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원담 스님

淸潭 2008. 11. 22. 14:21


 

 

덕숭총림 방장 원담 대종사 영결식 엄수

22일 수덕사에서 원로회의장 봉행

···사부대중 1만여명 운집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圓潭) 진성(眞性) 대종사의 영결식

 
 
 
원담스님 임종게

來無一物來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去無一物去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去來本無事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靑山草自靑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世俗과 靑山의 경계 위에 선 出格丈夫
기사등록일 [2008년 03월 19일 수요일]
 

탄생·출가
지난 3월 18일 덕숭총림 수덕사 염화실에서 열반에 든 원담(圓潭) 진성(眞性) 대종사(大宗師)의 본관은

부안김씨(扶安金氏)이며, 모친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서 아명이 몽술(夢述)

이었다. 법명(法名)이 진성(眞性)이고 법호(法號)가 원담(圓潭)이다.
대종사는 1926년 10월 26일 전북 옥구군 옥구면 수산리 217번지에서 부친 김낙관(金洛觀)과 모친 나채봉

(羅采鳳)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이듬해에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39번지로 이주해 성장했다.

1932년 신동우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중 장남인 형이 일찍 죽자 수명장수 기도 차 이모인 비구니

스님을 따라 절에 처음 발을 딛게 되었다.

이 때 처음 본 스님들의 생활이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달라 저절로 숭배하는 마음이 나게 되었고 집에 돌아

와 부모를 졸라 출가해 1933년 벽초(碧超) 스님을 은사로 만공(滿空) 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했다.

 

만공 선사와의 인연·수행

대종사는 수계 후 천장사에서 다각 소임을 하던 중, 방선 시간에 대중들이 ‘만법귀일(萬法歸一)’화두를

화제로 담소하는 것을 듣고 “노스님, 저도 참선을 해볼랍니다”하여 노스님의 허락을 받아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던 어느 날 일구월심 화두를 챙기며 정혜사에서 채공을 하던 중 만공 노스님이 거두절미하고 머리통을

내리치며 “알겠느냐?”고 물으니, 얼떨결에 “예,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만공 노스님이 주장자를 들어올리며 ‘네가 알기는 무엇을 알았느냐?’고 다그쳤고,

이에 ‘딱 때리니까 아픈 놈을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사실 잘 모르면서도 또 맞을까 겁이 나서 뱉어버린 말이었으나,

이 일을 계기로 ‘주장자로 얻어맞고 아팠던 놈이 어떤 놈인가’를 열심히 참구했다.

 

하루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만공 노스님이 역시 머리를 딱 때리면서 ‘알았느냐?’ 하고 또 물었다.

이 때 ‘예, 몰랐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자, 노스님께서 ‘그러면 알아야지. 내가 닷새 동안 기한을 줄 테니

알아봐. 모르면 여기에 살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해놓고는 닷새 동안 잠도 안 자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대체 알 도리가 없었다.

음날 금선대(金仙臺)로 심부름을 가자 만공 노스님이 역시 주장자를 가지고 달려들어 딱 때리기에 ‘아직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그제야 ‘됐다. 짚신을 삼아라’ 하셨다. 그때부터 만공 노스님 시봉을 하게 되었다.

 

깨달음

그렇게 만공 노스님과 인연을 맺어 시봉하며

가르침을 받고, 화두를 들어 가행정진을 거듭하던

어느 날 만공 노스님이 주장자로 머리를 때린 것이

세존이 꽃을 들고, 달마가 불안한 놈 잡아오라 하고,

육조가 한 물건이라 하고, 임제가 두들겨 맞고서도

모르다가 ‘황벽 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하는

말에 깨달았던 일들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한치의

어긋남 없이 맞는 법문임을 깨닫고 비로소 그 깨달

은 바를 노래(悟道頌)로 읊었다.

一片虛明本妙圓 (한 조각 비고 밝은 것 본래 묘하고

둥글어) / 有心無心能不知 (유심무심으로는 능히

알 수 없네.) / 鏡中無形是心卽 (거울 가운데 형상

없는 이 마음은) / 廓如虛空不掛毛 (확연히 허공

같아 티끌만치라도 걸리지 않네.)

