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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골재의 미녀

淸潭 2016. 12. 27. 11:18

뱀골재의 미녀

고흥설화 / 설화


고흥 동강면에 뱀골재라 불리는 고개가 있다. 벌교에서 고흥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뱀골재를 넘어야 한다. 꾸불꾸불한 고개라 해서 뱀골재라 부르는데, 뱀골재를 넘으면 붓끝처럼 생긴 첨산이 나타난다.


옛날 이 고을 선비들이 ‘대강(大江)의 필봉(筆峰)’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첨산의 붓으로 두방산(斗榜山)에서 흐르는 대강의 먹물을 이용하여 글을 쓴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예로부터 선비들이 몰려와 자기의 필적(筆蹟)을 다투어 남긴다고 한다.

고흥 사람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혹은 다른 볼일로 외지로 나가려면 이 뱀골재를 지나야 한다. 그래서 뱀골재는 항상 지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뱀골재를 지날 때 다음과 같은 속설이 있다. 길을 지날 때 뱀골재 모퉁이에서 어여쁜 아가씨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면 무사히 지나가지만, 뱀을 만나면 반드시 재앙이 일어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때 일이다. 고흥의 어떤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뱀골재를 지나는데 대낮인데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넘는 길인데도 갑자기 어두워지자 선비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그때 어디선가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타났다. 한적한 숲길에서 갑자기 묘령의 아가씨가 나타나자 선비는 대경실색하였다.


“누, 누구요!”


평상시였다면 반겼을 법한 미색인데 어두운 숲속에서 만나니 더욱 무서웠다. 그러자 그 아가씨가 선비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안심하세요.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안타까워 제가 길을 안내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앞장을 섰다. 선비는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매 한 가지라 생각하고 그 아가씨의 뒤를 따라갔다. 얼마 못가 선비는 길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자신을 인도해 준 아가씨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의문의 아가씨로 인해 길을 찾게 된 그 선비는 무사히 뱀골재를 넘을 수 있었고, 과거에 급제까지 했다고 한다.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한 후 이 소문은 삽시간에 고흥 고을에 쫙 퍼졌다. 그래서 뱀골재를 넘을 때 미녀를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과거를 보기 위해 뱀골재를 넘는 선비들은 재를 넘으려는 생각보다는 어찌 하면 미녀를 만날까 하는 생각이 더 앞섰다.


몇 년 후 다른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역시 뱀골재를 넘었다. 그 선비 역시 미녀 소문을 들었던 터라 일부러 걸음을 늦게 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기조차 하였다. 그런데도 미녀가 나타나지 않자 선비는 일부러 길을 잃고 헤매는 시늉을 하였다.


그때였다. 저만치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를 본 선비는 반색을 하였다. ‘드디어 나도 과거급제를 하겠구나.’


아가씨가 선비 가까이 다가오자 선비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아가씨가 커다란 뱀으로 변하였다. 과거급제의 꿈에 사로잡혀 있던 선비는 대경실색하여 도망치듯 재를 넘었다. 결국 그 선비는 과거에 낙방을 하였다.


알고 보니 그 선비는 집안 배경을 이용하여 온갖 나쁜 짓을 다하였던 패륜아였다. 그리하여 인근 고을에 악명을 떨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욕심을 부려 그런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고려시대 때의 일이다. 고흥 동강면에 버들이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버들이는 마음씨도 고운데다 얼굴은 더 예뻐서 집안은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많은 청년들이 버들이 얼굴을 보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버들이에게는 장래를 약속한 낭군이 있었다. 건너 마을 사는 최 도령이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최 도령이 과거 공부를 하는 바람에 버들이는 최 도령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 몇 달 동안은 거의 얼굴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최 도령 역시 과거 급제하여 버들이와 혼인할 생각으로 독심을 품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어느 날 밤, 최 도령이 버들이를 불러냈다. 다음날 일찍 과거를 보러 개경으로 떠나야했기에 마지막으로 버들이를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버들 낭자, 내일 개경으로 떠나오. 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올 테니, 돌아오면 부모님께 말씀드려 혼인을 했으면 하오.”


그러자 버들이가 최 도령 품으로 파고들며 말하였다.


“도련님.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다릴께요.”


다음날 일찍 최 도령은 과거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뱀골재를 넘는데 어떤 사내가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과거를 보러 가는 마당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저어한 최 도령이 무조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불한당들이 나타나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개경까지 가는 길이 멀기 때문에 여비를 빼앗기면 안 된다고 생각해 완강하게 저항하던 최 도령은 급기야 불한당들에게 변을 당하고 말았다. 최 도령이 과거도 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버들이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뱀골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 후 뱀골재에서는 버들 낭자의 원혼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퍼졌다. 최 도령처럼 반듯한 사람들이 뱀골재를 넘다 곤경에 처하면 버들낭자가나타나 구해주지만, 반대로 욕심이 많거나 비리가 많은 사람이 뱀골재를 지나면 뱀으로 변하여 응징을 한다는 것이다.


뱀골재 이야기는 고흥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 개과천선하게 하려는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