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만해 ‘불교유신론’은 혁명적
사부대중공동체 확립 될 때까진 진행형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기존의 체제와 조화를 이루면서 부분적이고 한정된 범위에서의 변혁을 꾀하는 개혁은 지속적으로 시도돼 왔다. 그러한 개혁은 불교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시도됐고,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며 변화를 주장한 개혁론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한국불교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때는 고려에 이르러서다. 삼국시대는 아직 불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시기였기에 개혁론이 불거질만한 큰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사정이 달랐다. 왕권에 빌붙어 세력을 키워 가는 권력지향적 승려나 재물을 축적하는 등 본분을 망각한 승려가 적지 않았다. 그로 인해 배를 주리며 살아가는 일반백성의 원성은 물론, 기득권 세력 역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불교 내부에서도 새로운 종파가 지속적으로 생겨났고, 이들은 서로를 인정하기보다 불신하고 반목하기에 바빴다.
이때 고려불교의 위기상황을 직감하고 종파간 통합을 추진하고 나선 인물이 균여(均如·923~973)다. 불교 교리를 담은 향가를 지어 대중에 보급함으로써 불교에 친근해지도록 힘썼던 그는 불교 제 종파의 통합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관혜가 이끄는 남악파와 희랑의 북악파를 통합하기 위해 큰 사찰의 승려들을 찾아가 설득하는 한편, 민간의 재가불자들을 찾아가 법을 설하는 것으로 종파간 분쟁을 종식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개혁적 모습은 없었다.
균여 이후 보다 적극적으로 불교의 변화를 요구하며 앞장선 인물이 보조지눌(1158~1210)이다. 보조는 1188년 지금의 팔공산 거조사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고 불교 쇄신운동에 나섰다. 이때 보조가 추진한 정혜결사(定慧結社)는 당시 세속화되고 미신화 된 호국기복불교와 우상불교를 정법불교로 복귀시키는 불교쇄신 운동이었다. 또한 명리(名利)를 위해 도구화되고 있는 불교를 수행불교로 재건하는 운동이기도 했다. 따라서 정혜결사는 곧 불교개혁에 다름아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친일 권상로도 불교개혁론 제기
이어 고려말 등장한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정치개혁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그는 부패한 사회제도를 개혁하는데 주력했음에도, 훗날 여자와 돈에 관련한 추문이 이어지면서 결국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역공을 당해 축출되고 말았다. 또한 신돈은 정치는 물론 토지에 이르기까지 사회제도 개혁에 주력했으면서도 불교개혁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세상을 바꿔보고자 한 개혁승이었을지언정 불교개혁을 추진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불교개혁론이 본격적으로 주창된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다. 이때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개혁론이 바로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이다.
만해는 이회광의 매종사건에 맞서 박한영 등과 함께 송광사·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며 임제종 운동을 펼쳤고, 1913년 35세의 나이로 불교의 개혁안을 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했다.
만해는 서론과 결론을 포함해 모두 17장으로 구성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개혁의 의의와 방법, 개혁주체의 확립, 대중화시대를 여는 포교방법, 승려의 사회적 위상 확립, 불교계의 효율적 통치, 그리고 실천이념을 제시하는 등 불교계 전반의 변화 필요성을 제기했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우선 불교가 미신이나 불합리한 과거의 관습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파사현정의 가장 큰 걸림돌로 수구파를 지적했다.
또한 개혁 주체의 확립은 승려교육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 중심은 선법(禪法)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력수행을 기반으로 한 포교방법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승려의 생산성 있는 활동을 강조했다.
결국 당시 불교계의 모든 면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었다. 따라서 보수적인 불교계를 향한 만해의 이같은 주장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이 가장 강하게 어필되기는 했으나, 불교개혁을 주장한 이들은 또 있었다. 훗날 친일파로 지탄을 받은 인물 중 권상로는 만해보다 앞서서 불교개혁론을 활자화하기도 했다. 권상로는 1912년 4월부터 1913년 7월까지 「조선불교월보」에 불교개혁론을 연재했다.
권상로의 불교개혁론은 크게 4가지다. 첫 번째가 심지(心地)의 개혁으로 불교인들의 정신자세에 대한 개혁을 역설했다. 두 번째는 단체의 개혁, 세 번째는 재단의 개혁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가 교육개혁으로, 권상로 역시 승려교육의 시급함을 강조하면서 불교교세의 확장과 사회적 역할의 출발을 교육에서 찾고 있었다.
권상로의 개혁론은 이처럼 만해의 유신론과 큰 틀에서 비슷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단체의 개혁 부분에 있어서는 수구파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 통합을 주장하고 있어 혁명적이기까지 했던 만해의 유신론과는 차이가 있다.
