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부처님 마음

붓다를 만난 사람들] 9. 사리풋타

淸潭 2010. 9. 1. 15:41

붓다를 만난 사람들] 9. 사리풋타
 
佛法 잘 이해하고 탁월하게 설명했던 지혜제일
기사등록일 [2010년 08월 30일 13:33 월요일]
 

외도 산자야의 제자였다 부처님께 출가
교단 어려울 때마다 지혜로 화합이끌어

 
     삽화=김재일

부처님 당시, 갠지스강 주변 일대는 그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대도시의 번영과 강력한 신흥대국의 출현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기존의 계급제도에서 정점을 차지하고 있던 바라문이라는 사제 대신에 국왕이나 자산가와 같은 새로운 상층계급을 만들어내는 등 인도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들의 정신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직 삶의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가는 주변 환경에 방황하며,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줄 만한 고차원적인 가르침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요구가 반영되어서일까. 반(反)바라문주의를 외치는 사문(沙門)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윤회와 해탈 등에 관해 독자적인 가르침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부처님 역시 사문이었다.

불교문헌에서는 이 무렵 활동하던 사문 가운데 대표적인 6명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른다. 육사외도란 불교에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을 설하는 6명의 외도를 가리키지만, 당시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육사외도 가운데 산자야 벨랏티풋타(Sañjaya Belaṭṭhiputta)라는 사상가가 있었다. 그는 회의론자로 예를 들어, ‘내세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만약 내가 내세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내세는 존재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과 다르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회피했다.

그의 주장은 뱀장어처럼 미끈미끈하여 좀처럼 붙잡을 수 없는 교설이라 하여, 만론(鰻論)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산자야에게는 250여명의 바라문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지식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세가 있는가 없는가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당시의 새로운 사상가들이 즐겨 논한 논제였는데, 사실 이는 그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어찌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가 우스운 것인지도 모른다. 산자야는 이와 같은 애매한 답변 형식을 통해 헛된 논의를 반복하고 있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조소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16세 때 친구 목갈라나와 출가

산자야의 제자 가운데 특히 스승의 총애를 받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사리풋타(Sāriputta). 어머니의 이름이 루파사리(Rūpasārī)였기 때문에 ‘사리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사리풋타라 불렸지만, 때로는 우파팃사(Upatissa)라고도 불렸다. 작은 체구이지만 이목구비가 매우 아름다운 미소년이었다. 그는 라자가하의 북쪽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거부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6세 때 동네 친구인 목갈라나(Moggallāna)와 함께 산자야 밑으로 출가했다.

어느 날 목갈라나와 함께 산정제(山頂祭)를 보러갔다가 ‘이 화려한 축제도 100년 후에는 무엇이 남으리….’하고 문득 무상함을 느껴 친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친구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당시 크게 번영하고 있던 산자야의 교단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누구든지 먼저 깨달음을 얻게 되면 다른 한 사람을 인도해 주자는 약속을 주고받으며 더불어 열심히 수행 정진했다. 그러나 산자야의 교설을 이해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고, 이해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라자가하를 거닐고 있던 사리풋타의 눈에 한 사문의 모습이 들어왔다. 가지런히 가사를 갖추어 입고 단정하게 발우를 들고 있는 그 사문은 걸음걸이에서도 시선에서도 움직임에서도 당당한 위의를 느낄 수 있었다. 사리풋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 세상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리라.” 그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Assaji)비구였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의 대상으로 삼은 5비구 가운데 한 명이다. 앗사지가 식사를 끝내자 사리풋타는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 밑으로 출가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누구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있습니까?” 앗사지는 대답했다. “석가족의 집으로부터 출가한 위대한 수행자입니다. 저는 그 분 밑으로 출가했습니다. 저의 스승은 그 분입니다. 저는 그 분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사리풋타는 또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스승은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설합니까?” “저는 아직 출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르침과 계율을 이제 막 배우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그 분의 가르침을 상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요점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 발생하느니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한다. 모든 법이 소멸하는 것에 관해서도 여래는 또한 그와 같이 설한다.’”

