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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실학

淸潭 2014. 2. 22. 12:42

인도주의 실학의 완성 다산 정약용

노인에게 한 가지 즐거운 일이 있으니붓가는 대로 쓰면서 미친 말을 따른다.
까다로운 운에 구애될 필요 없고 늦추어서 퇴고할 필요도 없다.
흥이 나면 바로 뜻을 움직이고 뜻이 나타나면 바로 쓴다.
나는 조선사람이어서 조선시를 즐겨 짓는다.
(노인일쾌사육수효향산체 제 5)

 

1. 똘똘한 개구쟁이

  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양수리의 윗쪽 마을 마재, 땅거미가 내려앉는 저녁 무렵이었다. 한 여인이 소년의 손을 질질 끌며 집으로 가고 있었다. 소년을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을 땅에 붙이고 버티면서 동네가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소년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온통 때가 묻어 시커멓고 손은 터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소년을 끌어다. 얼굴을 씻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빠져나와 도망을 쳤다. 여인은 세숫대야를 들고 소년을 쫓았다. 소년은 다시 잡혀 할 수 없이 얼굴을 씻었다. 어찌나 소리를 질러 대는지 동네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이 소년이 바로 조선 후기 최대의 학자인 다산 정약용이고 여인은 그의 형수인 이씨였다. 다산은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형수의 손에서 컸다. 얼마나 때투성이로 장난을 치고 다녔던지 형수 이씨가 대야에 물을 담아 들고 그를 쫓아다녀야 할 지경이었고 억지로 붙잡아 얼굴을 씻기려 하면 이 개구쟁이 시동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생떼를 써 이웃이 창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다산이 어른이 된 뒤에 형수 이씨를 생각하며 쓴 글에 나오는데 그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하기 그지없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아버지 정재원은 여러 고을의 원을 지낸 남인 계열의 청렴한 학자였다.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마을에 묻혀 살았는데 자식들에게도 늘 파당에 가담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어머니 없이 형수 밑에서 큰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총기를 발휘하여 뛰어난 재주와 글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장난은 심했으나 네 살에 천자문을 떼고 일곱 살에는 이미 글을 짓는 숙성한 아이였고 열 살에는 그때까지 지은 글을 모아 '삼미집'이라는 책을 엮을 정도였다. 삼미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눈썹 위에 마마 자국 세 개가 있어 붙은 별호이다. 집안에서는 그 때문에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몹시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의 유명한 학자이던 이서구가 양평에서 한양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는 길에서 열 살 가량의 소년이 나귀 등에 책을 잔뜩 싣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무심히 지나친 그는 열흘 가량 한양에서 머물고 양평으로 돌아오던 길에 다시 그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예전처럼 나귀의 등에 책을 잔뜩 싣고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서구는 이상하게 여겨 소년에게 물었다.
  "열흘 전에 네가 책을 싣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 또 책을 싣고 다니니 너는 책을 읽지도 않고 싣고만 다니느냐?"
  "아닙니다. 다 읽었습니다. 다 읽고 가져다 두려는 것입니다"


  이서구는 깜짝 놀랐다. 나귀의 등에 실린 책을 열흘 만에 다 읽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 나귀의 등에 실은 그 책이 무엇이냐?"
  "강목(원래는 자치통감강목 주자가 지은 역사서)입니다"
  "아니 그렇게 어려운 책을 그 동안에 다 읽었단 말이냐"
  "예 읽어서 다 외웠습니다"


  이서구는 소년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나귀의 등에서 책을 하나 집어들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소년은 척척 대답하였다. 이서구는 그 총기에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소년을 잘 기억해 두었다고 한다. 그때 다산은 강 건너 양평의 권철신(이익의 제자)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다산이 15세 되던 해에 정조가 즉위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한양으로 부름을 받았고 다산도 한양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2. 성호 이익을 사숙하다

  한양으로 이사온 다산은 학식이 높기로 유명한 이가환(이익의 종손)과 매형인 이승훈을 찾아갔다.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들은 당시의 쟁쟁한 실학자들로서 모두 이익의 제자들이었다. 다산을 이들을 통하여 성호학에 접근하였고 이익의 실학 사상을 사숙하였다.


