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여익구 편역-민족사 간행…“반정부적”이유
저자 중 금서 조치를 당한 첫 번째 인물은 도선국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에 반하는 무리를 가차없이 내쳤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쓴 소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생각을 달리하고 움직임을 달리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여기에는 서적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금서(禁書)다. 일반적으로 정치·안보·규범·사상·신앙·풍속 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법률이나 법률을 집행하는 국가기관에서 책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 일반에 유포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금서다. 그 방법 또한 다양해서 책을 불태우는 것을 비롯해 유포 및 판매를 금지하거나, 심지어 열람이나 소유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이미 서기 전 411년 프로타고라스가 지은 『여러 신에 대하여』가 신을 모독했다는 죄로 불태워졌고, 동양에서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던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 최초의 금서(禁書) 조치로 기록되고 있다.
분서갱유는 서기 전 213년 진시황이 최 측근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던 승상 이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협서율’이라는 법을 제정, 일상 생활에 필요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 460여 명을 생매장한 사건으로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금서조치의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고려 숙종때 승려 장형(杖刑)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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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도선비기’가 조선시대 금서로 지목받은 바 있는 도선국사진영. |
이토록 끔찍했던 금서조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적지 않다. 조선시대 들어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왕권에 빌붙은 성리학파에 의해 본격적으로 금서조치와 가혹한 탄압이 시작됐으나, 그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 금서는 목록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다만 중국의 도참서가 이 시대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 도참서는 비과학적, 즉 혹세무민의 미신이라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당으로부터 불경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함께 들여온 각종 술수서(術數書)들이 요서(妖書)로 낙인찍히게 됐다. 이 서적들은 요사스러운 책으로 낙인찍혔으니 드러내놓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사실상의 금서가 되고 말았다.
고려시대에는 보다 구체적인 금서조치 가 나타난다. 고려 숙종 5년(1099)에 당시 유행하던 역서(曆書)가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편찬자들의 직제를 없애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어 다음해인 숙종 6년(1100)에는 음양서(陰陽書)를 날조해 민심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이유로 승려 등이 장형(杖形)과 유형(流形)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대상자가 누구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 이같은 내용에 근거해볼 때 불교 전체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승려 개인이 금서조치에 연관됐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불교계는 고려 중기를 지나면서 종파 난립에 따른 내홍을 자초했다. 그리고 이 내홍은 결국 상대를 비난하는 상황까지 발전하면서 정권의 힘에 보다 가까이 다가선 쪽에서 상대를 겁박하는 수단으로 종파의 서책까지 탄압 받도록 했다. 이것이 곧 불서에 대한 금서조치라 할 수 있으나, 이 또한 구체적으로 어떤 불서가 포함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이어 고려 중종 6년(1511)에 윤회를 소재로 한 ‘윤회화복설(輪廻禍福說)’의 내용을 담은 『설공찬전(薛公瓚傳)』이 불태워지는 일이 일어났다. 조선 초기 채수라는 사람이 지은 고전소설 『설공찬전』은 주인공 설공찬이 남의 몸을 빌려 몇 달 동안 저승에 머물면서 들은 이야기와 자신의 원한을 자세하게 적은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권력층은 저승을 주요 소재로 하여 현실정치를 비판했다는 이유를 들어 ‘윤회화복지설’ 자체가 매우 요망한 것으로 판단했고, 사헌부는 문자로 베끼거나 언문으로 번역하여 읽는 것을 금했다. 이어 모든 책을 회수해 불태웠다. 때문에 현재 한문 원본이 전해지지 않아 불교적 사상이 어느 정도 포함돼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도선의 ‘도선비기’, 조선시대 금서
이에 따라 우리나라 금서의 역사에서 불교와 관련해 정확하게 작가나 책의 이름이 밝혀진 이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된다.
