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의 편지
지역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여보, 아마 우리에게도 기다리던 아기가 생기려나 봐요.』
『그렇게 되면 오죽이나 좋겠소. 한데 부인에게 무슨 기미라도‥‥』
『간밤 꿈에 웬 스님이 제게 거울을 주시면서 잘 닦아 지니라고 하시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태몽인 것 같아요.』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기를 갖지 못해 영약이란 영약은 다 먹어 보고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리던 충남 보은의 김진사댁 부인 박씨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한가위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밤, 김진사댁에서는 낭랑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는 자라면서 남달리 총명하여 다섯 살 되던 해, 벌써 천자문을 마쳤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어느 여름날. 돌이는 서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뒹굴기 시작했다.
나이 많은 서당 학우들이 업고 집에 이르자 놀란 김진사는 용하다는 의원을 부르고 약을 썼으나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이 병은 더 심해졌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수리 수리 마하수리‥‥』
대문 밖에서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렸다.
시주 쌀을 갖고 나온 김진사 부인은 스님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꿈에 거울을 주었던 그 스님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묘한 인연이라 생각한 부인은 스님께 돌이 이야기를 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스님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러잖아도 소승이 돌이를 데리러 왔습니다.
절에 가면 곧 건강을 되찾을 것이며 장차 이 나라의 훌륭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김진사 내외는 귀여운 아들을 절로 보낼 수 없어 선뜻 대답하지 못했으나 태몽을 생각하고는 하는 수 없이 스님 뜻에 따랐다.
스님 등에 업혀 절에 온 돌이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 건강해졌다.
낮에는 활쏘기 등 무예를 익히고 밤에는 불경을 읽으며 9세가 되던 해 김진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고향에 돌아가 상을 치르고 돌아온 돌이는 부친을 여윈 슬픔과 함께 사람의 나고 죽는 문제로 번민했다.
스님께 여쭈어 봐도 「아직 어리다」며 좀체로 일러주시려 하지 않았다.
이듬해 어느 가을날. 돌이는 화산의 설묵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여 각성이란 법명을 받았다.
사미의 엄한 계율 속에 정진하던 각성은 14세 되던 해 부휴 스님을 따라 속리산, 금강산, 덕유산 등으로 다니며 경전공부 외에 무술, 서예 등을 익혔다.
이렇게 10년이 지나자 부휴 스님은 각성을 불렀다.
「이제 네 공부가 어지간하니 하산하여 중생을 구제하도록 하라.』
벽암이란 호를 받은 각성 스님은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 묘에 성묘하고는 한양으로 발길을 옮겼다.
때는 조선조 광해군 시절. 조정에서는 무과 과거 시험을 치르는 방을 내걸었다.
각성 스님은 시험에 응시했다.
『김각성 나오시오.』각성 스님과 마주한 상대는 호랑이 가죽 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 흰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것이 마치 짐승 같았다.
두 사람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등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 회를 거듭하던 중 짐승 같은 사나이의 목검이 부러졌다.
각성 스님은 절호의 기회였으나 상대방이새 칼을 들고 다시 대적하도록 잠시 기다렸다.
그때 성난 사나이는 씩씩거리며 규정에 없는 진짜 칼을 원했다.
이를 지켜보던 난폭한 광해군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진짜 칼을 주도록 어명을 내렸다.
다시 징소리가 울렸다.
『얏! 에잇!」기합소리와 칼 부딪치는 소리뿐 장내는 쥐죽은 듯했다.
승부의 귀추가 주목되는 아슬아슬한 순간, 사나이의 칼이 스님의 머리를 후려치는데 스님은 날랜 동작으로 상대방의 칼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오, 과연 장한 솜씨로구나.』
광해군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무과에 급제한 각성 스님은 팔도도총섭이란 벼슬을 맡았다.
그러나 바른말을 잘하는 스님은 임금에게 성을 쌓고 국방을 틀튼히 할 것을 간(諫)하다 뜻이 관철되지 않자 벼슬을 내놓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몇 년간 무술을 더 연마하는 동안나라는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각성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세상에 내려가 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스님은 곧 대궐로 달려가 새 임금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고맙게 여긴 임금은 스님의 옛 관직을 회복하여 팔도도총섭에 명하고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했다.
남한산성이 다 이루어지기도 전에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왔다.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게 된 인조는 각성스님의 공을 높이 치하했다.
『대사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던들 내 어찌 생명을 보존했겠소.』
성곽 수호를 관군에게 맡긴 각성 스님은 의승 천 명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 북으로 진격했다.
『나는 팔도도총섭이다. 대장은 나와서 나와 겨루자.』
이때 적진에서 달려 나오던 대장은 갑자기 멈춰섰다.
『혹시 김각성 장군이 아니오』
『그렇소만‥‥』
『지난날 과거장에서 칼을 잃고 도망간 사람이 바로 나요. 나는 그때조선의 정세를 염탐하러 왔다가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했지요. 그때 살려준 은혜 잊지 않고 있소. 오늘 저녁술이라도 한 잔 나눕시다.』
『술도 좋지만 우선 승패를 가리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좋소. 그럼 내일 싸우도록 합시다.』
이튿날 아침.
벽암대사는 의병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 많던 적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들판에는 편지를 매단창이 하나 꽂혀 있었다.
『김각성 장군! 지난날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그냥 돌아가오.』
편지를 읽은 스님은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장경사를 건립했다.
훗날 조정에서는 스님의 공을 기리기 위해 남한산성에 「청계당」이란 사당을 지어 매년 추모제를 올렸다.
[답사후기]
※장경사에는 각안 스님에 대한 내용이 안내문에 전해오고 있으나 청계당은 존재하고있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적장의 편지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장경사(長慶寺)
* 깊은 산사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사찰, 장경사 *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된 사찰이다. 남한산성 안에는 본래 9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현재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국청사 등이 복원되었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장경사는 남한산성 동문에서 북쪽으로 2km 가량 올라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울 근교 사찰로는 드물게 한적하여 깊은 산사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축성 뒤에도 승군을 주둔시켜 수성(守城)에 필요한 승군의 훈련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훈련시키는 한편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을 교체하며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된 3칸 동향(東向) 건물이며 요사채 3동과 진남루(鎭南樓)·칠성각·대방(大房) 등이 있다.
* 소실된 남한산성의 사찰 *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의 축성이 시작되자 인조 3년에 승도청(僧徒廳)을 두고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사역을 돕게 하였다. 승군의 숙식을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옥정사(玉井寺) 외에 1638년(인조 16) 개원사(開元寺)·한흥사(漢興寺)·국청사(國淸寺)·천주사(天柱寺)·동림사(東林寺)·남단사(南壇寺) 등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때 함께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경사(경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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