  다산은 그때 처음으로 이익의 문집인 '성호사설'과 '곽우록'을 보았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유학뿐 아니라 천문, 지리, 역사, 문학 등 여러 분야에 관한 지식을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개혁해야 한다고 힘주어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필요한 주장만을 뽑아 간략하게 다시 짠 것이 '곽우록'이었다.


  다신은 두 책을 보고 얻은 바가 많았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은 백성을 위하여 학문하리라고 거듭 다짐하였다. 다산은 뒷날 이들 형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큰 꿈을 갖게 된 것은 성호 선생을 사숙하여 깨우침을 받은 덕분이다.

 

  다산은 또 이벽(이익의 제자 신서파의 선두)에게서 처음으로 서학과 서양의 과학 지식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북학파의 학자들과 달리 청나라에 다녀온 적이 없는 다산은 이벽의 집에서 서양 서적을 접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벽을 찾아가 물을 정도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3. 정조와 다산

  정조와의 첫 만남

  22세가 된 다산은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로 성균관 학생이 되었다. 이때 정조와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호학의 군주였던 정조는 성균관 학생들에게 늘 시험을 보였는데 그때는 학생들에게 '중용'을 내려 주고 강의하게 하였다. 학생들의 강의를 듣던 정조는 옆에 있는 승지(임금의 비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강의하는 선비 가운데 정약용이 으뜸이군. 그의 강의는 명쾌하고 조리가 있어"


  정조는 다산의 강의에 감탄하면서 앞으로 크게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산은 28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사헌부, 사간원 등의 언관이 되어 임금에게 간언하는 소임을 맡았다. 정조가 젊고 재기 있는 그를 늘 곁에 두고 자문을 구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다산이 정조의 부름을 밭고 입궐하니 정조가 그에게 글을 지어 달라 하였다. 이때 지은 글이 특별히 정조의 마음에 들었다. 그가 지은 글을 읽어 나가자 정조는 가지고 있던 부채로 장단을 맞추며 뛰어난 글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국조보감' 한 질과 고급 흰 종이 백 장을 상으로 내렸다.


  그 후에도 또 글을 지어 올렸다. 임금은 더욱 마음에 들어 상을 주려고 이 책  저 책을 물어 보았다. 다신이 모두 가지고 있다고 대답하자 정조는 할 수 없이 계당주라는 술을 한 대접 주었다. 그리하여 군신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여 다산이 거나하게 취하여 대궐을 나올 정도였다. 그들은 잘 통하는 임금과 신하였다.

 

  발명가 정약용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하다.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 세자을 생각하며 늘 마음 아파하였다. 정조는 사도 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1년에 몇 번씩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의 능행길에 올랐다. 그때마다 한강에 배다리가 놓였는데 그 설치를 다산에게 맡기자 훌륭하게 해내었다.


  정조는 사도 세자를 기리기 위하여 수원성을 쌓기로 하였다. 정조는 이 일 역시 다산에게 맡기고 체제공(당시 영의정)에게 총주관하도록 하였다. 다산은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개선할 방법을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모양 있고 든든하게 성을 쌓을 수 있을까 연구하였다.

 

거중기

이미 서양의 수학을 이벽에게서 배운 바 있는 그는 그 지식을 활용하였다. 기하학적 방법으로 거리와 높이를 측량하였고 무거운 돌을 들어올릴 수 있는 거중기와 활차(도르레) 그리고 고륜(바퀴 달린 달구지)을 발명하여 성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였다. 정조는 성을 둘러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거중기를 써서 돈 4만 냥을 절약했구나"
  다산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정조가 영의정 체제공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로 장년층의 이가환과 청년층의 다산을 꼽았다는 말이 날 정도였다. 수원성 공사에 공로가 컸던 다산은 그 해 가을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다시 정조의 명으로 경기도 암행 어사가 되어 연천 방면으로 나가게 되었다.

 

4. 세도 정치와 백성들의 삶

  암행 어사길에 오른 다산은 먼저 당시에 경기도 관찰사로 있던 서용보의 부정을 적발하였다. 서용보는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던 명문 대가 출신이었는데 나라의 곡식을 빌려 주고 백성으로부터 많은 이익을 챙기는 한편 마전 향교의 토지를 가로챌 계획을 그의 문객과 세우고 있었다. 이 일로 서용보는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 뒤로 그는 늘 다산을 적대시하였다.