이것이 1943년 17세 때의 일이다.

 

 

이에 만공 노스님은 일찍이 큰그릇이 될 것임을

확신했던 사미(沙彌) 진성(眞性)에게 글을 남겨 대종사의 견처를 인정했다.

眞性本無性 (참 성품에는 본래 성품이 없고) / 眞我元非我 (참 나는 원래 내가 아닐세.) / 無性非我法

(성품도 없고 나도 아닌 법이) / 總攝一切行 (총히 일체행을 섭했느니라.)

이후 대종사의 임운등등(任運騰騰)하고 활발발한 선기는 하늘을 끌어내리고 땅을 뽑아 올렸다.

대종사의 허광방달(虛曠放達)한 선지(禪旨)는 산꼭대기에서 파도가 일고 우물에서 먼지가 솟았으니

출격장부(出格丈夫) 그 자체였다.

 

경허·만공 스님의 법을 이은 대종사의 가풍(家風)은 언답(堰畓, 자갈논)을 일구고 땔나무를 나르는

중에도 평상심(平常心)의 도(道)를 내보이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한 불법을 체현(體現)한 행화를 보이고

사라짐이 변화무쌍하여 그 향방을 가릴 수 없었다.

오가(五家)의 종풍(宗風)을 두루 갖춘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기봉(機鋒)은 당대 선장(禪匠)들을 뛰어넘어

홀로 보배롭게 빛났고, 대종사의 해탈문(解脫門)은 불조의 정법을 이은 여법한 본분납승의 면목이었다.

수물부형(隨物賦形)의 창신성(創新性)과 당기살활(當機殺活)의 수물응기(隨物應機)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조사문의 가풍이었으며,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체(體)로 하고 촉처개진(觸處皆眞)을 용(用)으로 한

쌍인검(雙刃劍)은 마음도 부처도 아닌 자리에 머물면서 더러움을 버리지 않고 깨끗함을 취했고, 형식주의

적인 것은 거부하고 조신(調身)보다는 조심(調心)으로 장양성태(長養聖胎)를 삼았다.

대종사는 또한 천부적인 미적 감각으로 예술, 문화, 서화에서도 전문인을 능가할 정도여서, 의재 허백련,

비공 장욱진, 고암 이응로 화백과 교류하면서 각자의 작품을 서로 평하고 취사(取捨) 선정(選定)하였으니

이는 세속(世俗)과 청산(靑山)이 다름 아닌 경계였다.

남산(南山)에 구름이 일면 북산(北山)에 비가 오는 대종사의 본래면목은 일생동안 덕숭산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아침마다 달마의 소림굴을 드나들고 저녁마다 육조의 조계(曹溪)에서 발을 씻었다.

 

쉼 없는 정진
대종사는 수행을 이유로

산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1958년 불교정화 당시

구례 화엄사 주지를 잠시

역임하고 1964년 중앙종회

의원에 피선되었으며,

1967년 『만공어록』을

간행했다.

또 1970년 수덕사 주지로

취임하여 범종을 주조하고

범종각, 법고각, 청연당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했다.

1980년 통도사 극락암에

안거할 때 글씨 쓰는 것을

보고 경봉 큰스님이 ‘자네 글씨가 내 글씨보다 낫네!’라고 할 정도로 예술 방면에도 조예가 깊었다.

1982년에 쓴 수덕사 대웅전 현판을 비롯해 1984년에는 속리산 법주사 주련을 쓰기도 했으며,

1986년에는 일본산업경제신문이 주최한 국제서도전에서 대상(大賞)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독립기념관 건립 서예전을 열어 전액을 희사하기도 했다.

1986년에 덕숭총림 제3대 방장으로 취임하며 보임정수(保任精修)하게 되었고,

1994년에는 원로회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2003년 『원담법향집』을 출간하였고, 2004년 대종사(大宗師) 법계(法戒)를 품수(品受)했다.

