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3인방에 이어, 지난 10월 15일에는 남북 고위급 접촉을 위한 군사당국자 접촉에 북한 측 수석대표로 김영철 정찰총국장도 등장했다. 그는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해 온 인물로,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이후 7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시안게임에 참석한 북한 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방문했다지만 고단수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깜짝쇼’ 성격임이 분명하다. 그 정치적 계산이란 것은 다름 아닌 5·24 조치 해제를 위한 남북 대화에 북한이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북한의 비상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김정은은 체면 불구하고 최고 전문가가 현장에서 파악하고, 판단하고, 결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5·24 조치는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로 초래된 것으로,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없이는 해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원칙이다.
류제승(柳濟昇) 국방부 정책실장도 남북 대화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1990년대 이후 남북 군사대화를 주도한 군비통제관실에 근무하며 대북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이어받고 있다. 따라서 김양건 대남비서-김관진(金寬鎭)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영철 정찰총국장-류제승은 남북협상의 진검승부(眞劍勝負)를 위한 구도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월 30일로 예정됐던 제2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무산되면서 남북관계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황으로 변했다. 북한이 대북 삐라 살포를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이 날려 보내는 전단은 김정은 정권엔 치명적 무기다. 이를 어떻게 해서라도 막으라는 김정은의 오더가 떨어진 상황인 듯이 보인다.
실무선에서 이를 집행해야 할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2004년 6월 남북 선전수단을 철거한 장본인이다. 북은 지금 “남은 밀어붙이면 된다”는 김대중-노무현 이래의 경험에 기대를 걸고 선전수단 철거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이다. 오늘날 남북의 정황은 10년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1950년대 3년 동안의 정전협상 이래 남북 간 그리고 미·북 간에 치열하게 전개됐던 1990년대, 2000년대 초의 군사회담 경과를 정리하고자 한다. 국방부 군비통제관실 과장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차장·국장으로 군비통제관실에 근무하면서 한국군 장교 가운데 최장인 9년 동안 남북 군사회담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북 문제는 현재도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기 때문에 보안상 또는 대북전략상 내용을 소상히 밝히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관계된 실무자들의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또 관련 문서가 남아 있을 때, 그 대강을 정리해 둠으로써 역사 보존의 의의와 함께 남북 군사회담에 임하는 후배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美, DMZ 헬기 격추사건 발생하자 北 직접접촉 시도
지난 9월 15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서 김영철 정찰총국장(왼쪽)과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
이 사건 발생 직후 빌 리처드슨(Bill Richardson) 미 하원의원이 북한을 방문, 북측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사건 발생 13일 만인 12월 30일 헬기조종사 보비 홀 준위와 함께 격추 당시 사망한 데이비드 하일먼 준위 유해가 송환됐다.
이때 미국과 북한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대화의 창구를 열고자 했고, 그것은 군사정전위원회(Military Armistice Commission·MAC)가 1990년대 초 이래 사실상 무력화돼 양측의 접촉이 단절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토머스 허바드(Thomas Hubbard) 국무성 한국과장(주한 미국대사 역임)을 보내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고, 허바드는 “보비 홀 준위를 석방하면 미·북 군사접촉을 열도록 하겠다”는 각서를 북한 측에 써 주었다.
미·북 간의 직접적인 접촉 창구를 희망했던 북한은 절호의 기회를 맞았고, 미국도 북한군과의 접촉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은 ‘유엔사와 북한군 간에 군사정전위원회 외에 접촉채널을 갖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정전협정의 한 조항을 들어 어떻게든 북한군과 접촉을 하고자 했다. 1953년에 만든 협정 문안에 이러한 예외조항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역시 미국은 세계적인 국가 운영을 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4년 12월 30일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지나 남측 지역으로 넘어오고 있는 헬기조종사 보비 홀 준위. 미·북 협상은 사건 발생 2주 만에 신속히 타결됐다. |
‘정전문제에 관한 국제연합군과 조선인민군 간의 장군급 대화를 위한 절차’는 정책실장 박용옥 장군과 유엔사 부참모장 마이클 헤이든(Michael Hayden) 소장의 협상에 의해 이뤄졌다. 헤이든 장군은 현역 공군대장 신분으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임명됐고, 5년 동안 국가안보국(NSA) 국장까지 맡았던 인물이다.
주요 내용은, 첫째 이 대화가 ‘유엔사-북한군 대화’라는 것을 명백히 했다. 즉, ‘미국과 북한 간의 접촉’이 아니라 ‘유엔사-북한군 간의 대화’임을 미 측에 인식시킨 것이다. 둘째로, 이것은 정전협정에 입각해(in accordance with the Armistice Agreement) 진행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셋째로, 대표는 미군, 영국군, 그리고 태국, 또는 필리핀 등 제3의 유엔군 및 한국군 대표 4명으로 하며 그 대표들은 ‘동등한 발언권(equal voice)’을 갖는다는 것을 규정했다. 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미군 장성이 선임장교(senior officer) 역할을 하기로 했다.
전문과 총 6개 조로 구성된 이 절차는 한국군이 미군 등 다른 유엔군 대표와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다는 것을 명기한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등한 발언권’은 한반도 문제에 한국군이 미군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유엔사 대표는 헤이든 장군에서 마이클 던(Michael M. Dunn) 장군(美국방대 총장 역임, 예비역 공군중장)으로 교체됐고, 한국군은 정철호(鄭喆皓) 공군준장, 금기연(琴琦淵) 공군준장 등이 참여했다.
