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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과 조병옥

淸潭 2016. 9. 10. 09:47

장면과 조병옥

 

요새 젊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장면과 조병옥 - 그러나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항거하던 50년대에는 가장 두드러진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 일제 때 미국 유학을 한 사람들인데 장면은 본디 황해도 중화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일제 때에는 혜황동에 있는 동성상업학교의 교장 일을 보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품행도 단정하여 정치판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4‧19의 격랑 속에 탄생한 내각책임제의 민주당 정권하에서 소위 민주당 신파로 국무총리의 자리에 올라 그 혼란에 그 자리를 몇 달밖에 지키지 못하고 5‧16군사혁명으로 얼마동안 갈멜수녀원에 은신하고 있다가 그 군사정권에 투항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조병옥은 성품이나 기질이 장면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충청도 공주 태생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장면의 온화한 얼굴에 비해 조병옥의 얼굴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관상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얼굴을 ‘위맹지상’(偉猛之相)이라고 한다는데 한번 보면 한 평생 잊을 수 없는 특이한 얼굴이었습니다.

암살당한 장덕수의 집이 제기동에 있었는데 장덕수 기일에는 그의 부인 - 여러 해 경기여고의 교장이었던 박은혜가, 그 집에서 해마다 추모예배를 가졌습니다. 그 날 그 자리에는 조병옥이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와 이야기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에 앉아있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합니다.

해방되고 조병옥의 딸 하나가 이화여대에 다녔습니다. 그 때는 교통이 아주 불편하던 시절인데 연대‧이대 학생들이 다들 걸어서 북아현동 고개를 넘었습니다. 한번은 앞으로 가던 여대생 중에 날씬하고 옷도 잘 입은 학생을 보고 다들 한번 놀라고 감탄했는데 두 번째 놀란 것은 뒤따라가던 남학생 하나가, “재가 조병옥 딸이래”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그 여대생이 뒤를 돌아다 봐 세 번째 놀랐는데 그 날씬한 여대생의 얼굴이 조병옥을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제 때에도 일본인들에게 굽히지 않고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일제 말기에는 연희전문의 강사 자리에서도 쫓겨나 정말 생계가 막연했답니다. 그렇던 어느 날 조병옥은 잘 사는 친구 한 사람을 찾아가 다짜고짜로, “너는 내가 죽으면 문상 오겠지?”라고 하더랍니다. “물론 가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조병옥이 그 친구에게 “너 그 때 빈손으로 오겠냐 아니면 봉투라도 하나 들고 오겠냐?” “아무렴 빈손으로 가겠냐? 봉투 하나는 들고 가지!” “얘, 나 요새 매우 힘들다. 그 봉투 지금 다오!” 조병옥은 그렇게 말하고 조위금이 든 봉투를 살아서 받아 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요새 세상에는 이런 인물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재미없는 나라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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