또한 승가사 조실, 용인 하운사 조실, 용인 법륜사 조실, 금산 극락사 조실, 향천사 천불선원 조실,

개심사 보현선원 조실을 역임하며 깨달은 후의 향훈을 남겼다.

대종사는 30여 년 간의 결제·해제 상당법어(上堂法語)를 통해 마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인 듯, 더위를 씻는

맑은 바람인 듯, 납자(衲子)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조도(助道)에 도움이 되는 지남(指南)이 되어왔다.

 

원적
그리고 2007년 12월 『원담대종사선묵집』을 간행해 그동안 일필(一筆)을 들어 먹으로 선계(禪界)의

풍류 속에서 개오(開悟)로 이루어진 서예의 예술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다.

대종사는 지난 동안거 결제 때에도 대중들에게 가행정진의 경책을 아끼지 않았으나, 세연이 다함은 어찌

막을 수가 없었다.

대종사는 문도들이 마지막 한 말씀을 청함에,

‘그 일은 언구(言句)에 있지 아니해. 내 가풍은 (주먹을 들어 보이시며)이것이로다!’ 하면서

來無一物來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去無一物去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去來本無事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靑山草自靑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홀연히 입적에 들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圓潭 眞性 大宗師 修行 年譜

 

1926년  전북 옥구 출생. 아명(兒名)은 김몽술(金夢述).
1927년  충남 서천으로 이주.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
1958년  지리산 화엄사 주지.
1964년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취임.
1967년  『만공어록』 간행.
1970년  수덕사 주지 취임.
1980년  『경허법어』 간행.
1980년  승가사 조실.
1980년  용인 하운사 조실.
1982년  수덕사 대웅전 휘호.
1983년  덕숭총림 설립.
 『만공법어』 간행.
1984년  속리산 법주사 주련 휘호.
1986년  덕숭총림 제3대 방장 취임.
 《일본산업경제신문》 주최 제3회 ‘국제서도전’ 대상 수상.
 독립기념관 건립 서예전 개최.
1994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취임.
2002년  용인 법륜사 조실.
2003년  법어집 『덕숭산법향』 간행.
2004년  대종사 법계 품수.
  금산 극락사 조실.
  향천사 천불선원 조실.
  개심사 고현선원 조실.
2007년  『원담대종사선묵집』 간행.
2008년  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현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독립기념관 소장 대종사의 작품 13점을 덕숭총림 선미술관에 기증.
  3월 18일 오후 9시 수덕사 염화실에서 열반(법납 76, 세납 83).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진성 대종사(조계종 원로의원)가 3월 18일 오후 9시 경 수덕사 염화실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랍 83세 법랍 76세.

원담 스님은 1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32년 수덕사를 찾았다가 정진하는 스님들의 청정한 모습에 환희

심을 느껴 부모를 졸라 33년에 출가한 이래,

오랜 세월 수행정진을 거쳐 덕숭총림에서 후학들을 제접하며 수행풍토 확산에 주력해왔다.

원담 스님은 어머니 꿈에 신승이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여 몽술(夢述)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화주하러 온 스님의 목탁과 염불 소리를 듣고서야 울음을 터트렸을 정도로 불연이 깊었다.

어려서 이모를 따라 수덕사를 찾아 정진하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환희심을 느껴 출가한 스님은 천장사와

전월사 등에서 만공 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하다 33년 벽초 스님을 은사로, 만공 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했다.

 

원담 스님은 일평생 수행에만 전념하여 농선도인(農禪道人)으로 불렸던 스승 벽초 스님의 가풍을 계승

하여 현대시대에 맞는 ‘선농일여’의 새로운 가풍을 진작시키며 선지식으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스님은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후 가행정진하다 1970년 수덕사 주지로 취임해 덕숭총림의 기반

을 다자기 시작했으며 1983년 총림의 위의를 갖춰 덕숭총림을 열었다.

이후 스님은 ‘만공법어집’을 발간하며 덕숭총림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선풍을 계승하기 위한 수행에 힘써

오다 혜암ㆍ벽초 스님에 이어 지난 1986년 덕숭총림 3대 방장에 취임한 이래 지금까지 총림의 정신적

지주로서 수행가풍을 널리 펴는 등 총림의 어른으로 역할을 다해왔다.