  경기도 땅을 둘러본 다산은 백성들의 비참한 삶에 고심하였다. 낡아 빠진 게딱지 같은 집, 다 떨어진 옷, 굶기를 밥먹듯이 하는 생활, 관리의 부정과 조정의 부패와 무능 등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다. 그는 탐관 오리를 승냥이와 이리에 비유하면서 백성들의 참상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승냥이여 이리여
  우리 소를 잡아갔으니
  우리 양일랑 그만두어라.
  옷장 안에는 저고리도 없다.
  옷걸이에 치마도 없다.
  항아리에는 남은 장도 없다.
  독에는 남은 쌀도 없다.
  무쇠 솥 가마솥 다 빼앗아가고
  숟가락 젓가락도 모두 가져갔다.
  도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데
  어째서 이다지도 착하지 못한가(시랑)

 

  정조가 죽고 나자 이러한 참상은 더욱 심해졌다. 안동 김씨가 세도를 부리고 있었고 곧이어 풍양 조씨가 세도를 부렸다. 이렇게 19세기는 이 땅에 세도 정치가 들어선 시기였다. 이런저런 문벌가가 번갈아 정권을 잡고 나라와 민중을 휘저었다.


높은 벼슬을 독차지하고 남은 자리도 정당한 방법으로 인재를 뽑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팔았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관리는 그 본전을 뽑기 위해서 더욱더 백성을 길취하였다. 심지어는 벼슬을 이중 삼중으로 매매하여 한 수령이 부임하여 부임 잔치를 벌이는 동안 다음 수령이 부임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수탈을 견디지 못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백성이 많았다. 그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섬으로 들어가 어민이 되어 수탈의 손길을 피하려 하였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산적이 되었다가 화적떼로 뭉쳐 부자나 관가의 재물을 빼앗았고 마침내 곳곳에서 정면으로 관권에 저항하였다. 이른바 민란이다.


다산은 이렇게 탄식한다.

  군자의 학은 몸을 수양하는 것이 반이요 나머지 반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요즈음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들은 이익을 좇는 데만 정신이 팔려 목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찌들고 병들어 줄줄이 구렁텅이에 빠져 죽고 있다. 그런데도 이자들은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제 몸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목민심서 서문)

 

  그가 황해도 곡산의 부사로 있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곡산은 민란이 빈번하여 모두들 부임하기를 꺼리던 곳이었다. 전임 부사가 사건의 발단이었는데 그는 포수들에게 받는 조세 무명베 한 필 대신 돈 900냥을 거두어들였다. 이 고을에 이계심이란 사람은 이 부정을 따지기 위하여 천여 명을 이끌고 관가에 들어갔다. 그러자 부사는 이계심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고 이계심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달아났다.


  다산이 부임하는 길에 이계심이 엎드려 있다가 백성들의 괴로움 10여 가지를 적어 들고 와서 자수하였다. 수행하던 사람들이 잡아 가두도록 권하였으나 다산은 "관가에서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모두들 제 몸을 아껴 아무 말도 못하는 터에 자네같이 의로운 사람은 관가에서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들여야겠네" 하고 놓아 주었고 그의 건의 사항을 해결해 주었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민란을 막을 수 있었으니 다산의 넓은 국량과 목민관다운 면모를 잘 보여 주는 일화라 하겠다. 곡산은 물산이 적은 고을인데도 다산이 부임한 지 3년 만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윤택해지고 관아의 재정도 튼튼해졌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목민심서'를 저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천주교 박해와 유배

  경기도 지방 암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산은 몇 차례에 걸친 천주교 박해에 연루된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천주교도 윤지충이 보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운 사실이 발각되어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다산은 자신이 서학의 책을 읽은 것은 사실이나 서학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그리고 10일간 유배를 당하였다.


  4년 후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잠입하여 포교하다 잡히자 공조 판서였던 이가환이 좌천되고 이승훈은 유배되었다. 다산도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정조의 지극한 총애에 힘입어 지방 한직으로 좌천되는데 그쳤는데 정조의 이러한 총애가 오히려 그를 시새우는 세력을 키워 훗날의 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움직임이 부산해졌고 그 결과로 신유 사옥이 일어났다.

