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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사와 유구태자 보현

淸潭 2017. 1. 20. 11:43

능가사와 유구태자 보현

고흥설화 / 설화


고흥 팔영산 밑에 있는 능가사(楞伽寺)는 419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5세기 초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보기에는 믿기 힘든 구석이 있다. 5세기 경 유물이 발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스님인 아도화상의 생존연대(3세기)와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백제 말기 때의 일이다. 보현사 근처에 승아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른데다 외모까지 곱상하여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였는데, 자라면서 그 미모가 더욱 빛을 발하여 ‘임금은 몰라도 승아는 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유명하였다.

승아는 불심이 깊어 정기적으로 보현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시주를 하곤 하였다. 그날도 보현사에 가서 탑돌이도 하고 불공을 드리는데, 어린 동자승 몇이서 농을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렸다. 들으려 해서 들은 것은 아닌데 탑돌이를 하다 보니 동자승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다 듣게 되었다.


“너 보현사가 왜 보현사인지 아니?”


“누군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으니 보현사겠지?


“그러니까 왜 보현사라고 이름을 지었냐 그 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주지 스님이라면 몰라도.”


“오래 전에 아도화상이라는 분이 이 절을 지으면서 언젠가 보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귀인이 나타나 절을 유명하게 만들 것이라 해서 보현사라 했데.”

아도화상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이 절을 지은 분이 먼 훗날을 내다보고 그런 이름을 지었다니 참으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동자승들의 농이라 생각하고 승아는 별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보현사에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행색이 초라한 것을 보니 떠돌이처럼 보이는데 그래도 왠지 기품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스님들도 그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밥을 주자마자 허겁지겁 먹는 것이 며칠은 굶은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보현사에서 머물게 된 나그네는 기력을 회복하면 할수록 얼굴에 광채가 났다. 얼핏 보기에도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였다. 뭐라 설명을 하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그네는 잠도 거의 자지 않고 부처님 전에 뭐라 기도를 하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표정만 보아도 매우 간절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느낌만으로도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기도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나그네를 본 스님들도 나그네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승아가 보현사에 들렀다가 우연히 나그네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날도 승아가 탑돌이를 하려는데 나그네 역시 탑을 돌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러다 승아를 보고는 뭐라 말을 걸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했다.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그 날 이후 은밀하게 만났다. 청춘남녀가 사랑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었다. 뜨거운 눈빛 하나면 충분하였다.

그러다 점차 승아와 나그네는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나그네는 유구국의 태자였다. 부왕의 생신 선물을 구하기 위해 태자가 직접 배를 타고 남만(지금의 베트남)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는데, 며칠 동안 정신을 잃고 있다가 깨어보니 낯선 바닷가였다. 그래서 정신없이 걷다보니 팔영산에 이르게 되었고, 쓰러지기 직전에야 보현사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대 이름은 뭔가요?”

“제 이름은 승아라고 합니다. 도련님 이름은...”

부끄러웠는지 승아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그네의 대답을 듣는 순간 승아는 깜짝 놀랐다. 다름이 아니라 태자의 이름이 보현(普賢)이었기 때문이다. 보현 태자 역시 바닷가에 표류하여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걷다가 마주하게 된 절 이름이 보현인 것을 보고는 인연이라 생각하여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 주지 스님!”

보현태자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승아는 주지 스님께 달려갔다. 승아가 주지 스님에게 보현태자 이야기를 하자 주지 스님은 물론 듣고 있던 스님들까지도 깜짝 놀랐다. 전설로만 전해오던 보현이라는 귀인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보현태자를 대하는 스님들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마치 관세음보살이라도 대하듯 떠받들었다.

그런데 승아를 만난 뒤로 보현태자의 기도는 눈에 띄게 줄었다. 스님들이 잘 대해준 탓도 있지만 승아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불현듯 고국에 계시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생각하다 보니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린 후에 보현태자가 승아를 만나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낭자, 만약 내가 유구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대도 따라가겠소?”

그러자 승아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하였다.

“태자마마, 저는 부모님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함께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요.”

그리 말을 하고 품속으로 파고드는 승아에게 태자도 더 이상 뭐라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이런저런 생각으로 만감이 교차하던 보현태자가 숲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더니 태자를 감싸 안고는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내 너의 기도가 지극하여 유구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마.”

관세음보살의 목소리가 멀리 퍼지자 보현태자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비록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승아와 이별도 제대로 못하고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자의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세음보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태자를 끼고는 파도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졸지에 보현태자와 생이별을 하게 된 승아는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식음을 전폐한 채 지냈다. 그런 승아를 보다 못한 부모님이 보현사 주지 스님을 찾아가 상의를 하였다. 그랬더니 주지 스님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하였다.

“승아 낭자는 전생에 이미 보현 태자와의 인연이 닿은 사람이오. 그러니 이제는 속세의 인연을 끊고 보현 태자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좋겠소.”

그렇게 해서 승아는 머리를 깎고 보현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주지 스님은 보현태자와 승아의 그러한 슬픈 사연을 담아 벽화로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 사연이 널리 알려져 보현사에는 그 벽화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한다.

영조 때 이중환의 기록에 의하면 절 스님이 그 모양을 벽에 그려놓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영조 때까지 벽화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능가사를 중창한 정현대사

보현사는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탄 뒤 폐찰이 되었다가 1644년(인조 22년)에 정현대사(正弦大師)가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현대사는 임진왜란 후 화엄사를 중창한 벽암 각성의 제자이다.

지리산에서 하안거(夏安居) 중이던 정현대사가 어느 날 밤 잠을 자는데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관세음보살이 정현대사에게 일렀다.

“그대는 절을 지어 중생을 구제하라.”

나지막하였지만 너무도 또렷한 목소리였다.

“아니, 이미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는 중인데 또 어떤 절을 지으라는 말씀이신가요?”

정현대사가 묻자 관세음보살이 남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곳이 어디이옵니까?”

“저곳은 오래도록 불가의 기운이 묻혀 있던 곳이다. 저곳에 절을 지어 불도를 널리 전파하도록 하라.”
관세음보살은 정현대사에게 절터를 일러주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꿈에서 깬 정현대사는 하안거에서 벗어나자마자 남쪽으로 향하였다. 90 노구를 이끌고 남으로 남으로 향하면서 관세음보살이 일러준 절터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꿈에서 보았던 곳은 없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가 이윽고 고흥 팔영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관세음보살이 일러준 곳을 찾지 못한 정현대사가 포기하고 내려가려는데 팔영산 남쪽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둘러 내려가 살펴보니 놀랍게도 옛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정현대사는 그곳에 절을 짓고 능가사라 이름 지었다.

정현대사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들인 민정·의헌·상기 등이 스승의 유지를 따라 요사채 등을 세우고 단청불사를 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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