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불교경전

경전 속 나눔 이야기

淸潭 2009. 5. 8. 09:42

경전 속 나눔 이야기
 
나누려는 마음 있으면 그 사람은 가난하지 않다
기사등록일 [2009년 04월 29일 10:09 수요일]
 

어느 날 가섭 존자는 라자가하 도시 변두리에 쓰레기 더미가 쌓인 곳을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할머니 한 사람이 쓰레기 더미를 파서 굴을 만들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바싹 마른 몸에 병까지 얻어 운신조차 어렵습니다. 피붙이 하나 없는 까닭에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은 너무 낡고 헤져서 거의 발가벗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할머니에게 삶의 의미나 보람 같은 것이 있을까요? 그저 아침에 해가 뜨면 저절로 눈이 뜨이니 ‘아직 죽지는 않았나보다’라고 중얼거리고, 사방이 어두워지면 스르르 눈을 감으며 ‘지금 감는 이 눈이 내일 아침에는 제발 떠지지 않았으면…’하는 마음으로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간신히 넘기는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쉰 쌀뜨물을 나눠달라던 가섭존자

가섭 존자가 찾아온 그날도 할머니는 종일 굶었습니다. 그는 피골이 상접하여 헐벗고 굶주린 채 쓰레기 더미 속에 누워서 아무런 희망 없이 눈만 깜박이고 있는 할머니를 지켜보았습니다.‘아무래도 이 할머니가 오늘을 넘기기는 힘들 것 같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행복했거나 보람을 느낀 적도 없이 살다가 이대로 세상을 떠나게 해도 될 것인가. 아무리 지금까지의 삶이 절망스러웠다 해도 마지막 가는 길마저 사막처럼 황량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때마침 어떤 남자가 지나가면서 쌀뜨물을 버렸습니다. 할머니는 엉금엉금 기어가서 깨진 기와조각에 담아왔는데 쌀뜨물은 쉬어서 지독한 악취를 풍겼습니다. 할머니가 막 마시려던 찰나 옆에서 지켜보던 가섭 존자가 발우를 내밀었습니다.

“제게 한 모금만 나눠주십시오.”
할머니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기한테 뭘 좀 나눠달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스님, 지금 가난한 늙은이를 놀리는 겁니까? 부잣집에서 뭔가 얻어다 나눠주지는 못할망정 쉬어빠진 쌀뜨물로나마 허기를 지우려는 내게 이것을 나눠달라니 말이 됩니까?”
“나눠주려는 마음만 있으면 그 사람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뒤에 조용히 발우를 내민 채 기다리고 있는 가섭 존자의 모습에 질려서 할머니는 쌀뜨물을 부어주었습니다. 속으로는 ‘어디, 이 쉬어빠진 걸 한 모금이라도 삼킬 수 있는지 보자’라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가섭 존자는 천천히 마셨습니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쉰내가 진동하는 쌀뜨물을 마시고난 그는 할머니에게 합장을 하고 축원을 한 뒤에 떠나갔습니다. 『마하가섭이 가난한 할머니를 구제한 경(佛說摩訶迦葉度貧母經)』이라는 긴 이름이 붙은 이 경에서는 가섭 존자가 할머니에게 다음 생에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축원을 해주었고, 할머니는 쉰 쌀뜨물을 보시한 과보로 천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일화가 실제로 벌어졌는지 훗날 만들어진 이야기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경전에서 가섭 존자가 가난한 집을 골라서 탁발하러 다녔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허구라고 치부해 버리기 보다는 속에 담긴 메시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섭 존자가 굳이 가난한 할머니에게서 쉰 쌀뜨물을 한 모금 얻어먹은 것은 ‘나눔’이라는 행위에 담긴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나눔’은 세 가지가 있어야 성립합니다. 나누어 주는 사람, 나누어 주는 물건, 그리고 나누어 받는 사람입니다. 나누는 행위가 아름답고 숭고한 줄은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누구나 ‘나눔’을 찬탄합니다. 하지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잠시 머뭇거립니다. 그건 당연히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해야 할 일이고, 나는 그런 행위를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면서 ‘나도 이다음에 저 사람만큼 돈을 벌면 그때 보란 듯이 보시해야지’라며 후일을 기약합니다.

그리고 나누어 주는 물건도 문제입니다. 좋은 것을 주려니 받는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을 것 같고 변변찮은 것을 주려니 좀 멋쩍기도 한 것 같아서 역시나 후일을 기약하며 그냥 집안에 쌓아둡니다.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면 안 됩니다. 주는 사람의 기호와 성향에 맞지 않으면 받는 사람은 자격을 상실하여 ‘혜택’에서 제외됩니다.