 

이 해에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고 다산의 조카사위인 황사형의 밀서가 발각되었다. 아무리 서학을 신앙하지 않는다고 했다지만 처형된 정약종의 동생이고 이승훈의 처남이며 황사형의 처숙이었던 다산이 무사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더구나 이가환과 다물어 정조의 적대적인 신임을 받던 남인 시파라는 정치적 입장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다.


  이 일로 다산의 집안은 거의 멸문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셋재 형 약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산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0세 였다.


  그리하여 40세 부터 57세까지 18년 간의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귀양살이로 그치지 않았다. 이 유배 시절이야말로 다산의 위대한 사상이 집대성되는 의미 있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5. 유배지에서 완성된 그의 사상

  강진에서 주막 뒷방을 빌어 귀양살이하던 다산은 윤박이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그의 산정이 있는 다산으로 옮겼다. 다산은 그 곳에 다산 서옥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는데 그의 저술이 거의 그 곳에서 이루어졌고 호도 거기에서 따왔다.

 

  유학 사상의 재정립

  다산은 성리학이 당대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크게 반성하였다. 그러면서도 유학의 도를 실학으로 정립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다산은 도학에 머무르지 않았다. 다산은 당시 사람들이 주체성 없이 사모하고 모방하기에 급급하다고 비판하였는데 물론 사모하고 모방한 대상은 유학의 정통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고전적 규범이다.

 

그는 이렇게 주체적인 사상은 모색하지 않고 우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는 태도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허상을 놓고 함께 떠받들고 절하자고 하는 꼴이라고 규탄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단군 시대의 질박한 고풍이 그립다고 하였다.


  다산은 우리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는 민족 문화의 기풍을 계승함으로써 확립할 수 있고 또 자연스럽고 주체적인 사상이야말로 살아 있는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나는 조선 사람이어서 조선시를 즐겨 짓는다"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다산은 학문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의 다섯 학술을 비판하였다. '오학론'이 그것인데 다섯가지 학술이란 성리의 학, 고증의 학, 문장의 학, 과거의 학, 술수의 학이다. 성리의 학은 공연한 시비를 일삼고 헛된 명분만을 숭상하기 때문에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또 고증의 학은 지업적인 것을 풀이하는 데 몰두하기 때문에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과거의 학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기술이기 때문에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문장의 학은 건실한 생활 태도를 해치는 부화한 풍조를 낳으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관심은 자기 시대의 문제에 집약되어 있었다. 그는 송대 이래의 도학을 버리고 선진 유학(공맹의 원시 유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성리학의 논의는 공자의 본마음과 어긋나는 것이니 공자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그는 성리학의 논리와 그 의의를 깊이 이해하면서도 추상적 관념을 저마다 달리 해석하여 사분 오열하는 학풍을 비판하였다. 다산은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이기 논쟁은 세상이 마치도록 서로 다투어도 끝이 없을 것이니 인생에 일이 많은데 그대와 나는 이를 할 겨를이 없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관심은 현실의 문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다산은 천지와 만물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자기 사상의 목표로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늘 자기 시대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특히 '무력한 사람을 도와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측은하게 방황하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려는 뜻'을 실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차별 없는 평화의 세계'를 꿈꿨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소망이 있다면 온 나라 안이 모두 양반이 되는 것이니 곧 온 나라 안에 양반이 없어지는 것이다(여유당전서)

 

  다산은 유학의 본뜻이 '백성을 편히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유학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시경', '춘추', '논어', '대학', '중용', '맹자', '주역', '서경' 등에 대하여 새롭게 치밀하게 연구하여 주석을 달았다. 이는 이전 학자들의 주장을 따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따져 보고 형편에 맞게 연구한 것인데 그 핵심은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자기를 수양하는 것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육경 사서로 자기를 수양하고 1표 2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천하 국가를 위하니 수기 치인의 본말을 갖추었다"고 요약하였다. 원리 추구에 치중하여 이상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 유학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명실 상부한 실용적인 학문으로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주장한 개혁 사상을 보기로 하자.

 

  경세유표

  '경세유표'는 이름 그대로 세상을 경륜하는 데 필요한 제도와 당시의 제도를 개혁할 방도를 밝힌 책이다. 다산은 이 책에서 관리 제도, 행정 제도, 토지 제도, 조세 제도 등 국가 경영을 위한 제도의 큰 줄기를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 다산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구제하는 데에서는 나라의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보다 관리들의 수탈과 아전들의 협잡을 바로잡는 것이 더욱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산은 '경세유표'를 쓰던 붓을 멈추고 지방 행정을 바르게 펴 나라도록 지방 수령들에게 일러 주는 '목민심서'를 먼저 쓰게 된다.


