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품 없는 외모마저 넓은 마음으로 극복
부처님께 귀의…‘백성의 어머니’로 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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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김재일 |
코살라국의 수도 사왓티의 한 변두리에 위치한 아름다운 말리화원. 당시 이름난 대부호이자 바라문이었던 야즈냐닷타 소유의 화원으로, 흐드러지게 핀 말리꽃이 바람에 꽃잎을 흩날릴 때면 은은한 향기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낙원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곳에는 말리꽃을 손질하며 화원을 지키는 한 소녀가 있었다.
환상적인 화원의 모습과는 달리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이름은 카필라(Kapila). 야즈냐닷타 소유의 노예였던 그녀는 말리화원의 옥의 티라고 느껴질 정도로 볼품없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노예로 태어나 가진 재산도 권력도 없는데다 타고난 미모도 없는 그야말로 살아가는데 있어 조금이라도 기대어볼 만한 곳이라곤 전혀 없는 처량한 신세였지만 그녀는 항상 간절히 꿈꾸었다.“어떻게 하면 노예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한 여자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른 아침에 도시락을 챙겨 화원으로 향하던 그녀는 도중에 한 사문을 발견했다. 왠지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저 사문에게 이 밥을 보시하면 혹시 그 공덕으로 내게도 무슨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수행자에 대한 보시야말로 큰 공덕을 낳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카필라는 이 선행으로 인해 자신에게도 행운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었던 것이다. 그녀는 노예라는 자신의 신분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사문에게 밥을 건넸다. 사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음식을 받아주었다.
한편 그녀가 말리화원으로 들어갔을 무렵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숲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사슴의 무리를 발견하고 정신없이 뒤를 쫓다 일행과 헤어지게 된 왕은 우연히 말리화원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왕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한눈에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안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웃옷을 한 장 벗어 자리에 깔고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발을 씻으시겠습니까?’라고 물어 그리 하겠노라고 하자 연꽃잎에 물을 담아 와서 발을 씻겨주었다.
또 ‘마실 물을 준비할까요?’라고 물은 후 그리하겠노라고 하자 마실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왕을 편안하게 눕게 한 후 온 몸을 시원하게 안마해 주었다. 길을 잃고 헤매 다니다 지칠 대로 지쳐있던 왕은 피곤이 싹 풀렸다.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모든 것을 알아서 미리 대처해 주는 그 소녀의 현명한 처사에 감탄한 왕은 그녀의 주인인 야즈냐닷타를 불러 고액을 지불한 후 처로 삼겠다며 그녀를 왕궁으로 데려갔다.
왕의 총애에도 항상 겸손
갖가지 장신구와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되어 궁전에 들어선 카필라는 그때서야 자신을 데려온 사람이 파세나디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카필라는 왕의 여자가 되기 위한 예의범절과 교양을 갖추기 위해 여러 가지 교육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말리화원에서 왔다고 하여 말리카(Mallikā)라고 불렀다. 파세나디왕의 총애를 받으며 성숙함을 더해가던 어느 날 말리카는 왕의 500여 명의 여인 가운데 제1부인으로 선발되었다. 다른 여인들에 비해 모든 조건은 뒤떨어졌지만 세심하고도 배려 깊은 말리카의 언행과 배려 깊은 마음씨에 애정을 느낀 왕이 그녀를 선택한 것이었다.
어느 날, 사왓티가 한 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높은 누각에 오른 말리카는 지난날을 회상하다 생각했다.“한낱 노예에 지나지 않던 내가 무슨 업보로 오늘 날 이와 같이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을까? 이는 필시 그 사문에게 밥을 보시한 공덕이리라.” 말리카는 옆에 있던 시녀에게 물었다. “혹시 이러이러한 모습의 사문을 너는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아마 부처님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왕비는 크게 기뻐하며 왕의 허락을 얻은 후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로 향했다.
빛나는 용모, 모든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있는 듯한 평온함, 코끼리왕과도 같은 위엄, 청정무구한 모습…. 바로 자신이 지난 날 밥을 보시했던 그 사문이었다. 안도감과 기쁨을 느끼며 말리카는 부처님께 다가갔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다. “부처님이시여, 같은 여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어떤 여자는 얼굴도 못생기고 가난하며 신분도 천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여자는 얼굴도 예쁘고 재산도 풍부하며 신분도 높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녀에게는 인생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큰 문제이자 의문이었다.
지금은 한 나라의 왕비가 되었으나 한때 그녀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못생긴 여자노예에 불과했다. 말리화원에서 꽃놀이를 즐기는 고귀한 집안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바라보며 카필라는 수도 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무슨 연유로 나는 저 여인들처럼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못하게 태어난 것일까? 나도 저 여인들처럼 아름다운 용모에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지금 정말 행복할텐데….”