썰렁한 순안공항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 따른 후속조치로 남북 군사회담의 본격적인 장이 열렸다. 나는 군비통제관으로 국방부를 대표해 수행원 자격으로 평양행 전용기에 올랐다. 6월 13일 오전 10시25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순안공항에 내렸을 때, 조화(꽃술)를 손에 든 수만 명의 환영인파, 인민군 육·해·공 의장대가 “김정일 만세”, “결사옹위”를 외치고 있었다. 공군기와 미군기로 위풍당당한 우리의 성남 서울공항을 연상했던 나의 기대는 공군기도 하나 없는 허허벌판 공항이라는 데에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환영인파의 함성이 폭풍우처럼 커지는가 싶더니 공항 입구 저편에 갈색 인민복 차림의 파마 머리를 한 키 작은 남자가 뒷짐을 지고 붉은 카펫을 걸어오고 있었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었다. 그가 환영인파의 구호에 느릿한 박수로 화답하자 평양시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두 정상은 55년 만의 악수를 나누고 의장대를 사열한 후 나란히 승용차에 올라 행사장으로 이동했다.
자동차로 평양시내로 이동하는 중 신호등 대신 교통안내원이 수신호로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다. 평양 주요 거리는 20여 층의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으나, 인민대회장으로 가는 길을 둘러보니 ‘계획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2박3일 평양 체류 일정 동안 안내원이 배정돼 행사 때마다 버스에 동승해 행동을 같이 했다.
내가 안내원에게 “평양은 2박3일 정도의 관광코스면 적당하다”고 하자, 그는 기분이 언짢은 듯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측이 꺼리는 국군포로 문제나 북핵 문제는 회담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숙소인 고려호텔과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남측 방문단 환영만찬에서 맛본 북한 음식은 담백했다. 특히 옥류관의 온면(溫麵)은 면과 육수로 맛을 낸 듯 은근한 중독성(中毒性)으로 남측 인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정상회담 마지막 날, 남한 대표단은 동명왕릉을 찾았다. 동명왕릉은 1974년 김일성대학 발굴단에 의해 동명성왕, 즉 주몽(朱蒙)의 무덤임이 확인됐다. 동명왕릉으로 가는 길은 요철(凹凸)이 심해 차가 덜컹거렸고, 늘어선 전봇대는 성냥개비처럼 가늘어 우리의 1960년대를 연상케 하는 등 북한 경제의 실상을 느끼게 했다. 자전거와 같은 교통수단이 없어 하염없이 걷는 북한 주민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명왕릉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듯했다. 하지만 남한 학자들은 고구려 주몽이 도읍했던 곳이 졸본(현 중국 랴오닝성)인데 왕릉이 왜 평양에 있는지도 수수께끼라며 반신반의했다. 동명왕릉의 벽화에 등장한 인물들이 신라시대 왕릉에 등장하는 인물과 퍽 다른 북방계통의 인물이라는 점이 꽤 인상 깊었다.
제주 ‘다금바리’에 매료된 북측 인사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의 긴장완화에 따라 남북한의 문제는 군사적인 긴장완화와 신뢰구축, 경제·사회적인 협력, 두 가지 축(軸)으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정부에서는 분명히 했다. 특히 국방부에서는 군사적 신뢰구축(confidence building)을 위한 남북 간의 접촉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는 마치 새가 두 개의 날개로 날듯, 수레가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가듯, 반드시 병립해야 하며, 단순히 정치적인 화해 제스처나 대북원조, 이산가족 찾기 등으로 남북대화가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북측에 요구했다. 물론 정부도 국방부의 이러한 주장과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북 군사회담이 성사된 결정적인 계기는 박재규(朴在圭) 통일부장관이 2000년 9월 1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김정일과 만나 “이 문제를 빼놓고서는 남북관계가 순항할 수 없다”는 취지로 설명한 후, 김정일이 이를 수용하면서 성사됐다.
남북 간의 접촉을 위한 남북 군사 당국 간 접촉은 9월 13일 북한 측이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명의의 서한을 보내 “남북 군사대화를 갖자”고 제의하면서 시작됐다. 북측은 회담 장소를 홍콩 또는 베이징 등 제3국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해 왔으나, 우리 측은 장소가 어디든 회담 개최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북측 제의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후 북측은 “제주도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수정 제의를 해 왔고, 이에 대해 우리 측은 동의했다.
앞서 9월 12일 김용순 노동당 비서가 박재경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대장)을 대동하고 추석선물로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에 왔다. 돌아가는 길에 제주도에 들른 그는 그곳의 풍광(風光)과 ‘다금바리’ 회에 매료돼 회담 장소를 제주도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이리하여 제1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2000년 9월 25~26일 양일간 제주도에서 열린 것이다.
