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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아버지, 가족 속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淸潭 2016. 1. 24. 15:34

은퇴한 아버지, 가족 속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헤럴드경제 | 입력 2016.01.24. 08:29

아내ㆍ자식 위해 오직 ‘일’만 했던 우리 아빠
 일자리 잃자 정체성 상실… 가족은 외면

[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1. 서울 노원구에 사는 김모(57) 씨는 2년전 명예퇴직을 통해 30년 가까운 은행원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동안 아파트 중도금, 친지 사업 자금, 부모님 병원비, 아이들 학자금 등으로 퇴직금을 사전에 정산받아 다 써버리고 나니 손에 쥔 돈은 몇푼 되지 않았다.

요즘 김씨가 아침마다 하는 일은 공무원 부인의 출근 준비를 돕는 일이다. 부인이 “어디라도 좀 나갔다 오라”며 주는 용돈을 받을 때마다 김씨는 한없이 작게 느껴진다. 5년 먼저 은퇴한 김씨의 직장 동료들이 수년째 이런 생활을 한다는 말을 들으면 더 서글퍼진다.

 #2. 박모(50ㆍ서울 성북구) 씨에게 가장 힘든 것은 경제적 압박이나 명예퇴직의 충격보다 가족 내 소통 채널에서 철저히 배제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직장에 올인하느라 부인은 물론 대학교 1학년 딸과 고등학생 아들에게 신경쓰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우리네 아버지들의 슬픈 현실.

그동안 소홀했던 게 미안해 말을 건네 보지만 자녀들은 귀찮아 한다. 가족 간의 대화에 낄 수 없다는 데 무력감을 느낀 박씨는 최근 전문가의 상담을 받기도 했다.

중년 남성들의 가정 내 위치를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가장으로서의 ‘권위’나 ‘위신’은 이미 옛말이 됐다.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경제적 주도권은 없고 가족 안에서도 찬밥 신세다.

[출처=헤럴드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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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15’에선 개인의 노동시장 경력이 절정에 이르는 45~49세 한국 중년들의 일자리는 지속적인 불안 상태에 처해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같은 나이 한국의 5년 이상 중장기 근속자 비중은 47.1%로, OECD 국가(평균 66%)와 비교할 때 크게 낮은 수준이었다.

노동 유연성이 높은 캐나다, 미국, 덴마크에 비해서도 그 비율이 16%포인트 이상 낮은 것. 10년 이상 근속자 비중 역시 33%로, OECD 국가(평균 47.4%)나 EU 15개국(평균 57.1%)보다 낮다. 이런 불안은 가정 내에서의 지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다.

일자리 지킨 남성들은 집안에서 가족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바쁜 사회 생활로 가족들과 점차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고, 가정으로 다시 돌아온 중년 남성들이 ‘가족 내 왕따’를 당하거나 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회ㆍ정서적인 남녀상의 변화를 원인으로 꼽았다.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는 “과거 중년 남성은 사회의 중심축으로 살아왔고, 향후 후배 세대가 순환적인 돌봄을 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면서 “그러나 현재는 자녀의 만혼에 따른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평균 53세에 명예퇴직이 일어나는 등 경제적 기본 역할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은 역할로 산다는 말이 있는 만큼, 가장 스스로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움츠러들고, 이것이 중년 남성들의 집단적 우울증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대 사회의 남성들은 관계적 인간이라기보다 평생 일과 성실성으로, 스스로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존재인 만큼 직업을 잃고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정체성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가장 좋은 해결책은 안정적인 일자리가 확보됨으로써 가정 경제를 튼튼히 이끌어야하는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년 남성들의 움직임도 본격화되는 추세다. 직장인 정신건강 전문기업 다인에 따르면 중년 남성(40~69세) 대상 상담진행건수는 2013년 2609건에서 2015년 3379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중년 남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상담 중 부부 및 가족문제 관련 상담 비율은 2013년 28%에서 2015년 33%로 상승했다.

realbighead@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