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정과 교정 역임한 한암·만암스님 등 14명
수행력과 지도력 갖춰
종통승계…종단 신성 상징
‘종정’과 ‘교정’을 역임한 한암스님은 경허스님의 선맥을 이은 뒤 오대산에서 좌탈입망할 때까지 27년간 산문출입을 하지 않고 승가오칙(僧伽五則) 등의 가르침으로 후학을 제접한 선승이다.
한영스님은 “교육을 진흥시키는 자는 마땅히 불도(佛道)를 이루리라”라는 서원으로 인재양성에 앞장섰던 선지식이다. 운허스님과 운기스님 등으로 이어진 스님의 강맥은 현재 한국불교 교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을 만큼 교단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만암스님은 선교(禪敎)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도제양성과 인재양성에 매진했다. 왜색불교에 맞서 조선불교의 정체성 확립에 앞장섰으며 종정과 교정을 3차례 역임하며 불교 중흥의 원력을 실천했다.
동산스님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쇠퇴한 한국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정화불사에도 선두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부루나 존자’로 불릴 만큼 설법에도 탁월했다.
석우스님은 불혹(不惑)에 가까운 38세의 나이에 출가했지만 엉덩이 한 곳이 딱딱하게 굳어 있을 만큼 수행 정진은 그 누구보다 치열했던 선지식이다. 수행자의 본분사에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석우스님은 동화사에 금당선원을 열어 납자들을 지도했다.
효봉스님은 평양복심법원 판사로서 첫 번째 사형 선고를 내린 뒤 생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뒤늦게 출가했다. 하지만 엉덩이 살이 헐어 진물이 흐를 만큼 용맹정진해 ‘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을 갖고 있으며 ‘불교정화불사 송(頌)’을 지어 수좌들의 정화불사 동참을 독려했다.
청담스님은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이 있게 한 1등 공신이다. 성철스님 등과 함께 문경 봉암사 결사를 통해 수행풍토를 진작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가 왜색불교를 척결하고 청정비구승단을 이루기 위한 정화불사에 선봉에 나섰다. 정화불사 이후에는 종정과 도총섭 및 총무원장, 중앙종회의장, 룸비니 한국협회 총재, 동국학원 이사장 등의 소임을 맡아 한국불교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 또한 늘 가사를 수하고 육환장을 들고 대중을 맞이한 스님은 평생을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몸소 실천한 ‘수행자의 표상’이었다.
고암스님은 종정을 2차례 역임했지만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양의 미덕을 실천한 ‘자비보살’로 유명하다. 선교율(禪敎律)을 두루 겸비한 스님은 항상 자비의 실천과 계율, 정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수행의 표본을 몸소 보여줬다. 조계종 제3, 4대 종정 뿐만 아니라 해인총림 방장, 대각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후학을 제접했다. 또한 당시 불교계 숙원사업이었던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위해 직접 청와대를 찾아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고 당위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서옹스님은 ‘참사람 결사’로 중생을 제도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1941년 일본 임제대 졸업논문으로 진실자기(眞實自己)를 발표한 이후 평생 수행정진의 화두가 ‘참사람’이었던 스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법회의 자리마다 ‘참사람’을 강조했다. 만암스님의 법맥을 이은 서옹스님은 1996년 고불총림 백양사 초대방장으로 추대돼 임제선맥의 중흥을 발원하며 ‘참사람 결사’를 제창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매진했다.
성철스님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불교계는 물론 우리사회의 지도자이자 어른이었다. 특히 스님은 꼿꼿이 앉은 채 잠을 자고 입도 열지 않는 장좌불와의 고된 수행과 선행(禪行)을 실천했으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등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언설과 일화를 남겼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며 수행가풍을 진작시켰으며 1967년 해인총림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한 뒤 동안거 기간 동안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설했다. 스님은 부처님에 대한 신심의 증표로 3000배의 절을 한 불자에게만 접견을 허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암스님은 한평생 칼날같이 정진한 ‘수행의 사표(師表)’였다. 문경 봉암사 조실로 주석하면서 낙후된 가람을 중창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일반인에게는 산문출입을 금지한 채 용맹정진하며 승풍을 진작하는 조계종립특별선원으로 사격을 변모시켰다. 종단과 종도들의 부름에 응해 총무원장과 원로회의 의장, 종정 등을 역임했지만 스님의 행장에는 ‘안거’와 ‘정진’을 빼면 몇 구절 남는 것이 없을 만큼 평생을 ‘정진일념’으로 보낸 선승이다.
월하스님은 한 평생 빈틈없는 수행과 정진으로 한국불교의 주춧돌과 디딤돌을 놓았던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이다. 스님은 정화불사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와 방장, 조계종 감찰원장, 중앙종회의장, 총무원장, 원로의원, 동국학원 이사장, 종정 등을 역임하며 청정수행가풍을 진작시키고 교단의 뿌리를 튼튼하게 했다.
스님은 1992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집’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무도 모르게 1억5000만원을 흔쾌히 보시한 것이 뒤늦게 알려져 세인을 놀라게 했으며 손수 방청소와 빨래를 하며 끝없는 하심(下心)을 몸소 실천했다.
혜암스님은 출가 후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하며 참선수행에 몰두해온 선승이다. 스님은 선원 대중 스님들에게 항상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적게 먹어라” “안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밖으로 남을 도와라”라고 가르치며 납자로서 철저하게 수행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정법선양을 위한 교화방편으로 1981년 해인사 원당암에 재가불자를 위한 선원을 개원한 뒤 동.하안거와 토요철야법회 등을 통해 선의 대중화와 생활화에도 앞장섰다. 이와 더불어 ‘해인사 대쪽’이라 불릴 만큼 원칙과 소신이 뚜렷해 1994년 종단개혁과 1998년 종단사태를 해결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현 종정 법전스님은 선방 수좌들 사이에서 ‘절구통 수좌’로 불리는 선승이다. 수마(睡魔)를 조복받아 며칠째 한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용맹정진을 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 수좌들이 정말 수마를 조복 받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장군죽비를 들고 지켜봤지만 법전스님은 며칠이 지나도 꿈쩍하지 않아 수좌들이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평생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했다.
해인총림 방장과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제12대 종정을 거쳐 13대 종정을 역임하고 있는 법전스님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바보처럼 꾸준히 가라. 그래야 자신도 살리고 세상도 살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내리며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