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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설운도 한테는 세종문화회관 안 빌려준대요.

淸潭 2013. 4. 20. 12:01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가수 데뷔 30주년 맞는 설운도

 

문갑식 선임기자

 

입력 : 2013.04.20 03:14

'잃어버린 30년' 한곡이… 꿈같은 30년 스타의 문 활짝 열어줬죠
1983년 이산가족 찾기가 은인…한밤중 작사가 불러내 원래 있던 곡 개사
몇 시간만에 24차례 방송되는 등 大히트…예명 설운도는…원래 나운도였는데 나훈아 '짝퉁'느낌 나…
金씨부터 姓을 죽 대입해보고 최종 결정…세종문화회관서 노래 부르게 해주세요…
대관신청 두번 거절당해… 이유 모르겠다…송대관·태진아·장윤정도 다 노래했는데…


	설운도 잃어버린 30년 앨범 재킷사진
곽문희(82)라는 예명(藝名)의 가수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부산시청 공무원이었던 그가 어느 날 점심 먹으러 가는데 노래자랑이 한창이었다. "전부 별로네"하는 마음에 덜컥 마이크를 잡았는데 1등을 했다. 졸지에 부산MBC 전속 가수가 되자 난리가 났다. "무남독녀인 네가 왜 딴따라를…." 1년 만에 꿈을 접은 그는 아들에게 틈만 나면 "내 한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했다. 본명 곽순자의 장남이 곧 이영춘(李英春·55)이다.

열일곱 영춘이 울산 왕(王)다방에 들렀을 때다. 노래자랑이 벌어지고 있는데 가만 보니 신통치 않았다. 대회 끝나길 기다렸다 심사위원인 고(故) 이종건에게 "기회를 달라"고 했더니 몇 살인지 물어보고 고개를 저었다. 떼를 써 노래 몇 곡 부르니 표정이 변하는 것이었다. 주(週)장원, 월(月)장원 거쳐 연말 결선에 나갔다. 그가 홍민의 '석별', 송창식의 '한번만'을 부를 때면 객석에서 난리가 났다. 설운도(雪雲道)가 탄생한 것이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한창일 때다. 저녁 무렵 TV로 그 모습을 보던 그와 매니저가 동시에 무릎을 쳤다. 매니저가 말했다. "네가 준비한 '아버지'라는 노래를 개사(改詞)해보자!" 바뀐 가사가 새벽쯤에 전달됐다. 녹음테이프를 들고 KBS 주조종실로 달려갔다. 이원홍 사장이 듣더니 "당장 틀라"고 했다. 몇 시간 새 스물네 번이나 노래가 나왔다. 지금의 설운도와 기네스 기록에 수록된 '잃어버린 30년'은 그렇게 기적처럼 등장했다.

김태곤이 사준 짜장면 한 그릇

해운대에서 설운도는 남부럽지 않은 초년기를 보냈다. 3남 3녀의 장남에 아버지는 미8군사령관 통역관, 어머니는 부산시청 간호과장이었다. 행복했던 기억이 초등학교 1학년 무렵 끝났다. 아버지의 빚보증 때문이었다.

―인생에서 단맛은 짧고 쓴맛은 길다고 했습니다.

"그 큰 집이 순식간에 날아가더군요. 빨간 딱지가 붙고…. 밑의 여동생이 사망한 것도 그때고요. 미군에게 양담배 사다가 이문 붙여 파는 생활로 연명했습니다."

―공부도 제대로 못 했겠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진학은 했는데 곧바로 가수 생활을 시작했지요."

―어머니의 데뷔와 선생의 데뷔가 닮은꼴입니다.

"그런 걸 데자뷔(기시감·旣視感)라고 한다죠? 평생 자기 한을 풀어달라던 어머니의 바람이 이뤄진 거 아닌가 싶어요."

―어머니가 히트시킨 곡이 있습니까.

"고대원씨란 분하고 옴니버스 앨범을 냈는데 제가 들어도 구성지고 가슴에 와 닿는 목소리였어요. 가수 생활을 중도에 그만두고서도 외로울 때면 노래를 부르셨지요."

―그해 MBC 연말 결선까지 진출해서 곧바로 스타덤에 올랐습니까?

