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이건희 회장이 돈을 대다가 YS와 감정이 격해지면서 갑자기...”

정장열 부장대우 : 2013.12.16 15:31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16/2013121601907.html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가 없었으면 아마 이어도가 중국에 그냥 넘어갔을 겁니다. 우리가 떼쓸 거리가 전무한 상태에서 뭘 갖고 중국과 거래를 하겠습니까. 공해상에 세워놓았지만 그 기지 덕분에 이어도 주변은 사실상 우리 바다가 된 겁니다.”

[주간조선]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이건희 회장이 돈을 대다가 YS와 감정이 격해지면서 갑자기...”
김시중(81) 전 과학기술처 장관(현 고려대 명예교수)은 최근 중국과 한국의 방공식별구역 확대로 새삼 주목받고 있는 이어도 문제만 나오면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이어도가 사실상 우리 영토임을 웅변하고 있는 이어도 해양과학기지의 산파 역할을 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9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자연계캠퍼스 내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서울센터에서 만난 김 전 장관은 “당초 이어도 기지를 만들 때는 순전히 과학적 필요에 의해 만든 건데 정부가 이어도까지 포함되도록 방공식별구역을 확대해 명실상부한 우리 바다와 하늘이 되니 큰일을 했다는 자부심이 생긴다”고 했다.


김 전 장관에 따르면, 2003년 세워진 이어도 기지는 그야말로 우여곡절의 산물이었다고 한다. 예산 부족 때문에 몇 번의 중단 위기를 겪다가 10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됐다고 한다. “이어도 기지의 아이디어는 내가 과기처 장관이 된 1993년 해양연구소(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초도 순시 때 나왔어요. 그때 책임연구원으로 있던 이동영 박사가 ‘해수면 5m 아래 있는 암초’에 대해 얘기하더군요. 당시 이름은 이어도가 아니라 파랑도였는데 파도가 칠 때만 보이는 이 섬 주변의 어류 생태를 정부가 지원해 한번 조사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퍼뜩 머리를 스친 게 미국 유학 시절 대서양 휴양지에서 본 무인 구조물이었어요. 바다 한가운데 막대기 같은 구조물을 세워놓고 거기서 다이빙을 하면서 즐기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도 바다에 등대 같은 구조물을 세워 놓으면 어떠냐는 생각을 했죠.”


단순한 바다 위 구조물 구상은 금방 과학기지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어도 암초의 토질이 등대를 세울 정도로 단단하고, 특히 이어도가 태풍의 길목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이 이어도에서 제주도까지 오는 데 10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어도에 과학기지를 세우면 이런 대형 태풍을 예보해 재산을 보호할 수 있다고 연구소 측에서 그래요. 이어도 기지가 연구소가 나서서 할 게 아니라 나라가 할 일이라는 생각을 했죠.”


김 전 장관은 이어도 과학기지 구상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국제법적인 측면도 많이 따져봤다고 한다. “유엔해양심판관으로 있던 고려대 법대 박춘호 교수한테 전화를 걸어 이어도 과학기지가 유엔해양법에 저촉되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죠. 한 보름 있다가 연락이 왔는데, 유엔 측 인사들과 상의한 결과 유엔해양법에서는 그런 해상 기지를 오히려 권장한다는 답이었습니다. 암초에 선박이 충돌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해상 안전 측면에서 좋다는 거예요.”


◇ “관할권 다툼 확보하려고 우선 잠수함 관광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다들 ‘돈’ 안 된다고 빠지는 바람에...”


김 전 장관은 “그런 유권 해석을 들은 후에도 일을 단단히 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중국대사관, 일본대사관에 문의하는 절차를 거쳤다”며 “당시 두 대사관 모두 이어도 과학기지가 해상 안전을 위해 좋다는 답을 했다”고 강조했다.


