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美법무부 민권 담당 차관보 그레이스 정 베커
한국계 미국인으로는 현직 미 연방 정부 내 최고위직인 그레이스 정 베커 법무부 차관보. 그는 소수민족 출신으로서의 성장 배경과 언어 능력이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는 데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그레이스 정 베커 |
“한국계라 오히려 남다른 기회 얻을 수 있었죠”
"전 닭띠예요."
미국에서 공무원을 인터뷰하면서 나이를 비롯한 개인 신상정보를 물어 보는 건 쉽지 않다. 공적 영역과 사생활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그레이스 정 베커 미국 법무부 민권 담당 차관보에게 나이를 물어보면서도 우려가 없지 않았다. 한국계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미국인인데 어떻게 반응할까.
"정중하게 물어봐 줘서 감사합니다. 저는 닭띠 해인 1969년에 뉴욕에서 태어났고 언니 한명 오빠 두 명이 있고, 1994년 결혼해서…."
베커 차관보의 답변은 시원시원했다. 나이와 가족관계 등의 정보를 독자와 공유하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한국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해 줬기 때문이라 짐작됐다.
지난달 16일 미 법무부 민권담당 차관보에 임명된 베커 차관보는 한국계라는 점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소수민족 출신들의 인권 보호에 특히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법률가로 워싱턴에서 평판이 높다.
한국계로선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에서 현직 최고위직인 베커 차관보는 지난주 본보와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한국계 미국인으로 주류사회에서 겪은 도전과 보람에 대해 얘기했다.
한국계 고위 공직자로는 차관보급 예우를 받는 강영우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위원도 있으나 상근직으로는 베커 차관보가 유일하다.
"특히 한국계 미국인들은 연방정부에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방정부는 2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을 필요로 해요. 연방정부 근무는 의미 있고, 흥미 있으며 만족스런 경험과 기회를 제공할 겁니다. 여행 다닐 기회도 있고요…. 관심있는 젊은이들에게 연방정부의 일자리를 안내하는 웹사이트(www.usajobs.gov)에 들어가 볼 것을 권하고 싶어요."
―2002년 한 심포지엄에서 한국계 젊은이들에게 '가방을 싸서 워싱턴으로 오라, 워싱턴에서 만나기를 기다리겠다'며 미국 주류사회에 도전하라고 격려했던 게 인상적이다. 당시 강조한 워싱턴은 어떤 의미인가.
"누구나 집, 가족과 (지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일을 찾기 쉽지요. 사실 저도 대학 시절엔 졸업 후엔 부모님이 계시는 뉴욕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 제가 워싱턴에서 법과대학원에 다니면서 연방정부에 기회가 많이 열려 있음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베커 차관보는 2002년 심포지엄 당시 "당신이 정말로 미국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미국의 '매니지먼트'에 참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미 정부내에는 한국계 미국인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베커 차관보는 2000~2001년 미 연방정부의 노근리 조사단의 특별 자문관으로 활동한 경험을 강조했다.
"당시 제 한국어와 법률 지식을 사용할 수 있었고 많은 코리언아메리칸(한국계 미국인) 그룹과 교류할 수 있었어요."
베커 차관보는 노근리 조사단에 참가한 경위와 소감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AP 통신의 기사를 읽을때) 처음 느낌은 '내가 평생을 살아온 이 나라(미국)가 어떻게 이렇게 국민을 배신할 수 있을까'였어요. 그러나 계속 읽다 보니 북한 군인들이 민간인으로 변장해 미군을 공격했음도 알게 됐어요. 결코 단순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제가 조사단에 참가하게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친구가 e메일로 그런 자리의 기회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비록 조사단에서 제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이었지만 당시 그 일을 하면서 법률가로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제 존재의 중요성도 깨달았어요. 그 전에는 그저 최고의 법률가가 되는 데만 집중했지요. 매일 매일의 일에만 매달려 있었고 큰 그림을 보려고는 하지 않았죠. 그러나 노근리 일을 하면서 공동체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것에 대한 놀라운 만족감을 발견했어요. 당시 조사단의 보고서는 한국정부, 노근리 주민들, 미군 참전용사들, 한국군 참전용사들, 한국계 미국인 등에게 엄청난 중요성을 가졌지요."