"MBC 노래자랑에서 메달을 모두 3개땄습니다. 그때만 해도 가수가 다 된 것으로 생각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헛바람이 들어간 거였지만. 얼마 동안은 사람들이 알아봐줬지만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가슴에서 화가 치밀어 새벽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까.

"고모할머니가 스카라극장 앞 건물 주인이었던 위일창 선생을 소개해줬어요. 그분이 절 받아주시고 빈방도 내줬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남의 신세를 그리 오래 질 수 없잖아요.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블루웨이'라고 스카라극장 뒤편에 있는 다방 보조로요."

―그때부터 줄곧 다방 보조로 일했죠.

"서너 달 지났는데 주방장이 주인 지갑에 손을 댄 겁니다. 억울하게 공범(共犯)으로 몰려 쫓겨났어요. 다른 다방으로 옮겼습니다."

―가수 되려다 다방만 전전하고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갔다가 친척이 하는 대구 미산정이라는 요정(料亭)에서 '뽀이'를 했어요. 그 뒤엔 대구관광센터라는 호텔 일식부(日食部)에 들어갔고요. 그렇게 헤매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그러지 말고 서울로 올라가 고대원 선생을 만나보라'고요. 다시 서울로 와서 취직한 데가 어딘지 아세요? 명동의 설렁탕집이었습니다."

―가수 되려고 정말 별짓을 다 하셨습니다.

"어렵사리 지인(知人) 소개로 남영동에 있는 '니캉네캉'이란 나이트클럽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주인이 바로 유명한 최정자씨였습니다. 당시 음향을 보던 분이 한상덕씨인데 '니캉네캉'이 망하자 '공부를 더 하자'며 마장동에 있는 스튜디오로 절 데려갔죠. 스튜디오를 그때 처음 본 겁니다."

―가수들도 많이 봤겠습니다.

"김태곤씨가 '망부석'을 녹음하고 있더군요. 그 형이 녹음을 끝내고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해요. 그날 얻어먹은 짜장면 맛을 전 지금도 못 잊겠어요. 태곤이 형과는 지금도 가족처럼 지내는데 제가 그 얘길 하면 후회된다더군요. '그때 난자완스나 탕수육도 시켜줄 걸 그랬다'면서."

―그래서 최정자씨에게 밀린 임금을 받았습니까?

"그분도 사정이 안 좋았고 저도 꼭 받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대신 명동 '유토피아'라는 술집을 소개해줬어요. 거기서도 오디션을 봐 합격했습니다. 옷이 없어 빨간색 빤짝이 양복을 한 벌 빌려 입고 무대에 섰습니다."


	박근혜 당시 후 보의 유세에 참여하는 설운도 사진
설운도는 보수주의자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당시 후 보의 유세에 적극 참가했다.
카바레의 황제가 되다

마장동 스튜디오를 드나드는 가수들은 일류였다. 태진아, 박상규, 장우가 녹음하는 걸 바라보며 설운도는 밥상에 고기반찬 차린 부잣집 아이를 바라보는 가난한 집 아들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럴수록 집념은 더 불탔다.

―나이트클럽 가수가 대단한 겁니까?

"돈을 주고서라도 서려는 사람이 많았지요. 당시 나이트클럽 쇼는 1, 2, 3부로 구성됐습니다. 저는 무명(無名)이었던 현숙, 계은숙, 김연자와 같이 1부에 나섰고 박경희씨 같은 분은 2부나 3부용이었지요. "

―그러다 '숙자매'매니저를 했던 분께 스카우트됐죠.

"자랑은 아닙니다만 제 인기가 그때 대단했어요. 김훈씨의 '나를 두고 아리랑'이 대히트를 할 때였는데 간혹 펑크 내면 그 자리를 제가 대신했어요. '노래 잘한다'는 얘기가 장안의 술집 사장들 사이에서 자자했다니까요."

―서울의 온갖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를 휩쓸고 다닌 게 그때였지요.

"엠파이어, 꽃마차, 뉴브루셀, 유토피아, 관광열차…. 그러다 '저 친구 너무 크더니 건방져졌다'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말하긴 어렵지만 다른 사람 스캔들을 한 번 언급했던 게 퍼지면서 일종의 괘씸죄에 걸린 겁니다. '연예계를 뜨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어렵게 올라선 자리인데 절망했겠습니다.

