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7.09 23:38 / 수정 : 2008.07.10 07:47
- 3선 개헌안의 변칙 통과를 보도한 1969년 9월 14일의 조선일보 호외. 조선일보 DB
- 기어이 박정희(朴正熙)는 이승만(李承晩)의 전철을 밟고야 말았다. 헌법을 뜯어고쳐 스스로 세 번 연임할 수 있는 길을 열려 했던 것이다. 1969년의 어느 날, 대통령 박정희는 차기 대선 후보로 여겨지던 43세의 전 공화당 의장 김종필(金鍾泌)을 불렀다. 김종필의 회고에 따르면 대통령은 "조금 남은 일 더 하게 해 줘. 이담엔 임자 차례야. 이번 한번만 더 하겠다는 건데…"라며 그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해 9월13일, 집권 공화당 등 122명의 의원이 서명한 3선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됐다. 이들의 숫자는 개헌선을 넘은 상태였다. 야당 의원들은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취침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14일 새벽 2시30분, 의원 122명은 국회 제3별관으로 몰래 자리를 옮겨 5분 만에 투표를 끝내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국회의장은 의사봉 대신 주전자 뚜껑을 두드렸다. 10월17일 국민투표에서는 개헌안이 65.1%의 찬성표를 얻었다. "압도적 지지는 아니다"라는 분석이 많았다.
개헌안 통과 직후 야당에는 강력한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었다. 11월8일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金泳三)은 "빈사상태를 헤매는 민주주의를 회생시키자"며 '40대 기수론(旗手論)'을 들고 나왔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1월24일에는 김대중(金大中)이, 2월 12일에는 이철승(李哲承)이 출마를 선언했다. 김영삼 43세, 김대중 44세, 이철승은 48세였다. 당수 유진산(柳珍山)이 "구상유취(口尙乳臭·입에서 아직 젖 냄새가 남)"라며 폄하했지만 무기력한 야당을 쇄신하려는 그들의 새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 1971년 4월 10일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신민당의 부산 유세에서 지원 연설을 마친 김영삼(오른쪽) 의원이 김대중 후보의 손을 잡고 승리를 다짐 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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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9월29일, 한국 정당사상 최초의 민주적 경선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다. 김영삼이 1차 투표에서 1위를 했지만 과반수를 얻지 못하자, 김대중은 이철승계와의 신속한 막후 교섭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어 냈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은 박정희를 무섭게 추격하며 선전(善戰)했다. '관권 선거'였음에도 불과 95만 표 차이로 가까스로 승리한 박정희는 유세 도중 "다시는 여러분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게 진정 마지막이란 뜻이었을까, 아니면 이후 '10월 유신'과 '체육관 선거'를 염두에 둔 말이었을까. 그걸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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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9월 14일 3선 개헌안의 통과를 담은 당시의 대한뉴스. 철저히 정부 여당의 입장에서 편집된 이 영상물은, 야당 몰래 본회의장을 빠져나와 개헌안을 변칙 통과함으로써 헌정사상 큰 오점을 남긴 사건을 합리화하고 있다. 영상은 똑같은 화면이라도 편집에 따라 어떻게 전달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여당이 등장할 때는 장엄한 음악을, 야당이 나올 때는 혼란스런 음악을 의도적으로 배경에 깔았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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