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많은 逸話들을 간직한 德崇山 修德寺

淸潭 2008. 10. 31. 13:46

 

유적답사기 - 3

많은 逸話들을 간직한 德崇山 修德寺

2008년 10월 16일    인터넷博約會

 

충남의 종산인 가야산 줄기의 덕숭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유서깊은 절 수덕사를 찾았다. 이 절은 백제 말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고려 말에 懶翁禪師가 중수했다고 한다.

 

                                                        수덕사의 일주문

 

                                       불가의 보물을 소장한 聖寶博物館

초서를 모르는 나는 전부터 이 건물을 볼 때마다 처마 끝에 걸인 현판조차 읽지 못함을 스스로 부끄러워 했었다. 좌우의 각각 세 글자는 알겠으나 가온대 한 자는 영 알 수가 없어서 궁금했었는데 마침 동행하던 小魯先生께서 냉큼 알아와서 알려주신다. '禪之宗刹修德寺' 라고하는 '刹'자란다. 듣고보니 앞 뒤 문맥으로 보면 그리도 쉬운 것을-------,

이 절에는 근대에 이르러 크게 禪風을 일으키셨던 鏡虛, 滿空  두 스님께서 대를 이어 주석하셨으니 가히 '禪之宗刹'이라 할만 할 것이다. 경허스님은 깨달음이 크므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禪의 일상화를 추구하여 온갖 기행으로 파계승 소리를 들으면서도 개의치 않았던 큰 스님이셨다 하고,

그의 제자였던 만공스님은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찌(寺內)가 31본산 주지들을 다 불러놓고 조선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 할 때 다른 주지들과 달리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할만큼 강직하면서도 경허스님의 제자답게 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기신 스님이셨다고 전한다.

 

                                          위에서 내려다 본 성보박물관

 

                                          맨 위에 번뜻이 자리잡은 대웅전

 

경내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웅전은 고려 말인 1308년에 세워진(건립700주년) 건물로서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오래된 건물이다.

이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정면보다 측면의 칸 수가 더 많지만 정면은 한 칸에 문을 세 짝이나 달도록 칸이 넓고 측면은 칸살이 좁아서 측면이 더 넓은 역 현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래도 다른 절의 대웅전과 달리 비교적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기둥의 배흘림이 뚜렷한 것이 특징인 이 건물은 11량이나 되는 큰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엄정하게 처리하여 백제건축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건축연대가 분명하여 우리나라 고 건축의 기준이 되며 그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하여 국보 제49호로 지정 되었다.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

 

                                                 경내의 아름다운 숲들

 

                                   金一葉禪師가 수도했던 여승들의 수도도량 見性菴

 

평안도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기독교가정에서 자라면서 조실부모한 역경을 극복하고 이화학당을 나온 신여성, 필명으로 염문으로 세상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던 여류문인, 어느날 갑자기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이곳에서 수도하다가 일생을 마친 '수덕사의 여승' 일엽선사.

그의 본명은 金元周, 一葉은 춘원 이광수성생이 지어준 아호이자 필명이었고, 출가해서의 범명은 '荷葉'이었으니 '하엽선사'라고 해야할 것이지만 필명 김일엽이 하도 유명하여 절로 일엽선사가 되고 말았나 보다.

첫날밤에 다리 한짝(義足)을 떼어 윗목으로 밀어놓던 18세 연상의 노신사 이익노(연전교수)가 그의 첫 남편이었다. 신혼의 단꿈을 잊은 채 동경유학 중에는 조선유학생들의 문학지 '學之光'에 '자유연애론'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는 한술 더떠서 '신정조론'을 발표하였으니 그의 주장 한 토막을 들어보자.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다“

 

그러한 자유연애사상을 몸소 실천이라도 하려 했음일까? 유학 중에 만난 이장화시인과 열애에 빠졌다가 서울의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했고, 급행열차 안에서 첫눈에 서로 반했던 일본청년 오다 세이죠(大田淸長)와의 사이에서는 아들까지 낳았지만 은행장을 지난 일본의 명문에서 반도인 이혼녀를 며느리로 받아드릴리 없었다.

5개월 핏덩이와 매달이는 사나이를 매섭게 뿌리치고 서울로 돌어온 후에도 문인 이광수, 방인근, 동아일보의 국기열기자 등 뭇 사내와 숫한 염문을 뿌렸고, 영과 육을 함께 불살랐던 마지막 남자 백승욱박사(불교철학자)가 사랑을 버리고 수도의 길을 택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자 그도 이곳 수덕사로 만공스님을 찾아 비구니가 되었다.