김 전 장관은 “유엔 등에 문의하는 과정에서 이어도가 공해상에 있긴 하지만 기지를 지으면 나중에 관할권 다툼에서 유리하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도는 가장 가까운 유인 섬이 우리나라의 마라도로, 이어도와 마라도의 거리는 140㎞ 정도다. 중국은 가장 가까운 섬이 둥다오로 약 247㎞ 떨어져 있다. 이어도는 해안선으로부터 200해리(370.4㎞)가 인정되는 배타적경제수역(EEZ)을 기준으로 하면 우리나라와 중국의 EEZ 안에 모두 포함된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EEZ가 겹쳐져 있는 특정 지점의 관할권은 국제해양법상 유인 섬에서 누가 가까우냐는 근거리 우선 원칙, 또는 중간선 원칙을 따라야 한다”며 “그럴 경우 이어도는 우리 EEZ 안에 있고 여기에 과학기지 같은 것을 세워 놓으면 나중에라도 우리가 관할권을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국제법상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김 전 장관은 “과기처만 갖고는 힘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국방부 등 관련 8개 부처에 모두 문의해 이어도 과학기지가 ‘필요하다’는 답을 얻었지만 돈을 쥐고 있는 경제기획원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정재석 당시 경제부총리를 찾아가 이어도 기지 얘기를 꺼냈죠. 그런데 이 양반이 얘기를 꺼내니까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과학기술 행정이나 잘하세요. 나라 영토 넓힐 생각 하지 마세요’ 이래요. 결국 돈이 없다는 얘기였죠.”


김 전 장관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정재석 부총리를 게속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다 나온 아이디어가 ‘이어도 관광지’였다. “내가 돈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며 정 부총리에게 제시한 게 잠수함 관광지였습니다. 괌에서 얻은 아이디어인데 이어도에 헬기 이착륙이 가능한 헬리포트를 만들고 그 밑에 소형 잠수함 선착장을 만들어 해저 관광을 시키자는 아이디어였죠. 정 부총리가 ‘좋다’며 ‘관광회사에 시설을 짓도록 해 20년간 운영하고 기부체납토록 하자’고 하더군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현실화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접촉한 관광회사 사장들마다 ‘어렵다’고 손사래를 쳤기 때문이다. “한진관광을 처음 접촉했는데 사장이 만난 지 보름 만에 찾아와 ‘못하겠다’는 거예요. 잠수함도 사야 하고 어쩌고 하면서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삼성그룹 계열의 관광회사와도 접촉했는데 거기도 반응이 똑같았어요.”


유일한 진전은 김 전 장관의 ‘고집’을 높이산 정재석 부총리가 기초조사비 명목으로 2억원을 건네준 것이었다. “자꾸 들볶으니까 그 양반이 어떤 구조물을 지을 수 있는지 기초조사나 하라고 2억원을 주데요. 그래서 그걸 해양연구소에 주고 시뮬레이션을 시켰죠. 과학기자재를 설치할 1, 2층과 헬리포트를 설치할 3층, 그리고 태양전지를 깔 집열판 면적 등을 합쳐서 1157㎡(350평)와 1653㎡(560평) 두 종류의 구조물을 시뮬레이션 해보라고 시켰죠. 각각 비용이 128억원과 220억원이 나오데요. 삼성그룹까지 나가떨어졌는데 이 돈을 어떻게 구합니까. 그래서 일단 손을 놓고 있었죠.”


시간은 이어도 기지 첫 아이디어가 나온 지 7~8개월이 지나 1994년으로 해가 바뀌어 있었다. 1994년 8월 말쯤 느닷없는 ‘반전’이 이뤄졌다. “어느날 삼성중공업 사장이 저를 찾아왔어요. 삼성중공업에서 이어도 관광기지 사업을 하겠다는 겁니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이건희 회장 지시래요. 독일에서 머물다 돌아온 이 회장이 계열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데 삼성관광 사장이 이어도 사업을 포기했다는 보고를 한 겁니다. 이 보고를 받은 이 회장이 소리를 지르며 ‘장관이 개인적으로 필요해서 하는 거냐.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것 아니냐. 삼성관광으로는 안 되고 삼성중공업이 나서서 하라’고 지시를 했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 “김영삼 정권과 삼성그룹 사이에 전운이 감돌면서 또 다른 ‘반전’이 찾아오는 바람에...”