총림의 방장으로 주석하는 동안 수많은 수좌들을 제접하면서 1700 공안에만 매달릴 뿐 진정으로 공부한

수행자가 없음을 걱정하기도 했던 스님은 평소 “ ‘도인’이라는 헛 껍데기 이름에 만족하지 말고 진실한

수행자가 될 것”을 후학들에게 주문하며 옛 조사들로부터 이어져온 수행가풍을 이어갈 것을 당부해왔다.

원담 스님은 입적에 들기 전 문도들이 마지막 한 말씀을 청하자

'그 일은 언구에 있지 아니해, 내 가풍은 (주먹을 들어보이며)이것이로다!'하고 마지막 법을 편데 이어

 
來無一物來(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去無一物去(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去來本無事(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靑山草自靑(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홀연히 입적에 들었다.

한편 원담 스님의 영결식은 3월 22일 오전 10시 30분 수덕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 후

수덕사 연화대에서 다비장이 거행된다.

“승이든 속이든 기본이 튼튼해야”
 
큰스님을찾아서-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

바른 교육없인 나라기강 세울 수 없어
수행자는 下心 갖고 가람호지 잘 해야
기사등록일 [2008년 03월 19일 수요일]
 

장대비가 막 그친 후의 덕숭산은 참으로 싱싱했다. 그 안에 고풍창연한 수덕사가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보기 흉하게 법당을 가로막은 황하정루만 아니었던들 아마도 필자는 덕숭산을 넋을 놓고 언제까지나 바라보았을 것이다.(지금은 주지 법장 스님이 부임해 흉측한 모습의 황화루는 철거하고 수덕사가 새롭게 총림격을 갖춘 가람으로 재건, 본래의 사격을 회복해가고 있다.)

짙푸른 빛깔을 한 인공못을 지나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웅장한 황하정루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거슬러 올랐다. 몇 십 개에 불과한 계단임에도 불구하고 숨이 몹시 가쁘다. 아마도 도시생활의 속진에 찌들린 때문일 것이리라.

“점심공양들은 했는가?” 정겨운 목소리로 맞이하는 원담 큰스님의 엷은 미소가 비 내린 후의 사원숲 만큼이나 해맑게 다가왔다. 건강이 늘 걱정이라는 주위의 이야기가 무색할 만치 스님은 건강해 보였다. 비결을 물으니, 특별한 비결은 없고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살아가면 건강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올해(1993년)는 큰스님께서 출가하신지 꼭 60년이 되는 해. 세속에서는 60주년이라고 하면 환갑이다, 뭐다 해서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며 마땅히 호들갑을 떨 일이지만 스님의 표정은 그저 덤덤하기만 하다.

“큰스님 그래도 출가 60년인데 감회가 새로우시지요. 출가시절을 회상해주시지요.”

큰스님은 마지못해 답변을 한다는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다가 말문을 연다.

“내가 중이 된 것은 어머님처럼 모시고 살던 이모님께서 출가를 하신 게 동기가 되었어. 막상 이모님이 출가를 하고나니 허전하기가 이를 데가 없더군. 그래 도대체 이모가 무엇 때문에, 어떻게 해서 중이 되었을까를 알아보고 싶기도 했고, 또 출가해서 사시는 절은 어떤 곳인가 알고 싶어 찾아보겠다고 나선 것이 이곳 덕숭산까지 오게 된 연유지.”

“그렇다면 왜 다시 속가로 내려가지 않으셨나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 그래요. 그때가 내 나이 12살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가만히 살펴보니까 어린 눈에도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 바로 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또 세상에서 제일로 멋지게 사는 분들이 스님이라는 생각

이 들었어요. 그리고 나니까 이곳을 버리고 갈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된 게 지금까지 이곳에 머물러 살고

있게 된 이유입니다.”

그 후 스님은 마벽초 스님을 은사로 축발(머리를 깎는 것)을 했고, 만공스님께 계를 받아 스님이 됐다.

당시 상황을 큰 스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누구든지 절에 오면 은사스님을 정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런데 나는 처음에 은사를 정하지 않았어.

