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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신화/뉴시스】중국인에 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 '731부대'의 부지(위), 이시이 시로 731부대 사령관(왼쪽 아래), 세균 폭탄 사진. 일본 침략군은 1932~1945년 중국에서 군인 1만 명으로 구성된 세균전쟁 부대 60개를 만들었다. 중국 시민 최소 27만 명이 생체실험의 피해자다. 악명 높은 '731부대'를 포함한 일본군은 생체 세균실험에 기반을 둔 세균무기를 개발했다. 또 이 세균무기를 전투에서 사용해 중국 시민에게 페스트와 탄저병을 유발했다. ☞ 원본: Newsis.com|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도매인: 한국네티즌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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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신화/뉴시스】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서 일본인 의사가 중국인을 대상으로 세균 생체실험을 자행하고 있다. 일본군은 1932~1945년 중국에서 군인 1만 명으로 구성된 세균전 부대 60개를 만들었다. 중국 시민 최소 27만 명이 생체실험의 피해자다. 악명 높은 '731부대'를 포함한 일본군은 생체 세균실험에 기반을 둔 세균무기를 개발했다. 또 이 세균무기를 전투에서 사용해 중국 시민에게 페스트와 탄저병을 유발했다. ☞ 원본: Newsis.com|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도매인: 한국네티즌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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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신화/뉴시스】 1940년 11월 중국 지린(吉林) 성 눙안(農安)에서 일본이 자행한 사실상 생체실험이었던 "전염병 예방조치"를 보여주는 2014년 1월 복제된 사진. 일본 침략군은 1932~1945년 중국에서 군인 1만 명으로 구성된 세균전쟁 부대 60개를 만들었다. 중국 시민 최소 27만 명이 생체실험의 피해자다. 악명 높은 '731부대'를 포함한 일본군은 생체 세균실험에 기반을 둔 세균무기를 개발했다. 또 이 세균무기를 전투에서 사용해 중국 시민에게 페스트와 탄저병을 유발했다. ☞ 원본: Newsis.com|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도매인: 한국네티즌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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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신화/뉴시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사용한 세균폭탄. 일본 침략군은 1932~1945년 중국에서 군인 1만 명으로 구성된 세균전쟁 부대 60개를 만들었다. 중국 시민 최소 27만 명이 생체실험의 피해자다. 악명 높은 '731부대'를 포함한 일본군은 생체 세균실험에 기반을 둔 세균무기를 개발했다. 또 이 세균무기를 전투에서 사용해 중국 시민에게 페스트와 탄저병을 유발했다. ☞ 원본: Newsis.com|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도매인: 한국네티즌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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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신화/뉴시스】1946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에서 일본이 자행한 생체실험으로 폐페스트에 걸려 죽은 여성. 일본군은 1932~1945년 중국에서 군인 1만 명으로 구성된 세균전 부대 60개를 만들었다. 중국 시민 최소 27만 명이 생체실험의 피해자다. 악명 높은 '731부대'를 포함한 일본군은 생체 세균실험에 기반을 둔 세균무기를 개발했다. 또 이 세균무기를 전투에서 사용해 중국 시민에게 페스트와 탄저병을 유발했다. ☞ 원본: Newsis.com|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도매인: 한국네티즌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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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AP/뉴시스】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미군기가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그해 8월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했다. 사진은 원폭 투하 이틀 뒤 폐허로 변한 히로시마의 모습. newsis.com All rights reserved ☞ 원본: Newsis.com|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도매인: 한국네티즌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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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AP/뉴시스】 지난 1945년 9월8일 자료사진으로 유엔 연합군 소속 특파원이 일본 히로시마(廣島)에서 외관만 남은 전시관과 관공서 앞 건물 잔해에 서 있다. 이 건물들은 지난 1945년 8월6일 사상 첫 원폭 공격인 미군의 원격 투하로 사라졌다. newsis.com All rights reserved ☞ 원본: Newsis.com|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도매인: 한국네티즌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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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70돌’ 한국인 피해자들의 호소 “광복 70년? 우리에겐 피폭 고통 70년”5살때 피폭당한 이곡지씨, 남편과 함께 원폭피해 알리려 ‘피스 보트’ 올라 2세들은 치료 지원조차 못받아 또다른 원폭 피해자 심진태씨 “정부가 우리 죽기전 실태조사하고 일·미에 한국인 피해 문제제기해야” ◇ 1945년 8월6일 아침 8시15분께, 일본 히로시마 시마병원 위로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떨어졌다. 당시 5살이던 이곡지(75)씨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약 1.5㎞ 떨어진 집 안에 있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42만여명 가운데 조선인은 5만여명으로 추산된다. ☆*… 사흘 뒤 두번째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에서도 조선인 2만여명이 피폭당했다. 한국이 일본에 버금가는 ‘원폭 피해국’인 이유다. 그 뒤 긴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실태 파악이나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광복 70년은 이들에게 고통의 70년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70돌을 하루 앞둔 5일 이씨는 남편 김봉대(77)씨와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 있었다. 환경재단과 일본 피스보트가 마련한 ‘피스 앤 그린보트’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참가자들에게 ‘탈핵과 평화’를 얘기하고자 배에 오른 것이다. 김씨는 “원폭 피해자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8월 중에 국제소송도 제기하려 한다”고 했다. » 국내 원폭 피해자들 관련 주요 사건 일지 ▷ ☆*… 70년 전 그날 이씨의 히로시마 이층집은 핵폭풍에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1층에 있던 언니와 목욕탕 일을 나가던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다. 