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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윤용규 감독이 제작한 최초의 불교영화 ‘마음의 고향’중 한장면. |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루이 뤼미에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처음으로 공개한데 이어 1896년 3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뤼미에르 공장의 점심시간’ 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했다. ‘영화’가 탄생한 순간이다. 영화는 이처럼 세상 빛을 본지 불과 한 세기를 조금 넘겼을 뿐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923년에 첫 번째 작품이 제작됐다.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가 그 주인공. 이어 1926년 제작된 나운규의 ‘아리랑’은 폭넓은 사랑과 관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우리나라 영화는 몇몇 감독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됐을 뿐 크게 발전하지 못하다가 1960년대 들어서야 전성기를 맞게 됐다. 그리고 오늘날 영화 한편에 1000만 명의 관객이 몰리는 상황을 맞으면서 ‘대박’이니 ‘흥행대성공’이니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산업화·상업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불교를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한 불교영화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불교영화의 효시를 이루는 작품은 1949년 윤용규 감독이 제작한 ‘마음의 고향’이다.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원작으로 한 ‘마음의 고향’은 모성에 목말라 하는 동자승의 심리를 묘사하는 한편 이 동자승과 주지 스님과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두 번째는 1952년 제작 ‘성불사’
이 작품은 또 사실적인 면과 함께 고즈넉한 사찰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서정적인 면을 조화롭게 묘사해 오늘날까지도 수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때문에 당시 제1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이 영화에서 명문가의 미망인 역을 맡아 연기한 여배우 최은희는 단아하고 고전적인 이미지를 선보여 대중들에게 한국적 여인상으로 각인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마음의 고향’은 53년의 세월이 흐른 2002년에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져 ‘동승’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면서 다시 한번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1949년 작 ‘마음의 고향’과 2002년 작 ‘동승’은 또 영화의 배경을 같은 봉정사로 택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대중들은 두 작품을 통해 50년 넘는 세월의 간극을 살펴볼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감상에 젖거나 감동을 받기도 했다. 봉정사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촬영무대이기도 했다.
불교영화는 ‘마음의 고향’ 이후 지속적으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50여 편 가까이 선보이는 동안, 시대 흐름에 따라 그 면면을 달리하면서 불교영화 속에 당대의 사회상이 투영되기도 했다.
‘마음의 고향’에 이은 두 번째 불교영화는 1952년 제작된 윤봉춘 감독의 ‘성불사’다. 이 작품은 징병을 기피한 주인공이 절에 숨어살다가 주지 스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모든 것을 뉘우치고 자진해서 입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국방부 우수영화상을 받으면서 시대상을 반영한 일종의 계몽영화로 분류되고 있다.
이어 불교영화의 지평을 넓힌 인물로 평가받는 신상옥 감독이 1955년 이광수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꿈’과 1957년 현진건의 원작을 영화화한 ‘무영탑’ 등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리고 1958년 양주남 감독이 강노향 원작을 영화로 제작한 ‘종각’이 선보였다. ‘종각’은 비극적인 생의 굴레를 형상화시킨 작품으로, 오묘한 연기(緣起)의 세계관이 화면 속에 녹아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1949년 ‘마음의 고향’ 이후 1958년까지 10년 동안 제작된 불교영화는 5편에 불과했으나, 작품성 면에서는 어떤 영화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신상옥 감독의 ‘꿈’과 양주남 감독의 ‘종각’은 각각 베니스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될 정도로 그 완성도가 높았다. 이와 관련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신광철 교수는 「한국 불교영화의 회고와 전망」에서 “이 시기 불교영화의 세계무대 진출은 한국영화의 경향을 세계 영화계에 알리는 계기를 이루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1950년대 계몽영화 ‘성불사’에 이어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선동적 요소가 다분한 불교영화가 상당수 제작됐다. 이 역시 군사정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고승들의 행적이나 경전의 재현 또는 구전하는 불교소재의 전설을 다룬 작품들이 주류를 이뤘고, 여기에 국난극복의 상황에서 활약한 고승들의 이야기를 부각시킴으로써 일반 대중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선동적 요소가 가미됐다.
1961년 홍성기 감독이 제작한 ‘에밀레종’을 시작으로 1962년에는 장일호 감독의 ‘원효대사’, 이용민 감독의 ‘지옥문’, 김승옥 감독의 ‘이차돈’ 등 세 편의 불교영화가 동시에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매년 한 편씩의 불교영화가 제작되다시피 해 1960년대에만 10편의 불교영화가 상영됐다.