‘부처님이 나의 은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 그런데 불교집안이란 게 은사가 없으면 중을 안 만들어

줘요. 그래 절에 와서 4년이 넘게 행자로 있었지.

그러다가 마벽초  스님을 은사로 중이 되었는데, 은사는 만공 노스님이 정해주셨어요.

그런데 왜 내가 중이 되었는가. 그 연유가 재미있어요. 행자 생활을 한 4년 하고 있으니까 만공 노스님

께서 어느 날 나보고 이제부터 당신을 시봉하라고 명령을 내려요.

그런데 말이지, 노스님을 행자복 입고 시봉할 수는 없는 일 아니요. 법복을 입혀서 시봉을 들게 하려고

하니 노스님은 나를 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내신 것이지요.

또 나도 스님께 중이 될 결심을 말씀드렸고. 만공 노스님께서 그때 은사로 마벽초 스님을 추천해 주셨어요.

벽초 스님은 아주 훌륭한 스님이시니 은사로 잘 모시라는 말씀에 따라 벽초 스님을 은사로 나이 열여섯에

정식으로 중이 됐지요.”

스님은 이야기가 옛날로 돌아가자 입가에 엷은 미소마저 머금었다.

대담이 차츰 열기를 띠어가게 되자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큰스님, 덕숭문중은 경허, 만공 스님으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중추적인 선맥(禪脈)을 이어가는 문중

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덕숭문중의 가풍(家風)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덕숭가풍은 서래(西來)가풍입니다. 부처님의 탄생국인 인도가 여기서 서쪽이고, 또 서라고 하면 모든

법이 나온 근본도 되고 끝도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초이면서 동시에 최후인 것, 이것이 바로 덕숭산의 가풍이라고 할 수 있지요.”

“큰스님께는 만공 스님께 들려드렸다는 ‘딱따구리 노래’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화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그 이야기를 자세히 알려주지.

원래 만공 노스님께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노래 부르기를 아주 즐겨하셨어요.

노래를 잘하건 못하건 아이들만 보면 노래를 시키곤 하셨어.

그래 나도 만공 노스님을 잘 시봉하려면 노래하나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런데 그 때 무슨 일로 큰절(수덕사)에 들렸다가 거기서 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딱따구리 노래를 배웠

어. 그 사람들이 이 노래가사를 잘 외워 노스님께 꼭 들려드리라면서 노래를 가르쳐줍디다.

그 내용이 대강 무엇인고하면(스님은 이 대목에서 장단을 넣으며 천진한 표정으로 흥얼거리듯 가사를

들려주셨다)

‘뒷동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어진 구멍도 못 뚫는구나.’라는

내용입니다.

그래 그 가사를 잘 외워가지고 정혜사로 돌아와서 노스님께 정성을 다해 노래를 들려드렸지.

만공 노스님은 나의 노래를 재미있는 표정으로 들으시더니만

‘그거 참 좋은 노래다 보통 노래가 아니야. 단단이 외워두도록 해라.’고 하시더군.”

“그 딱따구리 노래를 정혜사를 찾아온 궁중의 상궁들 앞에서도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맞아요. 그랬지. 정혜사엔 가끔씩 서울의 상궁이나 나인들이 찾아오곤 했어요.

그 당시엔 그들이 시주를 많이 하는 아주 큰 신도들이라. 정혜사 살림은 그분들의 시주로 꾸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언젠가 서울에서 상궁나인들이 왔을 때 만공 노스님이 ‘진성아’하고 부르

셔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상궁나인들이 쭉 둘러앉았는데, 노스님께서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을 내리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의젓하게 노래를 불렀지.

그들은 처음엔 가사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 소린지 잘 모르는 것 같다가 까르르 넘어가게 웃음보를 터트

리더군. 그런데 나중에 만공 노스님의 노래의 가사를 풀이하는 것을 듣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어.

그런데 말이오. 만공 노스님이 이 노래의 가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시오.

노스님은 결코 이 노래의 가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시오. 노스님은 결코 이 노래의 가사를 속된 내용

을 담은 노래로 해석하지 않았어요.