나는 남북 군사당국 간의 회담진행 사항을 유엔사에 소상히 알렸다. 우리가 유엔사에 알려야 할 의무는 없으나 나와 유엔사 부참모장 마이클 던 소장과의 상호신뢰가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던 장군에게 “남북 간 대화가 이뤄지더라도 유엔사의 권위와 책임 또는 미국의 이익을 간과하는 남북만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유엔사와의 긴밀한 협의하에 남북 군사대화를 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러포트 사령관의 好意
현역 공군대장 신분으로 국가안보국장(NSA) 재직 시절의 마이클 헤이든 장군. 유엔사 부참모장 시절, 김국헌 장군과 함께 ‘유엔사-북한군 간 대화절차’ 프로토콜을 만들었다. |
이러한 국방부와 유엔사의 신뢰를 바탕으로 유엔사는 남북 군사회담에서 국방부를 믿고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것은 2000년 8월 26일 리언 러포트(Leon LaPorte) 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이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한(書翰)에서 구체화됐다. 러포트 대장은 “남북 국방장관회담에 있어 미국은 필요한 협조를 하고, 특히 미국이 남북대화에 방해물(hindrance)로 비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러포트 사령관의 서한은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긴 했으나, 미국 측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기까지는 러포트 사령관을 비롯한 유엔사 참모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제주도에서 열린 1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남북 간의 ‘신뢰구축’이라는 것은 북측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두고 양측은 밤을 거의 새웠지만, 신뢰구축이라는 용어는 끝내 사용하지 못하고 ‘남북 간의 긴장완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그치고 말았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국헌 장군이 김정일과 악수하고 있다. 김 장군은 대통령 수행원 자격으로 국방부를 대표해 평양을 방문했다. |
사실, 이때 제1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고 본다. 첫째는 남북대화가 경제·사회뿐만 아니고 군사적 측면에서도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명분적인 차원’, 둘째는 6·15 공동선언에서 남북철도 연결을 합의한 데 이어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도로 연결을 추가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당시 북측으로서는 철도·도로를 연결해 개성공단을 건설하고 이를 통한 외화 획득을 염두에 두었고,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불편도 감수할 수 있다는 속셈하에 회담에 임했던 것이다. 따라서 1차 남북 군사실무회담은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군사보장 문제가 주 의제가 됐다.
남북 양측은 이 문제를 정전협정에 입각해(based on the Armistice Agreement) 처리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경의선 철도·도로를 연결하는 문제는 비무장지대(DMZ)와 군사분계선(MDL)을 통과하는 문제였으며, 이는 바로 DMZ와 MDL의 관할권을 행사하는 유엔군사령관과 조선인민군사령관 사이의 협의를 거쳐 이루어져야 할 사안이었던 것이다.
북측은 이 문제를 지적하며 “유엔군의 동의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어왔고, 군비통제관인 나는 북측 실무자 유영철 대좌와의 협의에서 “그 문제에 관한 한 걱정 말라”는 식의 답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러한 답변을 한 것은 러포트 사령관의 서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남북 간의 군사회담에서 정전협정에 관한 논의는 유엔군사령관을 대신해(on behalf of)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위임한다’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할권’ 문제를 영국 케이스로 해결
2000년 9월 27일 제주도에서 열린 제1차 국방장관급회담에서 김국헌 장군이 김일철 인민부력부장(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가 조성태 국방부 장관이다. |
DMZ 도로연결을 남북이 추진하면서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러포트 사령관이 서한에서 밝힌 대로 정전협정에 관련한 사항에 관해 우리 국방부에 협상을 위임한다 하더라도 그 위임의 범위가 ‘관할권(Jurisdiction)’에 관한 법적 문제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DMZ와 MDL에 대한 유엔군사령관의 관할권을 존중하면서도 남북 간에 인원과 차량이 오가는 것을 별 지장 없이 하는 현실적 요구를 다 같이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두고 고민했다. 경의선 철도·도로 공사를 진행할 때, 공사가 완료된 이후에도 수많은 인원과 차량이 DMZ와 MDL을 통과할 것인데, 이때마다 일일이 유엔군사의 승인을 받아서 추진하기는 대단히 번거롭고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가지 문제를 두고 던 장군과 수차에 걸쳐 어려운 협의를 해 나갔다. 그러던 중, 나는 절충안으로 ‘관리권(Administration)’이라는 개념의 아이디어를 던 장군에게 제시했다.
즉, 법적으로는 유엔군이 관할권(Jurisdiction)을 갖되, 실제적으로는 운용에 불편이 없도록 한국군이 ‘행정적인 관리권(Administration)’을 갖자는 것이다. 즉 DMZ에서 일어나는 정전협정 위반사항이나 출입은 ‘관할권’에 해당하고, 관리구역 내의 공사·인원과 장비의 통행은 ‘관리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법적인 형식을 갖추는 엄격한 절차는 준수하되, 실제적으로는 지장이 없는 운영의 묘(妙)를 기하자는 것이다.
나는 런던대 킹스칼리지에서 4년간 유학하는 동안, 영국이 ‘99년 리스(lease)’ 또는 ‘999년 리스’ 제도를 두어, 아랍 부호들이 돈을 아무리 많이 내더라도 토지의 소유권은 완전히 이전하지 않고 결국 영국에 귀속하게 하는 법적 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던 장군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좋은 아이디어”라며 ‘관할권’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 협조했다. 이로써 남북 간의 문제를 ‘정전협정에 의거하여 처리한다’는 핵심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2000년 9월 12일 제주를 방문 중인 김용순 노동당 비서(오른쪽)가 북제주 ‘분재예술원’을 둘러본 후 성범영 제주 분재예술원장 내외에게 격려의 휘호를 써주고 있다. |
그리고 11월 17일 유엔사와 북한군은 제12차 판문점 장성급회담에서 ‘비무장지대 일부 구역 개방에 대한 국제연합군과 북한군 간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 합의서에 따라 남북 양측은 2000년 11월 28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처음으로 제1차 남북 군사실무회담을 개최할 수 있었다.
