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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고전범재판소 / 권오곤 재판관

淸潭 2010. 2. 8. 16:38

[초대석]국제유고전범재판소 권오곤 재판관




부활절 휴가에 짬을 내 일시 귀국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권오곤 재판관을 25일 국회에서 만났다. 전쟁범죄로 기소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 등의 주심 재판관인 그는 ‘세계의 정의’를 심판하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 위해 이날 ICTY가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돌아갔다. 이종승 기자

《가톨릭 사제복을 연상시키는 붉은 법복. 동시통역 음성이 쏟아지는 헤드폰. 법정 곳곳의 심리과정을 생중계하는 7대의 카메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권오곤(權五坤·53) 재판관은 4년간 이런 풍경 속에서 생활했다.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 등 전쟁범죄로 기소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을 재판하기 위해서였다. ‘발칸(반도)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었던 밀로셰비치는 권 재판관이 소속된 3인의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밀로셰비치가 올해 3월 감옥에서 돌연 사망한 뒤 재판은 중단된 상태. 이달 중순 부활절 휴가를 이용해 대법원 세미나 참석차 일시 귀국한 권 재판관을 25일 국회에서 만났다. 밀로셰비치의 돌연사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재판관들이 모두 쇼크를 받았습니다. 저도 큰 충격으로 한 일주일은 멍하니 정신을 못 차렸어요. 이렇게 중요한 사건 판결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정말 안타깝습니다.”

일각에서 독살설을 제기하지만 그는 “사인(死因)이 자연 심근경색”이라고 잘라 말했다.

“고혈압 약을 처방하는데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검사를 해 봤더니 나병과 결핵 치료에 쓰이는 항생제가 발견된 거예요. 그래서 독살설이 나왔지만 이는 밀로셰비치가 변호사에게서 약품을 받아 스스로 복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그는 방대한 자료 검토와 증언 청취 등으로 재판이 길어진 점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10년간 이어진 코소보전쟁, 크로아티아전쟁, 보스니아전쟁에 개입했던 밀로셰비치에 대한 기소 내용은 무려 66건에 이른다.

“피고인 사망 후 확인해 보니까 사실 여부부터 따져야 할 쟁점만 2000건이 넘더군요. 지금까지 법정에 나온 증인도 360명이나 돼요. 누적된 기록은 5만 쪽이고….”

10억 달러에 이르는 예산을 전범 재판에 썼으면서도 단죄를 못 하고 되레 반박 기회만 줬다는 비판도 나온다.

“밀로셰비치는 생중계되는 법정을 자신의 정치적인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어요. 자신은 평화를 지키는 투사였고 재판은 자신을 죽이려는 영미권의 음모라고 주장했죠. 그의 전략은 세르비아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당선될 정도로 효과가 있었어요.”

권 재판관은 밀로셰비치를 “똑똑하고 당당했으며, 고집스럽고 독재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는 법정에서 농담도 잘했고 셰익스피어의 문구를 인용해 자신을 변론하는 ‘학식’을 과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밀로셰비치를 상대로 한 재판은 굉장한 인내심과 집중력을 요구했다. 권 재판관은 매일 점심 부인이 싸 주는 도시락을 먹으면서 재판 기록에 파묻혔다. 비영어권 판사로서의 ‘영어 피로감’도 적지 않았다. 특히 따발총처럼 퍼붓는 동시통역은 큰 스트레스였다.

“국제 재판은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절차와 방식이 지독할 정도로 철저합니다. 판결문도 얼마나 자세하게 적는지 몰라요. 판사가 좀 졸았다며 피고인이 소송을 내는 바람에 문제가 된 시간대의 재판 장면을 녹화한 40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모두 돌려 본 적도 있어요. 재판 도중 판사가 바뀌면 모든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원칙이고요.”

권 재판관은 국제 재판에서 체험한 ‘공정성’을 한국의 상황과 비교했다.

“판사가 법정 바깥에서 사건 당사자나 변호사를 만나는 ‘소정(所定) 외 변론’이 한국에 얼마나 많습니까. 외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전관예우가 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문제죠.”

그는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범죄 사실만 간략하게 써넣는 한국 재판의 판결문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무죄라고 주장하는 피고인들에게 ‘왜 당신이 유죄인지’를 세세히 설명해 주는 게 필요해요. 유죄 선고를 받은 빌랴나 플라브시치 세르비아공화국 여성 대통령의 경우 71세 고령이라는 점을 양형 참작 사유에 포함시킬 것인지를 논하는 판결문만 다섯 쪽이나 됐어요.”

2004년 말 재선된 권 재판관은 2009년 임기가 끝날 때까지 영국인, 자메이카인 판사와 함께 발칸반도의 전쟁범죄와 관련해 아직 남은 피고인 45명에 대한 1심 재판을 맡는다.

권 재판관은 “밀로셰비치는 사망했지만 지금까지 누적된 기록은 다른 국제 재판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며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재판에 참여한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