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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 정모 씨가 8월 28일 공개한 석조일경삼존삼세불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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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불상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국보급 석조일경삼존삼세불입상(石造一莖三尊三世佛立像, 이하 삼세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상의 재질이 화강암이 아니라 종유석이고 ‘개원삼년’(715년)이라는 제작연대까지 기록돼 있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근엄하고 자비스러운 표정이 생생히 살아있을 정도로 조각이 섬세해 초기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양은용〈사진〉 원광대 대학원장은 최근 한국문화사학회가 발간하는 「문화사학」29집에 ‘통일신라 개원삼년명(開元三年銘) 석조일경삼존삼세불입상에 관한 연구’란 논문을 통해 삼세불에 대해 상세히 밝히고, 8월 28일 서울 을지로3가 부근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실물을 공개했다.
이번에 처음 존재가 알려진 삼세불은 종래 학계에 보고된 바 없는 매우 드문 양식으로 현재 소장자인 정(55) 씨는 부친이 1965년 무렵 경주 진현동 진티마을 뒷산 언덕의 돌출된 암석 속에 보관됐던 것으로 밭을 일구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삼세불의 보존 상태는 좌측 협시의 광배 일부분이 끊어진 것을 제외하면 매우 양호하며 오래된 때가 군데군데 남아있는 상태다.
높이 42.6㎝×넓이29.7㎝×깊이 11.7㎝ 크기의 장방형으로 하나의 돌에 붙어 있는 삼세불은 하나의 연뿌리에서 올라온 세 개의 연꽃 위에 나란히 서있는 일경삼존(一莖三尊) 양식을 갖추고 있다. 또 본존불의 수인(手印)은 여의주를 든 시무외인(施無畏印)에 여원인(與願印)이며 좌우의 협시불은 합장인(合掌印)을 하고 있다. 특히 삼세불 전면의 대석에 ‘대당 개원 3년 4월 5일에 유거는 아버지를 위하여 삼가 삼세불 일구를 조성한다(維大唐開元三年四月五日유居爲父敬造三世佛一驅)’는 명문이 기록돼 있어 불상 조성자인 유거가 임종을 앞둔 부친을 위해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년간 이 불상을 연구한 양은용 교수에 따르면 서체는 완연한 해서체로 통일신라 이전인 503년 작품으로 추정되는 봉평비(국보 제524호)와 남산신성비제일비(524년 추정)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요컨대 서체는 통일 이전의 신라서체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면서 형식은 통일 이후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곧 작품자체가 민간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또 삼세불의 삼존구성과 관련해서는 처음 과거(연등불)·현재(석가불)·미래(미륵불)의 부처님이 정형이었으나 8세기 이후 현실신앙의 경향에 따라 점차 석가불·미륵불·미타불 등으로 변화한 것을 감안할 때 이번 삼세불은 정형이 바뀌기 바로 전의 연등불·석가불·미륵불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이어 광배·연잎문양·옷고름·허리띠 등 여러 가지 양식에서 삼세불이 서산마애불입상의 본존, 배리선방사삼존석불입상, 삼화령석조미륵여래입상과의 친연성을 갖고 있음을 꼼꼼히 규명했다. 양 교수는 “삼세불이 갖는 친연성을 검토하면 배리선방사삼존불입상의 조성시기 뿐 아니라 이를 전후해 이루어진 일련의 불상에 대한 양식의 변천을 밝히는 데도 기준점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정영호 단국대 박물관장은 “엄숙하면서도 한없이 푸근하고 자비스러운 미소가 신라불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며 “이 삼세불은 여러 가지 양식에서도 신라불교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신라의 전형적인 미소가 그대로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공간문화연구소 정명호(전 문화재전문위원) 소장도 “옷의 지그재그 주름, 연꽃의 모양, 부처님 상호 등 신라시대에서 통일신라로 넘어가는 불상의 양식이 곳곳에 잘 드러나 있는 초기 통일신라의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963호 [2008-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