2000년 11월부터 개최된 제1차 남북 군사실무회담에 한국 측에서는 김경덕 군비통제차장을 비롯한 4명이, 북측에서는 유영철 대좌를 비롯한 4명이 참가했다. 우리 대표단은 국방부에서 수석대표 외에 1명, 통일부에서 1명, 건교부에서 1명이 참여했다. 당초 경의선 문제만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으나, 2002년부터 동해선 문제가 추가로 논의됐다.
우리는 회담에서 “경의선-동해선”이라고 언급한 데 반해, 북측은 “동해선-경의선”으로 언급했다. 즉 북측은 동해선을 연결해 금강산관광을 트려는 목적이 있었고, 우리는 경의선을 연결해 개성공단을 건설하려는 의도가 컸던 것이다.
결국 2002년 9월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도로공사의 군사적 보장합의서의 타결을 보았고, 이에 따라 철도·도로 건설을 위한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는 경의선 지역에서는 제1건설단, 동해선 지역에서는 제2건설단이 창설돼 담당했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북한 측과의 접촉 또는 협조는 군비통제관실이 담당했다.
그러나 철도·도로 연결 공사를 진행하면서 또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바로 남북 관리구역 내에서 이뤄지는 통행권 문제와 지뢰제거 문제였다. 당시 유엔사 측에서는 던 장군의 후임으로 부참모장 제임스 솔리건(James N. Soligan) 공군소장이, 국방부에서는 김경덕(金暻德) 군비통제차장(육사30기·예비역 육군소장·국방개혁실장 역임)이 협상 상대였다. 솔리건 장군은 던 장군과 달리 원칙을 중시하는 군인이었다. 나는 국방부를 대표해 유엔사 부참모장 솔리건 장군과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약정(Terms of Reference)을 체결하며 이 문제를 해결했다.
北, 남북군사회담 본격화하자 ‘선전수단 철거’에 매달려
2000년 9월 1일 남북 장관급회담 우리 측 수석대표인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함경북도 동해안 지역에 머물고 있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찾아가 조찬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
우리 측에서는 이 문제는 ‘쌍방 간의 군사적 신뢰가 발전되는 데에 따라 검토한다’는 정도로서 우리의 주도권을 최대한 확보하는 데에 주력했다. 남북 간의 군사적 신뢰가 발전되는 것에 따라 검토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측에 주도권이 있는 것이며, 우리 측이 보아 이 문제의 진척이 불완전하다고 판단될 때는 언제든지 선전수단 철거를 중단하도록 했다.
북과의 협상전선에서, 남북한의 확성기·전단 등 선전수단을 제거하는 문제에 가장 어려움이 많았다. 사실 북측이 남북 군사회담에 나오게 된 주요 동기도 남측의 선전수단 제거에 맞추어져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72년 7·4 공동성명 이래 우리는 2000년 이후 북측에 대한 전단살포를 중단했고, 심리전 방송도 우리 장병들의 정서함양을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도 북측은 회담장에서 굳이 이 확성기들을 제거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측이 그들에게 “우리 확성기 방송이 무엇이 대단하다고 북측을 자극하느냐”고 반문했지만, 북측은 “우리 지역에 비가 올 것이라는 남측의 정확한 일기예보조차도 우리 장병을 자극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 그들은 “자유로(自由路)에 오가는 차량의 앞등(전조등)도 우리에게 관측된다”며 “남측에 자동차가 얼마나 많길래 늦은 밤에도 이렇게 통행이 많으냐”고 했다.
휴전선상에 세워 놓은 선전문구를 제거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북측이 이를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떠보기 위해서 군사분계선에서 상당히 떨어진 소위 ‘존엄구호(尊嚴口號)’를 제거하라는 요구를 했다. 우리는 신성불가침한 김일성(金日成), 김정일에 대해 북측이 과연 존엄구호를 제거하겠는가에 대해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북측은 어떻게 해서든 남측의 확성기를 제거하겠다는 일념으로 판문점에서 20km 떨어진 신성불가침의 존엄구호를 철거했던 것이다. 북한군과의 협상은 이런 문제를 둘러싼 장기 지구전(持久戰)의 전선이었다.
마이클 던 소장(맨왼쪽) 등 유엔사 소속 장교들이 1999년 7월 2일 서해 교전 및 북한 경비정 영해침범 사건을 논의하기 위한 유엔사-북한군간 장성급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판문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
선전수단 철거는 김대중 정부 때도 들어주지 않은 요구사항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종석 차장의 회담타결 압력을 “우리 장관의 직접 명령 없이는 절대 응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하루는 NSC 상임위 회의에 참석했던 조영길(曺永吉) 당시 국방부장관(갑종172기, 예비역 대장)이 나를 불렀다. 조 장관은 “당신만 대북 전문가냐”고 버럭 화를 냈다.
이종석 사무차장이 “NSC 상임위에서 결정한 사안에 대해 왜 실무자들이 말을 듣지 않느냐”고 장관을 질책한 것이다. 장관을 최후의 ‘비빌 언덕’으로 삼았던 나는 장관에게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허탈했다. 나는 조기 전역까지 각오하고 이를 거부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장관이기 이전에 군인인 장관도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내게 저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정책기획관실 장광일(章光一) 차장(육사31기, 국방부 정책실장 역임)의 눈물 어린 만류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때 군복을 벗었을 것이다.
결국 2004년 5월 금강산에서 남북이 제1차 장성급회담으로 만났다. 남측은 제1, 2차 연평해전의 재발을 막자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북측은 대북 심리전 수단을 장성급 회담의 조건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으며 철거에 매달렸다.
