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인물초대석

孟思誠

淸潭 2013. 6. 30. 10:02

忠孝世業 淸白家聲=孟思誠

 

조선조 초기에 정승을 한 孟思誠[1340~1438]이란 분은 초등 국사서에도 청백리의 표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인데 천하의 효자요,

청백리중 청백리였는데,인품이 어질고 성격이 소탈하여 수많은 일화를 남겨오고 있다.

이 맹사성 정승이 살든집이 바로 충청남도 아산군 배방면 중리에 있는 [孟氏 杏壇]인데,맹사성이 손수심은 은행나무 두그루가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있기 때문에 그리 붙여진 것이다.

樹齡이 무려 6백년 가까이 되었으니,마의태자가 용문산에 오르다가 꽂아둔 지팡이가 변하여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용문사 은행나무보다는 연조가 짧으나,

비바람 세월을 뚫고 오늘에도 의연히 치솟아 있으니 양택으로 누가보아도 길지임을 알수있다.

소백산맥이 흘러오다 북으로 치달려 솟아오른 설화산 아래 진혈에 미좌축향으로 앉았으니 북향이다.

형세로 보면 재주와 덕성을 겸비하고 신선처럼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모양이니,이는 鎭山인 설화산과 안산인 배방산의 형국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지조있고 절개곧으며 풍류를 즐길줄아는 살만한 사대부가 살만한 대명당터다.이 집터는 원래 최영장군이 살든 곳인데 최영은 말년을 비참하게 마감한 고려의 명장이 아닌가?

그는 충직하고 剛勇했으며,청렴으로 일생을 마친 무관중의 무관이였다.

고려 말엽 명나라가 鐵嶺衛[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과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를 철령이라 하는데,이곳 이북의 땅에 직활지를 만들어야 한다는것이니 곧 고려의 영토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를 설치하려고 하자 그는 비분강개하여 오히려 요동까지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72세에 팔도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우군도통사 이 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8천명여 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에서 회군,개성에 돌아와 오히려 쿠테타를 일으키니 그는 결국 비참하게 참수되고 만다.

오늘날로 치면 야전군 사령관이 육군참모총장을 거세한것이니 분명한 하극상이요 국법을 뛰어넘은 것이다.

최영의 斬首 소식이 전해지자 개성 사람들은 물론 ,온나라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고 한다.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대자리[현 고양시]에 있는 그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는다 하여 赤墳이라 한다.

지금은 깨끗이 단장되어 벽제 화장터 가까운 곳에 있으니 누구나 쉽게 가볼수 있다."맹씨행단은 애초에 이러한 인물이 살든 집이였다."

숱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조국의 강토를 지키는데 평생을 바처온 대장군 최영이 맹사성의 활아버지인 맹유에게 물려준 집이니,이곳에 살든 맹씨들 또한 인물됨이 특출하였다.

東甫 맹희도는 고려의 修文殿提學이었고,정몽주의 절친한 친구였다.

맹유의 아들이었는데,24살무렵에 개성에 올라가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든중 온양 자신의 집에서"부친위독"이라는 급한 서신을 받게된다.

부랴부랴 달려와보니 맹유는 빙그레웃으며 시집온 새색시 방으로 들라한다.일이 이렇게 된데에는 며느리의 기막힌 태몽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전설은 이렇다.새 며느리는 어느날 태양이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놀라 일어났다.보통 꿈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시아버지 맹유에게 고하자,맹유는 그즉시 개성에 있는 아들 희도를 불러내린것이다.

그리고 나서 맹사성이 태어났다고 한다.그뒤 공교롭게도 최영의 손녀 사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