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 발자국과 삼산
중국 전국시대 때, 초(楚)나라 위왕(威王: ?~BC 327)이 장자를 부르러 대부 두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낚시를 하고 있던 장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년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서 보관하고 있다 하는데, 당신이 거북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아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소.”
이 말을 들은 위왕은 며칠 동안 낙담을 하여 정사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수를 하려다 위왕은 깜짝 놀란다. 신하들이 달려와 보니 세숫대야에 마치 산수화처럼 은은하게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 아닌가. 세숫대야에 비친 모습은 봉우리가 여덟 개인 산이었다. 위왕은 세숫대야에 비친 모습을 보고 감탄해 그 산을 찾으라고 어명을 내렸다.
위왕의 명을 받은 신하들은 지관 수십 명을 뽑아 세숫대야에서 본 그림을 지니고 천하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림과 같은 산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기를 십수 년. 이미 지관들은 백발 노인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 병들거나 사고로 죽고 남은 이는 사양, 분차, 대방 단 세 명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남은 삶이 많지 않음을 느꼈다. 위왕이 지금도 살아계시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썼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찾은 곳은 마한의 남쪽 끝이었다. 지금의 고흥이다. 바다가 보이는 고흥반도를 지나면서 그들은 위왕에 대한 충정도 충정이었지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였다.
위왕의 전설이 깃들어있는 고흥 팔영산 전경.
그날도 날이 저물어 가까운 인가를 찾아 하룻밤 신세를 졌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늙은이들을 홀대하지는 않았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지난 일들을 회상하는 그들에게 집주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장사손메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야기만 듣고는 말이 잘 안 통하여 긴가민가하였는데, 그들이 꺼내놓은 그림을 보니 영락없는 장사손메였다.
다음 날, 집주인을 따라 나선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집주인이 먼산을 가리키며 이야기하였다.
“저기가 장사손메요.”
집주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그들의 눈에 비친 장사손메는 그림 속 산이 분명하였다. 서둘러 초나라로 돌아간 그들을 위왕은 성대한 잔치를 열어 환대하였다. 하지만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던 위왕은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갔다. 세숫대야에 비친 것과 똑 같은 산을 보게 된 위왕은 여덟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여 팔영산(八影山)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배를 타고 초나라로 돌아가는 위왕의 머리 속에는 팔영산 자락에 사는 촌로가 해준 이야기가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수천 년 전 황제와 치우가 다투던 시절, 지금의 강원도 금강산 근처에 알천이라는 장사가 살았다. 그런데 힘이 세다고 안하무인이었던 그는 무고한 양민들을 괴롭히다가 그만 산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산신은 그 장사에게 “앞으로 한 달 안에 이곳에 1만 2천 봉우리를 쌓으면 용서를 해주겠노라. 다만 산을 옮길 때 부정한 사람이 봐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장사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몰래 산을 옮기는데, 보름도 안 되어 1만 개 가까운 봉우리를 옮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산을 옮기다보니 점차 옮길 산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처음과는 달리 낮에도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녔다.
산신과 약속한 한 달에 딱 하루를 남겨둔 날, 장사가 만든 봉우리는 1만 2천봉에 딱 하나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장사는 해가 지기 전에 마지막 봉우리를 옮기기 위해 한 걸음에 남쪽 끝까지 달려왔다. 그런데 너무 무리를 해서 뛰려다 그만 엎어지고 말았다. 그때 엎어지면서 두 손을 짚은 것이 지금의 고흥 팔영산이고, 무릎을 짚은 곳이 순천 하사의 인덕마을이다. 또한 멀리 뛰어오르려 너무 힘을 주었는지 순천 해룡면 대안리 풍덕마을 뒷산에는 당시 장사의 발자국이 아직까지도 바위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순천 해룡면 대안리 풍덕마을 뒷산에 있는 장사발자국.
너무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게 된 장사는 손을 털고 있어나서는 보성 근처에 있는 산봉우리를 하나 등에 메고 서둘러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막 순천 서면 강청마을을 지나던 중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산이 걸어간다!”
그 바람에 장사는 일을 그르친 것을 알고 그 자리에 산을 내팽개치고 금강산으로 돌아갔다.
장사가 들고 가다가 놓은 것이 지금의 순천시 용당동에 있는 삼산[원산 圓山]이다. 처음에는 한 봉우리였는데 끈으로 묶어 어깨에 메고 가다보니 세 봉우리처럼 된 것이다. 삼산의 세 봉우리 중 제일 작은 것이 약간 허물어져 있는데, 그것은 삼산을 내팽개치고 서둘러 금강산으로 돌아가던 장사의 발꿈치에 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순천 용당동 삼산 전경. 지금은 아파트로 둘러 쌓여 있어 옛 자료 사진을 활용하였다.