그해 6월 4일 설악산 켄싱턴스타호텔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 장성급회담에서 이른바 ‘6·4 합의서’로 불리는 ‘서해해상 충돌방지 및 선전활동 중지 및 수단철거에 관한 합의서’에 합의했다. 이어 ‘6·4 합의서’ 이행을 위한 부속합의서도 6월 10일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열린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양측은 44시간 무박3일의 피 말리는 담판을 벌이며 합의서를 만들었다.
남북 군사회담의 다섯 개 前線
2003년 9월 4일 리언 러포트 유엔군사령관이 조선호텔에서 열린 ‘극동포럼’ 창립 조찬강연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러포트 사령관은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에서 국방부에 상당부분 재량권을 허용했다. |
첫째, 전선은 북한과의 협상장에서의 대결이다. 회담장이 판문점, 서울, 혹은 평양이 되었든, 북한 측과 마주 앉는 자리는 전투 못지않은 또 하나의 전선(front)이다. 공산주의자에게 있어 ‘협상은 전쟁의 연속이다’는 논리에 따라 남북 간의 협상은 또 하나의 전쟁이 되는 것이다. 적의 의도를 탐색하고 의지를 시험하며, 이를 극복 돌파할 수 있는 전략과 협상전술을 모색하는 광범위한 작전이 전개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전선은 국내에서의 관련 부처 간 이뤄지는 내부적인 의견조율이라는 전선이다. 남북문제는 통일부, 국방부, 외교부, 국정원이 모두 관여하며 이를 청와대에서 총괄 조절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여러 부처의 입장은 그 사안을 보는 시각과 또는 부처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정리해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 역시 중요한 전선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전선은 주한미군과의 전선이다. 주한미군과 국방부와의 조율은 한미 양국의 공동의 이해와 연합방위 체제라는 대전제하에, 이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국방부와 유엔사 또는 연합사, 주한미군사령부 간에 어느 정도의 긴장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이것 또한 하나의 전선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네 번째 전선은 국회다. 북측과의 협상 또는 북측과의 대결이 이뤄지는 과정은 국회를 통해 국민에게 보고되며, 이 과정에서 여야의 입장 차이에 따라, 또는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신랄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국회의원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정치의 장’으로서의 전선이 있게 마련이다.
다섯 번째 전선은 언론을 비롯한 국민의 여론이다. 국회에서 완전히 수렴되지 않은 다양한 언론, 사회단체에 의한 의견의 분출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의 이해를 구하는 것 또한 어려운 과업이 된다.
원스타 김영철 소장, 박용옥 준장에게 “박 준장”이라며 하대
2002년 9월 18일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 인근에서 열린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공사 착공식에서 색색이 발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연기 뒤로 병풍처럼 둘러 있는 금강산 구선봉이 보인다. |
군사실무회담에서 북측에서 대좌가 나오고 우리 측에서 준장이 나감으로써 여기에 대해 우리 국내에서 비난과 항의가 빗발쳤고, 특히 예비역 장성들의 항의가 빗발쳤던 경우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2년 남북 고위급회담 때 남북기본합의서에 불가침 분야 부속합의서를 협의하기 위해 군사분과위원회 회담이 열렸을 때, 원스타인 북측 김영철 위원장(소장)은 카운터파트인 박용옥 당시 군비통제관(준장)에게 “박 준장, 박 준장”하며 계급체계를 악용해 회담의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당시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그해 6월 박용옥 준장을 소장으로 ‘특진’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북측은 회담 때마다 계급 문제를 들고 나왔다.
공산권의 군제(軍制)와 서방권의 군제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공산권의 대좌는 사실 독일의 상좌(Senior Colonel)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방권의 대령(Colonel) 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직책상으로도 북측 유영철 대좌가 부국장의 직책을 갖고 있었고, 그에 대응해 우리 측도 군비통제 차장인 김경덕 장군(준장)을 내보내는 것이 크게 모양새가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던 것이다.
2004년 6월 29일 남북 장성급회담 2차 실무대표회담이 남측 수석대표 문성묵 대령과 북측 수석대표 유영철 대좌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기 파주시 홍원연수원에서 열렸다. 남북은 군사분계선(MDL) 지역의 1단계 선전수단 제거 결과를 서로 확인하고 2단계 제거 작업에 대해 협의했다. |
결국 북쪽은 안익산 소장(해군 여부 불분명)을 내보냈고, 우리도 원 스타인 박정화(朴貞和) 제독(해사30기, 해군작전사령관 역임)이 회담에 나갔던 것이다. 이때 북측에서 소장이 나올 때 남측에서 준장이 나와도 북측이 장성급회담을 파행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적의 의도에 대한 확실한 간파가 있었기에 이러한 주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장에서 승리는 적의 의도를 간파할 때 담보되는 것이다.
얼마 전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한 군사당국자 접촉에서 북한 측 수석대표 김영철 정찰총국장의 상대로 류제승 정책실장이 맞는 것이다. 더구나 천안함 폭침을 주도한 김영철을 회담 대표로 내보내는 것은 독일이 이스라엘에 나치 전력자(前歷者)를 대사로 임명하는 것과 마찬가지 도전이다. 이 도전을 받아 준 것만 해도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 것이다.
조이 제독의 교훈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부속합의서에 따라 2014년 6월 16일 서부전선 무력부대 오두산전망대에서 군인들이 대북선전용 대형 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다. |
“공산주의자들은 엉겁결에 회의에 참석하거나 황급하게 협상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 먼저, 그들은 주의 깊게 무대를 설정한다.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유리한 협상환경을 만들어 실리를 챙기기 위해, 교섭이 진행될 장소의 환경을 세심하게 고려한다.”