"잠시 좌절했지만 곧 부산의 밤무대에서도 소문이 났습니다. 서면 무지개 카바레, 코모도호텔 카바레에서 서로 끌어가려고 난리가 났었죠. 군 복무는 그 시절에 마쳤습니다. 육군 7376경비교육단에서 방위로 부식(副食)추진병을 했습니다."

―선생을 강제로 연예계에서 밀어낸 분이 다시 찾으러 왔다면서요.

"세월이 흐르니 오해는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이고, 부산 바닥을 돌며 절 찾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제 감정이 안 풀려 한동안 피해 다니다 재회했습니다."

―그즈음 다시 KBS 신인 탄생 프로그램에 출연했지요?

"요즘 너도나도 하는 경연 프로그램의 원조 같은 게 바로 그 프로그램입니다. 거기서 5주 연속 우승했어요."

―지금의 슈퍼스타K 같은 프로에서 두 차례나 우승한 셈인데 뭔가 달라졌나요?

"'이제는 고생이 끝났다' 싶었는데 웬걸 매니저가 저보다 다른 사람을 더 챙기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드는 겁니다. 밤무대 아닌 TV에 등장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던 시댑니다."

―그룹사운드 '송골매'의 리드싱어 배철수가 밤무대에 다시는 안 서겠다고 마음먹은 게 한 취객(醉客)이 사과를 던지는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휴, 그 정도는 약과죠. 밤무대에 서려면 간도 쓸개도 다 빼놔야 합니다. 제가 딱 한 번 싸웠어요. 술 취한 분이 제가 노래를 부르는데 계속 시비를 거는 겁니다. '아예 상대하지 말자' 하고 고개를 돌리니 약이 올랐는지 무대 위로 올라와 폭행하는 거예요. 그때는 정말 화를 못 참겠더군요."

―그런데 설운도라는 예명은 무슨 뜻입니까.

"예명이 몇 가지 돼요. '이명' '이유림' '나운도(羅雲道)'를 썼는데 너무 가짜 냄새가 나 바꿨어요. 김씨부터 성을 붙여봤죠. 김운도, 박운도, 이운도, 최운도… 이렇게 하다 설씨까지 왔는데 그럴싸한 거예요. 그래서 설운도가 된 거예요."

―'잃어버린 30년'의 원곡(原曲)이 '아버지'였지요.

"'인생길'이라는 레코드에 들어 있는 곡인데 남국인 선생님이 작곡했습니다. TV를 통해 이산가족의 애환을 보며 무릎을 쳤어요. '바로 이거다' 싶었던 거죠. 매니저가 유명한 작사가 박건호 선생을 불렀어요. 그때가 새벽 한 시였습니다. 파자마 차림으로 달려오셨어요."

―작사가가 가수한테 왜 그렇게 벌벌 떤 겁니까.

"매니저가 연예계에서 '주먹'으로 유명했거든요. 그런 사람이 무릎 꿇고 '살려주라'고 하면서 개사를 요청하니 작사가로서도 진땀을 흘릴 일이죠. '잃어버린 30년'은 정말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곡입니다."


	설운도 사진
가수 설운도가 오는 5월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을 갖는다. 기네스 북에 오를 만큼 크게 히트한‘잃어버린 30년’을 부른 1983년을 그는 데뷔 기점으로 삼고 있다. 그 이전까지 그는 다방-설렁탕집-요정 보이로 일했고 밤무대의 황제로 통하기도 했다. / 김연정 객원기자
아침에 일어나니 유명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유명해졌다". 영국 시인(詩人) 바이런이 한 말이다. KBS 신인 탄생 우승자 설운도에게 기회는 1년 만에 찾아왔다. 1983년 전국을 눈물로 뒤덮은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가 잡는다.

―그 뒤 곧바로 레코딩을 했습니까.

"6시간 걸려 노래를 불렀는데도 만족스러운 음악이 안 나오는 거예요. '화장실 다녀와서 딱 한 번만 더 부르자'고 마음먹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뭐에 긁혔는지 손에서 피가 나는 겁니다. 뭔가 좋은 징조였죠. 그걸 KBS로 들고갔는데 몇 시간 만에 스물네 번이나 방송된 겁니다."