결국 우리는 ‘나는 지금 넉넉하지 못하고, 줄 만한 것이 마땅치 않으며, 주고 싶은 사람도 별로 없어서’ 그만둡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잡보장경』에서는 돈(재물) 없이도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나눔(無財七施)에 대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온화한 눈길로 상대방을 바라보기. 둘째, 온화한 얼굴과 즐거운 표정으로 대하기. 셋째, 부드러운 말을 건네기. 넷째, 상대가 다가오면 일어나서 맞이하기. 다섯째, 착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정성껏 살펴주기. 여섯째, 자리를 양보하기. 일곱째, 집안으로 맞아들여 지내게 해주기가 그것입니다.

꼭 재물이 아니어도 좋다

재물을 나눠주라는 말에는 머뭇거리던 사람들 중에는 이 일곱 가지도 나눔의 행위에 속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합니다. 누구든지 지금 당장에라도 실천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질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지라 물질(돈)을 조금 떼어주고 생색을 내기 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이 나눔의 정신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는 이 일곱 가지 나눔을 많이 강조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혹시 우리는 ‘내 것’을 나눠주기가 아까워 돈 안 드는 저 일곱 가지로 무마하려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부처님 재세 시에 아주 인색하기 짝이 없는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쥐가 드나들까봐 담에 구멍이 생기지 못하게 회칠을 하였고 마당에는 그물을 쳐서 새가 날아와 곡식을 물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너무나 인색하였기에 스님들이 숱하게 그를 찾아가 보시할 것을 권하였으나 오히려 조롱만 당하고 쫓겨날 정도였습니다. 결국 부처님이 나섰습니다.

부처님은 그 부자에게 먼저 다섯 가지 계(五戒)를 들려주면서 이것만 잘 지켜도 타인에게 두려움을 없애주는 큰 보시를 하는 일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삐딱한 자세로 듣던 부자도 그 말에는 크게 동의하였습니다.‘가난한 사람이나 계를 범한다. 나는 재산이 넉넉하니 남을 죽일 일도, 남의 것을 빼앗을 일도 없다. 게다가 술 마셔서 재산 탕진할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이미 보시를 실천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인색한 마음을 들킨 부자

그는 자신을 인정해준 부처님이 한없이 고마워 문득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말씀을 들려주신 분에게 답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창고에 있는 좋은 옷감을 하나 내어드려야겠다.’그는 부리나케 창고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새하얀 고급옷감을 꺼내든 순간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 보다는 조금 싼 것, 더 싼 것, 더 싼 것…. 수없이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였지만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죄다 값비싼 것뿐이었습니다. 환희에 차서 보시하려던 마음은 순식간에 인색한 마음과 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그런 부자를 지켜보던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보시할 때이지 인색한 마음과 싸울 때가 아니다.”
마음을 들켜버린 부자는 손에 집히는 옷감을 집어 들고 부처님에게 바치며 자신의 인색함을 뉘우쳤고 부처님은 그때 본격적인 법문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출요경』)
나눔을 실천하면 마음이 행복해지고 몸이 가벼워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팔만대장경 속에서는 제 아무리 고매하고 심오한 부처님경지라 하더라도 가장 먼저 선업을 실천하지 않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선업의 실천은 그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며 이것은 현실적으로도 즐거운 과보를 불러올 뿐만 아니라 깊은 종교적 진리에도 쉽게 도달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그런 선업의 대표적인 실천덕목입니다.

나눔-언제까지 ‘다음에’라고 중얼거리며 미뤄두어야 할까요? 그러지 말고 지금 당장 내 몫의 재물을 덜어내 보는 것이 어떨까요? 노파가 가섭 존자에게 나눠 준 것은 쉰 쌀뜨물이 아니라 ‘가난하니까 나는 나눠줄 것이 없다’는 가난하고 옹색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자가 부처님에게 바친 것은 값비싼 옷감이 아니라 인색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나눔이라는 것-행복을 불러오는 주문일 뿐만 아니라 옹색하고 인색한 내 마음을 넓혀주는 명약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미령 역경위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역경원 역경위원으로 일하며 경전 속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다양한 글들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대당서역기』, 『본생경』, 『경전의 성립과 전개』, 『붓다 그 삶과 사상』 등을 번역했고, 『그리운 아버지의 술 냄새』를 집필했다.


996호 [2009년 04월 29일 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