삼산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
알천 장사가 삼산을 내팽개치고 가다가 그 발꿈치에 채여 삼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가 잘렸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순천 삼산에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해 온다. 대체로 세 자매 이야기 혹은 세 형제 이야기로 전해오는데, 공통점은 막내가 시샘을 받다가 해꼬지를 당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옛날 예쁜 세 자매가 살았는데 부모님은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 모두 막내를 더 예뻐하자 시샘을 한 두 언니가 막내를 해쳐 결국 세봉우리로 변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 어떤 이는 오래 전에 장사가 무예 훈련을 하다가 그만 칼을 잘못 놀려 봉우리 가운데 하나가 잘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고려 초기의 정치적인 상황과 연관시키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삼산에 숨겨져 있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시기에 순천 출신 박영규 장군이 왕건을 도와 건국공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과 박영규 장군 사이의 갈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영규 장군은 순천 출신으로 견훤의 사위이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배신을 당하고 왕건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박영규는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견훤은 장인이지만 신검은 처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어떠한 이유로도 왕건에게 투항한 견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박영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해룡산성을 쌓게 하였다. 왕건의 군대가 밀고 내려오면 해룡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훤과는 달리 신검의 태도가 너무나 안하무인인데다 그를 믿고 대업을 논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박영규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박영규의 고민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어느 날 견훤의 밀지가 박영규에게 전해졌다. 밀지에서 왕건은 박영규 장군을 형님으로 모시겠다고까지 이야기하였다. 밀지를 본 박영규 장군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 대의인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결국 견훤과 신검 사이에서 가장 고통스러워할 아내에게 상의를 하였다.
“대왕께서는 마흔 해 넘게 힘써 대업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아침에 아들 때문에 나라를 잃고 고려에 투신하셨소.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내가 섬기던 임금을 버리고서 역적을 섬긴다면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겠소. 게다가 고려의 왕공(왕건)은 인후하고 근검하여 민심을 얻었다는 말이 들리니, 아마도 하늘의 계시인가 하오.”
이에 아내도 찬동하자 박영규 장군은 936년(태조 19년) 2월, 사람을 보내 귀부의 뜻을 표하였다. 이에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내리고 돌아가서 박영규에게 다음과 같이 알리게 하였다.
“만약 그대의 은혜를 입어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장군을 뵈온 뒤 당에 올라가서 부인에게 절을 올린 후, 그대를 형처럼 섬기고 부인을 누님처럼 받들어 반드시 죽을 때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하늘과 땅의 귀신이 모두 이 말을 들었을 것이오.”
그해 9월 박영규의 도움으로 신검을 치고 후백제를 멸망시킨 왕건은 박영규를 좌승(佐丞)으로 임명하고, 토지 1천경(頃)을 내려 주었으며,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박영규는 뒤에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훗날 박영규 장군은 순천 박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해룡산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박영규 장군이 쌓았다는 해룡산성. 토성이라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흔적만 남아 있다.
문제는 박영규 장군 사후에 일어났다. 태조 왕건이 유훈으로 남긴 훈요십조에서 차령 이남(호남) 출신을 경계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호족 세력의 도움으로 삼한을 일통하였지만 호남 출신 호족을 경계하지 않으면 왕권에 위협이 되리라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특히 박영규 장군의 경우 딸 네 명 가운데 세 명이나 왕후로 보낸 바 있어 왕의 권위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으로 왕권을 강화한 광종은 아직까지도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박영규 장군 세력을 경계하고자 풍수에 능한 사람을 보내 몰래 승평의 지세에 대해 알아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풍수가 승평에 있는 삼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를 쳐내면 대대로 인물이 나기 힘들 것이라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멀쩡한 산을 무너뜨릴 명분이 없었다. 이에 광종은 백부의 고향에 별장을 짓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는 그곳을 삼산 정상으로 지목하였다. 왕의 별장이 지어진다는 것은 고을 사람들로서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은 자원하여 산봉우리를 편평하게 다지는 일에 나섰다. 지금도 그때 파헤쳐진 흙더미며 돌무더기들이 산기슭에 남아 있다. 그러나 산봉우리가 잘려나가자 광종은 별장 짓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산봉우리가 파헤쳐지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박영규 장군 세력은 점차 힘을 잃더니 급기야 얼마 못가 그 세력이 미미해지고 말았다. 그러니 고려 건국에 이용만 당하고 축출당했다는 이야기마저 나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이야기를 근거로 삼산 봉우리 가운데 하나가 잘려 순천에 인물이 크지 못한다면서 삼산을 복원해야만 순천의 인물이 살아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출처] 장사 발자국과 삼산|작성자 월간 설화와 인물
'글,문학 > 野談,傳說,說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능가사와 유구태자 보현 (0) | 2017.01.20 |
---|---|
부자 되는 법 (0) | 2017.01.19 |
如意祭 (0) | 2017.01.18 |
고시래의 유래 이야기 (0) | 2017.01.16 |
까막과부가 부자가 된 사연 (0) | 2017.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