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스님의 평소 모습은 어땠나?
A: “큰스님에 대해서는 평소의 겉모습만 말씀드릴 수 있지 내면세계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옹산 스님)
Q: 스님이 평소 강조하신 가르침은 무엇인가?
A: 스님은 실수참구 하는 어른이셨다. 이심전심으로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스님의 평소 가르침을 떠올릴 수 있다. 몸소 실천하고 수행하는 가운데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스님의 본모습이라 할 수 있다.(옹산 스님)
Q: 스님은 만공 스님을 시봉하셨는데 일화를 하나 말씀해주신다면?
A: 스님은 수계 후 천장사에서 다각 소임을 하던 중, 방선 시간에 대중들이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에 담소하는 것을 듣고 ‘스님, 저도 참선을 해볼랍니다’ 여쭈니 스님께서 ‘참선을 어떻게 할래?’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하는 것을 화두로 삼아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만공 스님께서 주장자로 머리를 때리시면서 ‘알겠느냐?’ 하고 묻자 얼떨결에 ‘알았습니다’고 대답했고 노스님이 ‘네가 알기는 무엇을 알았느냐?’고 다그치자 ‘아픈 놈을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지어가다 어느 날 또 만공 스님이 주장자를 들이대며 머리를 때리며 ‘알았느냐?’ 하고 묻자 ‘그러면 알아야지. 며칠 기한을 줄 테니 알아보도록 해’ 하셨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닷새 동안 잠도 안 자고 참구하셨습니다. 어느 날 만공 노스님이 금선대(金仙臺)에 계실 때 심부름을 내려갔더니 역시 주장자를 가지고 달려들어 딱 때리기에 ‘아직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그제야 ‘됐다. 짚신을 삼아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원담 스님은 만공 스님의 법을 신뢰하게 되고, 오도송을 읊게 됐습니다.(옹산 스님)
![]() |
![]() | |||
|
||||
![]() |
![]() |
A: 덕숭가풍은 무상(無相)이다.(설정 스님)
Q: 스님께 일배(一拜)만 올리도록 하는 것도 같은 이치인가?
A: 덕숭가풍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고 상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는 무념 무상 무상이다. 결국 그 경지를 얻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삶에 있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상을 깨는 것이다. 상만 깨지면 자성을 얻게 된다. 덕숭산은 철저하게 그것을 지켜 심지어는 사리도 취하지 않는다. 경허 만공 스님의 다비 후에도 사리를 취하지 않는다. 만공 스님은 ‘사리 세는 놈은 마구니’라는 말로 경책하기도 하셨다.”(설정 스님)
Q: 그러면 원담 스님의 다비 후에도 사리를 취하지 않을 것인가?
A: “당연히 취하지 않는다.”(설정 스님)
Q: 스님의 수행일화는?
A: 원담 스님의 지도 방법은 발심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순간 발심, 그렇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스님은 겨울에도 돌 위에 앉아 정진하셨다. 그걸 보고 만공선사가 기특해 하시고 수행열로 몸이 상할까 염려해 방에 들어가라고 하셨지만 그대로 바위에 앉아 수행하셨다. 큰스님은 춥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삼매에 든다고 말씀하셨다. 스님이 수행할 때 광명이 비치고 인근 홍성지역까지 환히 비치는 경계도 많이 일어났다. 그때가 스님이 17세일 때였고 만공 스님이 그것을 보고 참으로 기뻐하셨다고 한다.(설정 스님)
Q: 원담 스님께 前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열반 소식을 전했나?
A: 선사들의 세계, 깊은 법력의 세계는 헤아리기 어렵다. 법장 스님이 입적하신 이튿날 원담 스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스님은 ‘잘죽었다’는 한 말씀만 하셨다.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무심하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 후로 한 번 더 여쭙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큰스님은 ‘모든 것이 인연의 소치지’라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진리와 죽고 사는 자리에서는 둘이 아니다.(설정 스님)
Q: 스님의 건강은 어떠신가?
A: 스님은 병원에 계실 때 무척 아프셨을 텐데도 표현을 하지 않으셨다. 28년 전 스님이 폐가 아프다고 하셔서 병원에 억지로 모시고 간 적이 있다. 그때 스님은 쓸개가 녹아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의사들인 ‘이 정도면 배가 칼로 찢듯 아팠을 텐데 어떻게 이 지경까지 두었나’고 책망하기도 했다. 급하게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제가 사인을 하고 수술을 진행했다. 가슴을 가로질러 크게 복개를 했는데 수술 후 다음날 병실에서 걸어 나오셨다. 의사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스님께서는 빨리 수덕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간신히 설득해 1주일 만에 퇴원했다.”(설정 스님)
Q: 스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은 무엇인가?
A: 자성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자유인이 될 수 없고 고통의 바다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그렇지만 스님께서는 마음을 깨치고 주인으로 살라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자기답게, 주체적으로 살라는 것이다. 깨치지 못하면 경계에 끄달려 필연적으로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고 스님은 강조하셨다. 마음을 깨치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이다.(설정 스님)
![]() |
![]() | |||
|
||||
![]() |
![]() |
Q: 20일 이명박 대통령이 분향소를 찾았다. 특별한 말씀이 있으셨나?
A: 대통령은 충남도청에 업무 차 왔다가 큰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수덕사를 방문하셨다.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주지진산식 때 수덕사에 오셔서 원담 스님을 친견하셨는데 열반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직접 분향소를 찾으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前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과도 인연이 있는데 법장 스님의 영결식에서 이 대통령이 조사를 할 때 햇무리가 지기도 했다고 말씀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수덕사와 인연이 깊은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옹산 스님)
Q: 스님은 선필로도 유명하신데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없나?
A: 큰스님은 생전에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자타가 공인하는 법필(法筆)이셨다. 지난해 83회 생신 때 주변에 있는 약간의 유필을 모아 도록을 냈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유필을 모아서 모든 분들이 볼 수 있도록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설정 스님)
Q: 덕숭총림 차원의 기념사업은 준비하고 있지 않나?
A: 지금은 경황이 없어 생각하지 못하지만 스님의 예술세계와 타고난 문화감각은 글씨 뿐 아니라 전각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방장이고 원로 스님이라서가 아니라 스님의 예술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스님의 열반 전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님의 작품 13점을 덕숭총림 선미술관에 기증했다. 수덕사 앞에 마련된 선미술관에서 스님의 세예 작품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옹산 스님)
Q: 스님의 법문은 어땠나?
A: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법문을 하기 전에 준비를 하시지만 큰스님은 손을 씻다가 혹은 외출 후 돌아오셔서도 준비 없이도 법상에 오르셔서 법문을 하셨다. 그럼에도 남의 글이나 법문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으로 법문을 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많은 사람들이 큰 감화를 받았다.(옹산 스님)