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아내와 이혼하고도 장모님과는 함께 살아야했던 1년
저는 십오 년 전, 스물 일곱 살 때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 당시 아내 나이는 불과 스물 세 살.
저희 두 사람 모두 대학을 갓 졸업할 무렵이었고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 철부지들이었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서로 깊이 알기도 전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속도위반으로 인해 서둘러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는 부른 배를 감추며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저희 둘은 결혼 직후부터 장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가 아이를 혼자 키울 수가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그 당시 제가 살 집도 구할 능력이 안 되었고, 생활비도 부담이었기에...
그나마 제가 곧 취직을 해서 최소한의 가장 노릇은 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지요.
어쨌거나 딸아이가 무탈하게 태어났고, 장모님도 저를 믿어주시고, 그렇게 일찌감치 가장의 길을 가는가 싶었는데...
그렇게 별나게 시작된 저의 결혼생활은 이후로도 늘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문제는 아내였습니다.
저도 아직 철이 없었지만, 아내는 그야말로 아내로서, 엄마로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부로서 해야할 일을 모두 장모님께 밀어젖혀놓고, 본인은 스물 서너 살 아가씨들의 생활을 이어나가려 하더군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놀고, 즐기고, 배우고, 세상 구경하느라 가정은 뒷전이었습니다.
변명이 아니라, 저는 그래도 생활비를 벌어야한다는 압박감 속에 직장생활에 충실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달리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내에게는 언제나 장모님이라는 대역이 대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장모님이 살림하고, 애 키우고, 심지어 생활비까지 벌어 보태셨지요.
그리고 언제나 딸의 잘못을 감추시려고 거짓말도 하시고, 저를 달래기도 하시고, 하여간 전전 긍긍이셨습니다.
아내는 취직이 돼서 몇 달 일하다가 금방 그만두고, 무슨 자격증 딴다며 친구들과 쏘다녔습니다.
그러느라 나날이 느는 건 주량이었고,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저보다도 적었지요.
씀씀이도 컸고, 쇼핑중독증세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일 싫었던 건 거짓말입니다.
언제나 애교섞인 거짓말로 눈앞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지요.
저도 잘한 건 없습니다.
어린 아내를 확실히 휘어잡지를 못했으니까요.
잘못을 고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너그럽게 풀어주지도 못했습니다.
언제나 반쯤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아내의 거짓말에 속고 마는 남편이었지요.
그렇게 십 년쯤 살다보니, 한계가 오더군요.
제 입에서 이혼하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나오더군요.
그러나 그 말이 나오자, 속이 다 후련하고, 내가 왜 이제까지 이혼만은 안 하려고 했을까, 싶더군요.
아내는 충격을 받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철이 너무 없었다면서, 정말 비참할 정도로 매달리더군요.
그렇게 나오니까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장모님까지 눈물로 매달리시니...
저희는 다시 한 번 노력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둘째가 생겼지요. 그렇게 기다려도 안 생기던 둘째가 말입니다.
하늘의 뜻인가 여기고 저는 진심으로 마음을 다잡았었습니다.
아내도 노력은 했습니다.
둘째 낳고 일년쯤은 그나마 집에 붙어 있더군요.
달라진 모습을 보이겠다는 약속대로, 아내는 술도 줄였고, 씀씀이도 많이 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이 더 행복해지지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집에 들어앉아 있는 아내는, 예전과 달리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분출을 못하고 사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 거겠지요.
저는 아내를 옥죄고 감시하는 못난 남편이 되어버렸고, 부부 사이는 점점 더 나빠져갔습니다.
그러다 작년 초에, 기어이 아내가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언반구 말도 없이 그냥 싸들고 나갔습니다.
처음엔 며칠 있다 들어올 줄 알았고, 들어오면 진짜 이혼해버릴까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가도 소식이 없더군요.
내가 아는 아내 친구들은 소식을 모르구요.
그러다가 얼마 만에 아내가 연락을 취해왔고, 다짜고짜 이혼해달라고 하더군요.
남자가 있다니... 참 기가 막혔습니다.
철모를 때 결혼해서 십오년을 낭비했고, 이제야 진짜 제대로 된 인연을 만났다더군요.