정전협상이 공산 측 점령 아래 있는 개성과 판문점에서 열리게 된 것도, 조이 제독이 공산 측 대표단장 남일(南日) 총참모장(외무상 역임)보다 4인치나 낮은 의자에 굴욕적으로 앉게 된 것도 그들의 계획된 협상전술이었다. 북한이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열 것을 고집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조이 제독이 꿰뚫어 본 바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상은 본질적으로 ‘정치심리전을 통한 전쟁의 연속’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구전의 양상을 띤다. 협상에 있어 그들은 크게 두 가지 뚜렷한 전술을 구사한다.
우선 살라미(Salami) 전술로서 문제를 일괄적으로 타결하지 않고 몇 개로 나눠 그 각각을 전부 새삼스럽게 제기하는 계략을 사용한다. 각각의 살라미에 대해 벼랑끝 전술(blinkmanship)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상대가 지칠 때까지 최대한의 신경전을 펴며, 이를 통해 상대를 거의 넉아웃시킨다는 것이다.
조이 제독은 “공산주의자들은 협상이 일단 시작되면 합의를 향한 진행을 지연시키는 것이 상대방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믿는다”면서 “그들은 서양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을 완성하려고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 한다”고 했다. 조이 제독은 “공산 측은 2+2=6이라고 제안하고, 합의를 끊임없이 지연시킴으로써 유엔군 측이 2+2=5라고 동의하도록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1951년 7월 회담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한 유엔군 측 대표들. 왼쪽부터 크레이기 소장, 백선엽 소장, 수석대표 조이 해군제독, 리지웨이 대장, 호데스 소장. |
그들은 남북관계의 진전을 국내정치에 이용하려는 역대 남한 정부의 조급증을 이용해 쌀과 비료, 노벨평화상에 목말라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급증을 이용해 달러와 6·15 선언을 받아 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도력을 상실하고 임기 만료 전 북핵만이라도 해결하려고 매달리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의 약점을 간파해 9·19 합의라는 미봉책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북한은 미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핵실험과 장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정전협상 당시 유엔군 측은 의제로 ‘한국을 횡단하는 비무장지대 설정’을 내걸었다. 하지만 북한 측은 먼저 38선을 양쪽 사이의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데 합의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전선(戰線)의 상황을 보면, 유엔군 측이 점령한 38선 이북 지역이 공산군 측이 점령한 38선 이남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공산 측은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을 협상의제로 제시해 놓고, 그 전제 위에서 모든 논의를 시작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조이 제독은 이를 두고 “속임수가 숨어 있는 의제”라고 말했다.
북한 측 행태는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출범 이후 북한 측이 6·15 공동선언이나 10·4 공동선언의 이행을 남북 간 대화재개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온 것이 그렇다. 북한은 우리가 지난 10년간의 대북정책을 반성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면서 ‘대북 퍼주기’를 담보하는 두 공동선언부터 수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나는 남북 군사회담을 지휘하며 조이 제독이 그의 책에서 말한 내용들을 주문(呪文)처럼 외우고 다녔다. ‘회담을 열자는 공산 측 제의에 서둘러 반응하지 마라’, ‘공산 측과 협상할 팀은 최고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상대편이 양보하면 이를 상대편이 약하다는 신호로 본다’, ‘공산 측과의 회담주제는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공산주의자와의 약속은 믿지 마라. 그들의 행동만 믿어라’ 등 조이 제독이 말하는 회담 노하우는 회담 실무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하는 ‘잠언’인 것이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 주한미군이 데프콘3(defcon-3)에 돌입하고, B-52 폭격기가 북한 상공을 비행하며 재밍(jamming)을 걸어 북한군의 통신을 마비시키자 김일성이 비로소 판문점에서 미국 측에 사과했던 것이 지금까지 북한이 협상에서 백기(白旗)를 든 유일한 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엔사 장교들과 긴밀한 관계 유지해야
제임스 솔리건 유엔군사령부 부참모장. 그는 2000년 이후 수없이 열린 남북 군사회담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막후에서 역할을 담당했다. |
유엔사 참모는 일부 연합사 참모와 겹쳐지는 인원도 있지만, 유엔사 업무만을 수행하고 있는 참모장교도 상당수다. 이들은 자칫 한국군이 연합사만을 중시하고 유엔사를 경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과 역할과 기능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불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남북관계에 대한 유엔사의 입장을 결정하는 데 있어 유엔군사령관의 판단을 보좌하는 것은 주로 이들 참모이다. 때문에 유엔사 참모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군비통제관으로서 마이클 던, 제임스 솔리건 등 유엔사 부참모장을 주로 상대했다.
던 장군과는 유엔사-북한군 장성급회담 진행과정에 있어서 긴밀한 협조와 협의가 있었기에 상호 간에 깊은 신뢰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복잡한 문제를 비교적 쉽게 풀어 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던 장군과 그 휘하 장병들에게 국방부가 그들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수시로 강조했다.
