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충남예산 수덕사

淸潭 2011. 3. 15. 13:17

일엽스님의 사연을 간직한 충남예산 수덕사

 

충남 예산의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근대에는 경허,만공선사가 한국불교를 다시일으킨 도량으로

한국 선종의 역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장소이며,

일엽스님의 사연을 간직한 절이다   


 

일주문

소전 손재형선생이 쓴 현판이 보인다

 

 


대웅전 : 국보 제 49호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담백한 건축미가 나를 머물게한다




 

수덕여관 :

 

 해방전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수덕여관은  애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그곳에 있다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인물은 많지만

김일엽(스님), 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상여자,

이응로화백.김태신(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 난 사생아)이상 남자다.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모든걸 훌훌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고,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 버리며,

나혜석은 김태신을 잘 돌보고 지내며, 

해강 김규진의 제자인 이응로화백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장소이다.

그들의 사연을 낱낱이 들어 봤었을 초가 지붕의 수덕여관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사연을 전하고 있다.

 

(밥을 먹으러 나왔다가 시간에 쫓겨서 여관사진은 찍지 못했다 )

 

 

 

전    설 :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
       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
       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
       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
       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
       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
       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
       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
       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
       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
       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