부처님은 대답하셨다.“화를 잘 내며 즐겨 사람을 괴롭히고 심한 잔소리나 꾸중을 늘어놓는 여자는 얼굴이 미워지느니라. 욕심이 많아 사문이나 바라문, 가난한 자, 노인 등에게 보시하지 않고 의복이나 음식, 마차, 향화, 장신구 등을 베풀지 않는 여자는 가난해지느니라.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는 여자는 신분이 낮아지느니라.”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해 항상 분노하며 남을 책망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그 감정이 다 드러나기 마련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외적인 아름다움도 정신적인 바른 변화와 실천을 통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또한 보시하지 않는 이는 더욱더 가난해지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는 이는 결코 스스로도 성공할 수 없다고 설하심으로써, 자신밖에 모르는 인색한 사람은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앞으로 진보하는 길을 발견할 수 없음을 가르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말리카는 자신이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또한 고귀하지도 못하게 태어난 것은 전세에 이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앞으로는 성내는 일 없이 널리 베풀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인연공덕의 힘 삶으로 보여줘
“부처님이시여 왕궁에는 왕족 출신의 여자도, 바라문 출신의 여자도, 장자 계급 출신의 여자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들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입장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화내지 않겠습니다. 많이 번뇌하지도 않겠습니다. 이것저것 전해 들어도 집착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본성을 잃지 않고 고집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문과 바라문을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도록 하겠습니다. 질투심을 없애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바라며 공경, 존경, 예배공양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어지는 부처님의 설법을 다 들은 후 말리카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며 평생 우바이로 살아갈 것을 맹세하고 오계를 수지했다. 이후 말리카는 평생 신심 깊은 우바이로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성심성의껏 모셨다.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이간질, 왕의 총애를 차지하려는 여인들의 질투…. 자칫하면 말리카는 그 한 가운데서 오만하고 고집스러우며 신경질적인 여인으로 변해갔을지도 모른다. 최고 권력자인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자만하게 만들 수 있었고, 또한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주위 사람들의 갖가지 아부와 고자질은 그녀의 감정을 항상 동요시켰을 것이다.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여전히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그녀를 속박하는 자신의 출신, 그리고 자신보다 너무나도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의 빛나는 외모…. 이를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열등감도 그녀를 괴롭히는 큰 요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으로서의 삶을 발견한 말리카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현명하게 대처해 나갔다.
한 나라의 왕비인 만큼 말리카의 총명하고도 현명한 처사는 남편 파세나디왕에게도 영향을 미쳐 선정으로 이어지게 했다. 한때 파세나디왕은 주변의 잘못된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대희생제를 하고자 했는데 말리카는 왕의 어리석은 행동을 깨우치며 부처님께 인도했다. 이때 목숨을 구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생명의 어머니, 생명의 은인’이라 칭송했다고 한다. 파세나디왕도 말리카 못지않게 신심 깊은 우바새였으나 국정으로 바빠 부처님을 자주 찾아뵐 수 없었다. 이런 왕을 위해 말리카는 자신이 불법을 배워 틈나는 대로 알려드리겠다고 제안했다.
어느 날 자식을 잃은 사람이 찾아오자 부처님께서는 ‘애정이야말로 괴로움의 원인이니라’고 하는 가르침을 주셨다. 왕에게 이를 전하자 왕은 애정이 어떻게 괴로움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지 처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왕에게 왕비는 알기 쉬운 예를 들며 설명했다. “왕이시여, 만약 제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왕은 어떠시겠습니까?” “너무 슬퍼 괴로움에 몸부림칠 것이다.” “바로 그렇습니다. 왕이 저에 대해 애정이 없다면 슬프거나 괴로울 이유도 없습니다. 애정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도 있는 것입니다.”
혹독한 계급사회에서 노예라는 제일 낮은 신분의 여자로 태어나 한 나라의 왕비에까지 오른 말리카. 부처님께 자신의 끼니를 공양한 인연이 정말 그녀에게 극적인 행운을 가져다주었는가 아닌가는 차치하고라도, 이를 계기로 이루어진 부처님과의 재회를 통해 그녀는 한 여인으로써 나아가 한 나라의 왕비로서 스스로도 행복하고 다른 이도 행복하게 하는 지혜로운 길을 발견했음에 틀림없다.
이토록 아름답고 현명한 말리카이기에 평생 파세나디왕과 국민들의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또한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 후에 조차도 그들은 진정 애통해 했던 것이리라.
이자랑 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060호 [2010년 08월 16일 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