이를 들은 사리풋타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산자야 밑에서 수행을 하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이제야 진정 추구할 만한 길을 찾은 느낌이었다. 사리풋타는 환희했다. 그 길로 달려가 친구 목갈라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부처님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스승인 산자야에게도 함께 갈 것을 권했지만 거부당하고, 결국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는 산자야의 제자 250여명의 바라문과 함께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로 향했다. 제자들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산자야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통분했다고 한다.

한편, 저 멀리서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동료수행자들을 이끌고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기 두 명의 벗이 오고 있구나. 그들은 언제가 내 제자들 가운데서 쌍벽을 이루며 가장 훌륭한 두 제자가 될 것이다.” 부처님 앞에 다가온 두 사람은 부처님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예를 올리며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귀한 분이시여, 저희들은 존사 밑에서 출가하고 싶습니다.” “잘 왔구나, 비구여. 가르침은 잘 설해졌다. 괴로움의 올바른 소멸을 위해 수행하여라.” 부처님의 말씀은 곧 구족계가 되었고, 이렇게 해서 그들은 불교승단의 수행자로 다시 태어났다.

“가르침을 전하는 장군” 칭송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행했고, 점차 부처님의 예언대로 불교교단을 대표하는 수행자가 되어 갔다. 그러나 처음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사리풋타는 매우 온화하고도 순수한 성품의 소유자였기에 다른 비구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놀림을 받는 일도 있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라자가하로부터 사왓티의 기원정사를 향해 가시던 어느 날이었다. 해가 지자 서둘러 비구들이 숙소를 차지하는 바람에 늦게 온 사리풋타는 잘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근처의 한 나무 밑에서 잠을 청했다. 이른 아침 부처님께서 밖으로 나와 기침을 하시자 때마침 저쪽 나무 밑에서도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있는 자는 누구냐?” “부처님, 사리풋타입니다.” “사리풋타냐. 그런데 너는 왜 거기 있느냐?” 사정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을 소집하여 법랍, 즉 출가한 햇수에 따라 와좌처 등을 분배할 것을 제정하셨다고 한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불법을 처음 알려준 앗사지 비구의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하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사리풋타는 죽는 날까지 앗사지가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서는 발을 뻗고 자지 않았다. 이 연유를 잘 모르는 일부 비구들은 외도에서 전향한 사리풋타에 대한 일종의 비아냥으로 그를 방향숭배자라 놀리곤 했지만, 그는 굳이 이유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비구들이 다 남쪽으로 발을 뻗고 자고 있는데 혼자서만 북쪽으로 발을 뻗고 자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다른 수행자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앗사지 비구에 대해 진정 감사의 마음을 느끼고 있던 사리풋타에게 있어 다른 비구들의 조롱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던 것이다.

지혜로운 사리풋타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거론될 만큼 유력한 사람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장군’이라는 말로 칭송될 정도에 이르렀다. 지혜제일로 평가되는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설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이 점은 부처님으로부터도 충분히 평가받았다. 한번은 세라(Sela)라는 바라문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누가 당신의 장군입니까? 스승의 상속자인 제자는 누구입니까? 이 굴려진 법륜을 이어서 굴릴 자는 누구입니까?” “세라여, 내가 굴린 법륜, 무상의 법륜은 사리풋타가 굴린다. 그는 여래를 따라 나타난 사람이니라.” 부처님의 법의 상속자로까지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리풋타에 대한 부처님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운 것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사리풋타는 동료수행자들 사이에서도 점차 존경의 대상이 되어갔다. 그들은 사리풋타에 대해 ‘성내는 일 없고, 욕심도 없으며, 선하고, 스스로를 잘 제어하며, 스승의 칭찬을 받는 선인’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부처님으로부터 최고의 신뢰를 받으면서도 결코 자만하는 일 없이 묵묵히 불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불교교단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평생 노력했던 사리풋타. 데와닷타가 반역을 일으켜 500명의 비구들을 데리고 승단으로부터 떠나갔을 때 그들을 다시 데려온 것도, 부처님이 만년에 병환으로 설법이 어려울 때 대신 설법하도록 의탁 받은 것도, 아난을 부처님의 시자로 삼을 것을 권유한 것도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이자랑 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062호 [2010년 08월 30일 1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