‘만다라’는 구도자 내면 다룬 수작
이 가운데 1964년 장일호 감독이 만든 ‘석가모니’는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영상화한 가운데 진한 가족애를 표출해 관심을 받았다. 출가한 남편을 위해 음식과 옷을 보내는 아내의 모습, 그리고 성불하여 세존이 된 아들을 보고싶어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다. ‘석가모니’가 한국적 정서와 제작방식으로 만든 불교영화의 전형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1970년대 역시 1970년 김화랑 감독의 ‘성불사의 밤’을 시작으로 1979년 이영우 감독의 ‘사문의 승객’까지 모두 10편의 불교영화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가장 눈길을 끈 작품은 단연 1974년 김기영 감독이 제작한 ‘파계’였다.
출가자의 파계상을 다룬 ‘파계’는 당시 한국영화계의 파격으로 불리던 김기영 감독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더욱 세간의 관심을 받았었다. ‘파계’는 어려서 동진 출가한 올깎이와 나이 들어 출가한 늦깎이 사이에 법통 계승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경쟁구도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비구 침해와 비구니 묘흔의 사랑이 더해지면서 출가자가 스스로 계를 깨뜨리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영화 ‘파계’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과 관련 영화평론가 문학산은 2001년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출가 승려들의 이같은 파계 과정은 금기(禁忌) 위반을 지켜보는 맛과 계율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구도행각을 지켜보는 관객에게 성찰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어 1980년대에는 전 시대에 비해 불교영화 수가 줄어들기는 했으나, 내용 면에서는 종교적 메시지 전달을 넘어 인간적 시각에 초점을 둔 작품들이 등장해 관심을 끌었다. 그 시발점이자 대표적 영화가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다. 김성동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기존의 불교영화에서 보여 준 승과 속 사이에서 생겨나는 일차원적 갈등구도를 벗어나, 진정한 구도자의 인간적 고민에 초점을 맞췄다.
‘만다라’는 승과 속의 갈등 가운데서 진정한 인간 구원의 의미를 묻는 구도자의 파계와 죽음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했고, 이러한 이유로 일부에서는 이 영화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불교영화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로 인해 한국적 이미지를 구성해내는 거장으로 추앙 받게 됐고, 국제영화계에서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배우 전무송은 이 영화로 제20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1980년대 대표적 불교영화로는 임권택 감독의 또 다른 작품 ‘아제 아제 바라아제’와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손꼽힌다. 배우 강수연의 삭발 투혼이 빛났던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불교적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는 수행적 삶의 사회적 의미를 영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강수연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다.
그리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불교의 선사상을 영상적으로 창출해 내는 과정에서 동양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불교적 사유의 이미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찬사를 받았고, 제42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1980년대 불교영화는 이처럼 영화적 작품성과 예술성에 있어서까지 주목받을 만큼 성장세를 보였다.
이어 1990년대에는 ‘오세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화엄경’, ‘유리’ 같은 불교영화가 만들어졌고, ‘은행나무침대’ 등 불교를 소재로 한 불교영화가 선보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는 출가승려의 금지된 사랑이야기와 출가자의 세속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하는데 집중해 기존 불교영화의 구성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눈길을 끌었다.
최고 흥행작품은 ‘달마야 놀자’
2000년대 들어와서는 ‘동승’ 이외에 사실상 직접적인 불교영화로 볼 수 있는 작품이 없는 상황이다. 다만 불교를 소재로 한 불교영화 가운데 2001년 박철관 감독의 ‘달마야 놀자’가 세상의 관심을 크게 받았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면서 불교영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으나, 당시 유행하던 조폭영화의 하나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주연배우 박신양은 「법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불교적인 영화라고 생각하고 찍었고, 불교영화에 출연했으며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조폭영화 논란을 일축하기도 했다.
한편 종교계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해 종교영화가 종교단체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제작 중단이나 상영 중단 등의 압력을 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 중 불교계에서 벌어진 대표적 사례가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였다. 불교계가 “비구니의 품위를 실추시킨다”는 이유로 제작 중지를 요구한 후 불교계와 영화계의 공방이 이어지던 중 제작사 측이 포기하면서 일단락 되는 일도 있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1014호 [2009년 09월 15일 1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