만해와 권상로에 이어 김법린도 불교혁신론을 강조했다. 김법린은 월간 잡지 「불교」에 게재한 글을 통해 불교개혁 방향을 크게 불교와 정치의 분립, 불교대중화, 불교의 농촌포교로 정리했다. 김법린이 말하는 정교분립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조선불교의 통제와 간섭을 없애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대중화와 관련해서는 1929년 「일광」지에 “산사로부터 도시로, 승려본위로부터 신자본위로, 은둔적·독선적 불교로부터 사회적·경제적 불교로 바꾸는 것이 현재 조선불교 갱신운동의 당면과제 중 하나다”라고 써서 그 뜻을 설명했다. 그리고 농촌교화와 관련해서는 농촌의 실제 정세를 조사하고 경제적·문화적 수준에 적응한 교화방법을 연구하고, 농촌포교에 적절한 인재를 양성하며, 조직적인 실시계획을 확립해야 한다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영재, 조선일보에 혁신론 연재
이어 이영재는 일본대학 종교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22년 11월 22일부터 12월 30일까지 모두 27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한 글에서 ‘조선불교혁신론’을 주장했다.
불교의 개혁, 법국의 건설, 당면과업으로 나눠 불교혁신론을 주장한 이영재는 이 논문에서 “오늘날 불교는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구렁텅이에 빠져 종교적 기능과 활동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승려는 줄어들고 사원은 피폐하여 사회에서 불교의 존재가치는 고사하고 존재 사실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조조차 없는 승려는 오히려 권세와 명리에 눈이 어두워 서로 반목하고 질투하여 멸망의 불구덩이에 함께 빠져드니 아무리 말법시대라고는 하나 불교의 쇠퇴가 오늘에서 더할 여지가 있으랴”라고 통탄했다.
그리고 “사찰령에 근거한 본말제도는 영락하나마 한 덩어리가 되었던 불교를 도리어 30개로 분할하였으며, 쇠약하나마 협의적이었던 것을 본말관계로 말미암아 도리어 분규케 하였으며, 미미하나마 공화적이었던 교정을 도리어 본산 주지의 전제로 만들어버렸다”면서 본말사제도의 타파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그 대안으로 사찰령 폐지운동, 말사 주지의 단결, 전체 불교도의 단합을 제시하며 조선불교의 혁신을 역설했다.
백용성의 대각교운동 역시 불교개혁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백용성은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과 중생구제와는 동떨어진 삶이 불교 존립마저 위태롭게 한다고 판단, 대각교운동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사찰의 경제적 자립, 교육체계 개혁, 자주적 불교의 건립, 한문불전의 국문 번역 필요성을 역설하고 스스로 실천운동을 펼쳤다. 같은 시기 ‘자선자수(自禪自修) 자력자식(自力自食)’을 주장했던 백학명의 ‘반선반농운동’ 역시 불교계 혁신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또 한사람, 박한영이 불교유신운동을 펼쳤다. 만해와 함께 임제종운동을 펼치며 조선 선종의 정체성 회복운동에 나섰던 박한영은 1913년 「조선불교월보」를 계승한 「해동불교」를 창간하면서 “침체된 불교를 진흥시키고 대중을 계몽하는 것이 이 시대의 사명으로 여겨 잡지를 간행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유신운동을 펼쳤다.
그는 무엇보다 교육을 통한 불교유신의 필요성을 절감, 스스로 전통교육기관인 강원과 근대 교육기관 명진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강사가 되어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일제강점기 본격적으로 나타난 불교개혁론은 이처럼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 승려 및 교육의 개혁,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경제적 자립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백용성·박한영도 개혁운동 참여
불교계 안에서의 내부 개혁론은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 직후의 불교혁신운동, 50~60년대 정화운동, 80년대 민중불교운동, 94년 종단개혁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불교혁신운동은 혁신세력이 당면 목표를 자주불교, 민중불교, 민족불교 건설로 설정했음에도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물론 분단과 전쟁이라는 외적 요소까지 겹치면서 성공하지 못했다.
또 정화운동은 비구 측이 왜색불교 청산과 청정수행가풍 확립이라는 명분을 들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유시를 이용함으로써 큰 혼란을 겪게 됐고, 결국 인적 청산과 이권다툼으로 변질되면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는데 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어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은 호국불교 및 어용불교를 민족불교·민중불교로 전환하려는 목표를 세웠으나 크게 진전하지 못하고 불교의 사회참여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94년 종단개혁운동은 사부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출범한 개혁종단이 문중에 의해 형성된 종단 내 불평등구조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아직까지 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따라서 불교개혁론은 사부대중 공동체의 본모습을 찾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끊임없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1028호 [2009년 12월 22일 0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