  비록 미완의 책이지만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나라의 제도 가운데 개혁해야 할 부분이 많다면서 먼저 우리 나라의 제도가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많아 우리의 형편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 실정에 맞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략을 보면 이렇다.

  1. 중앙 정부의 기구를 간소하게 고치고 불필요한 관리를 줄일 것
  2. 백성들만 교육할 것이 아니라 관리들도 교육할 것
  3. 관리 등용에서 신분 차별을 철폐할 것
  4. 관리 선발 제도를 간소화하고 선발 인원을 법으로 한정할 것


  5. 벼슬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관리들을 엄중히 감독할 것
  6. 문관과 무관을 차별하지 말고 국가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는 반드시 벼슬을 줄 것
  7. 문란해진 군포 제도를 없애고 옛 조세법에 따라 국가에 대한 백성들의 노동 봉사를 고르게 할 것
  8. 국방력을 강화할 것
  9. 은을 절약하고 해외로 유출되기 않도록 할 것
  10. 향리의 수를 엄격히 제한하고 세습하지 못하도록 할 것


  11. 이용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사람들을 청나라 북경으로 보내어 기술을 배워 오게 할 것

  이처럼 다산은 제도 개선책을 제시하면서 특히 나라 살림을 맡은 호조를 개선하려고 산업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흠흠신서

  이 책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옥사와 관련된 문제들을 다룬 글로서 옥사를 관장하는 관리들로 하여금 공정하게 하여 원한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쓰다가 붓대를 옮겨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목민심서'이다.이 책은 다산이 귀양살이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오기 직전에 완성한 책으로 그의 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그 시대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더듬어 보는 데 가장 귀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심지어 어떤 외국인 학자는 "조선 후기의 정치가 썩은 것은 조선 왕조로 본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다산과 같은 학자가 나온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다산은 어린 시절에 지방 수령이던 아버지글 따라 이곳 저곳 옮겨 살면서 수령의 태도와 농민들의 실정을 보았고 또 암행 어사로 전국을 돌면서 직접 백성들의 참상을 목도하였다. 게다가 유배 시절의 산경험도 있었다. '목민심서'는 그처럼 백성의 살림살이를 직접 보면서 평생을 노심 초사하던 일을 글로 옮긴 것인데 '목민'이라는 것은 '백성을 잘살게 한다'는 것이고 '심서'라는 것은 '직접 목민해 보고 싶으나 실행할 수 없으니 마음으로 한다'는 뜻이다.


  다산은 이 책에서 지방 수령들에게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정치를 바르게 하라고 되풀이하여 당부하면서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몇 가지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는 한턱 내는 등의 비용을 쓰지 말고 현지에 가서도 청렴과 절약의 모범을 보여야 실제로 백성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은 되도록 데려가지 말아야 하며 말을 많이 하지 말고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2. 백성의 세금으로 연회 따위의 놀이를 하지 말고 백성 사랑하기를 자기 아내나 자식처럼 하라. 틈이 있으면 늘 책을 읽도록 하라. 책은 '서경'과 '논어', '중용', '대학'과 송대의 '명신언행록'을 보는 것이 좋다.


  3. 무엇보다 청렴해야 한다. 봉급만으로 생활하고 떠나올 때 남은 돈은 그대로 두고 오라.

  세 번째 문장과 관련하여 다산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땅 속에서 옥을 발견하여 관가로 가서 수령에게 바쳤다.그랬는데 수령은 그 옥을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은 하도 이상해서 "이것은 분명히 보물이오니 받아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수령은 "당신에게는 이 옥이 보물이지만 나에게는 이것을 받지 않는 것이 보물입니다. 내가 이것을 받으면 당신과 내가 동시에 보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며 끝내 옥을 받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 이어서 다산은 돌아갈 때의 짐이 부임할 때의 짐과 같아야 깨끗한 관리라고 덧붙이고 있다.

 

  4. 공과 사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예컨대 아버니나 형 또는 아내나 자식이 임지에 따라가서 관가의 일에 간섭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나랏일을 문란하게 하는 짓이니 부득이하게 같이 가는 경우에는 관가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5. 고관들에게 선물을 하지도 받지도 말아야 한다.