‘진리라는 것은 본시 막힌 것이 아니고 열려(뚫려)있는 것인데, 우리 절 멍텅구리 대중들은 이미 열려

있는(뚫려진) 진리도 알지 못하는구나(못 뚫는구나).’라고 해석을 하시더군요. 어때요.

이렇게 해석을 해놓고 보니 멋지지요.”

 

이 대목에 이르러서 원담 큰스님은 신바람마저 나신 듯했다.

그러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와 덕숭총림을 이끄는 방장으로서의 원칙

같은 것을 말씀하셨다. 예컨대, 덕숭총림 수덕사는 해인사나 통도사, 송광사 등 여타 총림과는 달리 장소

도 비좁고, 재정도 넉넉지 못해서 총림의 자격에 미흡한 점이 많은데도, 총림으로 지정이 된 것은 한국

불교의 선맥을 중흥시킨 본찰로서 선풍을 진작시키라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스님은 만일 선풍을 진작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덕숭총림은 총림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자신은 여생을 선풍을 높이는 일에 모두 바칠 생각이라며 이 일 외에 다른 일은 모두 번외(番外)

인 만큼 수덕사가 다 날라 가는 일이 있더라도 덕숭산 가풍을 살리는 일에 나설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딱따구리 노래 이야기를 하시며 천진한 미소를 짓던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이 단호함, 맺고 끊음이 명확한 것이 우리네 중생들과 다른 점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분위기도 바꿀 겸 해서 불쑥 수덕사의 보물로 알려진 거문고 이야기를 꺼냈다.

최인호의 소설 『길없는 길』도입부에 만공스님이 남긴 귀중한 유품 중에 거문고가 수덕사에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거문고에 얽힌 이야기와 거문고가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가를 물었다.

큰스님은 거문고에 얽힌 이야기를 아주 소상히 설명했다.

“거문고 이야기를 하려면 수덕사 소유의 덕숭산 임야가 이왕직(李王職)에게 재산관리를 맡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만 이왕직의 소유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에 만공스님께서 이왕직을 찾아가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땅을 반환받아 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운현궁에 살고 있던 의친왕 이강(李剛)과 교분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이강이 만공

스님께 귀의해 수덕사의 임야를 찾아주고 신표(信標)로 거문고를 선물한 것입니다.

이 거문고는 고려 공민왕이 탔던 신품명기로 대대로 조선왕실의 보물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수덕사에 잘 보관되어 있어요.”

 

여러 차례 종회의원을 역임한 스님은 종단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인사권이 집중이 된 인사제도와, 종단재산을 중앙에서 일괄 관리하도록 하는 제도의 개혁이

없으면 조계종은 10년이 못가서 크게 쇠퇴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을 어떻게 길러내느냐의 문제인데 요즈음 젊은 후학들을 보면 솔직

히 걱정이 많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법문을 할 때 경이니, 계율이니, 행이니 보다는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늘 강조합니다. 사람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진리를 구현하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지요. 요즈음 젊은 수행자들을 보면, 중 생활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옛날 스님네들은 아침, 저녁으로 예불하고, 도량 청소하고, 공심(公心)으로 살려고 애를 쓰고, 하심(下心)

과 자비심을 갖고 중 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을 보면 이런 기본적인 면이 무척 약하다 이 말이요.”

스님의 질책은 후학들에 대한 염려에 다름아니다. 야단을 하는 경책의 일갈(一喝) 속에 진한 사랑이

숨겨져 있음이다.

“요즈음 먹물도 마르기 전에 주지를 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옛날엔 그러지 않았어.

그땐 주지라는 말은 없고 주장이라고 했는데, 주장이 모든 절살림을 알아서 처리했지.

특히 주장스님들은 원력이 있고, 하심하고, 자비로워야 했어.

절 아랫마을 사람들의 양식이 떨어지면 아무도 모르게 절 양식을 내다주기도 했고, 하여간 지금 주지들

처럼 나서대질 않았다. 이 말이지. 자신이 아무리 좋은 일을 했어도 숨기려고 했지.