―효과가 있었습니까.

"다음 날 아침이 되니 스케줄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습니다. 하도 노래를 급하게 만들었으니 가사를 외웠을 리가 있겠어요? 글씨를 앞에 크게 써놓고 노래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뒤 다시 추락했습니다.

"정말 제 팔자(八字)가 사나운 건지 그해에 10대 가수가 됐는데 다음 해엔 끝없는 나락에 빠졌습니다. 한 번 출연료가 100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떨어졌을 정도니까요. 정말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위기는 어떻게 벗어납니까.

"우울증 증상까지 나타나면서 '한국을 뜨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 고베(神戶)로 갔습니다. 고베가 일본 야쿠자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본산인데 당시 일본 경기가 초호황이었거든요. 야쿠자 중에 재일교포가 많아 향수(鄕愁)를 달래려 제가 노래하는 클럽에 많이 왔습니다."

―건달들에게 맞지는 않았습니까.

"건달들은 시민들은 때리지 않아요. 오히려 통이 컸습니다. '노래 잘한다'며 젓가락에 돈을 꽂아주는데 최하가 10만엔이었습니다. 기분 좋으면 몇 장씩 꽂아주기도 하고요. 거기 3년 있으면서 돈도 많이 벌고 일본 엔카(演歌) 공부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우울증도 사라졌고요."

―3년 만인 1987년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다 보니 한국 사정이 궁금하더군요. 가수들을 보니 '이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트로트의 진수를 보여야겠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귀국하면서부터는 히트곡이 연속해서 나왔습니다."

―당시 히트곡이 '원점' '마음이 울적해서'였는데 둘 다 사연이 있다면서요.

"'원점'은 이호섭씨가 쓴 곡인데 그분의 후암동 월세방을 찾아 '곡 써놓은 것 있느냐'고 공책을 들추다 발견했는데 원래는 '마음이 울적해서'라는 레코드에 수록된 겁니다. 한 아마추어 혼혈(混血) 가수가 그 노래로 전국노래자랑에서 입상했어요. '원점'은 파묻힐 뻔하다가 그분 때문에 히트 친 거죠."

―2011년에 제정된 제1회 한국음악저작권대상에서 '싱어송라이터'상을 받으셨네요, 그것도 공동수상자가 싸이(Psy)네요.

"제가 지금까지 300~400곡 정도 불렀는데 그중 80%가 제가 쓴 겁니다. 다른 가수에서 준 곡이 히트 친 것도 꽤 되고요. 가사는 주로 아내(이수진)가 씁니다."

―같은 싱어송라이터면서 싸이는 월드스타가 됐는데 트로트를 한 게 후회되지 않습니까.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트로트를 예전에 '도롯도' '뽕짝'이라고 부를 만큼 비하했지만 인생이 녹아 있지 않으면 부를 수 없는 장르입니다. 사람들이 나이 들면 트로트를 찾는 게 그 증거죠."

―오는 5월 4일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을 하는데 아무래도 선생의 가수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노래는 '잃어버린 30년'인 모양이죠.

"몇 년 전 임진각에 망향(望鄕)의 노래비가 생겼습니다. 감격스럽기도 하지만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저도 작지만 몫을 한 거 같아 그 곡을 데뷔 연도로 정한 겁니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연예인을 많이 찾지요, 선생도 꽤 불려다녔을 텐데.

"전 보수주의자입니다. 이회창 후보를 도와드렸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김윤옥 여사의 요청으로 함께 유세를 다녔어요. 박근혜 대통령은 MB와의 후보 경선에 져 의기소침해 계실 때 연예인들과 함께 위로해드린 게 계기가 돼 이번 대선(大選) 때 다시 만났습니다. 당선 직후 모임에서 우리 손을 꽉 잡으시며 '정말 감사하다'고 했는데 전 그 진실한 한마디면 다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정치하는 거 아닙니까.

"전 보수 좋아하다 손해 많이 봤어요. 이번 데뷔 30주년 공연 때 오히려 불이익을 받았는데요. 세종문화회관에서 대관(貸館)을 두 번이나 거절당한 게 정치적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송대관, 태진아, 장윤정도 했는데. 문형! 이 얘긴 꼭 써주세요. '박원순 시장님, 나도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 좀 부르게 해주세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