그 말 듣고 그저 멍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따져묻기도 싫었습니다. 분하다는 생각도, 훨씬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더 이상 결혼생활에 미련이 안 남은 상태였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이혼을 결정했고,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것으로 아내와의 질긴 인연이 깨끗이 정리가 됐다면, 그걸로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수학문제처럼 간결하지가 않더군요.
이상한 얘기지만, 아내와 남남이 되고도 일년 가까이 저는 장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유는 애들 때문입니다.
애들한테는 장모님이 엄마 이상이고,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한 보호자이십니다.
특히 큰애는 젖먹이 때부터 장모님이 업어 키우셨기에 정신적으로 애착이 너무 강합니다.
지금 사춘기를 맞은 딸아이가 엄마의 가출에 이어, 부모이혼, 게다가 외할머니하고 생이별까지 해야한다면
어떤 일이 뒤를 이을지 두렵습니다.
딸아이 본인이 그렇게 말합니다. 외할머니 가시는 데로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요.
그리고 겨우 다섯 살 밖에 안 된 둘째놈도 외할머니 손이 필요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퇴근이 늦고 일에 매여 사는 제가 어린 아이를 돌본다는 건 무리였습니다.
믿고 맡길 만한 부모님도 저한테는 안 계시고요.
이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장모님 도움을 받고 있고, 장모님 역시 저희 집을 못 떠나고 계십니다.
(지금 저희 집은 제 명의의 아파트이고, 장모님 댁은 세를 놓은 상태지요)
딸아이는 상황을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지만, 점점 더 외할머니에게 의존하고
아들녀석도 외할머니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저 역시, 앞으로 맞게 될 새로운 상황에 아무런 적응을 못하고 있구요.
한편 장모님은 지난 일년 간 집나간 딸을 욕하고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오셨습니다.
결국 이혼 결심했다는 말 들으시고는 ‘어린 자식 두고 집나간 여편네 두 번 생각 할 것도 없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깟 딸 없는 셈 치면 그만이라고...
물론 속은 말이 아니실테지만요.
지금 저희 집의 상황이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람나 집나간 마누라와 이혼하고도 장모와 함께 살며 *서방으로 불리고 있다니...
이혼도장 찍은 날도 현관문을 열어준 것은 장모님입니다. 물론 말은 안 했지만요.
누구라도 어처구니 없다고 할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가능케하는 현실의 압력이 정말 무서울 따름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이런 삐딱한 모양새로도 한동안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장모님이 술 한 잔 하며 얘기좀 하자고 하시더군요.
식탁 위에 소주잔 따라놓고 장모님한테서 들은 말이 또 한번 저를 기막히게 했습니다.
애들 엄마가 돌아오고 싶어한답니다.
남자가 있다느니, 그런 말은 다 헛소리고 그동안 부산 사는 친구 옷가게에서 일 도와주며 지냈답니다.
성격에 안 맞게 틀어박혀 사는 게 너무 답답해서 우울증에 걸렸었던 거랍니다.
"걔 성격 알잖은가?
애는 착한데 내가 잘못 키워서 애가 단단하지를 못해.
다 내 죄야. 그러니까 날 봐서 한번만 받아주게."
그게 우리 장모님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물론 장모님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어디까지가 아내의 진심이고, 어디서부터가 장모님의 바램인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다만 제가 새삼 확인한 건, 장모님의 속마음입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누구의 장모, 누구의 할머니이기 전에, 못난 딸을 둔 엄마이시네요.
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많이 복잡합니다.
더 이상 아무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럽게 마음이 흔들리는 건 뭘까요?
아무리 부족하고 문제 많은 엄마라도, 애들에게는 엄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더라는 사실을 깨달아서일까요?
1년간 떨어져 지냈다고 십오년간의 마찰과 갈등을 잊은 걸까요?
이러다가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빠져들까봐 두렵기도 합니다.
부부의 인연이라는 거, 맺기도 어렵지만, 끊는 것도 참 힘이 드네요.
맺을 때 잘못 맺은 인연일수록, 끊을 때라도 잘 끊어야 하는 거겠지요.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헝클어진 인연을 풀어나가는 방법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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