―소수계 출신으로 여성이란 장벽이 없지 않았을 텐데….
"자신감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인종적, 민족적 배경과 성별이 법률가로서 활동하는 데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고 더욱 자신감을 지니려 노력했어요. 사실 제겐 한국계라는 점이 만약 백인이었다면 갖지 못했을 독특한 기회를 줬어요. 한국계란 게 항상 자랑스러웠어요. 민권국에서 일하면서도 한국계로서의 경험이 다양한 출신 배경의 시민들을 돕는 데 도움이 됐어요. 특히 피해자가 한국인이거나 한국계일 경우 특별한 통찰이 가능했지요."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향해 달려오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여러 명의 멘토(조언자)가 있었지만 부모님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두 분 모두 정말 열심히 일하셨어요.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과 열린 기회를 주기 위해 그분들이 한 희생에 한없이 감사해요."
베커 차관보의 부모는 뉴욕 시 맨해튼에서 C백화점을 운영한다. 하지만 대형 백화점이 아니라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옷 등을 파는 가게로 규모가 크지는 않다. 겸손하고 한인 커뮤니티에 기여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란 평판을 받고 있다는게 주변 한인들의 전언이다.
―민권국 검사를 지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민권 담당 검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민권검사로 커리어를 시작한 건 아니에요. 판사실의 1년짜리 서기로 커리어를 시작했어요. 초기엔 형사국에서 마약 사건을 다뤘고 여러 정부 부서와 민간 로펌을 포함해 10년간 여러 곳에서 경험을 쌓은 뒤 민권국으로 왔어요. 친구인 완 킴(한국명 김완주) 씨가 민권국 책임자였던 덕분이지요. 그가 내게 귀중한 기회를 줬어요. 그의 지원과 격려가 제겐 큰 힘이 됐습니다."
―연방정부에서 일하면 돈은 별로 벌지 못하는데 후회는 없는지.
"전혀요. 10세, 7세인 두 아이에겐 충분한 음식이 있고 편안한 집과 옷이 있어요. 장난감은 너무 많은 것 같고. 솔직히 민간 부문에서 일하는 남편을 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집에서 배웠고, 한국인 손님이 많은 부모님 가게 일을 도우면서도 배웠어요. 1986년에 친구가 88 서울 올림픽 자원봉사를 지원했다는 말을 듣고 비록 한국말이 서툴지만 저도 지원했어요. 이화여대에서 여름방학 두 달간 한국말을 배웠고 1988년엔 휴학을 하고 두 달간 올림픽선수촌에서 캐나다와 수리남 대표팀 통역을 했어요."
"갈비를 비롯해 한국 요리를 조금은 할 줄 알지만 요리 보다는 먹는데 훨씬 유능하다"는 베커 차관보는 "제주도에 두 번 갔는데 지금까지 가 본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였다. 부산과 설악산을 보기 위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레이스 정 베커 약력: 1969년 뉴욕 출생.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조지타운대 법과대학원 우등 졸업. 워싱턴 연방고등법원 서기로 시작해 법무부 부차관보를 거쳐 인신매매, 경찰의 인권 침해, 각종 차별과 편견에 따른 범죄, 재소자 권리 보호 등을 총괄하는 직원 300명 규모의 민권국(局) 총책임자에 올랐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워싱턴=김승련특파원 srkim@donga.com
:그레이스 정 베커:
△1969년 뉴욕 출생.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조지타운대 법과대학원 우등 졸업. △워싱턴 연방고등법원 서기로 시작해 법무부 부차관보를 거쳐 인신매매, 경찰의 인권 침해, 각종 차별과 편견에 따른 범죄, 재소자 권리 보호 등을 총괄하는 직원 300명 규모의 민권국(局) 총책임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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