이런 점이 요즈음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아요.”

 

60년 수행생활을 해오면서 아직 스스로 깨달았느니, 깨닫지 못했느니라는 따위의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는 스님은 걸림없는 가풍, 형식에 얽매임과 특정한 대상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가풍속에 살다보니 요란

을 떨지 않고 무난히 중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승이든 속이든 기본이 튼튼해야 제대로 된다”는 가르침을 거듭 강조한 원담 큰스님.

‘걸림이 없으되 기본은 철저히 하라’는 가르침을 늘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스님은 그리 크고 높지

않은 덕숭산의 그늘을 한없이 길게 드리우는 거목이었다. <1993. 7.>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법어집 발간한 덕숭총림 방장 원 담 스님
“법어집이 없었다면 시비도 없는 법”
기사등록일 [2008년 03월 19일 수요일]
 

11월 18일 늦은 저녁 법어집 『덕숭산법향』 봉정식과 78회 생일을 하루 앞둔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을 친견했다. 몸이 좋지 않다는 세간의 풍문과 달리 스님은 건강했으며 기자들에게 가벼운 농담을 건넬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스님은 법어집 발간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잘못된 일”이라고 밝혔다. “법어집이 없으면 시비도 없을 텐데 법어집이 나와 삼라만상이 다 벌어지는 것”이라며 우매한 기자들을 향해 화두를 던졌다.

수덕사는 11월 19일 300여명이 스님과 불자들의 참여한 가운데 부처님께 원담 방장 스님의 법어집을 올리는 봉정식을 봉행했다. 다음은 스님과의 일문일답.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건강 좋아. 잘 먹고 산책도 하고.

△법어집은 보셨습니까
잘 나왔어. 다 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없으신지요
법어집 자체가 잘못이야. 법어집이 없으면 시비도 없을 텐데 법어집이 나와 삼라만상이 다 벌어지는 것이지.

△법어집에는 없지만 대중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십니까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 말을 한마디도 못했어. 한마디도. 그게 제일 아쉬워.

△못하신 말씀이 무엇인데요
말해주면 알겠어. (손바닥을 치켜들며) 이것을 적어 넣어라.

△책을 봐서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다행이지.

△왜 그렇습니까
아는 게 너무 많아도 걱정이야.

△만공 스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삼라만상을 다 가르쳤어.

△왜 방장 스님을 뵈면서 만공 스님에 대해 물을까요
귀가 가려워서였겠지.

△후학들에게 받고 싶은 것 있습니까
있지. 내 사진 찍었나. 내 모습 그대로야.

△수행자의 길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 수행자의 길이지.

△재가 수행자의 가장 바른 길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의심을 갖는 것이) 행하는 것이 바른 길이야.

△법장 스님은 총무원장 소임을 잘 하고 계십니까
몰라. 그 집안 어떻게 되고 있는 모르겠어.

△사부대중이 화합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제일 좋은 말을 물어봤어. 제일 좋은 말인데, 좋은 대답하기가 어려워.

△저희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신다면
악! 나 할말 다했어. 부지런히 일어나서 부지런히 가.

수덕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남 말 아닌 당신 말로 감화 준 스승”
수덕사 주지 옹산 스님
기사등록일 [2008년 03월 22일 토요일]
 

“큰스님께서는 평소 대중에게 법을 전하실 때 가장 밝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남의 말  남의 소리를 대신하지 않고, 항상 당신의 말씀과 소리로 대중에게 감화를 주셨던 참 스승이십니다.”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진성 대종사를 곁에서 시봉하며 가르침을 따랐던 수덕사 주지 옹산 스님은 대종사를 대중에게 감화를 주던 참 스승으로 회고했다.

원담 대종사의 일곱 번째 상좌이기도 한 옹산 스님은 “큰스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지만, 일상생활의 모습 그대로가 대중들에겐 가르침으로 전해졌다”고 대종사의 일상 모습을 설명했다.

