수백 명의 민간인을 고문한 사실 역시 드러났다. 반군은 차우셰스쿠 대통령을 3일간 끌고 다니면서 여전히 투쟁 중이던 비밀경찰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반군은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님을 깨닫고 특수 군사 법정을 병영의 작은 학교에 설치한 뒤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했다. 피고 측 변호인이 차우셰스쿠에게 배당되었으며, 변호인은 전 대통령에게 정신 착란을 근거로 유죄를 인정할 것을 권했으나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차우셰스쿠는 집단 학살, 시위대 학살 그리고 개인의 이득을 위한 공권력 남용으로 고발되어 한 시간 후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은 전 대통령에게 판결에 항소할 것을 물었으나, 차우셰스쿠는 침묵을 지켰다. 판결 후 신속히 밖으로 이송된 대통령과 그의 부인은 곧 총살되었다. 대원들이 30발 이상이나 발포했던 총살 과정은 루마니아 TV에 그대로 방영되었다. 그리고 12월 30일, 루마니아의 통치권은 반군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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