 

  다산을 이런 예를 들었다.

  숙종 때 어떤 나이 든 벼슬아치가 집에 돌아와 아내와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요새 조정의 고관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야기하는 것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일이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보내 온 물건들의 품평회를 하느라 바쁘니 이래서는 나라가 망할 도리밖에 없다"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다산은 그 밖에도 흉년에 대한 대책 법을 집행하는 원칙 등을 상세히 밝혀 놓았는데 그 핵심을 자신이 명을 받아 백성에게 봉사하는 관리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수령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가. 백성이 수령을 위해서 사는가. 백성은 곡식과 베를 바쳐 수령을 섬기고, 또 말을 바치고 따라가서 맞이하고 보내며 고혈을 짜서 수령을 살찌게 하니, 백성이 수령을 위해서 사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원목)

 

  이 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다산이 백성을 가리키는 '민'에 근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만 백성을 불쌍히 여기거나 보살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떳떳한 '나라의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고전적인 민본 사상을 계승한 것이기는 하나 다산은 단지 백성을 휼민하고 애민하면서 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정치 구조나 경제 구조가 백성을 억압하고 수탈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관념적인 덕치가 아닌 근본적인 해혁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다 쓰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 백성이라도 그 혜택을 입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

 

6. 백성과 함게 한 만년

  58세에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온 다산은 '흠흠신서'를 완성하고 우리말을 연구한 '아언각비'를 정리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백성들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또 당시의 위정자들은 그의 개혁안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심지어 '목민심서'를 읽어 주지도 않았다. 다산은 결코 농민들이 이대로 당하기만 하다가 죽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 번도 자신을 참소하는 자들에게 화내지 않고 스스로를 해명하는 데 그쳤던 너그러운 성품의 다산이 회갑을 맞이하여 자찬묘지명을 적으면서 이렇게 분노를 터뜨렸다.

 

  알아 주는 적고 비방하려 드는 자는 많으니 만약 천명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 줌의 불쏘시개로 태워버려도 좋다.

 

  다산은 농사 짓는 사람에게만 토지를 주고 토지 소유를 재한하며 세금은 10분의1로 하자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전론'을 제출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제안을 받아 다산을 다시 등용하려 하였으나 예전에 경기도 관찰사 시절에 다산에게 당한 경험이 있는 서용보(당시의 영의정)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 뒤로 다산은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면서도 늘 농민들과 함께하였다. 다산이 72세 되던 해, 고향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곡물값이 뛰고 인심이 몹시 어지러워졌다. 장사꾼들이 매점 매석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여 사람들은 아우성이었다.

 

그는 이때의 쓰라린 마음을 시로 읊었다. 굶주린 농민들이 어찌 일어날 줄을 모르느냐며 울분을 터뜨린 '저 가문 강변 마을의 봄을 노래한 시' 열 수가 그것이다. 이 시들에서 다산은 72세의 노인이면서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의협심을 보였다. 그것은 오로지 농민을 제 몸처럼 생각하는 깊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산은 그 저술이 무려 300여 권에 이르며 그 학문적 업적은 조선 후기 최대의 학자로 추앙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의 학문은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다산은 주체적이면서도 개방적이었다. 또 현실적이면서도 진보적이었고 합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이었다. 다산은 늘 인간을 깊이 이해하려 애썼고 마음 깊이 신뢰하였다. 그의 학문하는 태도는 구체적이면서도 종합적이었고 따라서 잡다한 지식의 집적에 빠지지않고 통일된 사상 체계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다산은 유학의 도를 지키면서도 실학을 완성하였다. 유교 경전을 창조적 실용적인 학문으로 정립하였다. 삼강 오륜 중에서 오륜은 인정하면서도 군신, 부자, 부부의 종속적 관게 윤리를 담은 삼강을 끝까지 거부하는 입장을 보인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는 수기와 치인을 별개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보았으며 이상을 현실 속에서 현실에 맞게 구현해 보고자 평생을 노력했다. 언제나 현실을 잣대 삼아 이상의 실현을 꿈꾼 것이다. 그의 이상은 모든 백성이 주인 되는 참다운 평화와 평등의 사회였다.


 

다산 정약용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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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재휘애비|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