로마 교황은 삼중관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 로마의 대주교, 바티칸시국의 왕이라는 세 가지 지위와 역할을 상징한다. 세 가지 지위는 셋이자 하나인 성부(聖父), 성자(聖子)와 성신(聖神)이 하나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원리와 통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엔군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의 지위와 위상은 셋인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엔군사령관의 지위와 책임, 권한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기회 있는 대로 그들에게 강조했다. 유엔사의 위상과 기능이 간과될지도 모른다는 유엔사 참모의 일말의 불안과 우려는 이러한 나의 설명과 약속으로 상당부분 해소됐다. 이를 통해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DJ의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발언에 진땀
‘정치의 장(場)’으로서의 국회의 보고 도 회담 실무자들에게는 까다로운 문제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끝난 후 서울에 돌아왔을 때 성남 서울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 한반도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요지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그 직후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한나라당, 특히 군 출신 국회의원들은 질책과 함께 강하게 항의했다. “도대체 아직까지 전선에서 100만의 남북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이 없다는 것은 무슨 소리냐”라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항의가 쏟아졌다.
그날 국방위에서는 이와 비슷한 유의 질문이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조성태(趙成台) 국방부장관(육사20기·예비역 대장)의 답변에 전 국방위원, 아니 전 국민의 관심이 모아졌다. 조 장관은 이렇게 답변했다.
“이번 정상회담 후에 대통령이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이 없다’고 하신 것은, 첫째,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바람’이고, 둘째로는 우리의 국가와 군사적 대비로써 반드시 전쟁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 그리고 우리의 능력을 통해 이것을 가능토록 하겠다는 ‘믿음’을 합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국회의 답변이 또 하나의 전선이라는 것은 바로 이처럼 어떠한 질문이 어떻게 얼마나 쏟아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문제를 핵심적으로 요약해 답변하는가에 대한 분초(分秒)를 다투는, 또 하나의 전선인 것이다.
김영철, 남북 군사회담의 ‘북측 총감독’
공산주의자들은 회담 장소라는 ‘무대’에 어떤 사람들을 ‘연기자’로 내보낼까. 조이 제독은 “공산주의자들은 협상팀을 대단히 주의 깊게 선발한다. 대표단 요원 선정시 지적 능력이 첫 번째 고려요소이며, 평판·계급 및 직책은 두 번째 고려요소이다. 지구력 그리고 논리성에 대항하는 냉철한 처신이 정전회담 대표단의 가장 중요한 특성처럼 보였다”고 했다.
실제로 정전협상에 한국군 대표로 참석한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대장은 “회담장에서 마주 앉은 이상조(李尙朝) 소장은 독기 서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다가 ‘상가(喪家)의 개만도 못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노예’라는 메모를 끄적여 보이기도 했다”며 “파리가 이마에 붙어도 눈 하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늘날에도 대남, 대미 협상에 나서는 북한 측 대표단은 북한이 선발한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북한의 김영철을 비롯해 북한 측 대표들은 남북 군사회담을 30년 이상 주도하고 있을 정도의 베테랑급들로 구성돼 있다. 북핵 협상에 나섰던 미국 외교관들이 북한 외교관들의 협상능력에 혀를 내둘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들 중 내가 대면했던 인물들에 대한 인물평을 간략하게 하려 한다. 1996년 강릉지역 잠수함 침투사건부터 2004년까지 10년 동안 나와 적수로 다퉈 왔던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남북 군사회담의 ‘총감독’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다.
그가 얼마 전 남북 장성급회담장에서 나의 후배인 류제승 정책실장과 대좌해 회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북한의 간부정책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사라질 것 같은 북한 정권이 오늘날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문화한 간부정책에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에 비해 우리의 남북 군사회담 조직은 허약하다. 과거 국방부 정책실 산하 군비통제관실에서 대북정책과 군축을 담당하던 것을 조직과 인원을 4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축소했다. 현재 남북 군사회담은 국내파트를 담당하는 정책기획관실 내의 북한정책과가 맡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군비통제관실의 군축과는 신설된 국제협력관실로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장교들이 1~2년 ‘철새’처럼 머물다 가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회담 전문가 양성은커녕 북한이 해군사령부, 인민무력부, 총참모본부 명의의 성명을 날리면 대응기관이 어디인지 헷갈리는 촌극도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북정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국방부 내의 군비통제관실과 같은 대북정책과 군비통제를 전담할 수 있는 국(局) 단위 이상의 조직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나는 2000년 9월 제주 남북 국방장관 회담 때 처음으로 그의 위상을 확인했다. 그날 밤 회담을 마무리하는 공동성명을 갖고 협상할 때 북측 대표는 유영철 대좌였고, 우리 측 실무대표는 나였다. 물론 외무부의 송민순(宋旻淳) 북미국장, 김희상(金熙相) 국방대 총장도 있었지만, 조성태 장관의 결재를 받아야 할 실무대표는 나였다.
유 대좌와 내가 밤 2시경 문안을 확정짓고 상부에 결심을 받는 것만 남았을 때, 우리는 조성태 장관이 임동원(林東源) 안보수석과 협의해 대통령의 재가를 바로 받을 수 있었으나, 유영철은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을 옆에 두고도 결재에 시간이 걸리기에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혹시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를 거쳐 국방위원장에게 올라가느라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후 남북 군사실무회담 등을 30여 차례, 수백 시간을 북측과 회담하며 김정일에게 직접 결재를 받은 것은 대남업무에 정통한 김영철이었고, 김일철·조명록은 형식적 채널이었던 것이다.
