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7.12 02:41 / 수정 : 2008.07.12 06:43
- 새마을운동의 시작을 보도한 1970년 10월 3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 DB
- 1966년에 '새마을'이라는 담배가 나오긴 했지만 그 말은 아직 일반명사일 뿐이었다. 그것이 실체를 갖춘 사업으로서 떠오른 것은 1970년 10월 2일의 일이었다. 정부가 전국 동·리마다 시멘트 355포대씩을 지급해 환경 개선을 유도하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벌이기로 했던 것이다. 낙후됐던 대한민국 농촌에 일대 "잘 살아 보세" 선풍을 일으켰던 이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운동의 시작은 이렇듯 '시멘트 재고 처분'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은 "공산주의자가 침투할 수 있는 토양으로서의 '빈곤'을 없애려는 대통령의 계산이 있었다"고 말한다. 1971년, 정부가 사업 성과를 낸 1만6000여 마을에만 다시 시멘트와 철근을 지급함으로써 새마을운동은 본격화됐다. 분명 정부 주도의 사업이었지만 그 핵심에는 이처럼 "잘하는 마을만 지원한다"는 원칙이 존재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경쟁 원리를 도입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 정신 중 자조(自助)였다.
그로부터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박정희 작사·작곡의 '새마을 노래'가 전국 농촌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가옥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초가집도 없애고") 농로를 확장했으며("마을길도 넓히고") 조림사업을 벌였고("푸른 동산 만들어") 마을회관·창고·축사를 개보수하고 전기와 전화선을 놓았다("알뜰살뜰 다듬세"). 1971년 호당 35만6400원이던 농가소득은 1981년 368만7900원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살기좋은 내마을"), 그 바탕에는 새마을연수원에서 양성된 농촌 지도자들의 역할이 있었다("우리 힘으로 만드세").
- 1972년 4월 새마을 깃발 아래 도로 확장 공사에 참여한 농촌 주민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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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 초가집을 없애는 등 전통문화를 말살했고, 유신체제 유지의 수단이 됐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개발에 따른 농촌 경제의 붕괴를 저지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현재 좌파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 성공 요인으로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목표'로 신뢰를 쌓게 했으며 ▲종래의 농본주의와는 대립되는 '발전주의'를 택했다는 점이 꼽힌다. 농민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경쟁력과 자생력을 키우려 했던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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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새마을 운동을 기록한 대한뉴스 영상물. 차례대로 1971년 9월의 '전국에 새마을을', 1972년 3월의 '거국적인 새마을 운동을', 1972년 6월의 '새벽종이 울렸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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