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의 일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 가서는 단종의 어머니이 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그 피부병을 고치 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는 왕자 시절 에 불경 언해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교학에도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즉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 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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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왕후 윤씨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1418년 홍주군에서 태어나 1428년 가례를 행하였으며, 처음 에는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또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 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 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 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 며, 덕종에게도 큰 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 3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해 무려 7년 동안 정사를 이끈 정희왕후는 섭정 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과단성있는 행동으로 조정을 안정시킨 그녀는 1483년 3월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 소생으로는 덕 종(의경세자), 예종 등 두 왕과 의숙공주가 있고, 능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으로 세조의 능 동편 언덕에 있다.
덕종(의경세자)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이름은 장, 자는 원명이다. 1445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를 맞아 월산대군과 성종을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 아 잔병이 잦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세조의 가족들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경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 에서 공작재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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