이씨와 어머니는 그해 10월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자주 한기를 느끼고 감기 비슷한 증상으로 고생했다. 이씨도 어릴 적부터 피부병을 앓았고 등에 생긴 종양 제거 수술도 받았다. '노 커트' 전문기사보기 더 큰 문제는 자녀에게서 나타났다. 45년 전 낳은 쌍둥이 중 한 아이는 22개월 만에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남은 아들 김형률씨도 10년 전 세상을 등졌다. 김씨는 “형률이는 폐 기능의 70%가 망가진 상태로 살다가 갔다. 2001년에 와서야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라는 희귀병인 걸 안 뒤, 원폭 후유증임을 확신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형률씨는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피폭자 건강수첩’(건강수첩)을 받지 못했다. 건강수첩은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임을 인정하는 증표로, 이게 있으면 한국·일본에서 후유증 치료를 지원받을 수 있다. 앞서 손병두씨 등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이 벌인 소송 등을 통해 1978년부터 한국인에게도 건강수첩 교부가 ‘허용’됐다. 그러나 원폭 피해 2세는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심진태(72)씨는 2살 때 원폭을 경험했다. 시마병원에서 약 3.5㎞ 떨어진 곳에 살던 그는 후유증을 크게 겪지 않았지만 자식들한테 증상이 나타날까봐 늘 불안하다. 심씨는 “손주들에게서 혹시나 증상이 나타날까봐 남몰래 살펴본다. ‘광복 70년’ 같은 말을 들으면 원폭 피해와 불안 속에 살아온 우리의 70년이 생각나 화가 난다”고 했다. 심씨는 한국 내 원폭 피해자 절반 이상이 살아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경남 합천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지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평균연령 80대인 원폭 1세대들이 죽기 전에 정부가 실태 조사와 연구를 하고 일본과 미국에 한국인 피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원자력발전만 강조하지 피해자 조사와 추모사업 하나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방준호 기자 3D3D3Dwhorun@hani.co.kr">3D3Dwhorun@hani.co.kr">3D3Dwhorun@hani.co.kr">3Dwhorun@hani.co.kr">3D3Dwhorun@hani.co.kr">3Dwhorun@hani.co.kr">3Dwhorun@hani.co.kr">whorun@hani.co.kr ☞ 원본글: 한겨레신문|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 있음. 한국 네티즌본부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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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 70주년] 박남주 할머니가 겪은 그날 하늘에서는 검은 비 쏟아져… "뜨거워, 살려줘" 행인 비명 생생 종전 후 한국으로 돌아간 피해자 여전히 보상·치료 못받은 채 고통 日, 전쟁의 무서움 잊은 듯, 핵무기는 물론 원전도 막아야 ◇“그 해 가장 더운 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전차에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빛과 불덩이같은 것이 전차를 순식간에 덮쳤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눈 앞에서 시가지가 다 사라졌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피투성이였습니다.” △ 사진:히로시마 원폭피해자인 박남주 민단고문은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70년 전 히로시마 원폭 당시 참상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는 "지금 일본 정부는 전쟁의 무서움을 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프리랜서사진기자 니콜라 다티슈 제공 ☆*… 박남주(83)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고문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70년 전 오늘(6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피해자로서 10년 넘게 일본 내외에서 활발하게 증언활동을 (...) 당시 히로시마는 해군사관학교와 전시사령부 등이 위치하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했다. 상공에는 미군 전략기인 B-29가 자주 출몰했고, 수시로 공습 경보가 울렸지만 그래도 폭격은 없었다. “그날도 경보가 있었지만 오전 7시에 해제됐어요. 평소처럼 아침식사를 마치고 동생 둘을 데리고 전차를 탔습니다.” 그 길로 그는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고도 했다. 당시 병가 중이어서 혼자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박 고문은 운이 좋았다. 5남매와 부모님 모두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 무사했다. “원폭 이후 30분쯤 지나니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렸어요. 기름을 붓는 것 같았죠. 거리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쓰이 아쓰이 다스케테쿠레’(뜨거워 뜨거워 살려줘)라며 몇 발짝 걷다가 픽픽 쓰러지곤 했습니다.” (...) 노컷기사, 전문보기 사람들은 한참 동안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 가스탱크가 터졌다고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그날을 어제 일처럼 상세히 묘사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는 “강변에 모여 함께 시신들을 태운 것”을 꼽았다. (...) 히로시마= 김혜경 객원기자 ☞ 원본글: 한국일보|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한국 네티즌본부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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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AP/뉴시스】6일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70주년을 맞아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위령식이 열렸다. 한 여성이 원폭 투하로 인한 희생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 원본: Newsis.com|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도매인: 한국네티즌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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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AP/뉴시스】6일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70주년을 맞아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위령식이 열렸다. 유가족들이 위령탑에 꽃을 바치며 참배하고 있다. newsis.com All rights reserved ☞ 원본: Newsis.com| Click○ 닷컴가기. 변조금지, 저작권있음. 도매인: 한국네티즌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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