그도 나처럼 남북 군사실무회담이나 장성급회담에서 회담장에 등장한 ‘배우’의 뒤에 있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감독이 모든 것을 연출하고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듯, 김영철과 나는 10년 동안 남북 군사회담의 진행에서 실질적 책임을 졌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철과 나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논리에 따른 주장을 김정일에게만 납득시키면 그만이었지만, 나는 국방부, 정부, 유엔사, 국회, 언론 등을 설득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유영철, 회담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2010년 5월 28일 박림수 국방위원회 정책국장이 평양에서 가진 외신기자회견에서 “우리에게는 연어급이나 상어급 잠수정이 없다”며 천안함 폭침을 부인하고 있다. |
2000년 9월 남북 국방부장관 회담 때 북측 대표단에 그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좀 의외였다. 아마도 미군유해 송환과정에서 미군들로부터 돈을 더 뜯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철직(撤職)이라도 당한 것 아닌가 추정한다. 그 후 회담에 나온 박림수는 상당히 고단해 보였고, 힘든 세월을 보낸 흔적이 역력했다.
박림수를 남북 군사회담에서 자주 대한 문성묵 군비통제차장은 내게 “박림수는 김영철이나 유영철과 달리 비교적 유연하고 솔직한 편”이라고 보고했다. 무리한 주장이나 요구를 할 때는 목청은 높이지만,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휴식시간에는 “본심은 아니었으니 이해해 달라”며 미안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민완수사관의 수법일 수도 있어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었다. 2010년 박림수는 외신기자회견에서 “천안호 사건은 남조선이 날조한 것”이라고 강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고 그와 대좌했던 회담 실무자들은 이야기했다.
‘걸어다니는 법규(法規)’로 불린 유영철은 2004년 남북 군사실무회담 북측 단장으로 ‘6·4 합의’를 통해 대남심리전 체제를 해체한 인물이다. 당시 회담을 직접 지휘한 김영철 상장이 얼마 전 류제승 실장을 만나 탈북자 단체가 풍선으로 전단을 날리는 것에 대해 펄펄 뛴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2005년 7월 군사실무회담 때 북측 단장인 유영철 인민무력부 대좌는 뇌졸중으로 회담 중 쓰러졌다. 우리 군 앰뷸런스가 ‘골든타임(golden time)’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그를 인계해 치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북측이 보안유지를 요구하는 바람에 언론엔 한 줄도 실리지 않았고, 북측이 사의를 표한 적도 있다.
그간 김영철이 정찰총국장으로 진급해 대남공작을 총지휘하고 있고, 박림수도 소장으로 진급해 정책국장으로 대남회담 공세를 진두지휘하고 있으나 유영철만 별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건강에 문제가 생긴 듯하다.
그러나 유영철은 군사정전위 등에서 신출내기 유엔사 장교들에게 소위 회담의 ‘히스토리’를 읊어 대며 전의(戰意)를 상실시킨 인물이다. 그는 어떤 의제, 이슈가 나오든 관련 법규, 전례 등에 정통했고, 논리전개 능력도 탁월했다. 우리 측 대표들과 벌이는 논리의 용쟁호투(龍爭虎鬪)는 가히 볼 만했다. 특히 합의문 작성을 할 때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언어감각이 발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We agreed to disagree”
인민무력부장 김일철 차수는 북한군 원로로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9월 제주도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다. 당시 북한 측 대표단은 판문점→성남 서울공항→제주로 갔다. 당초 국정원은 판문점에서 김포공항으로 이동해 민간항공기로 제주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을 짰다.
회담 실무를 총괄한 나는 김보현(金保鉉) 국정원 3차장에게 “국방부는 모든 수단을 갖고 있다”며 성남 서울공항을 이용해 군수송기 CN-235편으로 제주로 가는 아이디어를 냈다. 김보현 차장은 흔쾌하게 일정을 재조정해 주었고, 북한 측 대표단과 기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판문점에 도착한 북측 대표단을 영접하는 임무를 맡은 김희상 당시 국방대 총장은 이들과 거수경례를 할 것인가, 목례를 할 것인가를 두고 내부에서 논의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목례로 간단히 수인사를 했다.
김일철은 1933년생(81세)으로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때 동해함대 참모장을 지냈고, 해군사령관을 거쳐 인민무력부장을 9년 동안이나 지낸, 우리의 백선엽 장군과 같은 인물이다. 조성태 장관과의 회담에서 7~8년이나 많은 연배인 김일철은 군 경력만큼이나 시종 담담하고 여유 있는 자세로 회담에 임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제주 한림수목원을 방문했을 때, 김일철은 분재(盆栽)들을 완상(玩賞)하며 높은 수준의 품평(品評)을 했던 일이 기억난다. 1930년대에 태어나 일제시대 교육을 받은 분들에게 느껴지는 성향과 교양의 단면을 간취(看取)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향후 5년 후에 통일이 된다면,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북한군사팀에 ‘촉탁’ 자리라도 하나 보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역대 남북 군사회담 담당자들은 북한 측과 회담에서, 아주 사소한 제의나 문제제기에 있어서도 이겨 놓고 싸우는 자세와 정신으로 회담에 응했다고 자부한다. 사실상 지난 10여 년의 군사회담에서 우리는 항상 우위 속에서 적을 능가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군사회담을 담당해 왔던 김경덕 장군, 장광일 장군, 문성묵(文聖默) 장군(3사13기·국방부 정책실 군비통제차장), 이상철(李尙澈) 장군(육사38기·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 등의 탁월한 인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믿는다.
외교관들이 잘 인용하는 말에 ‘We agreed to disagree(서로의 의견 차이를 인정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되는 말이지만, 외교·협상 ·회담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말이다. 북측과의 30여 차례, 수백 시간의 담판을 이 한마디처럼 압축한 말도 없을 것이다. 나와 함께 남북대결의 전선에서 용왕매진(勇往邁進)한 동지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다함께 통일의 그날까지 일로매진할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