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역과 호랑이 굴
여수시 삼일동 동북쪽으로 보면 높이 336m의 제석산이 있다. 제석산 중턱에는 호랑이 굴이 있는데, 주역에 얽힌 슬픈 설화가 전해온다.
오래 전에 제석산 아래 마을에 가람이라는 외아들을 키우는 과부가 살았다. 그녀가 어떻게 과부가 되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사라진 후 홀로 가람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한다.
그런데 가끔 마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가람이 집 마당에 누가 봐도 맹수에 물린 것으로 보이는 고라니가 놓여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커다란 멧돼지가 목을 물려 숨진 채 놓여 있기도 하였다. 덕분에 그런 날이면 마을 잔치가 벌어지기도 하였지만 도대체 누가 짐승을 잡아다 주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호랑이 짓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제석산 자락에서 호랑이를 본 사람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가람이 어머니는 화제를 돌리곤 하였다.
어느 날 해질녘에 가람이가 혼비백산하여 집으로 뛰쳐왔다.
“가람아 무슨 일이니? 왜 그래?”
“호랑이가, 호, 호랑이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지만 호랑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람이 뒤편에 커다란 호랑이가 떡 버티고 서서 가람이 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본 가람이가 깜짝 놀라 어머니 품으로 안기며 사시나무 떨 듯 온 몸을 떨었다. 가람이 어머니가 호랑이를 보고 뭐라 하는 것 같더니 신기하게도 호랑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그날 밤 어머니가 가람이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람이 아버지는 문씨였다. 문씨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는데, 특히 주역에 통달하였다. 그가 얼마나 주역에 통달하였는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은 몰라도 주역 선생이라 하면 통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문주역이라 불렀다.
주역에 빠져 지내던 가람이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둔갑술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신통하게도 조금씩 둔갑술을 익히게 되었고 급기야 가장 어렵다는 호랑이 둔갑에 성공하였다. 호랑이로 변신하여 제석산을 한 달음에 뛰어 오르는 재미에 빠진 가람이 아버지는 틈만 나면 남들이 다들 자는 밤중에 호랑이로 변신하여 멀리 나주며 전주 등지까지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새벽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들어와 둔갑을 풀고는 잠들기 일쑤였다.
주역에 능통하다 하여 멀리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들의 사주를 봐주면서 가람이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점차 조는 일이 잦아졌다. 멀쩡하게 손님의 사주를 보다가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러니 점차 손님의 발길은 끊어지고 생계를 꾸리기가 팍팍해졌다.
“가람이 아부지, 얘기 좀 해요. 도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기에 그러는 거예요? 손님들 앞에서 졸고... 그러니 누가 당신한테 사주를 보겠어요! 어린 가람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대답을 들으려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일방적인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내를 뒤로 하고 가람이 아빠는 또 다시 낮잠을 자기 시작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아내는 몰래 남편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는 남편이 몰래 밖으로 나갔다. 잠든 척 하고 있던 아내가 몰래 따라 나가보니 남편이 주역 책을 꺼내 뭐라고 주문을 외우더니 놀랍게도 호랑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방으로 돌아온 아내가 밤새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새벽이 다 되어서야 남편이 기진맥진하여 돌아오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 누웠다.
그런 일이 거의 매일 반복되자 아내는 점차 약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밤 남편이 어김없이 호랑이로 둔갑을 하고 나가자마자 아내는 주역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새벽녘에 돌아온 남편이 다시 사람으로 되기 위해 책을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책이 없었다. 남편이 당황하여 이리저리 책을 찾는 도중 그만 날이 새고 말았다. 그리하여 깊은 한숨을 뒤로 한 채 호랑이로 둔갑한 남편은 제석산으로 올라가 그곳에 동굴을 판 후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다.
비록 둔갑술에 빠져 지내는 남편이 밉기는 하였지만 자신 때문에 호랑이로 변해버린 남편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졸지에 아빠를 잃어버린 가람이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내 역시 후회와 탄식 속에 살았다.
그런 연유로 호랑이는 아내와 아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가끔씩 짐승을 물어다가 주었다. 그러나 아내가 노려보면 꼼짝없이 꼬리를 내리고 제석산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어머니한테 호랑이가 된 아버지 이야기를 들은 가람이는 어머니 몰래 제석산으로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제석산 중턱에 굴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지난번에 본 호랑이가 있었다. 가람이가 다가오는 것을 본 호랑이가 반갑게 다가오더니 가람이를 끌어안았다.
그날 이후 가람이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주역을 공부하였다. 아버지를 되돌릴 방법은 주역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역이라면 지긋지긋하다는 어머니 몰래 공부를 하자니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10년을 공부하니 가람이 역시 둔갑술을 익히게 되었다. 가람이는 공부를 하는 틈틈이 제석산에 올라 간단한 둔갑술을 호랑이한테 보여주었다. 그런 가람이를 바라보는 호랑이의 눈빛은 복잡 미묘하였다.
다시 10년을 공부하니 가람이는 예전 아버지 수준의 둔갑술이 가능하였다. 가람이 역시 호랑이로 둔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니, 이제 되었어요. 이제 아버지를 다시 되돌릴 수 있어요!”
난데없이 아들이 아버지를 되돌릴 수 있다고 하자 가람이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남편을 되돌릴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아들 역시 아버지처럼 주역 책을 보며 둔갑술을 공부했다는 사실이 끔찍하였던 것이다.
“아니, 이놈아, 그 동안 주역을 공부했단 말이냐?”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자 남편을 되돌릴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도대체 어떻게 되돌린단 말이니?”
“제가 둔갑을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도 변하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러더니 아들은 어머니께 자신의 둔갑술을 보여주기 위해 마당 한 구석을 살폈다. 마침 수탉 한 마리가 다가왔다. 아들이 뭐라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수탉이 갑자기 강아지로 바뀌었다. 다시 주문을 외우자 강아지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람이의 둔갑술 실력을 본 어머니는 가람이와 함께 서둘러 제석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미 호랑이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 아니 호랑이의 주검 앞에서 통곡을 한 가람이 모자는 호랑이를 장사지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람이는 곧바로 주역 책을 불사르고 어머니와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 이 설화는 여수문화원장을 지낸 故 문정인 선생님이 채록한 내용에서 기본 뼈대를 삼았음을 밝힙니다.)
[출처] 문주역과 호랑이 굴|작성자 월간 설화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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