도선국사가 지은 『도선비기(道詵秘記)』가 바로 조선시대 금서 중 첫 번째로 꼽힌다. 한국 풍수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도선국사의 『도선비기』는 이 땅에 중국의 체계화된 풍수사상을 처음 전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 후기 승려인 도선은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바탕으로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 ‘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비보설(裨補說)’ 등을 주장했다. 도선의 『도선비기』는 고려의 성립과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고,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통해 ‘도선선사가 지정하지 않는 곳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말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서 정치 사상의 토대를 달리했던 정권은 이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민간에 널리 퍼져 혹세무민을 일삼는다”면서 『도선비기』를 요서로 지목하고 제3대 임금인 태종 11년 왕명으로 불살라 없애도록 했다. 때문에 원본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 『도선비기』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등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도선비기』 등의 서적이 요서로 지목되고 불태워진 배경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만큼 그때까지 통치철학이자 이념이었던 불교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고, 때문에 승려들의 저서까지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
물론 표면적으로 불교 서적을 금서로 지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불교사상의 대부분이 사찰과 승려를 중심으로 유지·발전되었음을 잘 알던 유학자들은 직접 사찰과 스님들을 탄압했다. 왕조실록이나 그밖에 전하는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 당시 유학자들은 사찰을 침탈해 불경과 경판을 불태우고, 사찰을 허물어 그 곳에 서원을 세우거나 자신들의 유흥을 즐기기 위한 정자를 세우기도 했었다.
따라서 당시 정권의 향배를 좌우했던 이들 유학파의 사찰 난입이나 불경 및 경판을 불태우는 등의 행위는 그 자체로 금서보다 더한 조치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조선판 ‘분서갱유’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금서와 불교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1980년대 초 민중불교운동이 확산되는 시기에 나타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면서 최근 들어 금서라는 표현 자체가 의미를 잃어가고 있으나,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군사독재정권의 눈에 거슬리는 책들은 세상 빛을 볼 수 없었다.
1980년대 불교운동으로 불교계 내부의 진보적 소장그룹에 의해 주도된 민중불교운동은 1976년 전주 송광사에서 열린 대불련 하계수련대회에서 전재성 박사가 ‘민중불교 운동론’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이는 기득권 세력의 편에만 섰던 불교가 처음으로 민중의 편에서 역할을 시작한 것이기도 했다.
불교계 개혁세력에 의해 출범했던 1981년 사원화운동이 채 싹을 틔우기도 전에 정권에 의해 와해된 이후 대불련은 소장승려들을 중심으로 전국지도법사단을 발족시켜 불교개혁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들은 1981년 4월 당시 대불련 사무총장이던 여익구가 편역한 『불교의 사회사상』을 바탕으로 이론적 무장을 해 나갔다.
민족사에서 간행한 『불교의 사회사상』은 일본학자들이 연구한 불교사회주의 이론과 동남아불교국가의 불법사회주의 운동을 소개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출간 직후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다. 그만큼 당시 시대상을 앞서가는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당시 3000권이 인쇄됐으나 당국이 금서로 낙인찍으면서 드러내놓고 판매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특히 출판사 설립 후 첫 번째 단행본으로 출간했던 『교단일기』가 판매금지 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민족사로서는 두 번째 단행본마저 판매금지 되면서 크나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민족사 윤창화 사장은 “불교인들의 사회의식을 고취시키고 바로잡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출판했는데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다”면서 “책이 반정부적이고 선동적이라는 게 당국의 입장이었고 수정을 요구하는 대목이 너무 많아 사실상 수정보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암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불교의 사회사상은 스님들이 보급
그러나 그 어려운 시기에 구원병으로 등장한 스님들이 있었다. 당시 민족사 사장 윤창화, 편저자 여익구 등과 더불어 한 달에 두 차례씩 모여 이 시대에 맞는 불교의 역할을 논의하고 연구했던 원혜 스님 등 스님들이 책을 걸망에 짊어지고 일어섰던 것. 스님들은 전국 강원을 찾아 책을 보급하기 시작했고 불과 보름만에 무려 1000권의 책을 소화했다. 그리고 이내 몇 달 지나지 않아 3000권 모두를 독자들의 손에 전하게 됐다.
민족사는 이에 용기를 얻어 이후로도 몇 권의 책을 더 기획했으나,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수시 방문이 주는 불편함에다 내용 또한 『불교의 사회사상』보다 더 진보적이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민족사 이외 다른 불교출판사에서는 이러한 책을 내놓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부대중의 의식변화에 영향을 줄만한 불서는 출판되지 않았다. 따라서 『불교의 사회사상』은 불교서적 중 근현대 최초의 ‘금서’이자, 불교계 최초의 ‘판매금지’ 서적이 되었다. 또한 판매금지로는 유일무이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서히 전개됐던 민중불교운동은 1985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불교의 건설, 주체적인 민족문화의 창달, 부의 공평분배와 조국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성취”를 목표로 내세운 민중불교운동연합이 발족되면서 질적 전환기를 맞았다. 그리고 그때 그 민중불교운동에 나섰던 많은 출·재가자들이 지금도 현장에서 활동하며 불교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1011호 [2009년 08월 25일 1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