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해외관광지

낙양의 용문석굴

淸潭 2010. 6. 21. 10:57



하남성 (4) - 낙양의 용문석굴

낙양(洛阳)은 ‘천하의 명도(名都)’로 불릴 만큼 유명한 고도(古都)다. 한 국가의 수도가 되기 위해서는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교통이 편리해야 하고 외침을 막는 데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또 산물이 쉽게 집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낙양은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황하가 낙양의 북방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고, 낙하(洛河)와 이하(伊河)가 남쪽 지역을 관통하므로 외침에 대비하고 아울러 수로를 통해 사방으로 뻗어나가기에는 더 없이 좋은 길지다. 또 낙양 서남쪽으로는 복우산맥(伏牛山脈)이 뻗어있고, 동쪽으로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어서 산과 평원에서 나오는 산물들이 낙양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이다.

이런 지리적 장점 덕분에 중국 역사상 13개 왕조가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8개 왕조가 이곳을 제 2의 수도로 삼은 것이다. 역사학자 사마광(司馬光)은 이렇게 읊조렸다.

“그대가 고금의 흥망성쇠를 알고 싶다면, 낙양성에 한 번 가보게나.”


낙양에는 수많은 유적지와 문물들이 산재해 있다. 그 가운데 으뜸은 역시 용문석굴(龍門石窟)인데, 불교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불상들을 통해 서역의 간다라미술이 어떻게 중국에 전래되었으며, 또 그것이 신라의 석굴암으로 어떻게 체현되었는지를 알게 하는 문명 교류사의 귀중한 세계 문화유산인 것이다.

용문은 낙양 시내에서 13㎞ 떨어진 곳에 있다. 야트막한 향산(香山)과 용문산(龍門山) 사이에 이하(伊河)가 흐르고 있는데, 양안(兩岸)의 암벽을 조각하여 만든 것이 바로 용문석굴이다.

 


용문석굴에 현존하는 불감(佛龕)은 2345개이며, 불탑이 70여 좌, 조상(造像)이 근 11만 존(尊)인데, 모두 한 시대에 만든 것들이 아니고 북위(北魏) 태화(太和) 17년(493)부터 시작하여 오랜 세월 동안 조성한 것이다.

그 가운데 백미는 봉선사(奉先寺)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이다. 『하락상도용문지양대노사나불상감기(河洛上都龍門之陽大盧舍那佛龕記)』의 기록에 의하면, 봉선사는 당(唐)나라 황후 무측천(武則天)이 고종 함형(咸亨) 3년(672년)에 지분전(脂粉錢) 2만관(貫)을 희사하여 축조하기 시작했으며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675)에 낙성했다. 오늘날 봉선사의 건물들은 소실되었고 석굴만이 남아 있다.

 

 

 

 

 

 

 

 

 

 

 

 

만오천개의 불상이 있다는 석굴 

좌우측에 토들토들한 것이 전부 작은 불상이다.

 

 

 

 

 

 

 

 

 

 

 

아래 봉선사의 주존(主尊) 노사나불 좌상은 높이 17,14m, 두상은 4m, 귀는 1,9m다. 얼굴은 풍만하고 눈썹은 그믐달 모양이며 눈은 아래를 향해 있고, 꼭 다문 입술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하다. 인자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고 고요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는 세상의 모든 번뇌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 같다.

좌측은 부처님의 제자 가섭(迦葉)이다. 체구는 왜소하게 표현되었으나 세상의 모든 풍파를 한 몸에 겪은 노승의 형상이다. 우측은 부처님의 또 다른 제자, 아난다(阿難陀)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다. 보살, 천왕(天王), 역사(力士)들이 부처님을 호위하며 서 있다. 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상들이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일부가 훼손되었지만,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중생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다.

 

 

좌측 

 

주존(主尊) 노사나불, 측천무후의 미소도 보인다.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유일무후(有一無後)한 여황제이다.

 

우측

 

우측은 이하(伊河) 

 

 

 

 

 

 

 

향산 쪽에서 본 용문석굴

춘추(春秋)를 아는 듯, 이하(伊河)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봉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