 

                                               견성암을 둘러싼 아름다운 담장

 

     

                                                    歡喜臺와 圓通寶殿

일엽선사가 머리를 깍고 만공스님으로부터 戒를 받은 환희대다. "청춘을 불사르고" 재만 남은 가슴에 새로운 계를 받아드리면서 환희를 느꼈던 것일까? 지금은 새 건물 원통보전이 들어서고 그 자리에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108번뇌를 모두 잊으려고 머리를 깍았지만, 핏덩이가 소년이 되어 찾아 왔어도 어머니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했던 그였지만 끝내 떨처버리지 못했던 구석은 있었나 보다. 그가 말년에 쓴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무래도 당신에게 향한 연모의 정의 재생임은 틀림 없습니다. 22년 전 당신을 떠날 때 흘리던 절망적인 눈물과는 다르지만 그저 남 모르는 눈물이 가끔가끔 흐릅니다." 스님도 인간임을 어찌하랴.

 

      

                 수덕여관의 현판들    (왼쪽은 이응로화백이 마당 옆 바위에 새긴 石刻)

일주문 왼쪽, 법계와 속계의 중간지점에 수덕여관이 있다. 이야기는 동갑내기 단짝친구 羅蕙錫여사가 자기도 중이 되겠다고 수덕여관으로 일엽선사를 찾아옴으로서 다시 이어진다. 일엽이 중이 되겠다고 할 쩍에는 "종교를 사랑의 도피처로 이용하려느냐?" 고 호되게 꾸짓던 그도 자유연애에 실패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박귀희여사가 고집스럽게 지켜냈다는 초가지붕의 수덕여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최초의 여권운동가, 최초로 세계일주한 여성, 항상 최초가 따라붙는 신여성 나혜석, 역시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현모양처는 이상적 여인상도, 반듯이 본받아야할 덕목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을 장려한 것이다.” 라는 글을 발표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첫사랑에 실패하고 귀국하여 12세 연상의 중년신사 김영우(변호사)와 결혼하고 두 아들을 낳은 후에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여행에 올라 남편이 독일에서 법률공부를 하는 동안 그는 불란서 파리에서 서양화를 익혔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동립운동가요 천도교교령이었던 崔麟선생을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독일에 있던 남편이 불야불야 파리로 돌아왔다.

1년 8개월의 긴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들 부부는 드디어 이혼을 했고, 나혜석은 '삼천리'라는 잡지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한다. “조선남자들은 이상하외다. 자기들은 정조관렴이 없으면서 아내와 일반여자들에게는 정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의 정조를 유린합니다.” -----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다. 오직 취미일 뿐이다.”

"유부녀가 바람 피다가 이혼을 당하고도 자숙하기는커녕 방종하기 그지 없다"고 지탄을 받자 이에 오기가 났던지 최린을 상대로 "妻權을 유린했으니 위자료를 내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세상에서는 "이제는 파렴치하게 돈까지 뜯어내려 한다고 비난이 빗발쳤지만 나혜석의 생각은 한 세기를 뛰어넘어 앞서 가고 있었다.

유부남과 유부녀가 바람을 피웠는데 여자는 자식도 재산권도 모두 빼았기고 이혼을 당했고 남자는 아무일도 없이 사회적지위도 명예도 그대로 유지한 채 당당히 활보하는 그런 세상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처권침해 보상청구소송'은 성립되지 못했고 여성을 위한 여권운동이었건만 여성들 조자도 호응은 고사하고 비닌만 퍼부어 졌다.

80여 년 전 남녀칠세부동석하던 시절이었으니 어찌아니 그러 했겠는가. 거리에 나서면 손가락질과 돌팔매가 날아들어 어쩔 수 없이 수덕사를 찾아왔건만 만공스님은 "임자는 중이 될 사람이 아니야" 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갈 곳이 없는 그가 수덕여관에 머물고 있을적에 서양화를 배우고 싶어하던 이응로화백이 찾아왔다.

여기에서 두 남녀가 가르치고 배우면서 숙식을 함께 했으니 세상이 또 조용할 리 없었다.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여자와 미남청년이 1년 여를 같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겠느냐" 고 하기도 하고 "연상의 남성하고만 연을 맺었던, 정신연령이 높은 나혜석에게는 8세 연하의 남자는 남자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반된 추측들이 난무했다고 한다.