옹산 스님은 이어 대종사와 만공 스님의 인연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옹산 스님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대종사는 어려서 출가해 다각 소임을 볼 때 지대방에서 수좌 스님들이 ‘만법귀일 일귀하처’화두를 놓고 탁마하는 말을 듣고는 수행에 처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는 만공 스님에게 참선 수행을 청했고, 몇 차례에 걸쳐 주장자로 얻어맞으며 드디어 진리가 멀리 있지 않음을 알았다.

옹산 스님은 또 “대종사가 선지를 체득하고 난 후 예(藝)에도 밝아 많은 선필을 남기셨다”고 전했다. 옹산 스님은 “큰스님께서는 예에도 밝았고 재능도 뛰어나 많은 선필을 남기셨다”며 “스님께서 남기신 수묵, 선필, 전각 등을 모아 스님께서 예술로 표현한 선의 세계를 대중들이 다시 한번 보고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속과 청산의 경계가 따로 있지 않음을 보였던 대종사의 가르침을 대중들이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다는 것.

3월 21일 늦은 밤 자리를 함께 한 옹산 스님은 대종사 입적 이후 전국 각지에서 덕숭총림을 찾는 수많은 조문객들을 맞이하느라 잠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생전 모습을 전할 때면 법을 들을 때의 법열이 되살아나는 듯 활기에 넘쳤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스승의 생전 모습이 떠오르는 듯 눈가에 이슬을 비춤으로써 세속을 떠나 출가인연으로 맺어진 사제의 정이 어떠했는가를 보이기도 했다.

예산 수덕사=심정섭 기자 sjs88@beopbbo.com

 

“큰스님 가풍은 ‘무상’, 참선 전 발심 강조”
 
문도대표 설정 스님
기사등록일 [2008년 03월 22일 토요일]
 

“덕숭총림의 가풍은 무상입니다.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단순하고 간단한 가풍이지만, 상을 깰 때 바로 깨달음과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원담 대종사의 문도대표인 수좌 설정 스님은 덕숭총림의 가풍을 ‘무상’이라고 소개하며 “경허 선사와 만공 선사에 이어 원담 대종사께서도 그 가풍을 잇고 전하셨다”고 원담 대종사의 가풍을 전했다. 설정 스님은 또 “상에 집착하지 않는 무상을 가풍으로 삼기에 다비식 이후에도 사리를 취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 그래왔듯, 원담 대종사의 사리 역시 따로 수습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스님은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전통과 관련 “예전에 만공 스님은 사리를 취하는 놈은 마구니라고까지 했다”고 옛 선사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설정 스님은 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가르침도 이어졌기에 큰스님께서도 항상 젊은 수좌들과 함께 밭을 일구며 ‘선농일치’사상을 실천하셨다”고 대종사의 일상 수행을 회고했다.

대종사는 낮에 일하고 새벽에 정진하는 총림의 수행풍토를 전승하면서 후학들에게 늘 발심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설정 스님은 이에 대해 “큰스님의 지도방법은 발심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며 “특히 참선은 발심이 중요하기 때문에 순간순간 발심해야 한다는 점을 후학들에게 강조하셨다”고 대종사의 가르침을 설명했다.

덕숭총림을 대표하는 수좌이기도 한 설정 스님은 원담 대종사의 수행과 관련 “큰스님께서는 전월사에서 만공 선사를 시봉하며 수행할 때 뜰 앞 돌에 앉아 좌선하기를 즐겨하셨는데, 그곳에서 자주 삼매에 들었다”며 “겨울 어느 날 평상시처럼 그곳에서 수행하던 중 삼매에 들었는데, 눈이 내려 몸을 덮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고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스님은 또 대종사는 그렇게 수행하고 일심으로 참구하며 본분사에 충실해 일찍이 17세에 도를 얻었고, 만공 스님도 크게 기뻐하셨다고 총림에 전해지는 대종사의 수행일화를 전했다.

설정 스님은 또 “큰스님께서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시던 법장 스님이 입적했을 때도 소식을 전해 듣고는 ‘모든 게 인연의 소치’라며 담담해 하셨었다”면서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경계의 종노릇을 할 뿐이라면서 경계에 끄달리지 말 것을 강조하셨다”고 대종사의 경계법문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