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뷔르츠부르크 대학서 ‘불교순전철학’ 학위
이기영 박사는 1960년 벨기에의 루뱅대학서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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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욱 박사 |
박사(博士)는 본래 중국의 진(秦) 나라 때 학문을 맡은 관직으로 처음 설치됐고,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고조선 때 박사라는 관직이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고구려에 태학박사가 있었고, 백제에는 오경박사, 의박사, 역박사, 노반박사, 와박사 등 다양한 박사가 있었다.
박사는 이처럼 고대의 전문 학자나 기술자들에게 주던 벼슬 이름이었다. 그러나 근현대들어 박사는 대학교에서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학위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교의 역사가 짧았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박사는 그 수가 많지 않았다. 따라서 한때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나오면 그 집안의 경사인 것은 물론이고, 인근 동리의 큰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박사학위는 또 출세의 보증수표가 되기도 하여 ‘박사=교수’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불교를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 박사는 1925년에 처음 탄생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학위를 줄만한 여건을 갖춘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학문으로 달래고 미래를 대비하고자 했던 지식인들은 외국 대학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김법린-김동화는 동대 명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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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 명예박사 |
그 가운데 1920년 프랑스로 유학해 1922년 독일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백성욱이 1925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백성욱이 바로 정식으로 학위를 취득한 첫 불교 박사다.
백성욱은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10년 봉국사에서 수행을 시작한 이래 불자로 또 불교학자이자 수행자로 한 평생을 살았다. 1919년 2월 말 당시 불교중앙학림 학생이었던 백성욱은 만해가 아끼던 제자 중 하나였고, 3·1운동 전날 밤 계동 유심사에서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밝힌 만해의 뜻을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국내에서 가열차게 3·1만세운동을 펼쳤던 백성욱은 일본 경찰의 손길을 피해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상해임시정부의 그늘에서 활동하던 백성욱은 그곳에서 ‘선진문물을 익히고 대중을 교화하는 것만이 조선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장차 20만 명의 조선청년을 깨우치는데 평생을 바치겠다’는 원을 세우며 유럽으로의 유학 길에 올랐다.
먼저 프랑스 파리 보베중학교에 입학해 독일어와 라틴어 등을 배운 그는 1922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고대 희랍어는 물론 독일 신화사와 천주교 의식 등을 공부하며 학문의 폭을 넓힌 그는 1925년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불교박사는 이렇게 처음 탄생했다.
백성욱은 이후 귀국해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학인들을 지도하는가 하면 1929년에는 김법린, 김상호, 도진호 등과 함께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를 열어 종헌을 제정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평소 “배고픈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밥을 먹어줄 수 없다. 제 아무리 부처님 아들이라도 부처님의 지혜를 상속받을 수는 없다. 수행하는 것을 미루지 말라. 스스로 선을 닦아 깨우쳐야 한다. 수시로 부처님을 부르고 기도하면 업도 소멸되고 해탈하는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며 수행을 강조했던 그는 홀연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하다 서울로 돌아온 후 해방정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임시정부활동 당시 인연이 있었던 이승만에 의해 1950년 2월 내무부장관에 임명되기도 했고, 1952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불교와의 인연을 소중히 했던 그는 1953년 동국대학교 총장을 1954년에는 동국학원 이사장을 맡아 학교발전을 이끌었다.
이어 1962년 5·16 이후 부천 소사동으로 내려가 ‘백성목장’을 열어 농사를 지으면서 중생구제의 길에 나서고는 한평생 수행자의 삶을 살다가 1981년 8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첫 불교박사의 삶은 승려, 학자, 정치가의 길을 오갔으나 그의 삶에 있어 기저는 불교였고 수행이었다.
국내 학위 첫 주인공은 김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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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화 명예박사 |
그러나 첫 불교박사 백성욱이 1925년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무려 35년여 동안 불교학사는 나오지 않았다. 백성욱의 뒤를 이어 탄생한 불교박사는 1960년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불교 참회의 기원」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기영 이었다.
이기영은 1922년 황해도 봉산 출생으로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불교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귀국해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불교학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특히 그때까지만 해도 설화 속 인물 정도로 묻혀있던 원효의 사상을 발굴해 원효 스님을 세계적으로 알린 원효학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기영 박사는 그 마지막 가는 길도 특별했다. 벨기에에서 서구 학문을 배우고 돌아온 그는 자신이 배운 문헌학, 철학, 신학의 방법론들을 한국불교학에 적용하기 시작했고, 제자들에게는 철저하게 공부할 것을 강조하며 불교학 발전에 매진했다. 그러던 그는 1996년 11월 학술회의 도중 갑자기 쓰러져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에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두고 세인들은 ‘강단열반’이라 이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기영 박사 이후로도 197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불교박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김법린과 김동화가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아 박사로 불렸다.