삼성중공업이 나서 사업을 진척시키는 중에 또 다른 ‘반전’이 찾아왔다. 1995년이 되자 삼성그룹과 김영삼 정권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건희 회장이 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재판을 받게 되고, 재벌의 선단식 경영에 대한 김영삼 정부의 개혁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미묘한 정치적 갈등이 생기면서 정부 사이드에서 추진되던 삼성그룹 사업이 다 중단돼 버렸어요. 나도 이미 1993년 12월 장관직을 그만둔 상태였고. 더욱이 1996년이 되면서 해양수산부라는 신생 정부 조직까지 생겨 버렸어요. 당연히 이어도 사업은 공중에 붕 떠버렸죠. 내가 후임 과기처 장관들한테 이어도 사업을 챙기라고 얘기하면 해수부 소관이라고 미루고, 해수부는 또 본래 과기처가 하던 일이라고 미루고. 7~8년을 허송세월 할 수밖에 없었죠.”


김 전 장관은 후임 장관들을 채근하면서 속이 탔다고 한다. 전문가들을 만나면 “이어도 기지가 들어설 곳은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어류의 보고로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곳”이라는 하소연이 들려오기 일쑤였다. 그러던 와중에 다시 정권이 두 번 바뀌어 2002년 12월 노무현 정권이 탄생했다. 김 전 장관은 노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결심’을 했다고 한다. “노무현 당선인이 해수부 장관을 지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양반이 해양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 당시 해수부 장관이 김호식씨였는데 무작정 장관실로 찾아갔어요. 장관들은 전직 장관이 찾아오는 걸 싫어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기획관리실장 배석시켜 달라’고 부탁해 놓고 안면 무릅쓰고 갔죠.”


당시 김 전 장관은 김호식 장관을 만나 “노무현 당선인께서 이어도 기지를 아마 이해하실 것이다. 당선인이 해수부 장관을 지내지 않았느냐. 이건 해양산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학기지다. 정부에서 만들어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예상대로 김호식 장관도 “우리도 조사해 보니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며 긍정적인 답을 했고 만난 지 며칠 후 전화를 걸어와 “하기로 했다”며 재가가 났음을 알려왔다. 아이디어가 나온 지 10년 만에 이어도 기지가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김 전 장관은 이후에도 수시로 이어도 기지 공사의 진전상황을 체크했다고 한다. 구조물을 어떻게 세우는지, 시설은 어떤 걸 갖추는지를 줄곧 관심을 두고 챙겼다고 한다. 이어도 기지의 시공사는 최종적으로 현대중공업이 낙찰받았고 공사비는 186억원으로 결정됐다. 당초 1157㎡ 기준 128억원이던 비용이 허송세월을 하는 동안 그만큼 인상된 것이다. 김 전 장관은 “만약 삼성중공업이 사업을 맡았으면 1995년에 완공했을 것”이라며 “7~8년간 사업이 표류했지만 결국 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 전 장관은 2003년 이어도 기지 준공식 때 참석해 허성관 당시 해수부 장관과 함께 인천에서 원격 준공 버튼을 눌렀다고 한다.


김 전 장관에 따르면, 이어도 기지는 빈틈없이 만들어졌고 실용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기지가 들어선 암초의 토질와 강도를 완벽하게 파악했고, 공법도 거기에 맞도록 신경을 썼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바닷속에 박은 철근은 포항제철에 의뢰해 특수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기지 내의 설비는 거의 대부분 자동화 시스템으로 설계돼 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중국이 이어도가 자신의 섬이라고 떼쓰는 이유는 해저자원이나 풍부한 어류자원뿐 아니라 중국 연안의 심도가 낮아 이어도 인근으로 항로를 확보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작용한다”며 “이미 과학기지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해양법의 원칙과 논리에 따라 당당하게 이어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