이무렵 14세 소년이 어머니 일엽을 찾아 이곳에 왔다. 일본청년과의 사이에 낳은 일엽의 유일한 혈육이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에게 양자로 들어가 황해도에서 자라다가 꿈에 그리던 어머니를 찾아 왔건만 일엽은 "속세와 연을 끊은 나는 너의 어머니가 아니니 스님이라 부르라"고 하면서 끝까지 계률만을 지키려 했다.

이를 지켜보던 나혜석이 "승려이기 이전에 사람이요 어미인데 어찌 저럴 수 있으랴"면서 소년을 품어 안고 팔벼개를 해주면서 어머니 노릇을 대신 하였다고 한다. 그 소년 김태식은 거기에서 그림에 눈을 뜨고 후일 김일성의 초상화을 그리기까지 한 큰 화가가 되었으며 남하한 후에 승려가 되어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라는 소설을 써서 평생 입으로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를 글로 불렀다고 한다.

수덕여관을 떠난 나혜석은 사찰과 양로원을 전전하다가 행려병자가 되어 세상을 떠났고, 나혜석이 떠난 수덕여관은 이응로화백이 사들여 부인 박귀희여사에게 맡겼다. 그러다가 젊은 여제자와 함께 파리로 떠나고 부인만 호로남아 수덕여관을 지켰다.

 

                     지금은 지방문화재가 되어 불교미술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제자와 결혼하여 돌아올 줄 모르던 이화백이 1968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잡혀오자 이제는 이혼서류에 도장까지 찍어주어 남남이 된 박귀희여사가 내내 정성을 다하여 옥바라지를 했고 출옥 후에는 산수 좋은 이곳에서 요양케 하는 등 앞의 두 여성과는 대조를 이루는 부덕을 보이기도 했으니 어느쪽이 옳았다고 해야 할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이응로화백은 이곳에서 박여사의 수발을 받으며 주변의 돌에 문자추상화를 남기고 다시 파리로 떠났다.

 

다.      

                                    고택복원기념석과 이응로화백의 추상문자석각

 

절 이야기에 속된 이야기만 했으니 이제 만공스님의 일화 몇가지를 소개하고 끝을 맺으려 한다.

일화 하나.

어느날 만공스님이 제자를 다리고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제가가 다리가 아프다가 엄살을 부린다. 아무 말 없이 앞 서 가던 스님이 밭에서 김매는 여인에게 갑자기 달려가 끌어안았다. 이를 본 남편이 호통을 치면 쫓아오자 스님이 재빨리 달아나니 제자도 딸아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넘어 한숨을 돌린 제자가 스님에게 불었다.

스님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다리 아프다던 놈이 잘도 뛰더구나. '一切唯心造'의 뜻을 이제 알겠느냐?

 

일화 둘.

어느날 스님이 선방에서 여승의 무릅을 베고 누어 코를 드릉드릉 골며 단잠에 빠저 있었다. 다음날 제자가 물었다.

아무리 自在無碍하신 스님이시지만 젊은 여승의 알무릅을 베고 눕는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까?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만, 이놈아 面壁正坐하는 것만 禪인 줄 아느냐? 남녀가 알살을 맞대고도 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참다운 선인 게야.

일화 셋.

고요한 절간에 철없는 동자승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뒷동산 딱다구리는 생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덩구리는 뚫어진 구멍도 못찾네."  어굴이 붉어진 여승들이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을 모르는데 스님이 지나다 들으시고 호통을 칠 줄 알았더니 도리어 '노래를 참 잘한다'고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서울에서 나라를 잃고 낙선재에서 尹妃를 모시던 궁녀들이 내려와 만공스님에게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마음을 다스릴 길를 가르쳐 줍시사"고 청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동자승을 불러서 전에 부르던 그 노래 한 번 다시 불러 보라고 했다. 전에 칭찬을 들었던 동자승은 신이 나서 멋들어지게 다시 물렀다.

엄숙한 자세로 듣고 있던 스님이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 궁녀들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진리는 멀이 있는 게 아니오. 부처님을 향한 길이 훤히 뚫여 있건만 어리석은 중생들이 뚫인 길도 찾지 못하고 헤메고 있을 뿐이오. 욕심을 버리면 뚫인 길이 훤히 보일 것이오"했다고 한다. 일상의 모든 것이 선이셨던 만공스님께 새삼 존경을 표한다.

선지종찰 수덕사 답사기를 쓰면서 흥미위주의 속세 이야기만 늘어놓은 나도 실없지만 어느 好事家는 김일엽, 나혜석, 박귀희여사와 만공스님, 이응로화백, 김태식스님을 일러 '수덕사의 세 여자와 세 남자'라고 익살을 부리기도 했다.

많은 逸話들을 간직한 德崇山 修德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