김법린은 1921년 프랑스 파리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해 공부와 독립운동을 병행했고, 1926년 철학과를 졸업하고 1928년 귀국했다. 이후 독립운동을 펼치던 그는 1938년 만당 사건으로 진주에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에서 각각 복역했다. 이어 해방 후에는 동국학원 이사장을 지내며 불교학 발전에 기여했고, 1952년에는 문교부장관, 1953년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장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2년 동국대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고 1963년 동국대 총장에 임명됐으나, 1964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교분립에 대하여」, 「3·1운동과 불교」, 「12인연에 대하여」 등의 논문을 남겼다.
김법린과 함께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김동화는 1930년 도쿄의 리쇼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한데 이어 1932년 리쇼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이어 1936년 리쇼대학 전문부 종교과 전임강사로 임용됐으나, 몇 년 후 귀국해 1940년 경북 5본산이 합동으로 은해사에 세운 오산불교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해 불교계 인재양성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1942년 혜화전문학교 교수, 1947년 동국대 불교학과 학과장, 1948년 부학장, 1953년 대학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962년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1년까지 대학원장 및 불교문화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많은 논문을 남겨 탄생 100주년인 2002년에 전14권의 『뇌허 김동화 전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처럼 백성욱, 이기영, 김법린, 김동화 등 겨우 몇몇만이 1970년 이전까지 불교박사로 불렸을 만큼, 불교박사는 희귀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는 국내외에서 불교박사가 잇따라 탄생하기 시작했다. 1970년 이후 불교박사 탄생 추이는 「법보신문」이 2008년 초 국회도서관 소장 박사학위논문 11만 4219권(2007년 12월말 현재)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동시에 도서관학을 전공한 이철교 선생이 근대 이후부터 2007년 10월말까지 정리한 「한국불교관계논저종합목록」을 취합 분석한 결과에 잘 나타나 있다.
2007년 말 기준으로 전체 520여 편의 불교 관련 박사학위 논문이 국내 50여 대학에서 발표됐고, 이들 중 첫 번째가 1971년 「향가 문학론: 그 불교 사상적 배경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종우다. 김종우 박사는 당시 ‘나옹화상 서왕가’를 학계에 발표해 주목을 받았고, 이후 국문학사 서술이나 가사 문학론을 새로 집필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기도 할 정도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국내 첫 외국인박사 사토 시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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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박사 |
김종우에 이어 1973년 동국대에서 김기동, 김성배 박사가 학위를 받아 뒤를 이었고, 스님으로는 1976년 박사학위를 받은 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처음이다. 같은 시기 외국에서 불교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는 일본 도쿄대에서 학위를 받은 김지견 박사를 시작으로 1974년 이종익, 1975년 채택수, 1978년 홍윤식과 신현숙 등이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1976년 신옥희가 스위스에서, 그리고 길희성(1977)을 비롯해 강건기·심재룡·박성배(1979) 등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불교박사는 급증하기 시작해 2007년 말 기준으로 국내에서 520명, 해외에서 190여 명의 불교박사가 탄생했다.
그러나 국내 학자들이 해외에서 불교 관련 논문으로 박사가 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 반해, 외국인들이 해외 대학이나 국내 대학에서 불교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각각 7명씩에 불과하다.
외국인 중 국내에서 불교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첫 번째 인물은 1993년 동국대에서 「원효에 있어서 화쟁의 논리」로 박사가 된 일본인 사토 시게키다. 이후 1995년 후지 요시나리가 동국대에서 「원효의 정토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7년에는 프랭크 테데스코가 동국대에서 「불교사상을 통해 본 한국사회의 낙태문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또 1999년 토니오 푸지오니가 「고려시대 법상종 교단의 추이 연구」로 서울대에서, 2000년에는 당아미가 「원측의 해심밀경소연구」로 동국대에서, 2001년에는 후쿠시 지닌이 「원효 저술이 한중일 삼국불교에 미친 영향」으로 원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난다라타나는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수행체계 비교-스리랑카와 한국을 중심으로」로 학위를 받았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1013호 [2009년 09월 08일 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